256화. 누가.찾아.왔나.봐요
“아니, 이게 뭐예요! 왜 게스트 안 와요!”
최은호가 분통을 터뜨렸다.
“이런 거 한다는 말 없었잖아요!”
4월 말.
복귀한 선수들이 바로 훈련에 돌입하지는 않는다.
가볍게 개인 솔랭이나 방송을 시작하고.
반기 면담이나 가벼운 중간 워크샵, 콘텐츠 촬영 등으로 웜업을 시작한다.
5월이 되면 정말 바빠지기 시작한다.
모든 팀이 복귀했으니 스크림 일정이 빽빽하게 들어차기 시작해서다.
어쨌든 당장은 박 감독이 자랑했던 그 ‘콘텐츠’.
“..가 아니잖아요! 이 게임 저 진짜 못하겠다고요!”
보다 앞서서.
퀴즈를 통해 팬들에게 선물을 주는 코너가 진행되고 있었다.
“당연히 아이템이나 스킬 이름 묻는 거나, 챔피언 그림 조금 보고 맞추기.. 네? 막 그런 거 있잖아요. 프로게이머한테 어울리는 그런 거!”
“나 요른 강화템 이름도 다 외웠는데..”
김예성도 침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하하하! 선수님들이 너무 자신만만하셔서! 난이도가 있는 걸로 골라봤습니다!”
요즘 인생 최대의 황금기를 맞은 콘텐츠 팀의 팀장이 외쳤다.
그는 팀장이자 콘텐츠 PD를 겸하고 있었다.
최근에는 감성 터지는 다큐멘터리를 올려도 눈물바다가 되고.
선수들끼리 잡담하는 걸 찍어도, 이유찬이 방귀 뀌는 것만 찍어도 조회수가 우주 돌파.
심지어 박 감독이 게임을 하는 것조차 콘텐츠가 된다.
하지만 팀장은 결코 이런 현실에 안주할 생각이 없었다.
더, 더 자극적인 걸 원한다!
이제서야 물이 들어왔는데 더 저어야지!
그래서 기획팀을 짜내 여러 가지 게임을 들고 왔었는데.
“하하하하하하! 오늘은 좀 어렵죠? 하하하!”
어지간한 걸 해도 권건이 캐리를 해버리거나 혼자 이겨버리니.
FWX 콘텐츠에는 일관성이 강했다.
오만 예능과 퀴즈쇼를 참고해서 들고 와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과거 역대 우승 날짜, 챔피언 출시일까지 리그와 관련된 거라면 못 맞추는 게 없다.
그는 예능의 신인가?
어우권.
어차피 우승은 권건.
어권우.
어차피 권건 있는 팀이 우승.
그렇다면 전체 팀전이다!
“권건 선수가 캐리 못하는 게임이 있다? 삐슝빠슝! 다섯명 전부 감당하긴 좀 힘들죠? 협력 게임 너무 어렵죠? GG치고 싶죠? 하지만 포기하면 팬분들한테 선물 못 드리죠?”
“죄송한데 한 대 때려도 될까요?”
“방금 누가 말씀하신 겁니까?”
“...”
“마이크 까면 다 나와요.”
감히 우승팀과 대적하는 자리에 선 팀장.
그는 결코 하하 호호 웃으면서 상품을 다 내주고 모두 모두 행복했답니다, 라는 결론을 낼 생각이 없었다.
그럴 거면 그냥 SNS에서 경품 추첨을 하지 선수들이 따는 콘텐츠를 왜 해?
“미치겠네.. 저 팀장님 원래 저랬어?”
“자! 그럼 다시 한번 해볼까요! 하히후헤호! 카키쿠케코!”
약속했던 게스트는 오지 않고.
선수들은 막막한 벽에 부딪혔다.
“이번 제시어는..!”
또다시 제시어가 뜬다.
칸칸이 나뉜 세트장.
제일 앞칸에 앉아있는 권건이 제시어를 보고 외운다.
“자! 시간 끝났습니다! 전달하세요!”
제시어는 사라지고.
