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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게이머, 그만두고 싶습니다-242화 (242/326)

242화. 무대 뒤에서

트릭스터 미드, 채지한은 아주 오랜만에 경기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선수님, 안 내리세요?”

“내리겠습니다.”

거대한 경기장.

평소에 출근하는 LOS 파크와는 규모가 다른 이곳.

채지한이 있던 중국과는 또 다른 느낌.

이런 광경을 마지막으로 봤던 게 언제더라.

벌써 4년 전 일인가?

하얀 석조 건축물인 인천 시립 유니버시아드 체육관.

여기까지 오는 게 쉬운 건 아니었다.

전문가들의 말에 의하면 ‘뜻밖의 사건’.

자신이 속한 트릭스터가 스톰을 이긴 게 뜻밖이라니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스톰과의 경기는 많은 무기를 소모하게 했다.

스크림은 잡기 쉽지 않았고, 얕봤던 상대 미드는 만만치 않았으며.

밴픽 역시 수도 없이 꼬이는 싸움이었다.

[ 성남 스톰의 석패.. 트릭스터의 승, 패, 승, 패, 승! ]

[ 승부 예측 진짜 망함, 진짜_진짜_망함_이걸_이기네.png ]

[ 트릭스터 ‘리뉴’의 품격, 미드 캐리 게임 ]

[ 스톰의 ‘킹’ 무너지다! ]

하지만 틈은 있었다.

트릭스터는 체급을 내세울 수 있는 포지션인 미드와 원딜을 영입한 것과 달리.

스톰은 이번 시즌에 운영을 중점으로 둬야 할 포지션인 정글과 서포터를 교체한 탓에 전체적인 밸런스에서 트릭스터가 앞섰던 탓이다.

미라쥬와의 싸움으로 비밀 무기를 선공개했던 것도 있고.

트릭스터는 어부지리를 챙긴 셈.

결과적으로 미드 차이라는 말이 나오긴 했지만 실상은 정글과 서폿 차이였다.

물론 채지한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이기면 미드 덕, 지면 미드 탓인 이 세상에서 이 사실을 굳이 부정할 필요는 없으니까.

만약 FWX를 만났다면.

혹은 미라쥬를 만났더라면 결코 올라오지 못했을 것이다.

홈 팀 없는 결승이 될 뻔했다.

그리고 일주일.

플레이오프가 종료되고 결승전인 오늘.

채지한이 트릭스터에 들어오기 전 일 때문인지 각종 기사에서는 오늘 경기를 강력한 라이벌전처럼 묘사했다.

[ 뜻밖의 선택 or 정해진 운명? 결승 무대에서 두 팀이 다시 만난다 ]

[ 대전 FWX vs 인천 트릭스터 ]

[ 서머 결승은 어디에서? 대전시, “경기장 리스트업 중.. 김칫국이냐고요? 아닙니다” ]

[ 트릭스터, 결승 진출 굿즈 할인 행사 ]

[ 대전 유명 모 베이커리, FWX 우승 시 ‘초유의 할인 행사’ 약속! ]

[ FWX에는 ‘유통 기한’이 있다.. 전문가, FWX의 기한을 10년으로 예측.. ]

ㄴ 혹시 통조림이세요?

ㄴㄴ FWX는 핵전쟁이 나도 괜찮다는 뜻ㅋㅋㅋㅋㅋ

ㄴㄴ 까는 기사인 줄 알았는데 기자님이 제일 프빠네

그야말로 온갖 것들이 날뛰는 혼파망 양상.

결승에 많이 안 와본 팀이라서 그런지 주접이 따로 없다.

“리허설 준비하러 가셔야 합니다. 서둘러주세요.”

아직 이른 시각.

오후부터 시작하는 경기지만 선수들은 오전에 도착해 리허설을 진행한다.

현장 세팅 역시 마찬가지다.

뒤따라오는 거대한 고급 버스가 언뜻 보인다.

FWX다.

거리가 멀면 얼마나 멀다고 버스를 대절했지?

설마 LOS 팀 전용 버스가 있을 리는 없고?

아니, 진짜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럴 리가 없는데도 저 거대한 리무진 버스는 도색인지 랩핑인지 FWX의 로고가 깔끔하게 쓰여있다.

미친놈들인가?

팀에서 돈을 얼마나 퍼붓고 있는 거야?

근데 이번 플옵 경기를 보니까 그럴 만 한 것 같기도..

“선수님! 빨리! FWX 선수님들도 입장하셔야 합니다!”

결국 옆에 서 있던 주죄측 스탭이 날카로운 소리로 재촉한다.

왠지 먼저 도착한 게 지는 일인 것 같다.

채지한은 눈살을 찌푸리고 얌전히 경기장 후문으로 향했다.

“최대한 제 장비 세팅 먼저 진행해주세요.”

예민한 탑이 대기실에 있던 담당 스탭들에게 요구 사항을 전달한다.

장비 강박증이 있는 타입이라고 한다.

정말 피곤한 스타일이다.

여기야 어쨌든 자기네들 홈이니까 좀 괜찮겠지만.

