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화. 별동대
문봉구가 입을 열기 직전.
“이 경기 끝까지 보자고. 아직 승패 결정 안 됐으니까 더 보시라고. 그래서 하는 말이야.”
종종 객원으로 초대받을 뿐만 아니라 한두 번 분석 데스크에 게스트로 들렀던 강동흔이 먼저 해설진 입장에서 대답했다.
이런 말은 은퇴한 지 오래된 선수가 하는 게 낫다.
“진짜 방법을 제시하는 게 아니라?”
“가능성. 실낱같은 가능성은 언제나 있지. 그걸 말하는 거야. 근데 이게 현실로 이야기하면 너무 쓰라리긴 하지만, 어쨌든 시청자들은 경기를 봐야 하니까. 흥행해야지. 은퇴하고, 전역하고 한발 떨어진 지금에야 알겠어. 상업 스포츠란 그런 거니까.”
- 형들.. 그건 말할 필요가 없는 진실이었어..
- [아직 모른다]가 진짜로 바뀐 경우는 별로 없음
- 짠하네
- 그럼 선수들은 질 거 다 알고 있는데 해설들은 밖에서 소리 지르는 거야?
- 캠 잘 보면 티가 나긴 함
“물론 선수 입장에서는 절대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게 맞고. 나도 그랬고, 모든 선수가 그래. 가끔.. 안 그런 사람도 있긴하지만서두.. 그건 그 사람이 프로 실격인 거야.”
그리고 문봉구가 단호하게 선수 입장의 말을 한다.
- 하긴 형 존나 포기 안 하긴 하더라
- 그래서 우리가 괴로웠자너
- ㅋㅋㅋㅋㅋㅋㅋ그만.. 그만 좀 해..
- 그래서 내가 4년째 FWX 팬이다 봉구야
약간의 침묵.
그리고 볼 필요도 없는 경기 결과가 펼쳐진다.
유니버스 탑 딜량이 0에 수렴하는 놀라운 그래프.
“사실 난 오랫동안 경기 자체를 못 봤어. 다른 팀 경기도 마찬가지여.”
“고질병이야. 연예인이랑 비유하긴 싫은데 그런 면이 있어.”
“어떤 점이요?”
“아까 말한 대로 상업. 열정으로, 사랑으로, 명예로 시작한 일인데도 결국 방송, 해설 영향 많이 받는 거.”
“음, 솔직히 말하자면 선수 생활이 길어질수록 돈 생각이 나. 우짤 수가 없어잉. 나는 늙어가고 수명은 짧고 다음 일도 찾기 어려우니까는. 아이고, 돈돈돈.”
“게임 잘 안될 때는 아예 이름 검색 자체를 하고 싶지가 않아. 포털사이트보다 커뮤니티 욕이 먼저 뜰까 봐. 내 가치 떨어질까봐.”
“2군 시절에는 내 이름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는데, 어쭙잖은 1군 선수가 되면 이름이 나오지 않았으면 하지. 내가 성적이 안 좋아서. 잘나가는 아들은 다를겨.”
“그런 것도 있지. 나중에 내가 한 선택이랑 해설진이 판단한 거랑 다를 때, 시청자들한테 자기가 너무 평가절하되니까 속상해하는 선수들도 있어. 제3안, 4안도 있는 거니까.”
“인터넷 반응도 그렇고. 이상한 별명 붙고, 막.”
역동적이었던 화면이 멈추자 대화는 깊어졌다.
- 형.. 8_8
- 시발 프로게이머 절망편;; 이게 머야;;; 내 직장이랑 다를 바 없어;;
- 프로는 그냥 졸라 숭고하게 일하는 거 아니였어?? 태어날때부터 잘나간거같앗는데
- 얘넨 하위권이었잖아 그쪽 스토리는 다르지
- 아..
- 그냥 지금이라도 다시 복귀할래? 늦지 않았어..
- 오퍼 좀 들어오지 않음?
- 솔직히 우리 협최봉은 2군 알박기도 가능햇자너
- 머야 이거 후원 왜 안 돼
- FWX는 후원 막기가 기본이야???
- 중계는 후원 안 받더라
- 머야 시발 풀어줘요ㅠ 형들 내 용돈이라도 좀 가져가;;;
솔직담백하게 풀어내는 하위권으로서의 과거.
“근데 뭐 여러분이 그걸로 마음 아프실 필요도 읍고~ 다른 선수들에게 실망하실 필요는 저어언혀 없어요~ 내 사연인거고 사람 바이 사람이여~ 우리도 한참 철없을 때나 원망스럽고 그랬지~”
하지만 문봉구의 너스레로 금세 분위기는 다시 돌아온다.
