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게이머, 그만두고 싶습니다-231화 (231/326)

231화. 개화

“그래서요?”

곽지운과 나는 티타임을 가지고 있다.

“그냥 거기서 만난 거지 뭐. 걔가 누굴 기다리고 있는 것 같더라고.”

가벼운 분위기에서 이뤄지는 대화.

“아마 너였겠지.”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 정도로 또라이일 줄은 몰랐네. 내가 똥믈리에긴 한데, 그런 새끼한테 먼저 친하게 지내자고 하는 멍청이는 아니야.”

“그럼 다행이고요.”

주제는 벌써 꽤 지난 일.

해머스전 직후 만난 허진수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는 해머스 후 유니버스, 스톰, 트릭스터, F.L.E까지 싹 밀어버리며 스프링 정규 시즌 마지막 주를 앞두고 있다.

2주의 간격.

따로 이야기할 기회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나도 나 나름대로 정리할 것들이 있었고.

놓쳐서는 안 되는 타이밍이 있는 일들을 처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혹시라도 허진수에게 어떤 영향을 받진 않았을까 하는 노파심이 들어 결국 이 주제를 꺼낼 수밖에 없었다.

“흠.”

곽지운은 항상 그렇듯이 아이스 초코를 쥐고 있었다.

“우리 팀 주장 자리는 아직도 생각 없고?”

그리고 갑자기 가운데에 내리꽂히는 메이저리거급 패스트 볼.

주장이란 건 명예직이다.

특히 선수 수명이 짧고 회전이 빠르며, 동년배로 이뤄진 이 판에서는 더 그런 면이 있다.

소위 팀의 프랜차이즈 스타 자리.

음.

내가 먼저 이야기해서 편한 건지.

아니면 원래 곽지운이라는 사람이 투명하기 때문인 건지.

혹시나 그때 나눈 대화가 불편한 소재일까 생각한 건 필요 없는 걱정이었다.

“생각 없습니다. 그건 형이 더 잘하는 일이니까.”

“그래? 그럼 뭐. 내가 맡지 뭐. 어차피 여기 오래 있어서 받은 거니까.”

“그래 주시면 감사하죠.”

“솔직히 주장이 대수야? 걘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짚었어. 주장 이거 귀찮기만 한데. 선도부원이랑 그냥 똑같은 거잖아. 주장 맡았다고 뭐 대단한 거 있는 것도 아니고. 사진 한 장 더 찍는 거 정도?”

이 말도 맞다.

허진수는 곽지운을 크게 잘못 봤다.

누군가에게는 팀의 주장이란 게 대단한 권력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어차피 팀이 우선인 곽지운에게 주장이라는 감투는 아무것도 아니다.

보통 주장에게 맡기는 피드백이나 의견 조율은 이 팀 주장이 아니라도 모두가 함께 해나가는 일이기도 하거든.

애당초 주장이라는 이름으로 휘두를 수 있는 게 없기도 하고.

그냥 주장 어쩌고 주워섬긴 것 자체가 생각이 틀려먹은 거다.

못해봐서 그런 거 아니야?

“그렇긴 해요. 주장 자리 필요 없죠.”

“야, 건아. 아무리 그래도 주장을 앞에 두고 그렇게 말하는 건 선 넘는 거지.”

“그런가요?”

“근데 내가 이미 주장인 걸 어쩔라미~”

말투가 하도 가벼워서 웃었다.

“아무튼, 걔가 대뜸 야리길래 ‘중국 생활은 어땠어요?’ 하고 물어본 게 다인데 급발진 돌았지?”

내가 우려했던 것과 달리 곽지운은 딱히 허진수에게 친한 척한 적도.

커넥션 같은 걸 물어본 적도 없었다고 한다.

말 그대로 그냥 인사.

“저도 오해했어요. 형이 저 중국 간다고 생각하신 줄 알고.”

