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6화. 나 말고 탑이랑
결승에서 만나자던 스톰 강준윤은 나에게 결국 지키지 못할 약속만 남긴 셈이다.
하도 당당하게 말하길래 뭐 대단한 카드라도 있는 줄 알았는데.
내상을 심하게 입었는지 아직도 답장이 없다.
근데 강준윤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도 은근히 트릭스터를 기다렸거든.
“그만 밀라니까. 너 너무 오버해서 제이슨한테 킬이라도 내주면 큰일이니까.”
“응, 너도.”
“내가 다 너 잘되라고 하는 말이야.”
“응, 나?도.”
“...”
“야, 듣는 바텀 답답하다. 탑이랑 미드 둘이 그만 좀 싸워라. 어차피 갱은 바텀 올 건데.”
“우리 싸운 적 없는데? 그냥 김미드가 미드 갱 빨리 와달라고 하려고 저러는 거임.”
“뭐? 김예성! 저 해석이 진짜 맞냐?”
지금 극도로 긴장한 애들 꼴 좀 봐.
너무 무서워하는 것 같지 않아?
“주장으로서 듣기만 할 수 없는 이야긴데? 야, 은호! 우리도 바텀 더 밀어!”
“확인! 건이 너 안 오면 우리가 죽는다! 우리는 둘이야! 똑똑히 들어! 둘 다 죽는다! 죽어버릴 거야! 포골만 뜯고 죽어버린다!”
“은호 형 협?박 지린다.”
아니라고?
아님 말고.
“미드는 갱 바로 안 와도 돼. 참았다가 먹을게.”
“오~ 마쉬멜론?의 사나이~”
“김예성 당신은 인간 사일 그 잡채? 그럼 정글 갱은 없는 걸로 해.”
“처리 완료.”
어쨌든 긴장의 주체가 무대건 상대건.
이걸 탈출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게임이 잘 풀리면 된다.
우린 그거 하나로 여기까지 온 놈들이니까.
“니가 요공보다 빨리 안 오면 우리 둘 다 죽어. 알지?”
웃기시네.
시야 확보 다 해놨는데.
벌써 두 번이나 흘려냈으면서.
“농담 끝, 집중.”
순식간에 잡담이 끊기고 네 쌍의 귀가 나에게 돌아온다.
“자..”
어떻게 엿을 먹일까.
“이유찬. 제안이 있어.”
“제안 뭐임?”
“네가 못하는 일일 수도 있는데.”
“그런 건 나님?에게 없음.”
이번 경기야말로 이유찬이 또 쌍코피 터뜨리기 전에 끝낼 생각이다.
“왜 탑한테만 제안하냐! 우우우우!”
“탑이 하는 건 서포터도 할 수 있다! 우우우우우!”
“그래서 포골을 쳐 잡숫는구나?”
“깍지 너 일심동체 안 해?”
“정글의 바텀 혐오를 멈춰주세요! 원딜 처우 향상 부탁드립니다!”
아, 진짜.
“지금부터 나는 바텀에 갈 건데.”
“역시 우리 정글.”
“믿고 있었다고?”
웃기는 놈들.
게임 시작 직전에 다 논의했으면서 왜 자꾸 모르는 척하실까.
오늘 핵심은 바텀이 아닌데.
“쟤네가 바라는 걸 박살 내러 가볼까?”
이왕 이렇게 큰 무대도 마련됐는데.
멋진 연기 보여드려야지.
그게 놀 줄 아는 놈들인 거야.
“이유찬, 네가 할 일은..”
가자.
말 잘 듣는 꼬맹이들아.
긴장 풀어.
“그래? 그럼 난 더 갓벽하게..”
달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는 말이 있다.
흔히 분산 투자를 이야기하는 이 격언은 LOS에서는 이런 뜻이다.
“그럼 더 좋지.”
주인공 한 라인만 믿다가는 큰코다친다고.
“김미드 내 말 들음?”
“잘해라. 상대 잡아둘 테니까.”
알았지, 트릭스터?
용사를 위한 연극 무대는 시작됐다.
