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화. 견제 정책
“와. 이거 진짜 편하다.”
선수 중 가장 경력이 긴 곽지운이 즐거운 듯이 고개를 까딱거렸다.
오늘의 경기는 최대 5세트.
분위기 적응을 위해 일찌감치 대기실에 자리한 선수들이 잡담을 나눴다.
“회전 초밥 같다.”
물론 5세트를 꽉 채울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웬 회전 초밥?”
“가만히 있으면 빙글빙글 돌아서 내가 고르는 것만 먹을 수 있네. 띵똥! 광주 미라쥬, 주문!”
“오. 초밥 시켜 먹을까? 우리 밥 시켰어요?”
초절정 긍정 표현에 박진현 감독은 머리를 흔들었다.
“얘들아, 오늘 죽 먹기로 했잖아.. 소화 잘되게..”
여기서 자기만 긴장한 것 같아서다.
“형, 회전 초밥 표현 지렸다.”
이유찬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따봉을 올렸고.
“기다린 아이에게는 마시멜로가 여러 개 주어진다고 하지.”
김예성은 태연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서서 슬쩍 웃고 있었다.
이제 한결 성숙하고 단단해진 김예성은 예의 그 냉혹한 미드의 얼굴이다.
“나. 궁금한 거. 있는데.”
다만 유상준이 미심쩍은 표정을 지으며 두리번거렸다.
“아직. 트릭스터. 안 고른 거. 이해. 안돼.”
그리고 그 시선은 권건을 향했다.
오늘 경기는 플레이오프 2라운드.
FWX와 미라쥬의 경기.
FWX는 미라쥬를 상대로 골랐고, 스톰에게 트릭스터를 배정했다.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회의를 통해 공유됐지만.
함께 보낸 시간이 상대적으로 긴 선수들이 많아 자세히 설명되지 않았던 것들도 있었다.
그래서 유상준은 정확하게 이 팀이 미라쥬를 지명한 것에 대해 일말의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다.
유상준 생각에 미라쥬는 수요일에 경기를 치렀기 때문에 목요일과 금요일, 이틀이나 준비할 시간이 있었다.
이틀은 48시간이고 2,880분이며 그 시간에 일정을 최대한 메운다면 스크림으로 40게임 정도를 할 수 있다.
혹은 퀵 아웃 리겜으로 더 많이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불리하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그는 모종의 이유로 트릭스터에 가고 싶어 했었던 만큼이나 트릭스터라는 팀에 대해 꽤 많은 것을 파악하고 있었다.
트릭스터는 밸런스를 중시하는 강팀이다.
심지어 귀환자 미드를 중심으로 코어를 더욱 단단하게 올렸다.
미드 중심의 스톰은 트릭스터에게 약한 면이 있다.
그래서 왕좌를 빼앗겼던 거니까.
내일 경기를 치르는 두 팀 경기의 승패 예측이 쉽지 않다.
하지만 트릭스터는 휘청거릴지언정 후반으로 갈수록 점점 단단해지는 성향을 보였고 결코 시간을 많이 주면 안 되는 팀이다.
“바로. 삼켜버리면. 안돼?”
지친 사냥감을 굳이 놓아줄 필요가 없다는 뱀의 시선이다.
“난 뭐든지 잘 먹으니까 상관없어. 미라쥬도 맛있어 보이는데. 희종이 형이 이번에는 진짜 은퇴할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그 형 제삿밥으로 메이지 써볼까?”
잡식성의 여우, 미드가 대답하고.
“야, 스톰이 얼마나 놀랐을까 상상하면 너무 웃기지 않아? 골탕 먹인 거잖아! 이게 웬 트릭스터야~ 개황당. 준비해놓은 거 다 뒤집어엎어 버리기!”
영악하고 심술 맞은 너구리, 서포터가 대답했다.
“가지고 놀다가 밟아 죽이는 게 더 짜릿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음? 난 트릭스터가 올라왔으면 좋겠음. 똑같은 영역에서 물어 죽이게. 걔네 홈에서.”
난폭한 사자 같은 탑도 공격성을 드러냈다.
“이유는 많지.”
그리고 드디어 만물의 영장이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일단 미라쥬는 그렇게 스크림을 많이 할 수 있는 팀이 아니야.”
유상준은 마음을 읽힌 것 같아서 흠칫했다.
