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화. 준비 완료
최은호는 큰 미련이 없어 보였다.
두 세트의 경기를 칼날 같은 긴장 위에서 진행한 뒤 본인도 육체적 한계를 느낀 모양.
“야, 상준아! 이 선생님이 가르쳐준 대로 잘하고 와라!”
예전 같았으면 고집을 부렸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최선을 다해서 유상준의 선배 노릇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사실 작년의 패배 중 최은호의 컨디션 관리 실패가 아예 없었던 건 아니고.
지금도 여전히 재활에 매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팀과 상의해서 유상준을 데려온 주체가 최은호니까.
“지더라도 내가 너를 로열 로더로 만들어줄게!”
어쨌든 소탐대실을 인정하기란 쉽지 않은데.
한 사람이 선배가 되어가는 과정을 눈으로 지켜보고 있는 것 같다.
“로열. 로더. 아닌데.”
“아니긴 왜 아니야! 내가 시켜준다니까? 걱정하지 마!”
“은호 형, 로열 로더는 데뷔하고 바로 우승까지 하는 거야. 얘 데뷔 아니잖아.”
“엥? 그런 거였어?”
“긴장 풀려고 일부러 농담 한 거지?”
속이 좁아 보이지만 사실은 가장 대인배가 아닐까?
아니, 문봉구 다음 정도?
“로열젤리의 그 로열이 아닌가? 먹으면 여왕 될 수 있는 거..”
“멍청. 그럼. 다운. 로더는. 다운됨?”
“형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냐. 어?”
아닌가.
“야, 근데.”
어차피 팀에서 샌드백 역할을 맡은 최은호는 이 정도 타격으로는 아무렇지도 않다.
본인은 명상 훈련의 성과라고 하지만 글쎄.
“어차피 유상준 너 여기서 다시 태어난 거 아니야? 그냥 로열 로더 해라.”
“...”
어처구니없는 우기기에 코칭 박스에 웃음기가 돈다.
“그래. 우리가 시켜 주자.”
“그러지 뭐.”
“사실 벤치에 앉아만 있어도 되긴 하는데.”
“은호가 너 배려하는 건가 보다.”
감독님, 코치님까지 나서서 유상준의 등을 토닥인다.
“야, 트릭스터 겁나지? 근데 괜찮아. 별거 아니라니까? 속이면 속고, 싸움 걸면 이기고, 위험하면 보호받고. 평소랑 똑같다!”
아무도 캐묻지는 않았지만 유상준은 제주 F.L.E, 혹은 연습생 시절부터 트릭스터에 가고 싶어 했고.
그리고 그만큼 두려워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가 없다.
“형.. 그거 건이가 한 말이잖아..”
“나도. 귀. 있다. 보이스. 들음.”
“흠, 흠. 어쨌든..”
최은호는 눈을 굴리다가 조금 진지한 기색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받아보니까 알겠더라. 앞뒤에 사람이 있는 게 얼마나 마음 편한 일인지. 그러니까 너도 괜찮을 거다.”
갑자기 따뜻한 말에 세상이 따로 도는 것 같다.
“오우야.. 서포터 세계관 오글거려 미쳐벌임.”
수군거리는 분위기 속에 유상준의 안경이 주르륵 코끝으로 밀린다.
“어쩔.서커스?”
드러난 눈이 약간 휘어져 있다.
“웃냐, 웃어? 니가 제일 무서워하는 선배가 누구냐? 이 선생님이 전화 한 통 넣어놓게.”
선생님이라니.
가르치는 사람을 가리키기보다는 한자 그대로 먼저 선에 태어날 생, 먼저 태어난 사람을 말하는 것 같아서 조금 웃음이 나오기는 하지만.
“권건. 더. 정글러.”
“앗 아아.. 그건 좀..”
이제 최은호도 꽤 괜찮은 팀원이다.
#
- (TRT) 오늘 왤캐왤캐임?
내가 그래 질 수도 있다고 생각은 함
근데 왜 이렇게 추하게 플레이함??
ㄴ 그저 미드 원툴
ㄴㄴ 미드 전략 막히니까 어법ㅂ버ㅓ버
ㄴㄴ 종나 답답하다 내가 감독할래
ㄴㄴ ㅇㅇ 이길준 고질병 지리게 나옴;
ㄴㄴ 준우승도 잘한 거야···.
ㄴㄴ 언제부터 우리가 이런 나약한 개소리를 하는 팀이었냐?
- (TRT) ? 뭐야 클래스 대신 사이다 나옴
ㄴ 오개꿀
ㄴㄴ 기회 왔냐?
