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화. 상위 포식자
‘예상과 다르게 움직여 새로운 플레이를 만든다’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반드시 전제가 필요하니까.
“이거, 모입니다, 양 팀 용 앞으로 모여요?”
꾸준한 반복을 바탕으로 해야만 ‘예상’을 만들어낼 수 있고.
그 후에야 ‘예상과 달랐다’는 결과를 도출할 수 있다.
“어어어어어? 어어어어?”
꼭 게임에 얽매일 필요 없이 주변을 둘러보자.
정해진 패턴에서 벗어나는 게 얼마나 피곤하고 어려운 일인지 느끼는 사람이 많다.
나 자신도 반복되는 패턴에 적응해버리거든.
“지금 미라쥬가 살짝 먼저 자리 잡으려고 하는데.. 치열한 자리싸움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초반 용 싸움은 아무래도 미라쥬 쪽으로 손을 들어주고 싶거든요!”
“동의합니다!”
그리고 놀랍지만 이건 오히려 규칙과는 거리가 먼 것 같은 짐승에게 더 완벽하게 적용된다.
일상에서 가장 가까운 짐승은 강아지.
곽지운이 키운다고 했던 ‘뽀삐’같은 개.
“영역 싸움 치열하죠!”
내 인생에 스쳐 지나갔던 연 중에는 당연히 개라는 존재가 포함되어 있었다.
프로게이머를 그만두고 집에서 방송과 함께 삶을 보내던 어떤 나락의 순간에 그랬다.
처음에는 인간관계에 대한 실망이 계기였고, 그 후에는 운동성 유지를 위한 하나의 수단처럼 내 삶에 들어왔던 존재.
“이게 자존심이거든요?”
“여기 우리 집이니까 나가! 으르렁! 으르릉! 으르르르르러러러렁!”
“어디서 개가 짖는 소리가? 컹컹! 왈왈!”
“사람의 언어로 중계해주시기 바랍니다.”
결국 그것마저 지키지 못했지만, 어쨌든 우울한 이야기는 차치하고.
개와 인간이 대화할 수는 없다.
그래서 개에게 교육이나 행동 수정을 요구할 때 필요한 건 확실한 인간의 행동.
평소와 다른 행동 패턴을 만들어내 보여주고.
그리고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아마도 이게 언어를 통한 의사 교환보다 더 뚜렷할 수 있는 짐승 간의 의사소통 방식.
게임도 같다.
게임을 하면서 상대와 대화할 수는 없다.
미라쥬가 머리 나쁜 체급 원툴 팀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강팀인 이유는 이런 패턴 교육이 수십, 수백 가지 갈래로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기 때문이다.
보통 이걸 본능적인 플레이라고 부르는 거고.
“자연스럽게 고지를 먼저 점령한 미라쥬인데요!”
“미라쥬가 시야 면에서 약간 아쉬움은 있지만 어쩌면 이 용, FWX가 양보하는 게 자연스럽다고 생각했는데..”
“이거 혹시 양보할 생각이 없는 걸까요? 아니겠죠?”
- 애시 딩거면 FWX도 진영 잡기 너무 어려울 것 같은데?
- 양보하는 게 어떨까?
- 형들 나 불안..안해
- 좀 이른 것 같은데.. 6렙도 안됐는데 싸움 이렇게 커진다고?
- 미라쥬 여기 목숨 걸어? 이걸 미드가 와?
그리고 우리조차도.
협곡에서는 말을 할 수 없는 짐승인 셈이다.
행동으로만 보여줄 수 있으니까.
“아니면 견제까지만 들어가나요? 양측 미드도 모이고 있거든요!”
“탑은 지금까지 치열하게 싸우고 있습니다. 개입하기 어려워요!”
하지만 나는 패턴을 만들어내는 일을 아주, 아주 오랫동안 해왔고.
반대로 패턴을 깨며 의사 표현을 하는 것 역시 습관처럼 해낼 수 있다.
뭐, 1만 시간의 법칙 그런 거?
“온다.”
우리는 앞선 세트에서 충분히 미라쥬에게 규칙을 강요했다.
“레넥 꼼짝 못 함.”
“오케이. 밀어 넣고 전령 앞 와드.”
“어. C-12.”
“예성. 집 갔다가 와.”
우리 팀이 한발 뒤로 물러날지도 모른다고 가정하고 있는 상대의 마음을 읽어낸다.
어떻게 보면 극 초반.
하지만 중반 같은 장기전을 계획한다.
“알겠어.”
