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화. 회귀자, 활동 개시
솔직히 난 좀 민망한 상태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그놈의 ‘친구’가 뭐라고 혼자 오두방정을 떨었는지.
[ 친구 맞아..! ]
그리고 그 민망함은 이 작은 악마 때문에 더 극에 달했다.
[ 내 친구 맞다고..! ]
“내가 언제 그렇게 말했어?”
[ 몰?루? 그걸 왜 나한테 물으브냐그~ ]
와, 진짜 미취학 아동.
학교에 안 간 것 같긴 하니까 맞는 말인가?
“진짜 그냥 한 말이야.”
[ 죄송합니다만 감정이 아주 휘몰아치시던데요? 갈팡질팡 알쏭달쏭 우왕좌왕 사방팔방~ ]
“...”
진짜 오랜만에 있었던 일인 건 맞다.
어쨌거나 내가 누굴 친구라고 생각해본 건 정말 오래전 일이니까.
그마저도 여러 번 그 사람의 모습을 볼수록 점점 깎여나가고 없어진 감정들이다.
그런 거 있잖아.
그때 얘가 이런 말을 했던 게 다른 이유가 있어서였구나, 하면서 실망하는 그런 일들.
그게 나한텐 일상이었다.
“FWX에서의 삶은 처음이니까..”
[ 네, 합리화 스톱. 그냥 너는 여기가 좋은 거야. ]
하지만 릴리는 그런 내 복잡한 심경을 이해해 줄 생각은 없는 것 같다.
인간들의 심오한 정신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 뭐가 그렇게 부끄러운 건지 모르겠어. 인간은 다 감정에 서툴러? ]
“이거나 먹어라.”
나는 그냥 방 한구석에 산처럼 놓여있는 동전모양 초콜릿을 건넸다.
지난 카드 게임에서 딴 그거.
막내 이유찬이 로켓 배송 해줬다.
[ 친구 하면 좋잖아. 뭐 어때? 어차피 걔넨 다 너를 친구라고 생각하는데. ]
캐비닛에 앉은 릴리는 발을 달랑달랑 흔들며 웃었다.
[ 왜 혼자 그래? ]
그래서 나는 조금 진지하게 대답해주기로 했다.
“그런 말은 언제나 책임을 불러.”
[ 책임? ]
“이 인과와 연을 책임지는 건 전부 내 책임이잖아.”
삶이 리셋되니까.
삶이 리셋되면 내가 줬던 모든 감정은 물론 서로 나눴던 이야기들이 사라진다.
이게 다른 사람들과 나의 다른 점이다.
자연스럽게 흐르는 시간이 아니라 오롯이 내게 고정된 시간선.
“내가 그걸 지켜야 하는데, 책임지지 못할 말을 뱉을 수는 없으니까.”
연애도 마찬가지다.
다음이 있다는 게 다름을 만든다.
수십번 실패한 회귀자는 어딘가 짓눌려있을 수밖에 없다.
감정을 훌훌 털어버리는 게 쉬운 건 아니니까.
그래서 어쩌면 어느 순간부터 ‘항상 최선을 다하는 것’에 지쳤었던 것 같다.
[ 그럼 지금은 그걸 지킬 준비가 되어서 그렇게 말한 거야? ]
“...”
나는 대답할 말을 잃었다.
솔직히 마음의 준비가 완전히 됐던 건 아니다.
허진수의 공격적인 언사가 나를 자극했을 때 나도 모르게 결론이 났고, 그런 말이 튀어나왔을 뿐.
우리 팀은.. 내가 평가하기에도 완성도가 높다.
내 컨디션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내가 이번 월챔에서 팀을 백퍼센트 우승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어쩌면.”
릴리의 눈이 가로로 길게 찢어지며 부드럽게 휜다.
이제 대충 저 눈빛을 알겠다.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의 웃음이다.
[ 근데 괜찮아. 그래서 인간이니까. ]
“무슨 뜻인데.”
나도 모르게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이 나간다.
[ ‘잃을 게 없는 사람’과 ‘지킬 게 없는 사람’ 중에 뭐가 더 최악일까? ]
갑자기 선문답?
“잃을 게 없는 사람 아닐까.”
[ 잃을 게 없는 사람은 더 내려갈 바닥이 없는 사람. 그리고 지킬 게 없는 사람은 의욕이 없는 사람. ]
“말하려는 게 뭐야?”
[ 나는 ‘지킬 게 없는 사람’이 최악이라고 생각해. 그건 아무런 열정도 없다는 뜻이니까.. ]
릴리는 다시 방긋 웃었다.
아까와 달리 조금 섬뜩한 웃음이다.
열정, 그래.
이 악마는 열정을 거두러 온 이.
[ 여기는 잃을 게 없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지. 그리고 지킬 게 없는 너를 만났어. ]
“...”
[ 넌 최악이야. ]
“갑자기? 내가?”
