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게이머, 그만두고 싶습니다-244화 (244/326)

244화. 시작하겠습니다

리허설과 관객 입장이 모두 끝나고.

무대는 또다시 어두워진다.

본 무대의 막이 오를 시간.

빡빡한 타임라인 아래 바쁜 디렉터들이 움직이고 있다.

거대한 공연.

선수들이 걸어온 길을 보여주는 오프닝 영상 후 다시 암전된 무대.

고요하지만 묵직한 목소리가 나온다.

기존에 녹화해뒀던 두 팀의 인터뷰다.

아무리 트릭스터의 홈인 인천이라고 할지언정 더 좋은 성적을 거둔 팀이 더 먼저 시즌 감상을 발표하는 체제에는 변함이 없다.

다만 전과 달리 교차 편집되었다는 점.

그리고 FWX의 유이한 스폰서 중 하나인 메타버스 기업, Tales의 기술 지원으로 영상과 무대가 전보다 훨씬 풍요로워졌다는 점이 달랐다.

순위로나 지원으로나.

전처럼 트릭스터가 유리하고 압도적으로 보이는 무대 구성을 하기에는 어려웠다.

촬영 장소는 인천의 어딘가.

공항 근처인 듯, 수도권이라고는 보기 어려울 정도로 광활한 대지가 펼쳐진 아름다운 인천의 풍광.

각 팀의 탑부터 입을 연다.

- FWX Chani (TOP) : 이 무대의 향기가 익숙해요.

지난 서머 결승 때 상대가 했던 말과 비슷한 말.

- FWX Chani (TOP) : 스프링은 시작하는 계절이니까요.

모처럼 정상인처럼 이유찬이 화면 가득 등장한다.

“우리 집 똥 덩어리 나왔다!”

“대본이네. 쟤가 저런 정상적인 말을 할 리가 없어.”

이유찬의 어머니와 누나가 코웃음 치면서도 조마조마한 시선을 고정한다.

- TRT Odd (TOP) : 웃기는 얘기죠.

- TRT Odd (TOP) : 이 자리는 저희 자립니다.

“퉷.”

“퉷.”

- FWX Chani (TOP) : 어어. 그럴 수 있죠. 그렇게 생각할 수 있어.

- FWX Chani (TOP) : 근데 탑 타워부터 따박따박 고속도로 내드릴게.

“우리 아들이 뭘 좀 아네. 그게 이기는 거지.”

“옳은 말씀.”

- TRT Odd (TOP) : 제법 적응했다고 생각하나 본데..

- TRT Odd (TOP) : 그 정도 생각밖에 못 하니까 아직 신입인 거죠.

- TRT Odd (TOP) : 감히 싸움을? 여긴 제 영역인데.

때맞춰 트릭스터의 탑이 화면 속에서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웃음을 터뜨리며 빈정거린다.

“쟤 비열하게 웃는 것 좀 보소? 우리 아들이었으면 그냥..”

“내 동생이었으면 아주..”

누구와 똑같이 과몰입한 탑 모녀는 주먹을 꽉 쥐었다.

- TRT Odd (TOP) : 저는 제 영역에서 제일 강합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근데 우리 못난이 큰 경기장 오는 거 잘 못 하는데.. 그래서 게임 시킨 건데.. 이렇게 큰 무대라니.. 작년에는 코피도 나고 그랬잖아? 우리 유찬이 힉힉호무리? 아니니?”

거칠기만 했던 그의 어머니도 잠시 걱정을 드러내지만.

“엄마, 그렇게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마.”

이유진은 제 엄마의 손을 꼭 잡았다.

FWX의 지원으로 다시 학업을 이어 나갈 수 있게 된 이유찬의 누나는 누구보다도 금융 치료의 힘을 잘 알았다.

“작년엔 그냥 잠깐 절었던 거고..”

물론 금융도 금융이지만 불안을 극복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계기.

전과 이번은 다르다.

“내 호적 메이트가 히키코모리면 세상에 인싸는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히키한테 사과해.”

“힉힉님들 죄송합니다.”

어쨌든 TOP는 탑이고 그건 정상, 선두, 최고란 뜻이니까.

이 가족에게는 그렇다.

- FWX Chani (TOP) : 그래? 여기가 트릭스터 영역?

그리고 화면 속의 이유찬은 섬뜩한 안광을 번뜩이며 씩 웃었다.

- FWX Chani (TOP) : 붙어, XX.

