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3화. VIP
경기장에도 VIP석이 있다.
실제 예매 시 열리는 좌석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다.
“애들 언제 나온대요?”
“경기 시작해야 나오겠지~ 아직 시간이 많이 남은 모양이야.”
“여기서 우리 지운이 얼굴 잘 보여요? 지운이는 우리가 보일까?”
“그건 나도 모르겠어.”
선수 가족석.
다른 좌석들과 얕은 펜스로 구분된, 각 진영의 가장 앞쪽 좌석이다.
돈을 주고 구할 수 없는 진짜 VIP석.
“우리 온 거 지운이가 모르면 어떡해?”
“어유, 우리 왕비 마마는 걱정도 많아. 이렇게 빛나는데 안 보일 리가 있겠어?”
“자기도 참!”
까르르 웃음이 터진다.
“어? 아니다, 안 보일 수도 있겠다.”
“어머머? 왜요?”
“빛만 온 줄 알고..”
“어머머! 어머머! 미쳤어! 미쳤어! 너무 좋아!”
“하하하!”
“와.. 우리 큰엄마랑 큰아빠 진짜..”
의젓하게 앉아있던 금빛 초등학교의 자랑이 한숨을 내쉬었다.
“삼촌. 이게 맞아?”
“음?”
곽지운의 사촌 동생, 곽재훈은 옆자리를 봤다가.
“아니야..”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곽지운이 프로게이머가 될 수 있게 응원해줬던 삼촌은 LOS 코스프레를 풀 장착하고 있었다.
태초의 챔피언 가렝.
칼이 너무 커서 자리가 불편하다.
아, 강아지 뽀삐라도 데려올걸.
뽀삐도 근본인데.
어쨌든 우리 가족은 다 이상하다.
“사탕 먹을래?”
오른쪽에 앉아있던 누나가 막대 사탕을 내민다.
작은 사이즈의 마스크 같은데도 얼굴이 얼마나 작은지 바로 눈 밑까지 마스크가 덮고 있다.
“고맙습니다.”
미인의 냄새를 기가 막히게 맡은 곽재훈은 냉큼 사탕을 받았다.
“착하네. 세자 선수 동생이야?”
“사촌 동생이요.”
“그렇구나. 되게 닮았네. 너도 귀엽다.”
“누나는 아칼린 닮았어요.”
“고마워. 내가 좀 예쁘긴 해.”
“예쁘기 전에 적폐챔이긴 한데.”
“?”
이즈 장인의 고정 멘트가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온다.
곽재훈은 서둘러 말을 돌렸다.
“누나는 누구 가족이에요?”
“미드.”
미드?
라온 선수 말하는 건가?
근데 왜 유니폼은 권건이고, 응원 메시지도 권건이지?
슬쩍 보니 만화책을 찢고 나온 것 같은 멋진 중년 아저씨가 함께 앉아있다.
턱수염을 다듬은 사람은 처음 본다.
저게 라온 선수의 가족?
“아빠. 이따가 사윗감이 몇번째로 입장하는 사람이냐면..”
“공주야.. 벌써 사윗감이라니.. 우리 예성 왕자는 몇번째로..”
“왕자 같은 소리하네. 고기 완자 말하는 거지? 지금 완자가 중요한 게 아니라니까?”
“험..”
중년 수염 아저씨의 낭만이 깨지려고 하고 있다.
두 사람이 대화를 시작하자 곽재훈은 의자에서 폴짝 뛰어내려 쪼르르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곽재훈이에요.”
이번에는 옆의 옆 사람이다.
“안녕.”
“누구세요?”
“어.. 나?”
다리가 불편한 삼십대 청년이 앉아있다.
이 경기장과 정말 어울리지 않는 정장 차림이다.
“은호네 형이야. 나이 차이가 좀 많이 나.”
“은호? 아! 서포터! 클래스 형의 형?”
“맞아.”
“그 형 진짜 잘해요.”
“그래?”
“옛날엔 찐따 같았는데 지금은 어엿한 도구로서 한몫을 해내고 있어요.”
“도구? 찐따보다 좋은 말 맞지?”
기울어진 집안을 위해 바쁘게 살아서 취미 생활이라고는 일절 몰랐던 청년이 고개를 기울였다.
“도구가 뭐냐면.. 어.”
이런 말 해도 되나?
이 초등학생은 필터링도 없었지만 반성도 빨랐다.