그의 시간 기준은 오로지 게임을 몇 판 할 수 있는가.
그의 장소 선정 기준은 게임 가능 여부.
그의 금전 개념의 기준은 스킨 가격.
“다른 팀들과 사이가 별로 좋지 않거든. 주로 해외 리그와의 스크림이겠지.”
권건은 대기실에 앉아있는 선수들 사이를 휙 지나며 이유찬 뒤에 섰다.
“어!”
“넌 진정 좀 해.”
툭, 툭.
감정이 격앙된 이유찬의 어깨에 가벼운 두들김이 전해진다.
예전에 그가 큰 무대에서 긴장감을 가졌다면.
지금은 긴장보다는 흥분에 가까운 감정이다.
한없이 침착한 권건의 태도.
탑은 훈련받은 대로 천천히 코로 호흡하며 기분을 가라앉혔다.
멘탈 전문 김한빛 코치가 조용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모든 시선이 따라온다.
“공개 스크림 데이터 거의 없지 않았나? 왜 해외 스크림을 확신해?”
김예성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질문을 던졌다.
“자. 이제 남은 팀은 사실상 네 팀이야.”
권건이 천천히 손가락 네 개를 폈다가 접었다.
FWX, 스톰, 미라쥬, 트릭스터.
“미라쥬는 스톰과 관계가 급격히 나빠졌어. 스톰은 오랜 시간 이 리그를 지배했었던 팀이고. 과거 월챔 우승 경력도 가진 팀이야. 소위 명문 팀.”
지체 없이 말이 이어진다.
“스톰의 김지훈 감독은 고집이 세지만 이전 세대 이스포츠 판에서부터 계속 수명을 이어왔던 사람. 인맥이 좁다고 볼 수는 없어. 스크림은 다양한 이해관계로 이뤄지지만 인맥이 차지하는 부분이 상당해.”
부드러운 제스쳐와 끊임없는 말.
“그러니까 스톰의 눈 밖에 나고 싶지 않은 팀들이 존재할 거라는 뜻이지. 시즌이 이번 시즌만 있는 건 아니니까.”
즉석에서 꼼꼼하게 이뤄지는 PT.
“반면 미라쥬는 탑 은퇴 후 스크림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었어. 원체 팀의 체급으로 찍어누르던 상어 같은 팀이라 훈련 포지션이 애매해졌거든. 스크림 상대도 얻어갈 게 있어야 하니까. 심지어 네 팀을 제외하고 탈락한 팀들이 휴가를 반납하고도 과연? 굳이?”
“하긴.”
“걔네랑 하면 좀. 그렇지.”
그 구성력에 박 감독 역시 눈썹을 들어 올렸다.
이런 사정까지 알고 있었어?
“그럼 방금 말한 두 가지만으로도 그렇지만. 우리한테 스크림 요청이 집중됐던 것까지 생각하면.”
답이 나온다.
“미라쥬의 스크림 상대는 주로 중국. 지금 와서 미라쥬가 내세울 수 있는 무기는 여전히 강한 체급에 불과하고, 중국과의 스크림은 결국 체급 강화용. 오늘 우리가 힘을 흩어내는 조합을 짜온 이유도 그래서지.”
“오.”
“아.”
“그렇게 깊은 뜻이?”
이유찬이 탑 전담 코치인 문백산을 돌아봤지만 문 코치는 눈만 끔뻑이며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나도 질문.”
어느새 오늘 경기도 잊고 이 PT에 몰입한 박 감독이 손을 들었다.
“그럼 미라쥬가 국내에서는 누구랑 스크림을 했을 것 같은지 의견 줄래?”
그 진지한 표정에 권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 팀은 거의 없었겠지만..”
부드러운 태도의 사람에게는 한없이 부드러운 태도로.
“최근 소외받았던 트릭스터, 그리고 그나마 관계가 좋았던 유니버스가 시즌 아웃 후 한 번 쯤 도움을 줬을 수 있고. 그래서 두 팀 예상합니다. 그리고 우리한테 꾸준히 요청 넣었는데 감독님이 거의 반려하셨을 테고요.”
“음..”
“지금은 LKL의 주가가 오른 시기다 보니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해외 스크림을 돌릴 수밖에 없죠.”
“그건.. 어떻게..”