#
FWX 정글의 선택은 바텀이었다.
귀환자 채지한의 생각과 동일했다.
그게 현시점에서 가장 이득이 클 테니까.
FWX도 판단이 제법이다.
이번 세트 미드 구도는 아칼린과 사일.
둘 다 채지한의 전문 분야다.
조용하게 성장했을 때 누가 더 유리한지에 대해서는 이게 좋다, 저게 좋다 말이 많아도.
어쨌든 중요한 건 시즌 초 완전히 매장됐던 암살자들이 슬금슬금 패치로 인해 다시 올라오기 시작했으며, 그 결괏값을 가장 먼저 보여줬던 게 채지한이라는 사실.
이제 ‘잘만 하면’ 충분히 꺼내 들만한 수준까지 올라왔다는 증명.
한국보다 중국 쪽에서 미드 암살, 브루저를 선호하기 때문에 이건 자신감 있는 구도다.
“권건이 바텀에서 같이 라인 확 밀어주고 있거든요? 다행히 무사 선수가 백업을 자아아알 해서, 어어어? 잘해서? 잘.. 해서?”
“그대로 힘으로 밀어붙여요? 밀어붙여요?”
분명 미드에서는 그렇긴 한데.
“이대로 바텀 포탑 골드 쌩으로 계속 뜯깁니다? 이거 덫 때문에 쉽게 다가갈 수가 없거든요!”
“너무 불편해! 너무 더러워! 럭스는 왜 이렇게 스킬을 아끼는데! 수전노야? 스크루지야? 써라, 좀! 왜! 왜 이렇게 사람 열받게 하는 거냐고요, 진짜!”
“카운터 근처에서 신발 끈만 묶고 계산은 안 하고 있죠?”
“극찬 감사합니다잉.”
“이거 타이밍 좀 이른데요? 일러요? 이릅니다! 여기 양측 정글 같이 묶여 있는데 한쪽만 포골 먹으면 어떻게 된다?”
- 전원협에서 나왔습니다 논제 : 정글이 포골 겸상한다?
- 건방집니다. 그렇긴 한데..
- 본 건의 경우 사실의 논제입니다
- 포골 먹고 있는 게 권건이라는 팩트를 뺄 수 없습니다
- 안 왔으면 이만큼 못 뜯었습니다 뽀찌 주는 게 옳습니다
- 동의합니다
- 동의
- 합리, 본 건 기각합니다
- 여기 무슨 문서 편집창이냐?
- 전원협 침투력하고는;
- 전국 원예 협회(X) 전국 원딜 협회(O) : 적폐 기득권 집단
- 서포터들의 고견은 접수되고 있지 않는www
- 너넨 그냥 빠져
- 아니(억울) 쟤네 서포터 대표 아니라고요 저건 그냥 클팬덤이라고
“상대 정글 입장에서는 너무 억울하죠!”
“다른 라이너 입장에서도 억울합니다! 야, 쟤네 그만 먹게 좀 어떻게 좀 해봐 좀! 조오오오옴!”
그런데 바텀이 밀린다.
“싸 엘라 싸!”
“빗나갑니다!”
코앞에서 싸우는 데 그걸 피하는 걸 피지컬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사실 어느 정도 거리가 좁혀지면 스킬은 피할 수가 없다.
여기는 지형 없는 필드가 아니니까.
“긴장했나요? 손발 안 맞고 있어요, 헤인즈케비, 헤케 듀오!”
“아니, 이제 요공도 정글로 돌아가고 싶은데! 왜 가질 않아! 권건이 빼줘야 같이 가는데! 왜 평화 협정 맺어주질 않아!”
웨이브가 그치자 잠깐 FWX 바텀은 뒤로 빼고.
정글도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 같았다가.
“다시 나와요! 다시! 또! 한 번 더! 하아아아안 번 더어어어어!”
“아니, 인제 그만 좀 해요! 그만 가! 넌 할 일도 없어?!”
“사실 지금 거의 농성하는 거거든요!”
