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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게이머, 그만두고 싶습니다-238화 (238/326)

238화. 그리고

미라쥬는 틀림없이 포식자다.

우리가 길들이기를 시도하고는 있지만, 원체 야생성이 강한 팀이다.

작년까지 상어에 비유되던 이 팀은 구심점이 되던 탑이 은퇴하면서 뭍으로 올라왔다.

그러니까..

그래, 늑대.

지금 미라쥬는 야생을 간직한 늑대쯤 되는 셈이다.

우리는 그런 미라쥬와 제법 가까운 스탠스를 취하고 있다.

굳이 미라쥬는 좋은 팀이라는 언급까지 하면서.

인간이 늑대를 길들일 수 있을까?

새끼 때부터 거둬서 키우면?

아니면 죽을 것 같은 목숨을 살려주면?

아니.

그건 어떤 방법을 사용하더라도 불가능하다.

일견 가까워진 것처럼 보일 수는 있긴 하겠지만, 결국 늑대는 늑대다.

언제든지 돌아서서 사람을 물 수 있는 짐승.

김예성이 말한 개와 인간론 같은 느낌과는 좀 다르지만 우리도 팀 대 팀이다.

결코 ‘진짜 친구’는 될 수 없다.

“개시.”

무탈하게 풀캠을 마무리한다.

내가 상대보다 빠르다.

바텀에서 확인된 와드 위치를 향해 이동하며 콜을 남긴다.

“1차 위치로 이동.”

“탑 위치 사수 중.”

“미드 마나 관리 중.”

상대 바텀은 모두가 예상할 수 있는 것처럼.

압박을 이어 나간다.

애시와 딩거다.

“바텀은 개 토나오는 중.”

압박에, 압박에 의한, 압박을 위한 픽이다.

실제로도 아무 개입이 없다면 바텀에서는 계속해서 손실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그럼 뭘 바랄까?

당연히 정글러인 내 바텀 출석을 예상하고, 바랄 거다.

욕심을 낸다면 직선형인 내 챔피언을 쭉 빨아들이며 퍼블까지 원할 것이고.

욕심을 많이 버렸다면 내 스펠을 빼거나 시간을 벌기를 바랄 거다.

그 시간 동안 상대 정글 세주는 뭘 하고 싶을까?

바텀에서 날 맞서 3 대 3으로 상대하고 싶을까?

이게 첫 번째 세트였다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자.

생각해보자.

이 짐승의 생각을 이해하면서.

더욱 짐승이 되자.

“소규모 교전. 끊어먹기.”

우리가 선 곳은 원형의 경기장.

수많은 이들이 환호하는 콜로세움.

여기서 짐승을 인간으로 상대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짐승은 어디까지나 짐승으로.

“오케이. 소규모 교전. 그런데 어떻게? 바텀 갱?”

“아뇨. 제가 만들게요.”

“믿어.”

지상은 이제 백수의 왕이 된 우리 FWX가 지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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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짝 보였죠? 살짝 보였습니다?”

“이거 눈치채나요, 미라쥬, 눈치채나요?”

“바텀 쪽 쭉 돌아들어 갈 수 있는 거거든요? 애시 딩거 바로 반응합니다! 뒤로 쭉 빠져요!”

바텀을 찌르는 기세로 화끈하게 움직이던 권건이 사라졌다.

“어?”

와드를 확인하면서.

“바로 미드 향합니다?”

눈을 가린 뒤에.

“잠깐만요, 이거 콜 들어갔죠?”

순간 교란.

“미라쥬 입장에서는 이거 계속 바텀 들어오면 최소 스펠 두 개 뺄 수 있거든요?”

“근데 권건 발길 돌렸어요! 그대로 미드 향합니다!”

미라쥬의 정글, 이인혁이 먹어 치운 텅 빈 캠프를 체크하며 깊숙한 정글 루트를 타고 오르막길을 따라 올라간다.

“미라쥬 동시에 뺍니다!”

“탈리아, 반보 물러납니다! 지금 권건이 확실히 바텀으로 갔는지 알기 어려운 상태거든요!”

“이러면 애시 딩거도 아까처럼 깊숙한 라인 유지하기 어려워요!”

- 어디 찌를 건데?

- 미드? 바텀?

- 아 빨리 선택해줘 현기증 난단 말이야

- 이때는 바텀 가야 하는 거 아님?

- 정글은 필수! 갱킹은 선택!

“반대로 FWX에서는 피요라가 발을 살짝, 살짝 뒤로 옮기고 있죠? 이거 알고 있나요? 알고 있는 것 같죠? 이거 되게 애매한 거리예요! 세주가 숨어있..!”

그리고 그사이.

“아, 이거! 마음 급해진 레넥이! 점멸 사용해보지만 절묘하게 빠져나갑니다, 차아아아아아니!”

“진짜 깔끔한 점멸 교환!”

“들어가? 말아? 아니? 이거 그냥 오지 마! 탑 갱의 딜레마!”