확실히 나아진 것 같다.

“잘한다!”

“그래! 이게 탑이지!”

“호우! 최강의 힉힉호무리!”

“아니라고.”

도저히 멘트 편집이 불가능했던 이유찬을 위한 화면 조정 시간이라도 된 듯.

화면 속으로 거대한 비행기가 지나간다.

이번에는 거대한 바위와 나무.

- FWX GwonGun (JUG) : 4월. 완연한 봄입니다.

- TRT Musa (JUG) : 최선을 다할 예정입니다.

지친 표정의 트릭스터 정글러가 간소한 감상을 남긴다.

- FWX GwonGun (JUG) : 풋풋한 풋내기들이 자라나는 계절이죠.

- TRT Musa (JUG) : FWX 뒤끝 진짜 미쳤네..

왠지 이미 승패가 결정된 것 같은 짧은 토크.

그리고 카메라는 회전하며 공항 근처의 현대적인 시설로 시점을 옮긴다.

- FWX RAON (MID) : 상대 키 플레이어요? 글쎄요..

카메라의 시선을 이용할 줄 아는 선수, 김예성.

- FWX RAON (MID) : 제일 경계하는 건 역시 탑이죠.

- FWX RAON (MID) : 차니(Chani)요.

그는 시선과 몸짓으로 트릭스터를 보고 있지도 않는듯한 연출을 그려낸다.

“김예성 삼백안 좀 치네?”

현역 연기자 김예린은 피식 웃으며 좋은 평가를 내렸다.

“우리 왕자는 어릴 때부터 내가 출사 나가는 걸 많이 따라다녔으니까. 흐뭇하구나.”

사진 전문가 역시 마찬가지다.

“나 닮은 거겠지.”

“쟤가 그래도 오빤데 너를 어떻게 닮겠니..”

“근데 아빠. 왕자라는 호칭은 세자 오빠 건데 자꾸 뺏지 좀 마.”

“어허, 예린아. 넌 왜 다른 사람한테는 오빠라고 하고 너희 오빠는..”

그리고 그에 지지 않게 무관심한 표정의 상대 미드가 모습을 드러낸다.

- TRT Renew (MID) : 관심 있는 건 단 한 가지(우승) 뿐입니다.

- TRT Renew (MID) : 제가 한국으로 돌아온 것처럼, 모든 것을 제자리로 되돌리는 것.

- TRT Renew (MID) : 그게 주어진 사명.

차가운 인상의 미드, 채지한이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자막에는 ‘우승’이라는 설명이 붙었지만 그게 진짜 우승일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어머. 쟤 중2병이야?”

- FWX RAON (MID) : 뭘 원하건.

- FWX RAON (MID) : 그건 아마 제가 이미 가진 걸 겁니다.

우승이 자기 것이라는 듯 대답한 김예성의 마무리와 함께.

“아.. 미드는 다 이렇구나.”

“험, 험. 예린아 혹시 너 방송할 때 생각은 안 나니?”

“인정.”

다시 전환.

넓은 대지에 깎아지른 듯 홀로 높게 솟은 공항 건축물이 백의 마법사들의 금자탑처럼 빛난다.

- FWX seZa (AD) : 와!

이제 편안하고 푹신해 보이는 실내 공간이다.

곽지운이 신난 표정으로 손뼉을 치고 있다.

- FWX seZa (AD) : 박대박대박! 또 결승이네?

- FWX Class (SUP) : 또 이러신다.. 제발 가만히 좀 계세요 세자님.. 채신머리없게..

- FWX Cider (SUP) : 쉽다! 재밌다! 이긴다!

바텀은 두 포지션이 한 세트인 만큼.

편집은 서로 대화를 주고받는 것처럼 빠르고 톡톡 튀는 편집으로 이뤄졌다.

- TRT Haynes (AD) : 여기서 지운이 형(seZa)을 만나네?

- TRT Haynes (AD) : 이야~ 이게 무슨 일?

- TRT Haynes (AD) : 작년에 6위를 했던 내가 올해는 결승이라고홀리몰리?

- TRT KeV (SUP) : 아아.. 아무리 해도 인터뷰는 익숙해지질 않아..

슬슬 토크가 끝나가고 있기에 가벼운 음악이 깔리고 있다.

날카로웠던 분위기는 부드러워졌다.

- FWX seZa (AD) : 무대에 걸맞는 좋은 경기 해보자고요!

