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7화. 어서오세요 용사님
LOS가 공포영화보다 끔찍하고 무서운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여기 있어서는 안 될 존재가 있다는 점이 그렇다.
“아칼린! 장막! 장막! 장막! 숨어! 숨어요!”
귀신을 피해 이불 속으로 도망쳐보지만.
“렌즈! 렌즈, 차니 렌즈!”
그걸 귀신이 들추고 있다.
귀신이 물리력을 갖추는 건 진짜 사기 아니야?
물론 채지한 머릿속에.
바텀 입장에서는 아칼린이 더 귀신같고 탑 입장에서는 절대 은신이 더 적폐로 느껴진다는 생각은 없다.
“이러려고 와박렌했다!”
거룩한 절대 은신, 채지한에게는 아주 약간의 시간의 틈이 있다.
하지만 위기.
“오드! 탑이 여기, 어떻게 여기?”
채지한은 그 틈에도 쩌렁쩌렁한 경고 핑을 남긴다.
분노를 담아 더 찍을 수 없을 때까지 연달아 찍는다.
“어..떻게 저기로 갔지? 걸어 내려가면서 안보였을 리가..”
탑에서 이상하가 눈살을 찌푸린다.
도통 이해가 되질 않는다.
진짜 우연히 모든 사람이 놓쳤다고?
그건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다.
“미친..”
하지만 당장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째깍.
암살자 파일럿의 기본은 침착.
채지한은 제가 만든 도넛 모양의 연막 주변에서 적 사일이 배회하며 억압의 사용 조건을 채우는 모습을 본다.
째깍.
내 점멸 온, 적 점멸 온.
그럼 탑에게도 점멸이 있을까?
사일의 마나 한 틱, 곧 들어올 억압을 내가 피해낼 수 있을까?
순간.
분명히 찰나 간 평화로워야 할 지금.
붉은 그림자의 끝자락으로 차니가 성큼 칼을 찌른다.
“실루엣!”
“이거 아칼린 맞았습니다! 아른거림 효과!”
이제 모두 공개된 시야를 바라보고 있는 해설진이 소리 지른다.
“피요라 Q는 판정상 시야에 보이지 않더라도..”
“앗.. 아아! 영 좋지 않은 곳을 스쳤어요! 하필이면 급소 터집니다!”
여유가 조금 더 사라진다.
기력이 애매한 건 둘째치고 타이밍이 좋지 않다.
궁극기에 스펠까지 투자하면 살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오브젝트 싸움을 포기해야 한다.
하지만 적 탑에게 점멸도 있겠지.
적 미드까지 함께 따라와서 자신을 죽인다면?
교환에도 실패하면?
주도권, 킬, 스펠에서 더 압도적인 손해.
혹시 간신히 살았다더라도.
그 뒤 바로 CC로 무장한 권건이 온다면?
점멸이 없는 상태에서 이 웨이브.
차라리 얌전히 죽을까?
죽어서 약간의 리스크만 짊어지고 다시 미드 대 미드의 싸움을 이끌어나가는 게 나을까.
생각은 길었지만 보낸 시간은 짧았다.
“라아아아아아아아온, 라온, 라온!”
사슬이.
“아아아아아아아아아! 쏠! 수 있어! 쏠 수 있어!”
곧 집에 갈 수밖에 없을 것 같았던, 끝까지 짜낸 마나로 터뜨린 사일의 E가.
왼쪽, 오른쪽?
위쪽, 아래쪽?
“억압!”
김예성이 뻗은 사슬이, 쭈욱 늘어난다.
공간에 비해 시간이 느리다.
음모.
이건 어떤 음모에 빠진 게 틀림없다.
아마 예상하지 못했던 어떤..
- 야..
- 나 느낌왔어
- 제사상 차려라 쟤 곧 죽는다
- 홍동백서 절대 지켜!
- /Zoe
- 결국 범인은.. ‘한 웨이브만 더’..
사슬이 닿는다.
“억, 어억! 억아아아아아아아아압!”
뜬다.
이건 미처 채지한이 완전히 도망을 포기하기도 전에 일어난 일이었지만.