“근데 이러면 이제 레넥 대 피요라는 손 싸움 구도로 굳어지거든요! 점멸 타이밍은 서로 체크할 수 있고! 너 점멸 없어? 그럼 나도 없어! 점멸 있어? 그럼 나도 있네!”

- 아니 미쳤어 텐? 차니 상대 가능해?

- 앗..아아..

- 이 새기 진짜 쓰레기라니까 아 제발 사우전드 돌아와요 미라쥬로

- 그 형 요새 잘 살더라 FWX 방송에도 나오고

- 배신자쉑;

“여러 번 말씀드리는 것 같지만, 사실 정글 입장에서는 저렙에 탑 갱가는 거 정말 싫거든요!”

“이야, 너무나 맞는 말!”

“세주는 아무것도 안 하고 지켜보기만 했지만 손해가 큽니다!”

“무슨 손해죠?”

“일단 탑 심기가 불편해져요! 니가 와서 내가 바로 점멸 썼는데 왜 너는 같이 안 썼어? 놓쳤잖아!”

“거참 예민하시네!”

“사실 이건 진담 반 농담 반이고요. 방금 미라쥬 정글 모습이 드러나면서 두 팀 모두 정글의 위치를 각각 확인하고 첫 턴을 사용한 셈입니다.”

“2세트 같은 그림을 노려봤던 것 같은데, 차니가 극도로 경계하면서 이거 시간 낭비하게 됩니다!”

- 맞아 2세트에는 차니가 죽어줬는데 시불

- 쟤도 학습 능력이 있어

- 있어? 진짜?

- 있긴 함 리얼루

- 누가 말해준 건 아닐까?

- 그게 맞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사실상 누가 조종한다는 게 학계의 정설

“그럼 권건은?”

필드에 바짝 긴장감이 돈다.

특히 미라쥬의 하체가 그렇다.

“아직 권건은 자신을 완전히 드러내지 않은 상태에서 빠르게 귀환을 선택합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던 모호한 선택.

“탑 갱 실패한 미라쥬 정글 테러 선수는 미드 백업!”

“혹시 모르는 거라고 판단한 것 같죠? 잠시 지켜봅니다.”

“아, 이렇게 되면 손해인데요. 권건 벌써 집에 갔거든요?”

바텀 아니면 미드로 들어올 것이라는 확신이 잠시 의식을 흩트린다.

“바류스라 지금 라인 정리 상당히 깔끔하게 이뤄지고 있거든요? 아주 약간의 틈만 있으면 됐어요!”

“미라쥬 바텀이 갱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아예 이른 시기 귀환 타이밍을 잡고 있습니다!”

“이러면 어떻게 되냐구요? 아마 원하는 만큼의 압박을 충분히 하지는 못했을 겁니다!”

“여전히 권건은 소진한 스펠이 없는 상태고요!”

변한 건 없었다.

그렇지만 모든 일은 상대가 기대하지 않았던 것을 행할 때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한다.

기본의 패턴과 다르다는 게 그렇다.

카페에 가서 음료를 주문할 때.

대부분의 사람은 응당한 절차를 상상한다.

주문받은 직원 혹은 제조 전담 직원이 음료를 제조한다.

완성된 음료를 올려놓고 메뉴와 주문자를 호명한다.

그리고 주문자는 음료를 수령한다.

아주 자연스럽고 간단하다.

하지만 흔하지 않은 경우가 있다.

주문하고 앉아서 음료 수령을 기다리는데.

호명을 듣고 카운터로 가보니 재료가 모두 떨어져 해당 음료를 더 이상 제조할 수 없다는 말이 돌아왔을 때.

마시고 싶은 음료를 이미 골라왔던 목마른 주문자는 당황한다.

그냥 이 카페를 나서서 5km는 떨어진 다른 카페로 가야 할지.

아니면 원하지 않는 다른 음료를 주문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한다.

“별사건 없이 다시 한번 소강상태 이어집니다.. 다만, 지금 미드에서 벨 선수가 상당히 힘겨워하고 있거든요?”

“르블란이 물약을 다 사용하지 않고도 훌륭하게 압박을 이어 나가고 있습니다. 아직 막잔 남았죠? 게다가 세주와 탈리아로 르블란을 한 번에 잡아내기가 쉽지 않거든요? 그 사실을 충분히 알고 있는 라온 선수!”

“짠해! 넥서스로 돌아가기 전에 막잔, 지겨운 이 협곡에 대한 막잔!”

- 싫은 놈들 안주 삼아 또 막잔

- 맨날 막잔 하자면서 끝이 안 보이는 막잔!

- 라온 저 새기 포션 언제 떨어지는데?

- 첫차 올 때쯤

불편한 상황.

“스펠이라도 빼보려고 하는 순간!”

“미드 쪽에 얼굴을 내비쳤던 권건 선수가..!”

하지만 이렇다 할 결과가 없다.

“지나갑니다!”

“예에! 저, 여기 좀 지나가겠습니다! 어휴! 불편하시죠? 제가 빨리빨리 좀 지나갈게요, 비키십쇼, 예?”

“훌륭하게 귀환 타이밍만 잡아내고 빠집니다!”