“아따, 건이.. 선수가 좀 악질이긴 해요잉?”
“요공이 해줄 수 있는 게 대신 덫 밟아주는 것밖에 없는데, 여기서 또 너무 로스가 나버리면 다시 정글 복귀도 하기 어려워요!”
“이번에는 FWX가 초반 턴을 아주, 아주 길게 늘여 쓰고 있습니다!”
채지한은 눈을 질끈 감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아마 저렇게 했을 거다.
생각이 일치한다는 건 무서운 일이다.
채지한 본인이 틀린 판단을 할 리 없으니, 권건이라는 저 정글러는 정답을 맞히고 있다는 얘기가 되니까.
인정하기는 싫지만 잘하는 선수다.
“미드는 서로 초반에 터치 안 하는 협정을 맺은 게 확실하고!”
“그렇죠, 아칼린이나 사일이나 사실 뭐 초반에는 할 게 별로 없어요.”
“그렇긴 해요. 그냥 근속하는 거죠.”
“탑은.. 둘 다 귀환했다가 복귀 중! 아까부터 차니 선수가 굉장히 많이 밀어붙이고 있긴 한데, 오드 선수의 제이슨이라고 하면 상당히 정평이 나 있거든요? 마나 관리 정말 잘해주면서 라인은 밀려도 CS에서는 밀리지 않고 있습니다!”
상체는 별일 없이 평범하다.
“이제 미드도 정비 텀 가질 때 됐죠?”
“서로 후속타 맞아줄 생각이 없어요! 무한히 반복되는 싸움!”
“아까부터 계속 똑같은 말 하게 되는데.. 아직도 집에 안 갔죠, 예에!”
미드에서는 암묵적으로 파밍 중.
아마 코어가 뜨고 각이 나오는 순간부터 구도가 달라질 거다.
단 한 번의 킬.
그때까지만 참으면 된다.
권건이 걸어오는 갱킹 스몰 토크, 그거 하나만 피하면서 버티면 된다.
“초반 킬이 터지지 않는 미드 구도에서 중요한 게 또 하나 있는데요!”
“이게 귀환 타이밍 잡는 것도 중요하거든요?”
그리고 그 순간.
채지한은 생각한다.
“오히려 웨이브 관리가 싸움이 되는 거예요. 천상계 미드들의 싸움이란 게 그런 거거든요. 간 척 해놓고 안 갔어. 한 라인 더 밀어서 박아버려. 그리고 손해 만들어!”
“벌써 고급 기술 몇 번 들어갔죠? 갔게 안 갔게? 나 집에 갔게 안 갔게!”
“바텀도 그렇고 지금 거의 집을 버렸어요! 상점 아저씨 섭섭하시겠다! 아니, 오늘은 왜 이렇게 손님이 없어!”
짧은 고민.
어차피 정글 둘은 바텀에 묶여있다.
상대는 마나, 나는 기력.
난이도는 있지만 자원 관리는 충분하다.
기 싸움에 져주면 아쉽다.
미드는 LOS의 주인공이니까.
“무사, 바텀 변동 없어?”
“어. 상대 정글 계속 바텀. 용 때문에 이번 웨이브 마치고 집 갈 듯?”
보통은 여기서 마치겠지만 채지한은 꽤 섬세한 편이다.
“오드는.”
“채지한. 내가 씨바, 상하 형이라고 부르랬지?”
“씨바 상하. 정보만.”
“하.. 기 존나 세네.. 아까 자기네 정글 확인하는 거 와드에 찍혔잖아.”
탑도 탑 라인으로 복귀.
시야를 쭉 훑는다.
머리가 바쁘게 굴러간다.
우리 정글이 상대 정글에 비해 부족한 편이긴 해도 반갈로 시작했다.
벽을 넘을 수 있는 피요라라고 해도 이번 웨이브 내에 들키지 않고 미드에 개입할 가능성은?
없다.
그럼 판단은 한 웨이브 더.
“..는데 둘 다 안 갔죠?”
“와, 진짜 독해!”