슬그머니 다가온 릴리가 내 미간을 톡톡 두들겼다.
그리고 꺄르르 웃으며 동전 초콜릿을 허공으로 던진다.
탁, 소리와 함께 자그마한 손에 잡힌 초콜릿은.
세로로 서 있었다.
[ 아니? 최악이‘었’어. ]
릴리는 방구석의 동전모양 초콜릿 더미 위에 제 것을 다시 올렸다.
[ 이제 넌 지킬 게 있지. ]
“뭘.”
사실은 알겠다.
“이 못난 놈들이랑 가는 미래?”
[ 지금 만난 인연을 잃지 않는 미래. ]
우리는 거의 동시에 말했다.
허공에서 잠시 눈이 마주친다.
[ 내가 도움이 됐을까? ]
나는 피식 웃었다.
릴리도 쌕 웃는다.
“지켜야지. 지키려고 노력해봐야지.”
여기까지 어떻게든 달려온 나를.
그리고 나와 발맞추기 위해 달리는 사람들에게서 잊히지 않으려면.
[ 삐빅, 또 틀렸습니다. ]
“또 뭐.”
[ 너 혼자 지키는 게 아니야. 잃을 게 없었던 사람들에게 이제 잃을 게 생겼으니까. ]
“...”
그런가?
그런가.
다 받아들이기는 어렵지만.
나도 뭔가 달라지고 있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든다.
그냥 아직 갈 길이 좀 남았나 보다.
[ 라그나로크를 거쳐야만 황금의 시대가 오는 법이지. ]
“그런 미사여구는 어디서 배웠니?”
[ 음..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 ]
“속담 공부 후기 잘 들었습니다.”
[ 별점 5/5. 한국어가 참 쉽고 유익하네요. ]
내가 잠시 잊고 있던 무기가 아직 수백 가지는 남았다.
모든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하는 것.
이건 지킬 게 생긴 사람의 방식.
“이제 자라.”
[ 오야스미나사이. ]
“잘하네. 역시 지옥산 언어팩.”
[ 때론 악마도 공부란 걸 한답니다. ]
웃음소리와 함께 릴리가 사라진 뒤.
방 한쪽 구석에 있던 동전모양 초콜릿 더미는 모조리 앞면으로 뒤집어져 있었다.
#
해머스와의 경기 바로 다음 날.
권건은 정말 이례적으로 박진현 감독에게 단독 면담을 신청했다.
일정을 철저하게 지키는 이 선수가?
혹시 뭐가 달라진 건가?
“건아. 이건 대체..”
놀람 반, 설렘 반으로 그 시간을 기다렸던 박 감독은 뜻밖의 정보를 접했다.
“대체 어떻게..”
“저한테도 연락이 왔었거든요.”
박 감독이 받은 것은 어떤 정보.
추이가 깔끔하게 정리된 자료였다.
“혹시 대답하거나.”
“그런 일은 일절 없었습니다. 일방적인 연락이었죠. 그리고 시기상 제 연락처와 세부 정보는 스톰 2군 시절에 샜던 것 같습니다. 넘길만한 사람도 있었고요.”
감독 앞에 앉은 권건은 가라앉은 눈으로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아. 그 쓰레기.”
여전히 FWX는 각종 소송으로 착실하게 상대를 묻어버리는 중.
시즌 중인 선수가 신경 쓸까 싶어 별다른 언질을 주고 있지 않았던 박 감독은 슬며시 운을 띄웠다.
“평생 그 사람 신경 쓸 일은 없게 할 거다.”
“감사합니다.”
권건은 단박에 무슨 얘긴지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외에도 전에 있었던 흉기 사건이나, 여러 가지.”
다른 소식 역시 마찬가지.
“네. 팀에서 도움 많이 주시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구단을 넘어 모기업에서도 법무팀을 지원해주고 있다는 소식이다.
“그리고 또..”
심지어 최근 음지의 커뮤니티에 나타난 악플러에 대한 정보까지.
FWX는 바보가 아니다.
다만 몇 마디 말에 과잉 대응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할 뿐.
그건 선수들에게도 누가 되니까.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건 이 판에서 닳고 닳은 권건 역시 마찬가지였다.
상황이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지는 눈을 감아도 훤하다.
온실 속이니 뭐니 외치던 허진수의 생각은 처음부터 틀렸다.
완전히.
이번 삶을 안식년 정도로 생각했었던 그가 여태까지 굳이 드러내지 않았을 뿐.
권건은 이 판의 지배자와 다를 바 없었다.
“그래. 일단, 대답 안 한 거 정말 잘했다. 똥을 보면 그냥 피하면 되는 거야.”
박 감독의 말에 권건은 뭘 생각하는지 피식 웃었다.
“?”
“아닙니다. 똥 하니까 생각나는 사람이 있어서.”
“유찬이?”
“그것보다 훨씬 작고 고약한 똥인데..”