잠시 고개를 휙휙 저은 박 감독이 의자에 풀썩 앉았다.
이전에 미라쥬를 지목하자고 의견을 내놓을 때도 그랬지만 훨씬 폭넓은 시야다.
몇 가지는 가정일 수 있겠지만 권건은 이 조각들을 충분히 의미 있는 가설로 완성했고, 감독 자리로 들어오는 정보에 마지막 확신을 붙이는 말이었다.
“얘 그냥 감독시킬까?”
“형님, 바지 감독 자리 유지하세요. 저도 코치 자리 포기 안 할 테니까.”
“그래. 선글라스 끼고 댑이나 해야겠다.”
“좋은 생각입니다.”
박 감독과 김 코치가 대화하는 사이.
기존 데이터를 훨씬 더 강화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든 최수철 코치가 급히 메모를 휘갈겨 적는다.
“교묘하네. 그래서 미라쥬가 우리한테 휘둘렸구나? 인터뷰에서도 납작 엎드리더라니.”
뭔가 깨달은 김예성이 눈을 가늘게 떴다.
“미라쥬에게 우리는 잘 보여야 할 상대지.”
그 말을 받은 권건이 왼쪽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와.. 개무섭네.”
“난 미라쥬랑 꽤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나도. 봉구가 은퇴한 사우전드 선수랑 합방도 하던데.”
이제는 미라쥬 선수들과 눈인사도 나누는 FWX 선수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친하지.”
권건이 순진한 선수들 사이를 가로지르며 다시 걸으며 김예성에게 시선을 건넸다.
“아하?”
보통 여우가 아니라 불여우에 가까운 김예성이 쌕 웃었다.
“인간과 개는 친하지만 다른 존재니까?”
그들의 미드는 여전히 팔짱을 낀 채였다.
어쩐지 그가 웃는 모습은 권건을 닮아 있었지만 훨씬 냉랭했다.
순해 빠진 사람들 사이에는 단호하고 정치적인 사람도 있어야 하는 법이다.
“와. 예성이 쟤 말하는 것 좀 봐. 표현 보소? 막 단정 짓네? 독하다. 독해.”
“너 강아지 안 키우지? 말넘심.. 선생님! 쟤 헌혈 못해요! 찔러도 피가 안 나와!”
“우우우우! 개는 사람의 친구입니다!”
“지금 그 말 한 거 아니야? 친구이긴 하다고?”
“어? 그런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권건이 다시 자리에 앉자 순식간에 애견인들의 혼란스러운 비난이 김예성에게 쏟아지며 분위기가 환기됐다.
각자 생각을 정리할 사람들은 잠시 침묵의 시간을 가졌고.
“근데 우리집 뽀삐 사진 볼래?”
“지운이 형네 강아지 키워? 나 볼래.”
시류에 큰 관심이 없는 선수들은 잡담 시간을 가졌다.
“형 혹시 얘 돼지임?”
이유찬이나.
“아니야. 시츄야.”
“깍지야, 이 돼지 이름이 시츄야?”
곽지운, 최은호 같은 선수가 그랬다.
“이름은 뽀삐고 견종이 시츄라고.”
“그럼 말도 알아듣냐?”
“아니, 귀여워.”
“앉아, 엎드려 이런 거 하냐고.”
“귀여워.”
“니가 부르면 와?”
“귀여워.”
“?”
“내가 시츄를 좀 아는데. 시츄는.. 그냥 잘 먹고 똥 잘 싸고 산책 많이 하고 건강하면 됨.”
“역시 동물 박사 유찬이. 우리 뽀삐 그거 다 잘해. 천재견이야.”
“어? 이유찬 너 혹시 시츄였냐?”
“으르르릉.. 왈! 왈! 왈!”
“여기 누가 개를 버리고 간 것 같아요.. 으악! 이 미친놈 진짜 물어!”
그때 한참 생각에 잠겨있던 유상준이 권건 근처로 다가가 고집스럽게 말문을 다시 열었다.
“이해. 했어. 근데.”
유상준은 스스로 말하면서도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여전히. 하루. 하루 차이 남. 손해.”
왜 자신이 자꾸 이런 작은 손해 이야기를 꺼내는지 파악할 수가 없다.
“하루. 하루 차이. 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권건이 이유찬에게 했던 것과 비슷하게 유상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아니. 하루는 정말 짧은 시간이야. 정말 짧은.”