“지금요, 이걸 아직도 귀환을 안 했다는 건! 두 미드가! 아주 미니언들을 골수까지 쪽쪽 빨아먹고 있다는 거거든요!”
“그만큼! 이 미드 싸움이 중요하고! 치열하다는 겁니다!”
- 형들 아깐 어차피 미드들이 할 수 있는 거 별로 없다며ㅋㅋㅋㅋ
- 사일 칼린 사카린 이잉 달다 달아 집에 가기가 싫다띠~
- 말 바꾸는 거 보소ㅋㅋㅋㅋㅋ
- 이것이 1티어 포장 기술ㅋㅋㅋㅋ
- 아니 둘 다 왤캐 자강두천이야ㅋㅋㅋㅋ 집에 좀 가 엄마가 걱정하셔ㅋㅋㅋ
미드는 서로 팔이 짧은 만큼 라인 한 가운데에서 만나 어우러진다.
서로 점화를 들지 않아 유리할 건 없지만 불리한 것도 없다.
그때.
느닷없이 메인 송출 화면이 트릭스터 시점으로 바뀐다.
워낙 자연스럽게 바뀌었기에 눈치챈 이들은 몇 없었다.
“아, 이거..”
한곳에 시선을 고정하는 사람들 몇몇만 알아차렸을 뿐.
“아직 바텀에 아직도, 아직도..!”
“아니, 이거 미드.”
“미드?”
고작 몇 초.
옵저버는 바텀에 박아뒀던 시야를 미드로 옮긴다.
왜 아무 일 없이 파밍하고 있는 미드를 비추는지 시청자들이 의문을 가지는 순간.
“어, 어, 어어어어어어어!”
“어어어어어어어어아아아아아?”
정말 느닷없이.
당연히 권건이 머물던 하체 쪽을 주시하고 있던 채지한의 생각과는 다르게.
“차니, 차니, 차니가아아아아아아아!”
“아따, 이거. 진짜로 쏙았네? 제대로 쏙아부렸어!”
- 어?
- 여기? 왜? 어떻게?
- 뭐야? 니가 왜 여기서
- 서프라이즈~~~!!!~!~!~~!!!
정말 갑자기.
뒤에서 피요라가 나타난다.
“차아아아아아아아니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 두둥 등장!”
소스라치게 놀란 해설진이 괴성을 지르고.
“아니..?”
가라앉아있던 채지한의 눈썹이 놀람으로 꿈틀거린다.
당연히 처음은 정글이나 서포터일 줄 알았는데.
어째서 게임 중후반에나 만날 줄 알았던 상대 탑이 벌써 말을 걸어오는 거지?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는데?
“아칼린과 싸워서 이기는 방법은 싸우지 않는 것이라고 들었거늘!”
“고건 미드끼리의 사연이고요잉. 탑에서는 싸웁니다.”
- 평행 세계의 썬봉구는 이런 플레이를 할 수 있었을까?
- 아니오
“근데.. 근데.. 근데에에에에에에에! 탑이, 탑이 여기까지 내려와서!”
“찔러요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옷!”
“왜! 왜! 탑이! 왜! 여기까지 왔을까! 왜애애애애액! 이 따뜻한 남쪽까지 어쩐 일로!”
- 남쪽에 나무 심으러 왔나 보지
- 환경 생각 갓 벽 하다
- 스모그를 발생시키는 암살자를 뎅겅하러 왔다
“탑은 이유 없이는 움직이지 않지요잉? 그만큼 현명한 존재들입니다잉.”
- 봉구형 그게 자랑이야?
- 문봉구 객원 해설 라스트 데이ㅋㅋㅋㅋ
- 전지적 객탑시점
- 올바른 소비라고 해줄래?
- 결혼은 탑이랑 해라.. 우린 경제 관념 철저한 놈들이니까
- 지 취미 생활에 돈 다 쓰고 밥은 편의점에서 사다 먹을 놈들ㅋㅋㅋㅋㅋㅋㅋㅋ
- (뜨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쉽ㅋㅋㅋㅋㅋㅋㅋㅋ 내 이야긴 줄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