정신 승리를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다.
분명 초반은 바텀 게임이었잖아?
픽부터 시작해서 압박.
분명 주인공인 권건도 그렇게 움직였잖아.
그리고 그다음 페이즈는 나, 미드가 핵심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을 테니 다음 동선이 미드였을 텐데.
“이거, 이거 경기 시작할 때도 말씀드렸잖아요! 사일이 킹-슬레이어라고!”
“쪽수 앞에 장사없죠잉? 쭉쭉 드링킹 들어갑니다잉?”
눈앞에서 별이 번쩍인다.
상대 미드 김예성의 스킬샷은 정말 날카로웠다.
마치 채지한의 버릇을 알고 있는 것처럼.
“뜹니다, 뜹니다, 이거, 여리디여린? 순살 암살자가 감당하기에는!”
“결투의 대가 앞에 곡예는 소용없다! 쫓습니다!”
“리뉴, 점멸 아끼는 판단이죠!”
이건 절대 내가 맞은 게 아니다.
얌전히 죽으려고 맞아 준 거야..
“탑의 공격력이란 게, 절대 만만치가 않아요! 피요라는 상점 주인이랑 미팅도 했거든! 좋은 상품, 감사합니다! 휘뚜루마뚜루 걸치기 좋군요!”
“갸아아아아아악! 피요라 회초리 올 타임 뻥뻥뻥! 다리가 무거워요!”
탑의 자원이 어느 정도일지 몰라서, 맞아 준 거라고.
“그러니까 미리 집에 가서 갑옷이라도 좀 샀어야 했는데! 몸뚱아리 하나로 버티기엔 너무 바람이 찹니다!”
“엄마가 집에 좀 오라고 했지!”
“그놈의 귀환 자존심이 뭐길래!”
“탑 타워 같은 거죠!”
“인정? 인정.”
그러니까 이건 미드 차이가 아니라 탑 차이라고..
채지한은 안간힘을 다해 키보드에서 손을 뗐다.
다음을 노리면 된다.
다음이 있을 테니까.
근데 이거 권건 기출 문제 아니잖아.
왜 이런 문제가 출제 된 거지?
“저기..”
얌전히 입 다물고 게임하던 서포터 강민찬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항상 우울한 뉘앙스로 말하지만 사실 가장 잘난 척을 심하게 하는 사람.
“똑똑한.. 내가 생각을 해봤는데..”
그래도 판단은 쓸만하긴 한데.
“차니 쟤.. 바론 둥지 방향에서 와드 시야 피해서 점멸 쓰고 내려온 거 아닐까?”
이게 무슨 개소리야?
“엥! 민찬이 형! 오브젝트 합류도 아니고 동선에서 점멸을 써? 그런 미친 생각을 누가 해?”
“서포터들은 하잖아.. 하, 라이너 녀석들.. 점멸 너무 소중해서 다른 생각을 못 하죠? 또또 이렇게 서폿의 중요성이 드러나 버렸네..”
“그럼 차니 쟤 속 빈 강정?”
바텀 듀오가 멋대로 지껄인다.
“다른 게 없었던 건 아니긴 하지.. 근데.. 너무 쫄 필요는 없었을지도?”
가만히 듣고 있던 채지한은 소름이 끼쳤다.
설마, 그럴 리가.
설마 설마.
하지만 다른 루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벽 통과 버그 같은 게 있지 않은 이상 길은 단 하나.
정말 이렇게까지 탑의 욕심을 거스르는 문제를 출제한다고?
저 단순한 탑이?
인터뷰에서도 분명히 탑 고속도로 내겠다며.
아니면.. 다른 사람이?
채지한의 화면이 회색으로 물드는 순간.
“바텀에서 권건이 시선을 뺏고! 탑이 시야를 피하기 위해서 미친 점멸까지 소모해서 신개념 동선을 창출해내면서!”
“차니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퍼블을! 가져갑니다아아아아아아아악!”
“결승 첫 세트의 첫 번째 킬은 차아아아아아니! F-W-X!”