- TRT Haynes (AD) : 오브 콜스, 와이 낫?

- FWX seZa (AD) : 근데 우승은 내가 하고!

원딜계의 마당발 곽지운.

- TRT Haynes (AD) : 응, 내밑곽.

호넷에서 이적하고 좋은 성적을 내고 있는 원딜 목해인.

- FWX seZa (AD) : 응, 내밑목!

두 사람은 친한 만큼 가벼운 펀치를 날리고.

- FWX Class (SUP) : 출전요? 어차피 저나 상준이(Cider)나 누가 나가도 이길걸요?

- TRT KeV (SUP) : 하아.. 정말정말 부담된다.. 나는 하난데 저쪽은 서포터가 둘이라니..

- TRT KeV (SUP) : 너무너무 죄송해요.. 근데.. 저희가 이길 거라서요..

- TRT KeV (SUP) : 시시해서.. 죽고 싶어 졌다.. 이런.. 죄송해요.. 또 말실수를..

서포터들도 정신 나간 토크를 이어 나간다.

- FWX Cider (SUP) : 안. 되겠다. 둘이. 번갈아. 가면서. 패자.

- FWX Class (SUP) : 야, 좋은 생각이다. 너랑 내가 생각이 통할 때가 있네?

- FWX Cider (SUP) : 그. 말. 불편.

- FWX Class (SUP) : 유상준 죽고 싶냐? 인터뷰 협조 안 해?

“아무래도 오늘은 협력해야겠죠?”

“저들은 ‘용서’할 수 없는 ‘말’을 하고 있다..”

“우리는 같은 팀, 같은 포지션, 같은 C가문이잖아요?”

“에욱. 왠지 ‘역겨’워서 토할 ‘것’ 같다.”

“C가 뭐 어때서요? 좋기만 한데.”

그리고 덕분에 FWX 서포터 가족은 극적으로 합의에 성공했다.

어딘지 전의 결승과는 조금 다른 무게감.

트릭스터는 ‘절대자’ 컨셉을 오랫동안 유지해왔다.

꼭 1위가 아니더라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충분히 강했고, 서부의 유력자 중 하나였으며.

그것이 그들의 브랜딩이고 자부심이었으니까.

하물며 여기는 그들의 제국.

하지만 그 긴장감은 자연스럽게 흩어졌다.

경기장은 전과 달리 트릭스터의 시그니처 컬러만 있는 게 아니었다.

“끝났나?”

가벼운 분위기 속에서 누군가 입을 연 순간.

웅, 웅웅.

밝았던 음악이 결승 무대에 걸맞은 낮은 앰비언트 사운드로 전환된다.

“어?”

두 팀의 컬러가 마치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은 채 일렁인다.

딸깍.

- FWX GwonGun (JUG) : 때론.

LKL 로고를 띄우며 끝난 줄 알았던 인터뷰 영상이 다시 켜진다.

유난히 짧았던 권건의 추가 인터뷰 영상이다.

그는 이미 이번 정규 시즌 POM 최고 기록을 달성하며.

혹시라도, 아주 혹시라도 FWX가 우승하지 못하더라도 역사에 남을만한 선수로 꼽힌다.

전설이 될 선수.

- FWX GwonGun (JUG) : 뺏는 것보다 지키는 게 더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그가 묵직하게 입을 연다.

따로 대단한 음악을 깔지 않아도 절대자의 한마디에는 주변을 위압하는 기운이 있었다.

- FWX GwonGun (JUG) : 우리는 어떤 입장일까요.

누가 봐도 이 무대의 주인공.

- TRT Renew (MID) : 나는 뺏으러 왔습니다.

그리고 작년까지 트릭스터 소속이 아니었던 미드 채지한.

올해 트릭스터의 멱살 캐리이자 키 플레이어.

- FWX GwonGun (JUG) : ···

영상의 주인공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전 시즌 우승팀 트릭스터.

팀적으로 보자면 트릭스터는 우승을 ‘지켜야’ 할 것이고.

이적한 채지한 개인의 입장에서 보자면 우승을 ‘뺏어야’ 할 것이다.

이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어떤 사람은 무대를 장식한 두 가지의 시그니처 컬러들이 아직 섞이지 않은 채지한과 트릭스터처럼 느껴졌다.

- FWX GwonGun (JUG) : 저도 그랬던 적이 있습니다.

영상을 뒤로한 채.