“죄송해요. 나쁜 말이에요. 지운이 형이 은호 형 진짜 잘한다고 그랬어요. 나쁜 말 한 적 한 번도 없어요.”
“괜찮아. 나쁜 말인 줄도 몰랐어.”
“그래도 비밀이에요! 진짜 진짜 꼭 비밀!”
“알겠어.”
시간을 쪼개 연차를 내고 이 자리에 온 최은성은 옅게 미소 지었다.
그는 이번 상반기에 해외 지부에서 일하고 있었기에 비행기까지 타고 왔다.
하지만 그 시간과 노력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훨씬 규모도 컸고 멋진 장소다.
당연히 젋은 남성층만 있을 줄 알았는데 즐기는 연령대도 다양했다.
모니터 속에서 꼼지락대는 정도라고 생각했던 게임이었는데.
이 자리에 와보니 왜 동생이 그렇게 게임에 목숨을 걸었는지 이해가 될 것 같았다.
“이따가 클래스 형 나오면 박수 많이 쳐주세요. 우리 형 목숨 절반은 그 형한테 달려있거든요.”
“절반이나?”
별거 아닌 질문에 곽재훈은 한참 고민했다.
“아뇨.. 절반의 절반 정도.”
“서포터는 정말 대단하네.”
“원딜에 비하면 별로 대단한 건 아니에요.”
최은성은 동생 최은호가 해주던 설명을 떠올린다.
바텀은 서포터가 다라고 했나?
근데 이 꼬맹이가 하는 얘기를 들어보니 아닌 것 같기도 하다.
“나도 LOS 해볼까?”
“원딜로 하세요. 원딜이 제일 쉽고 쎄요.”
“‘원딜’이라는 캐릭터를 고르면 되는 거야?”
“그런 게 아니라..”
한참 설명을 한 곽재훈은 문득 걱정됐다.
다 큰 어른이 대체 뭘 어떻게 살았길래 이런 것도 몰라?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려고..
어쩔 수 없이 한참 원딜의 위대함을 설파한 곽재훈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알려준 걸 알면 클래스 형도 좋아하겠지?
친형이 원딜, 동생이 서포터면.
형제끼리 얼마나 재밌게 게임할까?
위험한 미래를 만들어 낸 곽재훈은 옆으로 시선을 돌린다.
최은성의 바로 옆자리.
이번에는 온통 시커먼 옷차림으로 앉아있는 누나다.
미래의 원딜 재원 최은성을 흘긋 바라보자 어깨를 으쓱한다.
모르는 사이인가 보다.
“안..”
“너. ‘세자’ 선수의 ‘동생’?”
긴 앞머리가 눈을 반쯤 가렸고, 어두운 밤처럼 새카맣고 윤기나는 생머리가 늘어뜨려져 있다.
“대충 맞아요.”
하지만 언뜻언뜻 보이는 눈빛은 뱀같이 빛난다.
“그렇다면 ‘원딜’?”
희고 마른 손마디가 왠지 무서워서 주춤거리게 된다.
얼굴도, 나이도 짐작할 수가 없어서 왠지 오래된 공포영화의 한 장면 같은 느낌인데.
심지어 목에 걸린 수건에는 ‘나는 신을 믿어요’라고 적혀 있다.
“네..”
수상하다.
너무 수상하다.
사이비 뭐 그런 건가?
“형.. 여기 위험..”
방금 잠깐 교감을 나눈 최은성에게 몸을 기댄다.
“아니야, 재훈아. 다시 한번 잘 봐.”
침착한 어른의 도닥임에 다시 보니.
“나는 신을 믿어요.. 권건 당[신]..?”
주접도 이런 개주접이 없고.
음침한 모습과 달리 머리 위에서는 권♡건 따위의 머리띠가 껌뻑대고 있다.
FWX 팬이 아닐 수가 없다.
근데 불이 들어오려면 들어오고 꺼지려면 꺼지지 왜 저렇게 무섭게 번쩍거려?
이게 대체 무슨 조합이야?
“너는 ‘상관’없는 사람이로구나..”
게다가 이 미친 말투는 뭐고?
한국말치고는 이상하게 강세가 들어가 있고, 그래서 아무 맥락 없이 의미심장하다.
“사이다 선수 가족분이신 것 같아.”
최은성이 옆에서 거들어줬지만 곽재훈은 말없이 눈만 굴렸다.
“후..”
무서운 누나가 한숨을 쉬자 입에서 냉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 같다.
“저는 최은호 선수 형입니다.”