돌아앉아 있던 두 번째 칸의 김예성이 음악이 흘러나오던 헤드폰을 벗는다.
못하는 게 없는 정글러가 침착하고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읊는다.
“인기 만점 추억의 단팥빵. 재료로는 밀가루 강력분 300그램과 우유 150그램, 달걀, 이스트, 버터, 앙금, 검은깨, 소금과 설탕이 들어갑니다. 1차 발효 50분, 중간 발효 10분, 2차 발효 45분을 잊지 마세요.”
마치 눈앞에 문서가 있는 듯한 모습.
“오우야..”
“권건 선수님은 저걸 외우네.”
“토씨 하나 안 틀렸어. 순간 기억력 뭐 있나.”
게임은 약 100글자에 해당하는 문장 외워 전달하기.
해당 분야에 대한 지식이 있다면 큰 어려움이 없을 수도 있다.
문장 대부분이 재료에 관한 내용이니까.
“오케이..”
김예성이 눈을 빛내며 세 번째 사람에게 전달한다.
순서와 어순, 어미는 조금씩 틀렸지만 빠진 재료나 틀린 정보는 없다.
“예성 선수님도 잘한다.”
“거의 다 맞췄네.”
뒤에서 보던 스탭들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다.
벌써 이 게임이 여섯번째 진행되고 있고.
상품 중 절반 이상이 날아갔다는 사실을.
김예성의 말을 주의 깊게 들은 곽지운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최은호에게 자신감 넘치는 말투로 전달했다.
“최고인기 빵 만들기! 재료! 밀가루 3킬로! 우유 2.5킬로 그램! 달걀, 소금, 버터, 이스트, 설탕! 1차 발효 60분, 2차 발효 30분을 기억하세요!”
“세자 선수.. 나는 나만의 길을 간다? 갑자기 소금빵이 됐어?”
“분량이 급식 수준.”
“제빵사세요? 저렇게 만드는 거 맞는 거 아니야?”
정보를 전달했던 김예성이 도리질 치는 줄도 모르고 최은호에게 따봉을 건넨 곽지운이 정면을 보고 앉았다.
“하.. 진짜.. 하기 싫다..”
유상준은 자기는 언어 전달력이 떨어진다는 핑계 겸, 다른 임무를 맡고 멀리 앉아있다.
최은호는 그게 사무치게 부럽다.
이럴 줄 알았으면 평소에 말 많이 하지 말 걸.
“이유찬..”
“어!”
“준비됐어?”
“어!”
마지막 칸에 악마가 기다리고 있다.
“만들기. 재료. 밀가루, 우유, 달걀, 소금, 버터, 이스트, 설탕. 발효 기억하세요.”
최은호는 최대한 간결하게 전달했다.
어차피 글자 수로 판정한다.
그러니까 정확한 단어만 살리면 될지도 모른다.
“요령 좋은데?”
“전략가네.”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다.
“정답!”
마지막 순서인 이유찬이 번쩍 손을 들었다.
“말씀해보시죠!”
앞서 말을 전달했던 네명의 선수들은 이미 사색이다.
“빵!”
“?”
정적이 흐른다.
“빵!”
“어억, 총 맞았다. 어억?”
“아 진짜 팀장님.. 사람 킹받게 하네..”
싱글벙글한 팀장을 두고 모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 게임 그렇게 하는 거 아니라고!”
“정답 맞추는 게 아니라 문장 말하는 거라고!”
“지금 벌써 여섯번째잖아! 이 새끼 왜 인풋은 있는데 아웃풋이 없냐!”
“누가 빵인 거 모르냐? 그냥 비벼서 삶아도 빵 나오겠다!”
“그래, 그러니까 빵!”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
세상에는 이 직업을 가지지 않았다면 어떤 삶을 살았을지 모를 것 같은 사람이 있다.
그리고 하필이면 여기 그런 사람이 있다.
“아니 빵이라고요! 빵! 빵! 빵!”
이유찬은 억울한 표정으로 허공을 향해 총을 쏴댔다.
“쟤 손가락 좀 어떻게 해봐..”