“이런 게 진짜 가치라니까요? 권건은 갱갱갱으로 끝나는 선수가 아니에요, 이 선수는!”

다시 한번 주문했지만 이번에도 돌아온 대답은 ‘정말 송구하지만 그 음료의 재료 역시 다 떨어졌다, 혹시 다른 음료를 주문하시는 것은 어떠시겠냐’는 정중한 말.

주문자는 다시 한번 고민한다.

시간이 늦었다.

직원은 정중하다.

다른 선택지는 없어 보인다.

그럼 계속해서 물어보는 수밖에 없다.

이 음료는 되겠냐, 저 음료는 가능하겠냐.

“이거, 권건! 뚜렷하게 바텀 방향!”

“대응합니까? 대응해요? 어?”

“아니, 아니? 바텀 가지 않습니다. 용? 이른 타이밍에 솔로 용? 아닙니다! 용 앞뒤로 시야 잡고 그대로 빠져나갑니다! 집요하게 정글링!”

하지만 또다시 거절당한다.

“클래스 선수가 충분히 시야 백업해주고, 세자 선수 라인 잘 받아먹고 있습니다! 하체 쪽으로 힘이 충분히 실려있는 상황이거든요! 미드에서 밀리고 있는 만큼 아까만큼 압박을 편하게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 뭐지? 이럴 거면 애시딩거 왜 뽑았어?

- 이렇게 약한 픽이었나? 딩거 별거 없네?

- 나 이해를 못하겠네? 왜 저렇게 쫄아?

- 누가 설명 좀 해줘 봐;;; 미라쥬 뭐가 저렇게 겁나?

“미라쥬 바텀 조합이 절대 쉬운 픽이 아니라는 소리를 듣는 게, 밀어붙이기 시작하면 끝도 없이 밀어붙일 수 있지만 말리기 시작하면 이불처럼 말려버리는 게 애딩이거든요?”

거절당하고, 또 거절당한다.

“지금 조심성이 나쁠 게 없습니다. 더 망하지 않는 방법이긴 해요. 다만, 이렇게 되면..”

“세자 선수 집중력이 요즘 들어 거의 최고가 아니냐, 이런 말 많이 나오거든요? 그리고 클래스 선수의 탄탄한 소랴카 플레이가 손실을 최소화하고 있습니다!”

- 미드가 바로 올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저따위로 함 대체????

- 고구미 시벌 존나 공격적인 줄 알았는데 게임 너무 노잼으로하네

- 멍청이들;; 꼭 킬이 터져야 명품 겜인줄 알아?

- 내가 킬을 보고 싶어

- 사실 나도 그렇긴 해

- 기다려라.. 그들은 절대 우리를 배신하지 않는다..

“지금 애시의 매가 날아간 위치가 항상 바텀 방향이죠? 방금은 직선 갱 견제 들어갔습니다! 허탕이었어요! 미라쥬는 그만큼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습니다! 권건이 들어올 것 같으면서도 들어오지를 않고 있어요!”

“들어올 만도 한데! 들어올 줄 알았는데!”

“그럼 선택해야죠? 이 불편함을 감수하고 계속해서 바텀 픽의 의미를 살리기 위해 밀어붙일지, 아니면 과감하게 딩거를 로밍 돌릴지!”

- 어떻게 좀 해봐 진짜!!!!

- 권건 쟤 아무것도 안 하고 있잖아 시1발롬들아!

- 미라쥬!!!! 진짜 내가 이기라고는 안 할게 한 세트만이라도 이겨 제발 좀!!

- 스톰한테 보여줘야 할 거 아니냐고!!!

- 머하냐고 진짜!!!!!!!!!!!!!

그러다 보면 화가 나고 언성이 높아진다.

도대체 이 카페에서 되는 음료가 뭡니까?

말을 해줘야 알 거 아닙니까?

참을성이 뛰어난 사람도 이런 반복되는 거절 아래에 분통을 터뜨리기 마련.

조급하고 폭압적인 미라쥬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래서 짐승.

“의미 부여하지 말라고 했지.”

“형도 존나 의미 부여하고 있지 않음?”

“내가 언제?”

“아까 맵에 떨어지는 낙엽이랑 흔들리는 부쉬 이펙트에 존나 호들갑 떠는 거 다 봤음.”

“원래 거기 숨어들어 가면 부쉬 출렁이는거임.”

“닥쳐, 성북동 주문 할아범. 풀 스택 쵸가스가 숨어있어도 똑같은 게 부쉬다.”

“싸가지 없는 놈..”

예측은 빗나가고.

거절이 계속되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는 상황에서 작은 흔들림이 시작된다.

“용 볼래?”

휘둘리는 판단이 나온다.

“어. 차라리 그게 낫겠다.”

“우리 바텀 조합 자리만 잡으면 훨씬 유리해. 작업 들어가자.”

“확인.”

노림수.

짐승이라고 불리던 미라쥬를 향해.

FWX는 집요한 자세로 더욱 몸을 낮춘 채.

그들을 함정으로 끌어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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