“일하는 거야. 일. 그리고 그 안에서도 열정을 유지하는 게 프로여. 물론 다들 많이 고생하지. 속 안 상하는 사람이 어딨것어? 다른 일은 뭐 안 그려?”
“그건 그렇죠. 저도 재밌어서 편집팀 일 시작했는데 가끔은 좀 질리더라고요.”
“사람이 그렇지 뭐. 그리고 해설님들이 없으면 그냥 겜인디. 상호 협력이 중요햐. 얼마나 별명도 많이 붙여주시는데. 덕분에 내가 ‘최강의 방패’였나?”
“그거 사우전드 선수 별명 아니냐? 그걸 왜 네가 스틸하지.”
“미안하지만 확실히 봉구 형은 항상 ‘동부 최후의 성벽’이었어.”
“어이쿠.”
세 사람은 웃었다.
“어차피 게임에 정답은 없거든. 그래서 해설자님들도 고생이 많으시다더라.”
“우리가 썩은 상품을 보내도 항상 부풀리고 멋지게 포장해주셔야 하는 거 아니여. 얼마나 고생인지.”
“부풀려요?”
“어엉. 조촐한 게임도 가끔은 과대 포장 해주셔서 살려주시잖여. 공부도 엄청나게 한다니까. 그거 아무나 하는 게 아녀.”
- 과대 포장ㅋㅋㅋ
- 원헌드레드vs제네럴 : 100원 동전 던지기 게임
- 데스티니 오브 락시저페이퍼 : 가위바위보
- 얼어붙은 성전 퀘스트 : 얼음 땡
“그래서 그냥 게임도 적벽 대전이 되고 무협도 되고 뭔 불꽃도 되고 그런 거 아니것어. 대단하신 분들이여.”
“항상 논란도 버티셔야 하고. 누구 이름을 불렀니, 교묘하게 깎아내렸니, 저 멘트는 의도가 있었니 마니.”
옛이야기를 나눈 두 명의 은퇴자와 한명의 일반인이 경기 화면을 잠시 내렸다.
“그래서 지금이 더 좋아. 그리고 이해가 돼. 모든 사람들이.”
“뭘요?”
“선수, 감코진, 우리 팀, 다른 팀, 게임사, 협력사, 연고지, LKL 해설진과 분석가, 아나운서, 그리고 팬까지. 전부 하나야. 이제서야 이건 문화야. 그냥 단순한 PC 게임이 아니라 문화.”
화려한 FWX의 리플레이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모든 화면의 주인공은 FWX 선수들이었고.
중간중간 선수들이 환호를 지르는 장면이나 대화가 나오면 지세현이 볼륨을 슬쩍 높여준다.
뜨거운 현장감.
겪어봤거나, 지켜봤거나.
하지만 똑같이 느낄 수 있는 그 마음.
“문화..”
우릉우릉, 묘한 감정이 지세현에게 밀려온다.
그는 이 ‘세계’에 가장 늦게 입문한 사람이다.
무대에서 활약하는 프로게이머가 아니라서 자신은 고작해야 주변인이라고 생각했는데.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라고 이야기해주고 있다.
“맞어잉. 선수가 없으면 해설이 없고, 해설이 없으면 리그 영상도 없지. 영상은 편집자가 없으면 만들어지지 않고. 그리고 그걸 봐주는 팬이 없다면 선수도 없지. 은퇴하고 한 발 멀리 떨어져서 보니 이게 다 상생이었던 거여. 여러분들 덕분이여.”
- 봉구야..
- 형,, 눈물,, 난다,, 짜식,,
묘한 공감의 선에서 채팅도 잠시 느려진다.
“근데 그런 것도 있지 않아? 솔직히 우리도 사람이라 이기적인 게 있는데. 뭣보다도 우리 팀 FWX에 해설님들이 못한다는 소리를 않잖아.”
문득 강동흔이 분위기를 흩어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건 그래요. 최근에는 FWX에 대해서 나쁜 말을 하는 걸 본 적이 없어요.”
“우리 논란은 콜링 논란밖에 없지 않아?”
“콜링?”
“궈어어어어어어언건인지 권거어어어어어어어언인지.”
“맞네. 맞아.”
“맛만 좋으면 그만이여~”
“나이스 컬쳐~”
이유야 뻔하다.
당연히, 잘 되어가고 있으니까.