“이거 진짜 콘텐츠 낼 거예요?”
“존엄성 훼손되는 거 아니에요?”
“저 새낀 인간도 아니니까 상관없어..”
“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 이럴 수가! 대.황.우승.레전드 팀인 우리도 못 하는 게 있다? 하하하하하! 1인 캐리 불가 절대 갓겜! 이거 참! 으아하하하하학!”
그 꼴을 보고 팀장은 손뼉까지 치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완벽한 사람, 완벽해지려고 노력하는 사람, 자기만의 길을 걷는 사람, 정리하는 사람, 그리고 이상한 놈! 최고의 조합이야! 캐릭터 각 뜬다 떠! 진짜 뜨네!”
“저 팀장님 조증이야?”
“하하하하하하! 이런~ 인간적인 모습~ 내가~ 이래서~ FWX를 좋아할 수밖에 없다니까~ 나도~ 10년 근속이거든요~”
“혹시 미치셨어?”
한참을 껄껄대던 팀장이 갑자기 뚝 웃음을 그친다.
“자, 게임은 적당히 여기까지 하시고..”
“양극성 장애?”
“아, 아니. 아니 잠깐만요!”
어쨌든 팬한테 영향력을 행사하는 게 인생의 목표인 최은호가 달려 나오며 외쳤다.
“왜 게임을 여기까지 해요? 아직 상품 남았잖아요! 더 할 수 있어요!”
그가 악다구니는 부리는 사이.
분량에 배부른 팀장이 고개를 휘휘 저었다.
“후회하실 텐데?”
“후회 안 해요! 나, 클래스에게 팬분들한테 선물 드리는 것보다 중요한 건 없어요!”
“이제 게스트님 오실 시간이라.”
“그것참 목 빠지게 기다려왔던 시간이로군요? 혹시 제 얼굴에 뭐 안 묻었나요?”
“못생.김.”
“너한테 물은 거 아니다.”
또 한 번 분량을 제조한 팀장이 슬며시 웃으며 세트를 정리를 지시했다.
“자, 그럼.”
정리가 다 끝나갈 때쯤.
“어.어. 형들. 우리. 스튜.디오에. 누가. 찾아왔나? 봐요.”
오늘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은 유상준이 연기를 시작했다.
“누.구.지?”
“웃참 100렙..”
“진짜 웃지 므르..”
“상준이 저거 하려고 일겜 쉬었냐?”
“정신 집중이었던 거임.”
“누구. 세요? 저희. 촬영. 중인. 데. 아이. 참. 곤란.하게.”
다시 한번 노크 소리가 들린다.
어떤 팀들에게는 게스트가 여성 BJ나 아이돌인 경우가 있었고.
또 어떤 팀들에게는 게임에 관심이 많은 남성 연예인일 때도 있었다.
하지만 FWX는 진행 아나운서면 몰라도 콘텐츠 게스트는 없는 팀이었다.
여태까지는 그랬다.
근데 게임계에도 진리가 있다.
여전히 게임 인구는 남성이 더 많은데다.
구단 역시 시스템의 용이성을 위해서건, 체제 미비 혹은 지원 인력의 쏠림 현상에 의해서건 간에 사옥 상주 멤버는 대부분 남성.
그러니까 어쨌든 군대 같은 이 환경에서 여성 게스트는 가뭄에 단비 일 수밖에 없다.
“와라, 와라, 와라, 와라, 제발, 와라! 와라! 와라!”
미친 듯이 심장이 뛰고 있는 최은호는 이게 다 호르몬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여미새에게도 낭만이 있다.
그에게 팬은 여자가 아니다.
오히려 엄마와 같다.
엄마들만 보고 산 지 벌써 3년이 넘었다.
그래서 더 설렌다.
“들어. 오세.요.”
유상준이 느려터진 손으로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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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따라 콘텐츠 촬영 장소에 우르르 함께 온 감코진, 특히 박 감독은 감회에 젖어있었다.
사옥에도 공간은 많았지만 콘텐츠를 촬영하기에 최적화된 곳은 아니다.