“유찬이 말고도 또 똥이 있어? 누군데?”
“그쪽은 진짜 하찮은 개똥이라서.”
두 사람은 잠시 말을 이어 나가다가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었다.
“우리 왜 자꾸 똥 얘기하냐. 유찬 옮았나.”
“그런 것 같네요.”
박 감독은 미묘하게 달라진 권건의 말투를 느끼고 있었다.
그전까지 벼랑 끝에 매달려 있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좀 더 뭔가.
뭔가 다르다.
“하지만 혹시 모르니까 팀원들에게 확인 먼저 부탁드립니다.”
더 자세한 느낌을 받기 직전, 권건이 빠르게 상황을 정리한다.
“음. 그렇지. 혹시, 정말 혹시 모르니까. 감코진도 쫙 돌릴게. 일단 난 확실히 아니다.”
“네. 알고 있습니다. 감독님과 코치님들 전부 다 아닌 것도 알고 있어요.”
심지어 그 권건이 희미하게 웃음까지 띠고 있다!
“어, 듣고 보니 그러네.”
“그래도 조심하는 건 언제나 좋죠. 한 사람이라도 휘말리면 곤란하니까요.”
“그래.”
박 감독은 아직도 이 상황이 어리둥절했다.
“그리고 그 뒤엔 우리가 진행하기보다는 해머스 쪽에서 진행하게 두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어?”
“해머스요. 한동규 감독님.”
“그걸 어떻게..”
박 감독의 눈은 이제 더 커질 곳도 없었다.
권건은 자료에 손을 대고 톡톡 두들겼다.
선명한 이름이 눈에 들어온다.
허진수.
“박진현 감독님 이름으로 빚 하나 달아두는 거, 나쁘지 않죠.”
“음. 그래. 고맙다.”
얼떨떨한 표정의 박 감독은 급히 음료를 들이켰다.
“그, 그리고? 어떻게 하면 좋을까.”
자기가 생각해도 멍청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말을 잇는다.
“큰 건이니 공을 좀 들여야 할 겁니다. 그래도 해머스는 언론사 쪽이라 충분히 능력이 있을 테고. 한 감독님이 아마 그쪽으로 아는 분이 있으실 겁니다. 해머스 모기업과 밀접한 분이시니까.”
“그래? 그랬어? 꽂은 거였..? 아니, 대체 어떻.. 아니,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게임과 스포츠는 몰라도 사회 면까지 조예가 깊지 않은 박 감독이 빠르게 메모를 해나가기 시작했다.
이건 그가 아예 모르는 방면이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평생 접하지도 않을만한.
“조사하다 보면 사건이 지나치게 커질 수도 있으니까 볼륨을 조절하는 것도 방법입니다. 관계자가 많을 수밖에 없으니까요. 하지만 그건 우리가 생각할 부분까지는 아니죠.”
“그렇.. 그럴 것 같다. 그럼 나는..”
“김 단장님의 도움을 받으세요. 서두를 필요가 없으니까요.”
박 감독은 자기와 다루는 업무 장르가 다른 김수연 단장을 떠올렸다.
권건의 말이 옳다.
자기 선에서 감당할 만한 문제가 아닌 것 같다.
근데 대체 어떻게?
“그리고 사건에서 해머스 감독님께서 잘만 하신다면 꽤 자리를 잡으실지도 모르죠.”
그 순간 권건이 가려운 부분을 긁어준다.
“그렇지. 생각한 대로만 된다면..”
사적인 감정에 휘둘리고 싶지는 않지만 한동규 감독의 불쌍한 눈빛이 선하다.
그는 완벽한 사람은 아니지만 노력하는 사람이고, 선수를 아낄 줄도 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런 정의 구현은 박 감독도 찬성하는바.
“제보자는.”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네요.”
권건이 검지를 입에 가져다 댄다.
박 감독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선수를 보고 있자니 예전부터 가끔 느꼈던 감정이 떠오른다.
이십 대 초반, 이 나이 또래의 선수들 같다기보다는 묘하게 나이가 많은 것 같은 느낌.
당장의 승리 하나에 울고 웃는 선수가 아니라 먼 길을 걸었던 사람인 것 같은 지친 얼굴.
하지만 오늘의 권건이 조금은 장난스럽게 웃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 마음이 편해진다.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근데 혹시 허위 정보라거나. 건이 네가 그랬다는 게 아니라.. 그냥 정보 자체가.”
마지막으로 박 감독은 작게 남은 의문을 던졌다.
사실 직접 상대와 연락을 해보지 않고서는 습득하기 내용과 추측이 아닐까 싶었지만.
“글쎄요. 그건 모르는 일이죠. 하지만..”
그의 왼쪽 입꼬리가 말려 올라가고 있다.
그리고 박 감독은 권건이 저런 표정을 지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잘 알고 있었다.
“틀림없이 우리 생각대로 될 겁니다.”
그건 항상 완벽한 승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