ㄴㄴ 솔직히 우리 케비가 사이다보다는 낫지 않냐?
ㄴㄴ 근데 저 새기 실력보다는 픽 돌리는 거 전문이잖아
ㄴㄴ 또 돌리는 픽 들고 나오겟지 뻔함ㅋ
ㄴㄴ 아 씨바 왠지 쎄한데..
ㄴㄴ 기대 금지 기대 금지
#
“벌써 세 번째 세트라니, 이거 너무 빠른데요?”
“그렇습니다! 앞선 경기는 경기 시간 자체가 그리 길지만은 않았습니다!”
현수진과 남동현 해설은 주책없이 팔을 펄럭였다.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은 날씨였지만 하늘은 찌를 듯이 맑았고.
경기장 내부에는 뜨거운 열기로 인해 등에 땀이 흐를 정도였다.
“스프링의 마지막 날인 오늘! 이 경기의 최종 승자가 이번 세트에서 가려질 수 있을까요!”
트릭스터가 팬들을 향해 호응을 유도하고.
FWX 선수들 역시 마찬가지로 객석을 바라보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아주 여유롭게.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사실 스프링 스플릿의 정규 시즌이란 게, 얼마나 합이 잘 맞아왔는가를 증명하는 자리인 거거든요.”
“네. 시즌 초까지만 해도 스토브 리그로 인해 변경된 선수들끼리 호흡을 잘 맞춰왔을까를 보여주는 모습이었죠.”
“하지만 벌써 결승. 이제는 그 시즌의 결실을 보여줘야 할 자리라고 볼 수 있는데요..”
“첫 세트를 이긴 팀이 우승할 확률이 높다고 말씀드렸죠. 하지만 그 말을 뒤집으면, 패패 승승승이 결코 없는 일은 아니라는 얘깁니다!”
“새로운 전설? 오히려 좋아! 할 수 있어요, 트릭스터!”
캐스터를 가운데 둔 두 해설이 주거니 받거니 하며 스프링 전반에 대한 평가를 늘어놓는다.
“이 자리가 또 중요한 건, 다음 서머까지 이 느낌이 계승된다는 점이거든요.”
“그런 면에서 FWX는 사실상 완벽한 플레이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 어차피 결과는 정해져 있어
- 시간 잡아먹지 말고 걍 한 줄로 정리하면 안됨? FWX가 이겼다
- 그게 쉽지가 않네
- 너네 진짜 징하다 어메이징
- FWX 맛있어요. 맛집이에요. 드셔보세요.
“네, 밀어주고 당겨주고. 당겨주면 또 밀어주고!”
“작년까지 권건 선수를 중심으로 활동했다면 올해는 각 라이너들의 수행 능력이 남다르거든요. 원래부터 재능은 충만했고요!”
완벽하게 부활한 FWX의 바텀.
결국 프로게이머라는 업을 가지고 있는 이상, 각자 재능이 없었을 리는 없다.
다만 좀 더 조건을 타는 선수들이 있을 뿐.
“피지컬 때문에 상체 중심의 팀이 되지 않을까 했는데! 이렇게 판이 깔리니까 세자 선수가 얼마나 특출난 원딜이었는지를 보여주는 계기가 된 것 같아서 마음이 푸근해집니다!”
“원딜은 절대 혼자 다 만들 수 있는 포지션이 아닙니다. 팀적으로 봤을 때 그래서도 안 되고요. 그야말로 팀웍의 진수. 주어진 롤이 다를 뿐, 서포터와 같다고 볼 수도 있죠.”
“그래서 세자 선수가 인제야 빛을 보는군요!”
“그런데 이번 세트!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지금!”
“사이다 선수가 교체 출전합니다!”
“더블 스쿼드는 FWX가 꽤 성공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전략 중 하나인데요!”
그리고 그 상황에서 일어난 변화.
“픽 돌리기. 다른 팀들도 그거 안 하고 싶어서 안 하는 거 아니거든요. 그저 지금 메타도 고려해야 하고, 선수 숙련도도 고려해야 하고, AD AP 밸런스나 상대 조합까지 고려해야 해서 하기가 어려운 건데!”
“사이다 선수 같은 경우에는 FWX에 들어가면서 자기 재능을 개화시켰습니다!”
“여전히 다른 팀에서 적합한 인재일지는 잘 모르겠어요.”
“사용하기 어려운 카드죠. 자, 그렇긴 한데.”
선수들이 자리에 앉아서 마지막 싸움이 될지도 모르는 경기를 준비하고 있다.