“이러면, 이러면, 이거 빠른 첫 귀환이 되면서 동시에 라인 개박살 나기 일보 직전! 이러면, 이러면 정말 복구하는데 시간 너무 오래 걸려요!”
- ^^발 이게 뭐야 억까 좀 하지 마!!!!!! 제발!!!
- 어이어이 [적폐챔]에게 그런 기회는 없다
- 헤으응 망차니 투자의 귀재?
- 탑다운 행동이 아닌걸? ㅋㅋㄹㅃㅃㅋㅋ
- 수많은 보이스 체크로 알 수 있지
- 비선 실세 실존 확인
- 정글 게이트가.. 열린다..
촌스럽게 생긴 노 스킨 피요라가 칼을 세우고 감정 표현을 띄우고 있었다.
2025 트릭스터, 아듀.
난 그때 트릭스터에 있지도 않았는데 왜 나한테 지랄이야.
“이 사실을 알았다면! 점멸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리뉴 선수가 점멸을 써서 살았을 텐데!”
“너무 깔끔하게 포기했어요!”
채지한의 감정이 치밀어 오른다.
“그런 정보가 있었으면 너 똑똑하다는 수식어보다 먼저 말을..!”
“내가 아무리.. 천재라도.. 생각할.. 시간은 필요하잖아..”
느리지만 전혀 기죽지 않은 서포터가 말을 이었다.
“근데.. 지한아. 내가.. 미리.. 말해줬으면.. 사슬은 피할 수 있었고? 나는.. 그걸 모르겠네..?”
“...”
“민찬이 형, 말넘심..”
“아아니, 나도.. 쟤가 케비라고 안 부르고 민찬이 형, 이랬으면 따뜻하게 말했지.. 나도 너무나 큰 상처를 받아서..?”
트릭스터 선수들의 음성 채널이 끝없이 가라앉고 있는 사이.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경기장은 열광의 도가니다.
“리뉴 선수에게 확신이 없었어요, 이런 과감하다는 말이 부족한 미친 투자, 또라이 같은 플레이! 차니!”
“탑이 왜 미드까지 내려왔을까요!”
“겨울나려고?”
“오. 남자의 마음은 철새랍니다.”
“보이지 않는 상대도 반드시 적중한다! 그림자만 볼 수 있다면! 어둠 속을 꿰뚫어 보는 전설의 사륜안! 라아아아아아아온!”
“뒤통수, 뒤통수, 뒤통수! 적의 시선은 바텀으로! 실제 작전은 미드에서 첩보 작전! FWX!”
“하지만 탑 웨이브 쭉쭉 밀립니다, 이거! 한 웨이브 완전히 버리..지 않고?!”
“미드 싸움 이기고 즉시 귀환한 라온 선수가 바로 탑 텔! 라인 정리 들어갑니다! 손해 메우려던 오드 선수도 뒤로 빠질 수밖에 없죠!”
“사일은 탑은 인정합니다잉.”
“이러면 라인 손해 최소화! 이다음 웨이브 때 자연스럽게 스왑 들어가면 됩니다!”
“이렇게 부드러운 라인 관리가 있나요!”
오답 노트를 받아 본 채지한은 이를 악물었다.
“이거, 이거 진짜.. 그냥 단순한 1데스가 아니라.. 초반에 귀환 안 하고 시간 끈만큼, 그만큼 이자 쳐서 돌려받는 거거든요? 절대 단순한 사건이 아닙니다!”
“FWX가! 결승 첫 번째 세트, 그 큰 공을! 트릭스터의 핵심 요원인 미드에서부터 굴려 나가기 시작합니다아아아아아아아악!”
혹시 정답을 맞히고 있던 사람은.
FWX가 아니라 나였나?
#
이유찬은 거짓말을 했다.
인터뷰 영상에서, 탑 타워를 따박따박 부숴버리겠다는 고속도로 선언을.
그게 첫 로밍에서 진짜 효과가 있었는지까지는 모르겠다.
우리 팀 탑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는 ‘또라이’.
LKL에서 미는 우리의 이번 시즌 이미지는 ‘빌런’.