무대 가운데에 있는 원형 무대에 은은한 조명이 켜지며 소리 없이 우승컵이 모습을 드러낸다.

지금까지 우승컵은 그 존재를 과시하지 않고 있다.

- FWX GwonGun (JUG) : 이제 두 입장은 상관 없습니다.

그리고.

- FWX GwonGun (JUG) :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주는 무대.

- TRT Renew (MID) : 나를 증명하는 자리.

- FWX GwonGun (JUG) : 우린 그걸 결승이라고 부릅니다.

컵의 주인은 정해지지 않았다.

- TRT Renew (MID) : 나는 채지한, 트릭스터.

- FWX GwonGun (JUG) : 나는 FWX.

이제.

우승컵 주변으로 거대한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한다.

리허설 때 들려오던 웅장한 음악이 서서히 시작된다.

- FWX GwonGun (JUG) : 권건입니다.

영상의 배경은 인천의 한 바이오 허브 9공구.

입항해있는 거대한 크루즈, 그리고 하늘로 날아가고 있는 비행기.

국제도시 인천의 경제자유구역.

이 자리에서 우승하는 팀은 곧 신세계로 뻗어나가는 팀이 될 것이다.

딸깍, 두 팀의 엠블럼이 동시에 화면에 드러나고.

“지난 시즌, 그리고 이번 시즌 최대의 빌런이라고 불리는 그들! 정당한 계승자로서, 혹은 그 전설의 시작으로서 이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것인가!”

무대가 진행됨과 동시에 FWX가 먼저.

“소개합니다, F-W-X!”

그리고.

“길고 길었던 입춘을 지나 여름에 황위에 앉았던 그들, 하지만 이제는 이 영광의 왕좌를 영원히 얼려버리고 싶은 용사!”

트릭스터 선수들이 입장을 시작했다.

“트릭스터어어어!”

그리고 모두 제자리를 찾는다.

“무대도, 팀도, 선수도 전과 같지만 전과 다릅니다. 서머와 같지만 스프링은 다릅니다! 가을과 겨울을 밀어내고 봄이 찾아온 지금, 새로운 바람이 불어올 것인지!”

평소보다 묵직하고 낮은 목소리로 분위기를 만들어낸 캐스터가 힘차게 두 팀을 소개한다.

“역사는 이미 시작됐습니다. 오늘, 이 영광의 자리에서 빛나는 우승컵을 들어 올리게 될 팀은 누가 될 것인가. 대전 FWX와 인천 트릭스터, 인천 트릭스터와 대전 FWX!”

리허설에서 담당자가 강조한 대로 정확히 선 선수들이 이번 결승에도 자리를 가득 메운 수많은 사람을 응시한다.

“오늘 이 자리를 별처럼 빛내줄 우리의 선수들.”

반짝반짝 빛나는 응원의 물결이 눈부시다.

“그리고 시간은 돌고 돌아! 결국 다시 오고야 만 오늘!”

지난 결승, 객석보다 아래에서 관중석을 별처럼 올려다보던 선수들은.

이제 천천히.

올라가기 시작한다.

“렛 더어어어어어어어어어 파이널스 비긴!”

그리고 무대 장치에 의해 상승한 선수들의 시야는 이제.

관중보다 조금 더 높은 곳에서 바다를 누리고 있다.

트릭스터를 상징하는 요정 형상이 날아와 FWX를 상징하는 불꽃놀이처럼 사방에서 작게 터진다.

이걸 신호로 그 자리에 온 선수 가족들, 구단 관계자들, 친구들, 은퇴한 선수들, 탈락한 타팀의 선수들, 같은 구단의 다른 게임 팀 선수들, FWX의 팬.

“FWX..”

그리고 누군가와 달리 무대의 중압감을 버티지 못해 떠나갔지만.

“빛나고 있네..”

오랜 시간이 흘러 이제야 무대를 마주할 수 있게 된, FWX의 암흑기의 시작을 끊었던 먼 과거의 어떤 이조차도 큰 숨을 들이켰다.

FWX.

그들은 정말 별이고, 진짜 스타.

“그 영광의 무대, 대망의 결승전을! 뜨거운 함성과 함께! 지금부터어어어어어어어!”

모두가 일시에 발을 구르며 함성을 지르기 시작한다.

“시자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무대 가운데에서 우승컵을 둘러싼 불길이 힘차게 타오르고 있었다.

“하겠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습니다!”

불꽃과 별빛의 바다가 그들을 경배하는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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