“‘클래스’의 ‘가족’?”
“사이다 선수의 누나 되시나요? 같은 FWX 서포터 가족이네요.”
최은성이 서글서글한 웃음을 지었다.
“우리는 ‘가족’이 아니다. ‘클래스’는 ‘사이다’의 적.”
곽재훈은 아찔해졌다.
“아.. 동일 포지션이라서요?”
이 경쟁 구도 뭐야?
“근데 아시죠? 우리 은호가 더 오래 있었던 거. 경력과 직급이 달라요.”
최은성은 씩 웃는다.
킹치만 늙은 형, 그런 말을 하면 목숨이 위험해요..!
“!”
무서운 누나는 화가 난 것 같았지만 영혼을 뽑아간다든가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약한 자’에게는.. 볼 ‘일’ 없다.”
“약자요? 아, 제가 몸이 불편해 보여서? 글쎄요. 저는 신체보다는 머리에 자신 있는 타입이라. 걱정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 형도 만만치 않다.
“‘당신’이 없다면.. 내 ‘부하’가 ‘주전’ 서포터가 될 수 있나.. ‘신’에게 한걸음 더.. ‘가까이’..”
“직장 내에서도 같은 위계에 있는 팀이 있으면 한쪽이 자진 퇴사할 때까지 실적으로 눌러버리는 게 이상적인 승부 전략이거든요.”
“나의 ‘신’에게 ‘판단’을 맡기도록 하지..”
“그거라면 은호가 권건 선수와 각별한 사이라던데요. 제일 먼저 말 건 것도 우리 은호라고. 어쩌죠, 이미 판단 기준이 기울어져 버렸네. 사내 정치라고 아시나?”
두 서포터의 형과 누나는 팽팽한 기싸움을 벌였다.
여전히 머리 위에서 머리띠가 반짝거린다.
이제 두 사람은 자기한테 관심도 없다.
곽재훈은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경기 시작하면 같이 응원할 거면서.
어른들도 싸우면서 친해지는 건가 봐.
어쨌든 초등학생이 낄 자리는 아닌 것 같다.
생기가 빨려 나갈 것 같아서 도망치던 그때.
“얘! 너 내 동생 할래?”
갑자기 덥석 자신을 잡아 드는 손길이 거칠다.
“누구세요!”
깜짝 놀란 곽재훈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번에는 그을린 피부가 건강해 보이는 누나다.
힘이 얼마나 센지 발이 땅에서 떨어진다.
치익, 여기는 이즈.. 거리.. 조절에 실패했다..
“어휴, 귀여워! 얘 왜 모자 안 썼지? 13세 이하 띠모 모자 국룰 아니야? 엄마, 얘 좀 봐봐!”
“띠모?”
누나와 똑같이 닮았지만 더 무섭게 생긴 아줌마와 눈이 마주친다.
“누가 신성한 탑에서 띠모 소리를 내었는가?”
초등학생은 오금이 저린다.
“아니지, 얘는 탑이 아니잖아! 아까 말 못 들었어? 숟가락이래!”
숟가락.. 도구.. 그거 나쁜 말인데..
지은 죄가 있어서 그런지 입이 안 떨어진다.
“숟가락에 작은 덩치면 띠모 시키는 게 맞지!”
“원딜이건 탑이건 띠모 삭제 좀.”
“그럼 배인은 원딜이야? 탑이야?”
“배인은 정신적으로 탑이지. 등을 보이지 않잖아.”
“하이고. 우리 엄마 탑에 잘 계시고~”
옆에서 아줌마가 시원한 손길로 누나의 등짝을 후려친다.
“안부 잘 들었고~”
“어머나 시벌! 우리 엄마 촉수 강타 너무 맵다!”
“호호홋! 누굴 닮아서 말버릇이 이래? 혹시 너네 엄마 닮았니?”
“응, 우리 엄마 일라 닮음.”
“설교는 필요 없다.”
입담이 좋은 초등학생도 정신이 혼미해진다.
“그만..”
그만 하세요, 이 탑신병자들아..
“어머, 놀랐나 봐! 미안해!”
“괜찮..”
“야, 유진아. 얘 눈 동그랗게 뜬 것 좀 봐. 우리 유찬이 어렸을 때랑 똑같다.”
“엄마 콩깍지 좀 빼. 걔가 그런 시절이 언제 있었어? 배에서 나올 때부터 지금 모습이었지.”
“그건 그래. 우리 집안의 똥덩어리..”