제법 일치한 것 같기도 하고.
사실 나도 점멸까지 사용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냥 스펠 소모나 라인전 위축이라는 결과를 기대한 건데 킬까지?
그야말로 배짱 플레이고 도박 수.
나라면 사용하지 않는 방식인데 오히려 상대가 지나치게 계산적인 타입이라서 더 잘 들어갔다.
상식이 있는 사람은 오히려 상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법이니까.
뭐 어쨌든 잘 하지 않는 플레이는 언제나 충격적이고.
그건 상체를 흔들어놓는 역할을 했다.
“사고, 사고가 났어요!”
“사고가! 났어요!”
“으아아앙 헤드샷! 빵! 이 사건은! 내가 맡죠!”
상체에 기대는 픽을 보여줬던 바텀이 같이 침몰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진이 아예, 아예! 아무 역할도 못 하고 있습니다! 4타를 칠 수가 없어요!”
- 강제 관람(을 하는 중)
- 왐마 연꽃 함정 시벌 연근도 못 캐는 거
- 생산력 0
- 연근이 연꽃 뿌리였어??? 나 지금 첨 알았음;;
- 그래서 진이 농부였구나^ㅗ^
- 전격 연근 FTA
- 올해 농사도 망했어요
“덫, 덫, 덫! 비장의 한 발, 예에!”
“쏩니다, 쏩니다!”
총성이 한 발 울릴 때마다.
“세에에에에에에자아아아아아아아아! 냉큼 킬을 집어 갑니다!”
“여전히 원딜 복지 국가 FWX!”
작은 목숨이 스러진다.
- 왜 얘네가 쓰면 궁이고 우리가 쓰면 아궁이냐?ㅠㅜ
- ㅋㅋㅋㅋ리얼 진 궁 불쏘시개 수준ㅋㅋㅋㅋ
- 커튼콜을 열면 거기 럭스 궁이 더 먼저 꽂혀
- 럭폿 플레이 ㅈ되네
- 으앙 커튼콜~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
트릭스터 탑은 약점을 잘 피해내면서 역으로 솔킬을 얻어가기도 했지만.
바텀 중심으로 영향력을 미드까지 먼저 올려내는 데에 성공한 우리 덕에 이유찬은 말 그대로 ‘적당히’ 타워만 허깅하면서 오히려 정글 시간을 빼돌리는 데에 일조했다.
상대 정글이 왜 탑으로 갔냐고?
로밍 후 오히려 이유찬에게 사이드 템을 권했으니까.
밀러 나올 거라고 생각했겠지.
근데 또 속았네.
처음에 나갔으니까 이번에는 안 내보낼 거지롱.
이제 시간은 우리 편이거든.
“이번에도, 이번에도 도저히 살아나갈 수가 없습니다!”
“아까 점멸 소모해버렸거든요! 궁 아홉 시 반!”
그리고 우리가 노려야 할 주인공은.
“미드, 미드 또 억까! 또 억까야! 또오오오오오!”
뻔하잖아?
“아칼린이 제일 싫어하는 친구가 자기랑 똑 닮은 사일 같은 친구들이에요! 그런데 자꾸 다가옵니다! 안녕! 우리 오랜만이야아아아아아아아! 하이 헬로우 다이브!”
“차니? 놈은 우리 중 최약체였다! 다음은 나, 위대한 도시에서 해방된 반역자가 상대해주마!”
- 라온 쟤 뭐 혹시 아칼린 닮은? 사람 싫어함? 존나 패네
- 그런 사람이 어딨어ㅋㅋ
- 아칼린 실존 인물 아니었어? 아이돌이잖아
- ?
- 사만다? 인공지능이 아니었던 거야?
“죄송하지만 이전 사천왕한테도 죽었었는데요! 이거 리트라이 횟수 제한 있거든요!”
“세이브 로드도 없습니다!”
“클리셰 뒤틀기?”
우리 귀환자 미드는 나와 대화를 가장 먼저 하기를 기대했을지 몰라도.
내 앞에는 사람이 여럿 있었거든.
훠이.
빌런 나가신다, 길을 비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