허진수 얘기로만 보면 완전 그렇게 보여서.

“어.”

곽지운이 아이스 초코를 쭉쭉 빨다가 꿀떡 넘긴다.

“갈 거라고 생각하긴 했어. 완전 갈 거라고 생각했었지.”

곽지운은 시원시원하게 이야기했다.

“?”

“그냥 네 자리에 중국어책 있고, 취업 비자 관련된 책자도 있고 그래서.”

그걸 봤었어?

어쩐지 위치가 바뀌어있더라니.

솔직히 나는 내가 나도 모르게 정리해둔 줄 알았다.

워낙 오래 신경을 안 써서.

음.

이거 잘못하면 일이 꼬일 수도 있겠는데.

인제야 여기에 정이 들었는데 괜히 똥파리가 끼어서 아침 드라마처럼..

“혹시나 오해할까 싶어서 말씀드리는 건데 파기나 위약금 뭐 그런 건 현실적으로도 전혀 말이 안 되는..”

허진수가 지껄인 개소리를 나열하고 있으려니.

“어. 말해.”

의자에 몸을 기댄 곽지운이 싱글벙글 웃고 있는 게 보인다.

“그런 말은 완전 개소리..”

내가 계속 말을 잇는데.

이제 곽지운이 웃어도 너무 웃는다.

“니까. 무시를.”

“그래. 그래. 나도 걔한테 대답했잖아. 아니라고.”

그랬나?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너 안 갈 거잖아.”

“...”

“FWX. 권건?”

허 참.

이래서 눈치 빠른 애들은 편하다니까.

“그것보다 궁금한 게 있는데.”

주장이 몸을 쓱 기울이고 목소리를 낮췄다.

“난 지금 네가 뭘 하고 있는 건지가 더 궁금해. 대장.”

“제가요?”

“어. 나는 주장, 너는 대장. 그러니까 말해봐. 네 목표가 뭔지.”

아.

진짜 눈치 빠르네.

#

[ (LKL) 8주차 정산 : ‘꺼지지 않는 불길’ 마지막까지 치열한 LKL의 스프링 시즌! ]

[ 절대자의 품격, FWX ]

[ PO 확정 5개 팀 : 대전 FWX, 성남 스톰, 인천 트릭스터, 광주 미라쥬. 그리고 대구 유니버스! ]

[ 마지막 한자리는 누구의 것? ]

[ 뜻밖의 얼굴.‘동부의 마이’ 부산 호넷과 ‘서부의 상징 빅스를 이긴’ 제주 F.L.E의 치열한 막차 싸움.. ]

ㄴ 서울 빅스를 이긴 제주 F.L.E를 이긴 부산 호넷이 진짜 승자다

ㄴㄴ 빅스 주가가 요즘 껌값이라 큰 의미는 없는 듯ㅎ

ㄴㄴ 어쩌다 이렇게까지.. 예성아.. 예성아 돌아와.. 빅스로..

ㄴㄴ 왠지 수백번 단 댓글인 것 같은데.. 가겠냐?

[ ‘서울’의 사나이들은 어디로 갔는가? 8위 빅스의 남은 대진은 FWX와 스톰, 불투명한 미래 ]

ㄴ 바이바이 빅스!

ㄴㄴ 쉬밸럼들 껌에 사진을 넣은 순간 운명은 정해져 있었다

ㄴㄴ FWX도 젤리에..

ㄴㄴ 누가 여기서 FWX 소리를 내었는가?

ㄴㄴ 서머에는 대전 올로케 가자~

ㄴㄴ FWX! FWX! FWX! 이 판을 만든 건 FWX!

ㄴㄴ 이 와중에도 FWX랑 스톰은 좆밥이라는 말을 못 하겠는 나 자신이 너무나 서러워

ㄴㄴ 서울~ 서울~ 서울~ 아름다운 이곳에..

ㄴㄴ 동부 공기는 좀 어때 빅스?