쌓아온 시간이 다른 선수들과는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긴 선수가.
"상대의 하루는 우리의 1년을 바꾸지 못해."
아주 확고하게 말했다.
유상준은 습관적으로 안경을 벗어 옷자락에 닦으며 눈을 피했다.
“어쨌든. 트릭스터를..”
“트릭스터를 얼른 쓰러뜨리고 싶지?”
그리고 드디어 권건에게 정곡을 찔린다.
“너 불안하구나.”
유상준은 안경만 닦았다.
“난. 그런. 정치. 몰라.”
그 모습을 보던 김예성이 묵묵히 그를 위해 준비한 안경 닦는 천을 건네며 짧게 첨언했다.
“정치가 아니고 정책이야. 너도 이제 마음 고쳐 먹어. 너도 FWX니까.”
어딘지 모르게 예전의 자신을 보는 것 같아서.
권건이 빅스의 껌 종이를 찢어줬던 그때처럼.
“내 친구 건이랑 예성이는 말도 잘한다?”
앉아있던 곽지운이 활기차게 외쳤다.
가라앉은 무드를 파악하는 데에 원딜만큼 빠른 사람은 없다.
“잘한다! 내 친구 거니거니! 1년 못 바꿔! 응, 돌아가!”
“내 친구! 친추 좀! 제발 다시 친추 좀!”
금세 뽀삐 팬클럽에 가입한 두 사람 역시 돌림 노래처럼 호응했다.
“그만.”
드물게 난처한 표정으로 권건이 고개를 돌렸다.
곽지운이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언젠가의 먼 과거에서 권건은 그들에게 그저 의무를 다하고 예의를 차려줄 뿐이라는 느낌이었다.
극단적으로는 권건이 FWX의 아주 완벽한 보호자 같다는 오해.
어쩌면 건이는 내가 똥만 싸도 돌봐주고 있는 건 아닐까?
나 너무 개같나?
도움이 되나?
수평적이지만 동등할 수는 없는 사이인가?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리고 몇 가지 사건으로 더 확실해졌다.
“내~ 친구의 부탁이라면 어쩔 수 없지. 얘들아! 우리 부끄러운 ‘친구’가 되지 말자고!”
‘FWX의 정글러’가 가볍게 손을 내저어 다시 한번 난색을 보인다.
그가 민망해할 수는 있지만.
다른 선수들에게 이런 권건의 행동은 확신이 된다.
최소한 내가 ‘뽀삐’가 아니라는 확신.
“알겠다구! 그만 부르겠다구, 친구!”
“상준이랑 이야기 나누라구~ 친구!”
리그의 흐름뿐만 아니라 다방면으로 꽤 해박한 권건이 유일하게 약점으로 가진 부분.
그래서 정작 권건은 이런 사실을 알지 뚜렷하게 깨닫지 못했지만.
고작 한 단어로 그들에게는 불안을 떨치고 수십 단계는 나아간 신뢰가 생겼다.
“어쨌든..”
헛기침한 권건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응.”
전보다 깨끗해진 안경을 쓴 유상준이 권건을 멀겋게 바라봤다.
“상대가 누구라도 상관없어. 사실 견제조차 필요 없어. 그래도 하는 것 뿐이야. 완벽을 위해서.”
바르고 올곧게만 느껴졌던 권건의 목소리가 왠지 악마처럼 느껴진다.
상대는 언제 당황했었냐는 듯이 침착하다.
“너도 알고 있잖아.”
당장 경기 시작이 금방인데도 생각 없이 웃고 떠드는 것 같은 나머지 선수들의 목소리가 평화롭게 울린다.
뜸을 들이고 다시 말이 이어진다.
“그리고 하루 차이가 아니라 일주일 차이야.”
“일주일?”
유상준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투명해진 안경알 너머에 뚜렷한 선을 가진 미남이 왼쪽 입꼬리를 올려 웃고 있다.
왠지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 것 같다.
유상준은 현실을 자각한다.
천하 태평한 다른 선수들의 자세가 이해된다.
“다음 주 토요일, 우리는 우승할 테니까.”
여기는 FWX.
스프링 우승까지 한 걸음 남았다.
높은 곳을 앞에 둔 사람들은 바로 앞의 마지막 봉우리가 두렵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