잠시 정신없는 핑퐁 속에서 곽재훈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거.. 확실히 탑 가족이구나..
“어머님.. 저는 코구모가 싫어요..”
“당신의 의견 존중합니다.”
여기 조금 더 있으면 이상한 사람이 될 것 같아서 곽재훈은 얼른 도망쳤다.
이제 다 구경했나?
누가 빠진 것 같은데.
아직 경기는 시작되지 않았다.
곽재훈은 두리번거렸다.
마침 잠시 자리를 비웠던 듯.
이제서야 돌아와 앉고 있는 아줌마가 보인다.
“안녕하세요.”
아줌마라고 불러도 되나?
아줌마의 좋은 말이 뭐지?
아주머니?
그것보다는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같은 느낌이 드는 고운 어른이다.
“저는 곽재훈이에요. 금빛 초등학교에 다녀요. 원딜이에요.”
왠지 바짝 긴장하게 된다.
“재훈아, 안녕. 나는 건이네 엄마야.”
조곤조곤하고 예쁜 말투.
부드러운 선.
잘생긴 걸로 소문이 자자한 FWX 정글러가 누굴 닮았는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항상! 신세 지고 있습니다!”
“신세? 말도 예쁘게 하네. 신세는 우리가 지고 있지.”
“불초 지운이 형을 잘 부탁드립니다.”
초등학생의 이상한 문맥에 끝내 여인이 웃음을 터뜨렸다.
“건이 형은 두 번째로 입장할 거고요..”
아무 말이나 늘어놓던 곽재훈은 문득 권건의 어머니를 빤히 바라본다.
웃고 있는 얼굴에는 걱정이 깃들어 있었다.
“왜요?”
그 모습을 곽재훈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걱정하실 거 없어요. 건이 형이 다 이겨 줄 거에요.”
어차피 FWX가 세상에서 제일 세니까.
“그런 게 아니라.”
여인은 작게 손사래 쳤다.
“우리 아들이 실패를 두려워하는 성격이거든.”
세계관 최강자 1위에게도 그런 고민이?
초등학생은 받아들일 수가 없는 이야기다.
“삶에 백퍼센트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걸 무서워하는 여린 아이라서.”
무서워해?
여려?
권건과 백만 광년은 떨어진 것 같은 얘기에 곽재훈은 눈만 끔뻑댔다.
“어머, 내가 애한테 무슨 소리를.”
“근데요.”
“응?”
“실패 안 하면 되잖아요?”
“음..”
놀란 표정.
곽재훈은 무슨 말이라도 해야겠다 싶어 서둘렀다.
“걱정하지 마세요. 건신님이 아무리? 여?려도 우리 지운이 형이, 그리고 차니 형이랑 라온 형이랑 서포터 형들이 실패 안 하게 지켜줄 거예요.”
“그래? 그거라면 믿을 만 하네.”
상대 얼굴에 웃음기가 묻어난다.
“딱 보세요. 얼마나 잘하는지.”
“고마워.”
“또 바라는 점 있으세요?”
에헴, 에헴 하는 소리를 내며 곽재훈이 팔짱을 끼고 허리를 쭉 편다.
제 사촌 형인 곽지운에 대한 믿음이 굳건한 태도였다.
이 모습을 본 진짜 어른은 어른스럽게 이야기하는 초등학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 아들은.. 항상 승리를 강요받는 일을 하고 있지만.. 그래도 부모로서 작게나마 바라는 게 있다면.”
경기 시작을 알리는 듯 조명이 꺼지기 시작했다.
“승패와 상관없이 항상 행복했으면 좋겠어. 좋은 친구와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행복하고, 좋은 사회를 만나서 행복하고..”
초등학생은 이해할 수 없는 어른의 마음에 입술을 비죽였다.
무슨 행복을 그렇게 멀리서 찾아?
이게 게임이지 세계 평화야?
“에이, 저기요. 근데 그건 좀.”
“응?”
곽재훈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건 너무 복잡하니까 그냥 일단 이기고 행복한 걸로 해요.”
“어머..”
고운 눈웃음.
“여신님도 이기라고 기도하시는 거죠?”
“여신?”
“건신님 엄마니까 여신.”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웠니?”
곽지운의 부모님인 큰엄마, 큰아빠가 떠올랐지만 곽재훈은 딴청을 부렸다.
“아무튼 기도하세요.”
그리고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다시 움직였다.
“그래, 그럼 그러자꾸나.”
승리를 낳은 여신이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