다음에 다른 장소에서 결승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여기까지 생각하던 채지한은 문득 자기가 오늘 경기를 질 준비를 하는 것 같아서 다시 기분이 나빠졌다.

“오드. 입 좀 다물어.”

“저 개싸가지가 형한테..”

“리허설 곧 시작한다. 상하. 지한. 집중해라.”

예민한 긴장감.

“네.”

이길준 감독의 말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콜이 들려온다.

틈을 이용해 대기실에서 선수들의 흐트러진 머리나 메이크업을 만져주던 담당 스탭들이 모니터링을 위해 우르르 빠져나간다.

현장 다큐 촬영을 위한 카메라 부대와 역시 마찬가지다.

이 모든 게 오늘은 평소와 다른, 결승 무대라는 것을 나타낸다.

무대 뒤에서는 많은 일이 일어난다.

“일렬 대기해주시기 바랍니다!”

주최 스탭과 경기장 기본 인력.

트릭스터의 직원들과 FWX 직원들.

“3, 5번 카메라 화이트 잡았나요?”

“예!”

카메라 팀, 음향 팀, 조명 팀, 현장 엔지니어들과 보안 팀.

“스탠바이!”

게임 팀 감독, 코치, 선수.

“큐!”

가장 중요한 경기 직전에는 대기실에서 밴픽 논파나 전략 수정만 할 것 같지만 실상은 좀 다르다.

말 그대로 영화 촬영장 같은 분위기다.

짐벌 따위의 장비를 설치한 거대한 카메라가 빠짐없이 선수들을 좇는다.

오히려 선수들은 밖에서 어떤 축제가 벌어지는지 잘 모른다.

뭘 파는 푸드트럭이 오고, 어떤 카드사에서 경품을 주며, 어떤 팬들이 어떤 복장으로 경기를 보러 오는지까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이 많은 인력보다는 수십, 수천 배는 많은 사람이 이 경기를 고대하고 있을 것이라고 짐작할 뿐이다.

이건 결승임과 동시에.

행사고, 공연이며, 축제니까.

“리허설 시작합니다! 이번 메인 음악 지나간 뒤 캐스터님께서 호명하실 때, 여기 서 있는 스탭이 깃발을 흔듭니다. 기억하세요. 트릭스터는 파란 깃발입니다. 그때 입장하시면 됩니다.”

옆에는 동일한 환경의 FWX 선수들이 일렬로 대기하고 있다.

“FWX는 빨간색. 빨간 깃발입니다. 기억하세요.”

귀에 꽂힌 인이어를 통해 리허설 담당자의 말이 더욱 또렷하게 전달된다.

바로 앞에 서 있는 담당자는 총알처럼 빠르게 말하면서도 정확한 발음을 유지했다.

“앞에 있는 선수와 한걸음 거리 유지해주세요. 무대에 나가시면 바닥 부분에 각 포지션별 조명이 들어옵니다. 해당 위치에 정확하게 서주세요.”

“이따도 이렇게 일찍 나와요?”

FWX의 탑 위치에 서 있는 선수가 심드렁한 말투로 물었다.

저놈은 긴장감도 없나?

이 사람들 예민한데 저런 질문이 나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아까도 설명했..”

신경질적인 말투를 고수하던 담당자가 눈썹을 휙 들어 올리며 눈을 마주쳤다가.

“아, 차니 선수. 아뇨, 본 무대는 별도로 안내해 드릴 겁니다. 하지만 진행 방식은 똑같아요.”

상대를 보자 무슨 불쌍한 비밀 사연이라도 아는 것처럼 한결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그 꼴을 노려보고 있는 건 장비 문제로 잔뜩 예민해진 우리 팀의 탑 오드.

“동정표 꼬라지하고는..”

작게 중얼거리는 말이 들린다.

뭐지?

지난 결승에서 무슨 일 있었나?

채지한의 의문을 뒤로하고.

“시작합니다.”

선수들이 서 있는 복도까지 메스꺼운 진동이 전해져오기 시작했다.

음향 장비와의 거리감이 가깝게 느껴진다.

웅, 웅.

거대하게 울리는 베이스.

테스트처럼 두어번 울리던 공기의 진동이 잠시 후 사라진다.

지직, 직.

통로 끝의 불이 낡은 형광등처럼 깜빡이다 꺼진다.

암전.

“당황하지 마세요. 연출입니다. 곧 켜집니다.”

야광 조끼를 입은 담당자의 낮은 목소리.

주변을 여러 겹으로 가득 메우고 있었던 리허설 음악이 쥐 죽은 듯이 사라지자 무서운 고요가 찾아온다.

모든 선수는 희미한 불빛 속에서 통로 끝의 밝은 빛을 응시했다.

경기장 위, 좌석에 앉아 듣는 것과.

경기장 아래, 통로에서 듣는 것은 차이가 크다.

일상에서 만나볼 일 없는 아주 거대한 크기의 스피커가 선수들과 멀지 않은 곳에서 옅은 진동을 뿜어내기 시작한다.

딩.

고음역을 담당하는 윗 동그라미의 트위터.

저음역을 담당하는 아랫 동그라미의 우퍼.