“딩거 타워 세이브 1, 리필 10초 예상.”
“은호 형 땡큐.”
“미라쥬에서 선공! 첫 번째 용은! 화염 용입니다!”
“치기 시작합니다, 완전히 주도권 쥐고 있죠? 이 영역을 파고 들어가는 건 더 큰 손해가 될 수 있습니다!”
“FWX, 선택하나요? 선택해야죠? 오늘따라 망설이나요? 바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이번 버전에서의 저렙 단계 용이 만만한 건 아닙니다만, 이렇게 오늘 미라쥬처럼 철저하게, 그러니까 영역 동물 조합을 짜왔을 경우에는 공간 창출이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음 전령 싸움에서 탈리아가 궁극기까지 지니게 되면 그 속성이 더 강화되는 거거든요?”
“FWX는 오히려 전령 쪽 시야를 잡아두는 건 어땠을지!”
건강한 긴장감이 흐른다.
“애시 매 없음.”
“체크.”
“적 풀 스펠.”
“확인.”
한뜻으로 알고 있다.
이건.
어쩌면 적에게는 첫 번째 기회처럼 보일 수 있지만, 우리에게는 큰 그림의 한 조각일 뿐.
“확실한 건 두 팀이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스펠을 아끼고 다음 교전까지 염두에 두는 게 중요합니다! 이거 바로 전령 주도권까지 쭉 이어지는 긴 싸움이 될 수 있어요!”
게임을 하는 선수들은 해설진의 말을 들을 수 없다.
잡담이 사라지고.
고요가 찾아온다.
“레디.”
항상 모든 선수가 집중력을 최대로 올릴 수는 없다.
작년까지의 이 팀원들이 그랬다.
“나도 레디.”
어떤 팀은 단 한 순간도 보이스가 비지 않는 경우도 있다.
긴장 때문이다.
“응. 레디.”
하지만 FWX에서의 1년의 세월은.
우리를 동일한 집중의 바다로 빠뜨리기에 충분한 훈련 시간이었다.
1만시간은 되지 않더라도, 그걸 따라가고 있는 자들과 내가 있다.
이건 팀이 함께했던 퀀텀 점프.
“주장?”
“맡겨.”
“겟, 셋.”
팀원들이 연결된 보이스에서 느껴지는 건 다만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의 냄새.
그 때문에 자기가 믿고 있는 것을 행하는 수밖에.
“고.”
떨어지는 명령과 동시에 방아쇠가 당겨지는 것처럼 김예성이 쏘아져 나간다.
“르블란 선진입!”
“견제?!”
미처 그 그림자가 사라지기도 전에.
끼이이, 묵직한 건틀릿을 차징.
바로 따라 들어가는 건 나다.
“이번에는 아닙니다!”
“여태까지 몸을 숨겼던 권건의 뱌이 등장!”
정적을 삼켜내고.
“진영, 진영, 진영, 방어 진영 들어갑니다!”
“애시에 딩거가 영역 싸움에서..!”
즉각 공간 뛰어넘기.
“점멸, 점멸과 함께 금고 부수기이이이이이이이!”
“미라쥬의 탈리아!”
주먹의 각도를 살짝 튼다.
코앞에서 적을 비켜 맞추면 밀려나는 게 아니라 끌어당겨진다.
“순식간에 공격 들어갑니다!”
“세주의 개입 흘려내면서!”
“뱌이가 받아냅니다!”
그리고 그 첫 타격으로 패시브를 발동.
“바로 따라 들어온 서폿 투 서폿 견제! 클래스의 침묵!”
- 모처럼이니까 딩거란 녀석을 붙잡아둬 볼까나?
- 어머니! 스게에에에www
- 너희도 좀 닥쳐
- 아아ㅡ 체크메이트. 이것이 “클래스메이트” 다.
- 스타폴은 거리가 가까울수록 어떤 수학의 쵸-전자포ww
- ? 존나 무슨 말씀데시타?
- 어이어이 일코하라구
- 미친 클래스단 새기들;;
“딩거가 따라 들어가기 곤란한 상황! 순간적으로 세주 붕 뜹니다!”
아직 미라쥬의 우선순위는 용.
“전부 다 들어올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나요!”
“탈리아, 권건이랑 너무 가까워요! 숨 닿을 거리! 뒤로 확 빠지면서 밀어내려고 하는데..!”
“뱌이가 무빙으로 완전 무시! 이거 반응 속도 이거 맞아? 뭐 하는 선수에요? 미쳤어요?”