충분히 사랑을 받는 팀이니까.
하지만 무엇보다도.
선수 하나하나가 올바른 사람들이니까.
그 사실을 아는 졸업생들은 여러 가지 감정 속에서 웃음 지었다.
한때 설움이 있었지만 이미 지나간 이야기.
처음에 꿈꿔왔던 프로게이머로서의 삶과 현실의 괴리감 사이에서 무너지지 않게 하위권 선수 한명 한명을 다독여온 팀.
여러 해 동안 농사를 지어온 FWX의 결실이 여기에 있다.
“나는 아직도 내가 FWX라고 생각하거든.”
“FWX 맞지. FWX 소속 스트리머잖아.”
“그거 말고도. 알잖어잉.”
“알지.”
- 뭔데 이 팀..
- 그냥 의리 때문에 여기서 한 게 아니었어?
- 전관예우 뒤지고..
- 이 형들 진짜 FWX 좋아하는구나;
- 의리 10;;
- 싸우고 은퇴하는 사람들도 많던데;
- 형들 안 되겠어 술 한잔하자
“나는 그냥 내가 FWX인 게 자랑스러워. 우리도 문화야.”
“나도.”
“나도.”
세 사람은 피식 웃었다.
“직장이 좋은 직장이 되기가 참 어려운데.”
“그걸 하네.”
“그럼 우리, 경기는 끝났고. 일단 인터뷰 보고들 오세요. 우리 여기 좀 치우고 잠깐 있다가 술 한잔해야겠다. 여러분, 술방 고?”
- 좋다ㅋㅋㅋ형들 바로 방 열어줘요 제발
- 행님.. 내가 보틀 주문은 못 해 드려도 한잔은 사겠읍니다
- 주종은 뭐로 준비헐지@@@
- 흰살생선에,, 청수 와인으로,, 준비허겠소,,
- 나는 맥주에 치킨!
- 나는.. 물에 소주
- 늬,, 주소가 어디니,, 어린. 친구야,, 내가 좀 보내줄ㅌㅔ니,,
핏, 하는 소리와 함께 잠시 화면이 꺼진다.
준비 중 화면으로 돌아간 순간 노트북을 조작하던 지세현이 화면에서 완전히 보이스를 페이드아웃시킨다.
“우리 같은 사람들 이야기도 들어주고. 사람들 맘이 참 곱다.”
“그러게. 예전엔 적만 있는 것 같았는데. 여기가 오아시스가 아닐까.”
“근데. 잊으신 거 아니죠? 우리가 진짜 모인 이유..”
“아니지.”
“사실 진정한 낙원은 없지. 최소한 현업인에게는.”
지세현의 말에 남은 두 사람의 눈이 빛난다.
사실 이제 본론이다.
“어떤 씹쌔가 우리 정글 욕하고 다닌대?”
해설진부터 시작해 FWX 원딜의 필수 덕목인 인맥과 말발이 뛰어난 강동흔.
그의 숨겨진 정체는 직접적인 욕설보다 교묘한 키배에 능한 악귀.
“고 조빱새기 사지를 조사뿌야지.”
루키 유망주 방송인 문봉구.
그의 숨겨진 정체는 방송계 신흥 세력, 다양한 연령대의 행님단을 이끄는 탑꺽정.
“제가 조사한 바로는..”
그리고 FWX 콘텐츠 팀 지세현.
모든 삿된 표현을 밝혀내는 등불 같은 온라인의 망령.
성적인 발언, 정치 드립, 기울어진 시각, 위험성이 있는 모든 표현이 FWX 공식 석상에서 노출되지 않도록 막고 대본을 쓴 자들의 사상 검증을 행하는 젊은 심문관.
그의 숨겨진 정체는 모든 커뮤니티에 통달한 진정한 온라인 리스크 관리자.
새로워진 FWX에 의해 인생이 달라진 세 사람.
든든한 FWX 수호대이자 별동대의 발족이었다.
#
그날 밤.
선수 중에서도 삼가는 사람이 있다는 해설 듣기.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2배속으로 듣던 유니버스 탑, 최정인은 큰 슬픔에 잠겨있었다.
“이럴 수가..”
해설 듣기는 오래전, 미라쥬 벤치에 앉아있던 시절부터 지겹게 해왔다.
경기 분석을 위해서?
아니.
그냥 그 당시 주전이었던 사우전드 김진승이 못하면 자기 이름이 나올까 봐.
정말 대단한 관심병자인 최정인은 놀라우리만치 강한 멘탈의 소유자였다.