디링.

아마 홀에서는 영상이 나오고 있을 것이다.

선수들의 지난 시간과 매드 무비를 결합한 어떤 영상이.

딩디링.

동명의 교향곡 멜로디의 주선율을 좇는 기타가 전개된다.

밝은 분위기라기보다는 아포칼립스에 가까운 분위기다.

오오어, 오오오어, 아득하게 먼 곳에서부터 하울링하는 늑대처럼.

남성 보컬과 코러스의 허밍이 가닥가닥 합쳐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어느 순간.

“흡.”

모든 소리와 숨결이 한 지점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다가.

음악은 한 점에서 락으로 결합하면서 강렬하게 본색을 드러낸다.

갑자기 치고 들어오는 우퍼의 떨림.

진동이 느껴진다.

고장 난 스피커를 통해 들리는 것 같은 덥스텝 사운드와 엉킨 베이스 드럼.

두 팀 모두에게 짧고도 먼 길이었던.

2026 스프링 스플릿 결승전.

다시 통로의 끝에서부터 강렬한 불빛이 들어온다.

여기가 이번 스플릿 종착지라는 것처럼.

“Welcome to the new world. To the new world.”

담당자가 자기도 모르게 흥얼거린 가사.

그 가사를 시작으로 순식간에 곡조가 치고 올라간다.

전보다 훨씬 화끈한 락.

텅, 텅.

계속되는 드럼 소리와 끝까지 올라가는 보컬의 목소리.

뼛속까지 전해지는 우퍼의 진동이 공기를 밀어내자 채지한의 몸도 흔들린다.

그는 안간힘을 다해 밀려나지 않기 위해 버텼다.

“From the New World.”

올 시즌 공식 표어에 걸맞는 노래와 가사.

불규칙적으로 지지직대는 덥스텝과의 결합이 쉴 새 없이 스피커를 두드려댄다.

경기는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두들겨 맞은 것처럼 부담스러웠다.

여기는 트릭스터의 홈인데.

어째서?

“Welcome to the new world, From the New World.”

음악에 따라 조명이 깜빡, 깜빡.

살짝 어두워졌다 밝아진다.

“ㅡㅡㅡㅡㅡ! 소개합니다!”

그리고 그가 눈치채지 못한 어느 순간 사방은 고요해져 있었다.

붉은 깃발이 흔들리고 있다.

저 깃발이 누구였지?

우린가?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하지만 다행히 코를 후비적거리던 상대 탑이 먼저 걸어 나가는 걸로 보아 우리 차례가 아닌 모양이다.

둥.

본 음악이 끝나고.

옅게 깔리는 앰비언스, 그리고 발밑으로 가라앉을 듯이 낮은 북.

둥.

진동이 강제로 심장 소리와 박자를 맞춘다.

두둥!

여전히 조명은 음악과 맞추어 움직인다.

둥, 두둥.

빨라진다.

둥, 둥 두둥 둥!

긴장.

아, 이 감정은 긴장이다.

여태껏 단 한 번도 공황이라는 감각을 느껴본 적 없었던 채지한은 수상한 압박감에 숨이 차오르는 걸 느낀다.

가만히 서 있는데도 복도가 돌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느리게, 여유롭게! 발걸음 천천히! 고개 드시고! 허리 펴세요!”

리허설 무대로 입장 중인 FWX를 코치하는 목소리가 꽂힌다.

“내가 최강이라는 것처럼! 감정 이입! 나는 오만하다! 세상의 모든 걸 내려다본다! 그런 자세로!”

그런데, 왜?

왜 우리가 먼저 나가는 게 아니지?

왜 선착해있는 게 내가 아닌 거지?

내가 이 세상의 주인공이 아니었나?

조명이 느리게 점멸한다.

그는 아직도 유리구두의 주인을 찾지 못했다.

‘그 사람’만 찾아서 같은 팀이 될 수 있다면.

선뜻 우승까지 걸어 나가는 조연의 자리를 내줄 수 있을 텐데.

아니, 어쩌면 공동 주연 정도까지 해볼 수도 있을 텐데.

채지한은 벌써 우승 인터뷰도 준비했다.

우승을 할 수만 있다면,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여기서 내가 너를 찾고 있다고.

트릭스터에 분석 데이터를 남겼던 그 사람을.

문서로만 봐도 손발이 척척 맞는 어떤 이와 눈이 마주치면 어떤 기분일까.

아마 보고만 있어도 배가 부르고 뭐든지 해낼 수 있는 기분이겠지?

여기까지 오는 데에 지나치게 많은 자원을 사용했건만.

일주일이라는 시간은 지나치게 짧았고 결국 오늘이 오고 말았다.

FWX는 먼저 걸어 나가고 있다.

그 순간.

그들의 등 뒤를 바라보던 채지한은 시선을 느꼈다.

깜빡.

불이 켜진다.

정글, 권건이다.

깜빡.

불이 꺼진다.

나를 봤나?

깜빡.

불이 켜진다.

아니, 보지 않고 있다.

어쩐지 섬뜩한 감각에 채지한은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들의 결전은 몇 시간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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