“라온과 권건이 집요하게 노립니다, 사슬, 사슬, 사슬..!”
타앙.
“묶입니다!”
빠르게 타격을 쑤셔 넣으며 폭발 보호막의 쿨을 돌린다.
눈은 재빨리 다음 상황을 훑는다.
“위기! 벨 선수 위기! 위기! 이거 르블란은 풀 컨디션! 집에 다녀왔거든요!”
“어머니 저는 풀피입니다! 다른 아들 챙기세요!”
“어! 안 그래도 궁은 없어! 알아서 살아 남으렴!”
- 오까ㅡ상 다메욧
- ㄷㅊ
“잠깐만요, 진영에서 유리했어도 숫자가 차이 나면 곤란해져요!”
“라온이 추격을 이어 나가면서 양측 미드 전장 이탈!”
“혹시 뱌이가 Q선마가 아닌가요?”
미라쥬의 바텀이 나비꼴로 돌아서며 진영을 바꾼다.
그들도 바보가 아니니 알고 있다.
우리가 그들의 영역 외곽에서 싸우고 있다는걸.
남은 건 용 아래쪽을 단단히 틀어막은 미라쥬의 정글 바텀과 동일한 우리.
“미라쥬, 선택해야죠?”
뭘 선택하고 싶을까?
이제 위치 장악에서는 적이 유리하다.
르블란은 잠시 전장에서 이탈.
내 스킬과 점멸이 먼저 빠졌다.
당장은 우리의 스펠이 부족하다.
해볼 만하게 느껴질 것이다.
“용, 용, 용, 체력! 용 체력! 3분의 1지점 돌파!”
용 둥지를 중심으로 진영이 둥글게 돈다.
몸을 낮춘다.
언덕 위에서 내려올 우리 바텀을 막아서기 위해 적이 설치해둔 딩거 포탑 근처로 내 위치를 옮긴다.
- 건이 형이 용을 포기해?
- 저걸 버려?
- 형 변했어?
- 들어가! 들어가! 들어가! 들어가!
- 저걸 어캐 들어가 ㅄ들아
미라쥬가 용만 먹고 싶을까?
과연 FWX 정글러를 박살 내고 싶은 욕구를 참을 수 있을 것인가?
하나.
둘.
셋.
“대비하세요.”
제법 멀리서 김예성의 퍼블 알림이 뜨는 그 순간.
“퍼블, 퍼블, 퍼어어어어어블! 권건과 라온이 선취점을 터뜨렸습니다!”
“F-W-X!”
“하지만 아직 대치 상황, 지금 당장 어떤 이득이 오는 건 아니거든요! 르블란은 전장까지 상당히 거리가 있습니다!”
팽팽한 긴장감이 협곡을 메운다.
살짝 호흡을 띄웠다가.
이 정도면 됐다는 것처럼.
짐승들에게 긴장을 푼 등을 보인다.
이걸 위해 여태까지 꼬아 왔다.
들어갈 걸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지 않을 걸 들어가면서.
“미라쥬! 미라쥬의 세주, 돌입! 돌입, 돌입, 돌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입!”
사냥하는 짐승은 뒤돌아선 약한 적에게 자비를 보이지 않는다.
“점멸 맹습!”
사실 오랜 기간 세주를 잡아 온 만큼 충분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 챔피언은 큰 덩치를 통해 병목 현상을 만드는 데에 최적화되어 있는 챔피언이라는 것.
그래서 더욱 미라쥬가 욕심을 버리지 못하리라는 것도.
“이거 못..!”
모든 스킬을 다 피하고 다 맞춘다?
어리석은 이야기다.
오히려 이럴 때야말로 생각을 틀어야 한다.
자.
재간을 부려보자.
정확하게 적의 돌격보다 반 박자 빠르게 돌아선다.
한없이 느려진 시간 속.
반의반 숨.
바로 지금, 파앙.
작은 포탑을 향해 끈질긴 힘을 쏟아낸다.
“어..!”
“피할 수가!”
넓은 면적의 세주가 번쩍 들이닥친 순간.
좁은 길목에 선 내게 한 호흡으로 퍼부어지는 집중 사격과 기절 수류탄.
“점사!”
빠지면 섭섭할까 봐 따라 들어오는 미사일까지.
반드시 나를 여기서 끊겠다는 각오가 서린 공격.
“점사?”
하지만 그 각오는 곧 의문으로.
“어어어어어어어어! 어어어어어어?”
또 비명으로 바뀐다.
“왜? 왜 데미지가?”
- ????