관중은 때때로 소리를 질러가며 선수들을 바라본다.
“반대로 사이다 선수가 출전했을 때 밴픽에서 압도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가져가지 못한다면, 기본적으로 플레이의 안정성 자체는 클래스 선수 쪽이 더 높게 평가받고 있기 때문에!”
“손해를 보는 거라고 할 수 있겠죠!”
- 사이다 딱 대
- ㅋㅋㅋㅋㅋㅋ 나쁘지 않아
- 길준아 정신 똑바로 차려라 제발제발
- 진짜 암살 그만해라 암살해버린다
마지막 수 싸움이 시작됐다.
“블루 진영에 인천 트릭스터!”
“레드 진영 대전 FWX! 가장 중요한 세트의 밴픽 시작합니다!”
트릭스터가 원한 것은 긴 호흡의 경기.
해설의 평가대로.
FWX를 상대로 밴픽적 우위를 가져가는 것이 꼭 필요하다.
다만 그게 쉽지 않은 일이라서 문제지.
트릭스터의 이길준 감독은 장기를 두듯이 천천히 시작했다.
“트릭스터는 FWX 바텀의 변화를 트릭스터가 유의미하게 이용하기 위한 밴픽을 진행할 것 같죠?”
첫 번째 밴 페이즈에서 트릭스터는 드디어 암살자를 버리자는 신호를 보냈다.
권건의 사일 정글, 심지어 그걸로 이긴 꼴까지 본 이상 계속 이렇게 가는 건 트릭스터만 바보가 되는 길이다.
다행히 FWX는 화해의 제스처를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였다.
무슨 꿍꿍이지?
트릭스터는 미처 밴하지 못한 리싱을 선픽으로 뽑고.
“권건 선수 한정 영구 밴! 리싱을 보지 못한 지 오래!”
“저라도 견제할 것 같긴 하네요.”
“그렇다면 FWX는?”
상대에게 턴을 넘긴다.
FWX의 픽.
“마오차이!”
빠르다.
턴을 넘기자마자 돌아온 칼답이다.
“이건. 이건 그러니까, 어디죠? 일단 사이다 선수는 포함될 것 같고. 탑, 정글로도 용례가 있습니다. 물론 현메타 프로 씬에서는 탑으로 쓰기 어렵지만..”
“제가 알기로는 FWX의 최수철 코치, 그러니까 브라보 코치님께서 탑 마오 장인으로 유명하거든요. 그 영향이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탑, 정글, 서폿 어디로 갈지 알 수가 없는 상황!”
- 마오차이 : 있을게
- FWX : 뽑을게
- 트릭스터 : 헷갈릴게
- 도사님 그립읍니다
그리고 숨을 한번 들이쉬고 내쉬는 사이.
다시 픽.
“그리고 연달아서, FWX의 신드리!”
“암살자 밴이 충분히 진행된 상황에서 꽤 무난한 미드 선픽이 되겠습니다! 근데 진짜 혹시 바텀인 건 아니죠? 비원딜 아니죠?”
“그..으! 저는 대답을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FWX니까요!”
트릭스터는 어느 것 하나 확신할 수 없는 챔피언이 뽑힌 상황.
레드 진영에 보낸 뒤 픽을 두 개나 봤는데도 상대의 생각을 정확히 엿볼 수가 없다.
이길준 감독은 초조해졌다.
아, 암살 마렵다.
트릭스터는 잠시 아라에서 손길이 머무르는 듯했지만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여기서 다시 암살로 돈다고?
그게 더 큰 일이다.
“이제 트릭스터에서 선택합니다!”
밴픽의 속도만으로도 그 마음을 짐작한 현수진 해설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기본적으로 밴픽은 뺏기 싸움.
더 좋은 픽을 얼마나 더 많이 가져오냐에 달린 경우가 많은데.
이 경우에는 차라리 FWX가 먼저 5개를 다 뽑게 하고 그다음에 뽑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무난한 선택이 이어진다.
“아, 이렇게 가는군요? 트릭스터에서 냐르와 바류스!”
트릭스터의 픽 시간을 끝까지 끌어다 쓴 선택이다.
“나쁘지 않은 선택입니다. 사실 1세트 때 트릭스터가 바류스를 밴 했었거든요. 이번에는 카드가 부족했고, 두 번째 페이즈까지 가게 되면 좋은 원딜을 상당히 많이 뺏길 게 뻔합니다. 어차피 헤인즈 선수가 좋아하는 졔리는 밴이니까요. 한 라인이라도 우위 잡아야죠.”