ㄴㄴ 아ㅋㅋ

[ 정규 시즌 ‘순위 결정전’, 최대 라이벌! 스톰과 미라쥬의 격전이 온다 ]

ㄴ 요새 얘네 왤캐 사이가 안 좋아?

ㄴㄴ 왜겠어? 싸운 거 못 봤냐?

ㄴㄴ 도대체 왜 싸우는 거임ㅋㅋㅋ

ㄴㄴ FWX한테 인정받고 싶은 거 아닐까?

ㄴㄴ 니들이 뭔데 인정이야; 그냥 우리가 싸우고 싶어서 싸우는 거지

ㄴㄴ 그래ㅋ

[ 알 수 없는 2, 3, 4위의 행방. 2위 스톰의 9주차 대진 난항, 공동 3위의 트릭스터와 미라쥬의 마지막 싸움도 기다려.. ]

[ 상위권 싸움은 끝이 없다, 단 한 팀만 빼고. 왜? ]

ㄴ 왜긴 왜야 FWX 시벌 저걸 어캐 이겨요

ㄴㄴ 득실 차도 두배 차이 나잖아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ㄴㄴ 진짜 존나 지금 와서 다 져도 FWX가 1등이야ㅋㅋㅋ

ㄴㄴ 피닉스한테 지겠냐고ㅋㅋ아ㅋㅋㅋㅋ 그건 캐붕이지ㅋㅋ

ㄴㄴ 헛웃음 존나 나와ㅋㅋㅋㅋ

ㄴㄴ 후,,, 결국 우리가 전승 우승 가나?

ㄴㄴ 아직 우승 아니거든?

ㄴㄴ 응ㅎ 그래ㅎ 너넨 한 세트라도 이기고 말해ㅎ

ㄴㄴ ㅎ ㅏ 시1발

[ ‘가장 높은 자리에서 기다리마’ FWX의 끝없는 승리. 16전 16승의 ‘최강’ 2026! ]

[ 가장 완벽에 가까운 팀 ]

그리고 FWX의 채널.

자체 다큐멘터리 콘텐츠의 업로드.

[ 코리아 넘버원, 확정 | Blooming Villain EP.6 ]

ㄴ ㅇㅅㅇ 영상 제목 광오한 거 보소; 근데 빌런이라니 ㅋ

ㄴㄴ 빌런이 뭐 어때서ㅋ

ㄴㄴ 빌런은 원래 라틴어 villanus(농장일꾼)에서 유래함ㅇㅅㅇ villa(고대 로마의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일한다고. 그러니까 농민이라는 뜻임ㅇㅅㅇ FWX = 농민;; ㅉㅉ 수준;; ㅇㅅㅇ

ㄴㄴ 뭐래?

ㄴㄴ 님 너무 추함;; 혹시 여기 위키 복붙 해달라고 하신 분 계세요?

ㄴㄴ 앞에 블루밍 붙었잖아요 농민 봉기인가 보죠

ㄴㄴ 님 저런 빡대가리 상대하지마여 우린 품격있는 FWX 팬이니까

ㄴㄴ ㅇㅋ

ㄴㄴ 위끼에 님은 2026년에 사망한다고 적혀있으면 돌아가실 분이네ㅋㅋㅋㅋ

ㄴㄴ 냅둬 평생 저러고 살게

ㄴ 하긴 지난 시즌까지는 빌런이 맞았지

ㄴㄴ 다음 시즌에는 더 이상 빌런이라는 단어를 쓰지 못하게 될 것이다

ㄴㄴ 그럼 뭐라고 씀

ㄴㄴ 글쎄? 그땐 우리가 ‘법’이다..

ㄴ 왜 아무도 저 말에 대꾸를 못해?

항상 얌전하던 FWX의 콘텐츠도 서서히 공격적으로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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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지만 돈을 잃은 건 남동현 해설님, 너네요.”