- ?? 딜 무엇? 권건 왜 안 뒤짐? 버그임?
- 존나 딜 너무 안 박혔잖아?? 애시 딩거 빵딜?
- 버그네 ㅇㅅㅇ 저기서 뱌이 패시브가 왜 터짐;
- 패시브가 떴었어? 난 못 봤는데?
- 뱌이 패시브가 먼데 십덕들아;
“그러니까 이게!”
길었던 용 앞의 강.
도개교가 내려오는 것처럼 길이 훤히 열린다.
“뱌이 체력이 왜? 왜 줄지를 않아?”
“갓 잡은 활어처럼 신선도 최강!"
“이거 무슨 상황이에요? 이거어어어어어어! 너덜! 너덜! 해졌어야 하는 건데!”
- 패시브 보호막 아님? 말파처럼
- 그게 뭐 대단한 건데;
- 조건부 아님? 걍 생기는 거 아니고
- 세주 CC가 선이잖아
- ? 뭔솔
- 소랴카가 힐 해줬겠지
- 오까ㅡ상 사스가 클래스다욧
“소랴카?”
“저렙 소랴카 힐량이 이 정도였으면 나 앞으로 원챔 할래!”
“어머니!”
“할렐루야, 이거 그거 아니야! 옵저버님의 마우스를 봐! 그의 스킬 창을 봐! 헤이! 떼껄룩! 이거 설마?”
- 아 오까상 아니야?
- 응 아니야 힐량 절대 저만큼 안 나와
- 이 새기들 클래스 팬이면서 소랴카 손도 안 대봤냐?
- 힝; 들킴;
길은 만들면 된다.
“지금, 이거, 이거, 6레벨 전 교전을 만들어 낸 게!”
앞장서서 주먹을 휘두른다.
“당연히! 당연히 뱌이라는 챔피언이 ‘스킬을 못 맞추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닌 만큼.. Q랑 점멸까지 다 소진하고 궁극기도 없는 상태에서는 할 일이 없다는 게 학계의 정설인데! ”
- 어어 우리가 입증합니다
- 명예퇴직 인정합니다
- 존나 부나방 챔피언
- 챔프 삭제 좀
“근데 지금 이렇게 패시브 터뜨리면서 진입해주면 순간적으로는, 특히 이런 초반에는 상당히 강력한 탱커의 면모를 보여줄 수 있는 거거든요? 르블란 오고 있거든요?”
팔을 길게 뻗어, 앞으로 휘두른다.
“숨 좀 쉬고 말하세요! 뱌이 패시브는 조건부인 대신에 상당히 성능이 좋습니다! LOS 국민 탱커 말파의 화강암 방패가 최대 체력 9%의 보호막을 생성한다면 뱌이는 13%! 준수함을 뛰어넘어 1.44배의..”
“댁도 좀 쉬어요! 여기 쇼미야?”
순간적으로 아직 채 6레벨이 되지 못한 상대의 스킬을 빨아들인다.
“그러니까 어쨌든! 성능은 대단하지만 조건이 중요한데요! 최소한 이번 버전의 조건은..”
“뱌이가!”
“‘스킬’을!”
“‘적에게 맞추면’!”
“‘3초 동안’ 보호막이 생깁니다!”
- ????? 스킬?
- Q 없었고 W는 패시브고 E는 평타 판정인데 R 없었음 버그 맞는 것 같음
“그러니까 그 스킬이 어디에 있는 거냐면..!”
- 어쨌든 권건이 세주한테 먼저 맞고 시작했잖아??? 그럼 못 터뜨리는 거잖아
- 그래서 저게 왜 터졌냐고
- 스킬을 맞췄겠지!!
- 스킬이 없잖아!
- 맞출 기회도 없었잖아!
- 맞췄겠지!
- 니가 봤어?
- 아니 아무것도 못 봤어; 이게 심검 뭐 그런 거냐?
우르르, 내가 내린 도개교를 타고 여태 개입을 최소화하던 바텀 두 사람이 뛰쳐나오기 시작한다.
순식간에 우위가 뒤바뀐다.
물어도 타격이 없는 상대를 보면 짐승은 본능적으로 공포에 질리게 되어 있다.
포식자도 상위 포식자 앞에서는 포식 행동을 할 수 없는 법이거든.
그리고 그 순간.
“퍼즈!”
“퍼즈 걸렸습니다!”
퍼즈?
퍼즈라면 내가 전문가를 하나 아는데.
룰루퐁인지 루라퐁인지.
뭐였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