“냐르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지간한 상황에서 주도권을 잡기 좋아요. 메이킹에서도 훌륭하고요. 무난하다는 건 곧 이 챔피언이 강하다는 뜻입니다!”
이 상황.
모두가 알고 있다.
“다만 아쉬운 점은..”
이미 트릭스터는 FWX에게 끌려가고 있다는 점.
그리고 FWX의 박진현 감독이 진행하고 있는 밴픽은.
점점 속도를 올린다.
“FWX에서 연달아.. 진? 진? 진이요?”
- 너틀않
- 니픽쩔 !_!
- 진 그렇게 하는 거 아닌데~ㅋ
- 혹시 진 서폿 아님???!?!!??!
- 어디서 오셨어요? 지금은 유행 지났어요
- 힝;
“이게 한번 무력한 모습을 보여준 챔피언을 다시 꺼내 드는 일이 그렇게 잦지는 않거든요! 약간 미신이긴 한데 이런 큰 무대에서는 승리의 픽 같은 게 있어서..!”
“근데 중요한 건, 1년 승률로 치자면 작년 이맘때인 스프링에서 세자 선수가 발굴했던 게 진이고! 그리고 그 후 지금까지 세자 히스토리에 아예 패배가 없거든요!”
“남몰래 숨겨뒀던 개꿀픽?”
“근데 또 모릅니다, 진짜 진 서폿 할 수도 있잖아요! 상대 사이다는 소위, 꼴마폿이라구요!”
“신드리랑 같이? 진짜 설마 바텀 비원딜 신드리, 서폿 진?”
- 얘라면 그럴만하다
- 거봐 돌릴 거랬지
- 사이다 저 새기 픽 돌리기 원툴이라니가
억, 하고 당황할 겨를도 없이 밴 순서가 돌아온다.
트릭스터가 한 장을 넘기면 FWX는 더 빨리 돌려준다.
1초 미만 컷.
부드럽기만 했던 박 감독의 기세가 느껴진다.
이 감독은 자기 호흡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철컹, 밴.
철컹, 밴.
“밴 진행되고 2페이즈!”
따라가는 트릭스터는 숨이 가빠진다.
“FWX에서 이번에는 요내!”
“나 이제 진짜 모르겠어! 지금 뭐 나왔죠? 순서대로 마오차이, 신드리, 진, 요내?”
그리고 FWX의 네 번째 픽까지.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것처럼 빠르게 결정이 떨어지고.
락인, 락인, 락인, 밴, 밴, 밴, 락인.
다시 트릭스터의 픽 시간이 돈다.
“그으으으으으..러니까!”
철컹.
“트릭스터 락이이이이이이이이인!”
철컹.
챔피언이 락인 되는 소리가 귓가에서 엔진이라도 돌아가는 것처럼 크게 들리는 것 같다.
“트릭스터에서는 리싱, 냐르, 바류스, 그리고.. 마지막으로 칼마와 아자르로 전체 픽을 완성합니다!”
“여긴 누가 어디로 갈지 딱딱 보여요!”
그리고 FWX가 마지막으로 픽할 차례.
“아..”
숨 가빴던 이 감독은 문득 깨달았다.
다른 선수가 출전하면서 오히려 밴픽에서 더 이겨야겠다고 생각한 게 자신을 더 급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한 호흡, 두 호흡.
시간이.
길다.
밴픽에 주어지는 시간이 이렇게나 길었다.
FWX는 여태까지 순식간에 선택했던 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처럼 선택을 미뤘다.
남은 시간, 3초.
그리고 고요.
오류라도 있는 것처럼.
시간이 멈춘다.
객석도 숨을 죽이고 마지막 픽을 기다리고 있다.
2초.
이제 모든 진실이 밝혀질 순간이다.
“어어?”
1초.
철컹.
“FWX, FWX, FWX..!”
“어어어어? 시스템 가동!”
“락! 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인! 준비, 완료!”
- 어어어어? 어어어어ㅓㅓ
- 이게..?
- 픽 안 돌렸네ㅋ
- 정말 정직한 [서포터]로군요? (씇)
- 이이ㅣ이이잇 ㅣㅣ이이이발????
- 근데.. 나 왜 설레지?
- 아아 깡통 로봇의 낭만 시대가 돌아왔다..!!
- 소리 질러!
“이거 진짜 픽 한 거 맞아? 혹시 랜덤 픽 된 거 아니야?!”
“인간 시대의 끝이 도래했다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결승, 무대에에에에에에에에에! 드디어어어어어어어어어!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아아아아아악! 출격합니다아아아아아아악!”
결승 무대에 미친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