물론 자기에게 좋은 말만 골라서 들으니 해설을 듣건 말건 상관이 없다.
이름이 불리는 그 순간의 짜릿함은 자기 자신도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이니까.
그래서 이건 그의 수많은 습관 중 하나다.
하지만 오늘은 놀라울 정도로.. 탑에 대한 언급이 적다.
“정인이 형 뭐해? 형 또 바닥 눈금 세?”
“나가.”
“뭔 개소리야. 여기가 연습실인데 내가 어떻게 나가. 나갈 거면 너나 나가라 찐따야.”
싸가지없이 쏘아붙이는 원딜 강은찬은 왠지 기분이 좋아 보였다.
누구랑 문자를 하는지 심술궂은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
“빨리 안 나가? 나가라. 나가 뒈져, 빵딜.”
“네가 원하니까.. 내가 나가 주는거야..”
쏟아지는 따가운 시선을 참지 못한 최정인은 쓸쓸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폰으로 이어듣기 하면 그만이다.
“저 형 또 왜 저래?”
“몰라. 근데 이럴 때 위로해주면 진짜 큰일 난다. 저 형. 진짜 절대 먼저 말 걸지 마라.”
“확인.”
안타깝지만 최정인의 속성을 너무 잘 아는 동생들.
“야, 쫓아 나가자.”
“말은 걸지 말자.”
“쉿.”
눈짓을 주고받은 나머지 선수들이 재빨리 그를 뒤따라 나간다.
최정인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연습실에서 게임을 하는 선수는 아무도 없었다.
“어떻게.. 아무도..”
FWX와 경기가 끝나고.
최대한 천천히 장비를 정리할 때도.
다른 선수들이 하나둘 자리를 비웠던 사이에도.
그리고 그렇게 나갔던 선수들이 다시 돌아오고, 경기장을 떠 밴에 탑승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지금쯤이면 오지 않을까 했던 그 누구는 찾아오지 않았다.
이제 좀 정이 든 멍청한 짐승 탑도 마찬가지다.
우정.. 우정이란 무엇인가.
한낱 스쳐 지나가는 소매 끝에 머무는 그것이 우정이라 할 수 있을 것인가..
인간의 삶이란.. 인간관계란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위해 어쩌구..
바람에 날리는 한 줄기 저쩌구처럼..
왱알왱알..
“선수님!”
그때 최정인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던 스탭들이 옆에서 소리쳤다.
“축하합니다!”
빠방, 소리와 함께 작은 폭죽이 터진다.
“생일을 축하해요!”
“햅삐, 햅삐, 해피버스데이 투 유!”
“뿌뿌뿌뿌우! 깜짝 놀라셨죠? 서프라이즈!”
“오늘 경기 때문에 속상하실까 봐..”
하지만 그 모습을 보지도 못한 채.
자기만의 세상에 들어간 최정인은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뭐야?”
“선수님?”
“노이즈 캔슬링 무슨 일? 저거 어디 제품?”
“아니 그냥 줄로 된 구식인 것 같은데..”
“선수님 집중력 무엇? 평소 우리 얘기에나 좀 집중..”
“나도 니 맘 아는 데 조용히 좀 해.”
유니버스 스탭들이 당황하는 사이.
- 권건, 권건, 권거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언!
- 또오오오오오오오! 또오오오오오오오! 이거어어어어어얼! 또오오오오오오오!
- 찌르고, 찌르고, 찌르고, 예! 대체, 이 선수! 권건 이 선수 뭐하는 선수인가요? 대체 뭐냐구요!
최정인이 듣고 있는 해설에서는 권건에 대한 극찬이 쏟아진다.
문득 발걸음을 멈춘 최정인이 고개를 들고 천장을 올려다본다.
밝은 불빛이 쏟아진다.
잊혔다.
완전히 잊혔다.
게임에서도 무시당했다.
지금의 승점은 아슬아슬하다.
엎치락뒤치락 4위와 5위를 오가는 중.
팀에서도 PO에 힘을 쏟자는 의사를 전달했다.
그렇다는 건..
“나 혼자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다는 뜻인가..! 나는 여포가 아닌 것인가!”
“왜 저래?”
“몰라.. 우리 선수님 가끔 좀 이상하잖아..”
“가끔?”
- 권건, 권건, 권건!
- 전설의 출혀어어어어어어어어어언!
해설진이 멘트를 외치는 그 순간.
- 띠링!
이질적인 소리가 이어폰을 통해 울린다.
재빨리 확인한 폰에는 갓 도착한 푸시가 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