“돈을요? 제가? 언제?”

해설가 남동현은 어깨를 으쓱했다.

“돈을 걸지는 않았잖아요. 그냥 의견 개진이었지.”

스프링 정규 시즌 9주차 경기.

오늘은 금주 최고로 팽팽한 게임.

‘매치 오브 더 위크’, 성남 스톰과 광주 미라쥬의 경기가 있는 날.

시즌 초, 대진표가 처음 나왔을 때만 해도 해설진은 이 주의 매치 오브 더 위크가 서울 빅스와 대전 FWX의 경기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때 서부의 지배자 대열에 있던 빅스.

그들은 ‘스토브 리그에서 가장 망한 팀’ 중 하나로 꼽혔을 때까지만 해도 ‘그래도 모른다’는 기대받던 팀 중 하나였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동부 리그를 대표했던 부산 호넷에도.

제주 F.L.E에도 한 경기씩을.

그리고 심지어는 과거 최약체 하면 떠오르던 F 삼인방 중 하나이자 지금도 바닥인 피닉스에게까지 세트 승을 내주는 수모를 당하고 있었다.

물론 피닉스는 F가 아니라 P였지만, 불과 작년 초까지만 해도 ‘ㅍ’보다는 Fuxk이나 F급에 가깝다는 소리를 듣던 세 팀이었기에 그랬다.

어쨌든 F 삼인방 스탬프 랠리를 달성한 결과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빅스는 김예성을 내보낸 뒤 끝도 없이 추락했고, 간식거리라고 놀림당하며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었다.

그래서 빅스와 FWX의 경기는 더 볼 것도 없는 FWX의 승리.

FWX 팬들에게는 승패가 정해진 레슬링 경기이자 즐거운 축제겠지만 리그의 매치 오브 더 위크에는 부적합 판정.

“그래도 좀 아쉽게 됐네. FWX가 스톰한테 한 세트 안 내줬으면 무패로 전승 가는 건데. 동현 해설님 돈도 따고.”

“아니, 형! 돈 안 걸었다니까요?”

“그럼 밥이나 사요. 알았지? 여기서는 형 말고 해설님이라고 부르고.”

“아니, 근데 애당초. 저랑 방송을 같이 한 건 현수진 해설님이랑 이승수 분석님인데 도대체 왜..?”

“안 속네.”

강기수 해설이 아쉽다는 것처럼 고개를 저었다.

“속겠어요?”

“아무튼..”

FWX의 세트 승 대기록은 연속 27세트에서 멈췄다.

성남 스톰에 의해서였다.

세트 승, 패, 승.

딱 한 번의 세트 패.

결국 경기 결과는 승리였고 여전히 압도적인 1등이었지만.

믿을 수 없는 기록이 실제로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기대와 정말 LKL에서 진정한 의미의 ‘퍼펙트게임’을 보고 싶었던 이들이 많았기에 아쉬움도 있었다.

“뒤로 갈수록 부담이 컸겠지.”

“전 상상도 안 되는데요. 출전 거부할 것 같아요. 손 떨려서 게임 하겠어?”

그리고 그 이후의 두 경기 역시 계속해서 스윕하면서.

FWX 팬들의 마음은 아까우면서도 너무 행복한 기묘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전설적이었던 과거 팀 중 세트 패조차 하지 않았던 팀은 없었지만, 어쨌든 승리에 너무 적응해버렸기 때문에 그랬다.

욕심은 끝이 없다.

“음. FWX는 FWX만의 싸움을 했던 거지. 지금 탈 한국 수준이니까.”

“그래서 사이다 선수가 실수했나?”

“전혀. 난 전혀 그렇게 생각 안 해. 사이다 선수 탓이라기보다 그 경기는 오히려 굉장히..”

그때 나타난 한 사람.

“심지어 어쩌면.. 계획적.. 으로..”

말을 잇던 두 사람이 잠시 말을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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