개인 방송할 정도의 공간은 있어도 공간이 크면 소리가 울리고.
소리가 울리지 않으면 장비가 들어갈 너비가 나오지 않는다는 식이다.
그래서 지난 시즌부터는 오프 시즌에 스튜디오 렌트 계약을 했다고 들었다.
촬영해야 할 콘텐츠가 많았으니까.
사실 이것보다 더 큰 이유는 초소형 스튜디오나 사옥 촬영이 위대하신 팀 FWX의 위상에 걸맞지 않다는 다소 높으신 분들의 체면치레이긴 하다.
어쨌든 덕분에 오늘의 게스트에게 충분한 장소.
분명히 돈이 많은 팀이지만 기적처럼 성적은 바닥이었던 FWX.
복지가 좋은 회사일수록 실적이 안 나온다는 썰의 대표 주자.
하지만 그랬던 팀이 정말 잘나가기 시작하자 구단은 그전까지 있던 건 복지도 아니라는 걸 보여주기 시작했다.
한정판 각인 디바이스나 전용 버스는 당연했고.
눈에 띄지 않는 부분까지도 예산이 투입됐다.
공용 시설, 그러니까 공간은 물론 정수기를 비롯해 공기 청정기나 가습기, 에어컨 등에도 위생 관리를 위해 두 배 많은 인원이 투입됐으며.
전자파 차단에 좋다는 온갖 새롭고 다채로운 식물과 그들을 관리하는 업체 역시 규모가 달라졌다.
들어오는 물건의 납품 계약 역시 몇 단계나 상승, 원래부터 유명했던 식단에는 푸드 스타일리스트까지 붙었다.
선수들의 휴가 동안 숙소에는 개인 수면 패턴에 맞춘 최고급 매트리스와 산소 발생기도 들어왔다.
그야말로 티 안 나는 돈지랄.
특별 인센티브는 당연했다.
심지어 기기 지원 폭도 더 넓어져 핵심 관계자들은 이전처럼 장비 지원을 요청할 때 복잡한 절차 없이 시트에 이름과 기종만 올리면 묻지도 따지지 않고 즉시 퀵으로 배송받을 수 있었다.
어쨌든 회사의 형태를 갖췄던 구단의 기존 절차도 깡그리 무시하는 대단한 특혜다.
돈 쓸 구석을 찾고 있던 FWX에서는 LOS 팀을 귀한 보물처럼 아꼈다.
- 한동규 (해머스) : 잘 지내고 계십니까.
- 한동규 (해머스) : 박 감독님. (원숭이가 춤추는 이모티콘)
그럼에도 구단의 기기 지원비를 사용하지 않고 오래전에 사비로 샀던, 박 감독의 낡은 휴대폰이 울렸다.
액정에는 작은 금이 갔고 오래되어 꼬질꼬질하지만 사용에 문제는 없다는 식이었다.
그건 여태까지 이 팀에서 제가 까먹은 돈이 더 많다는 고지식한 박 감독의 성격 때문이었다.
- 한동규 (해머스) : 저는 잘 지냅니다.
헤드인 감독이 그러면 코치들도 함부로 특혜를 쓸 수 없다.
물론 그렇게 사리사욕을 채우려는 사람도 없었고.
하지만 재밌게도 오히려 그 점 때문에 상부에서는 뭐라도 더 해주고 싶어서 몸이 달아있을 뿐이었다.
휴대폰 하나 바꿔주는 건 정말 비용 따위라고 말해도 될 정도로 사소한 일이니까.
이제 막 우승 산에 오른 FWX가 저들의 가치를 제대로 깨닫는 건 시간이 좀 더 걸릴 일이었다.
- 한동규 (해머스) : 덕분에.. 그때 그 건. (진지한 원숭이 이모티콘)
수다쟁이였던 해머스 감독의 메시지.
- 한동규 (해머스) :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메시지에 온점까지 따박따박 붙이고 있는 게 보통 긴장한 기색이 아니다.
박 감독은 잠시 답장을 썼다 지웠다 하며 고민만 하다가 그냥 휴대폰을 닫았다.
게스트가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