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화. FWX 권건
FWX 박진현 감독은 오랜만에 만난 해머스의 감독 한동규와 짧은 담소를 나눴다.
선수들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이게 정말.. 하.”
한 감독은 풀이 죽어 보였다.
터져버린 몇몇 선수들이 자기 앞에서 입을 꾹 닫아버렸기 때문이었다.
“제가 박 감독님한테.. 잘난 척을 그렇게 했었는데. 면목 없습니다.”
막내 선수 김진이 선수들끼리 이야기를 나눌 시간을 달라는 요청을 했기에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던 한 감독은 애꿎은 바닥만 발로 끄적이고 있었다.
“팀이란 게 제 맘대로 돌아가질 않네요. 잘하는 선수만 모아 놓는다고 다 잘한답니까, 뭐 이런 말까지 했었는데.”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박 감독은 옛 생각이 났다.
해머스를 이겼을 때 잘했다고 칭찬해주던 한동규 감독.
감독으로서 하는 게 없다고 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을 때 선뜻 응원해줬던 그.
기죽어있지 말라고,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도 감독의 몫이라고.
그리고 과거에 스톰 2군 감독 하석준이 권건의 욕을 하고 다닌다는 사실을 알려줬던 사람.
“해머스가 틀렸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근데 결과가 틀렸잖아요.”
물론 그때는 잠깐의 동정심에서 나온 말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이후에도 한 감독은 간헐적으로 연락을 해왔다.
“저희 FWX도 틀렸었죠. 그것도 오랫동안, 아주 많이.”
“그건.. 뭐..”
둘의 사이는 팀적으로 가깝다기보다는 사적인 친분에 가까웠다.
붙임성이 좋은 한 감독은 작년 올스타전에서도 다른 감독들에게 박 감독을 소개해줬고.
박 감독도 덕분에 꽤 인맥을 넓힐 수 있었다.
“솔직히 보면 아시잖아요. 알죠? 저희 문제.”
“알죠.”
“그렇죠. 그렇죠. 그래요. 다 알죠.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깊은 한숨.
“근데 왜 저희만 몰랐을까요? 스톰이 균열 생성기 팔고 다시 템 뽑는 건 줄 왜 몰랐을까? 개꿀템인 줄 알았는데.”
“템을 판다는 게 워낙 뭐. 쉬운 일이 아니니까요.”
“LOS에도 이런 시스템은 없다고. 왜 현실에 영향을 주냐고.”
선수 이야기다.
다만 이런 자리에서는 큰 목소리로 말할 일은 아니었기에 두 사람은 목소리를 낮췄다.
“우리 쿵짝 장단이 좀 안 맞아서..”
단장 이야기다.
“그쪽은 입김이 좀 세다는 말을 듣긴 했습니다.”
“근데 또 비싼 돈 주고 뽑아줬으니까 그만큼 결과 내놔라, 이 스탠스에요, 지금.”
인사 쪽에 큰 권한이 없는 수원 해머스 감독으로서는 답답할 뿐이다.
“하하..”
문득 박 감독은 FWX 김수연 단장을 떠올리며 마음속으로 감사 인사를 올렸다.
“그런데요.”
“예, 박 감독님. 듣고 있습니다.”
“제가 섣불리 조언하긴 어렵습니다만..”
한 감독이 초롱초롱하게 눈을 빛냈다.
“확실한 건, 안 좋은 뿌리는 빨리 뽑아낼수록 좋습니다. 커리어로 생각하면 어려운 일이겠지만..”
박진현 감독은 말을 골랐다.
해머스에서 데려간 허진수는 굳이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이 판에서 소문이 자자했다.
하지만 감독에게 선수 한 명을 그냥 쳐내라거나.
거기에 들인 손해를 감수하고 보내라는 등의 말은 쉽게 할 수 없는 말이었다.
다만 이런 면에서 박 감독은 경력자다.
FWX 2군의 사건이긴 했지만 한명을 내보내는 데에 깊이 관여한 적이 있었기 때문.
“지금 한 감독님께서 잃을 게 얼마나 남았나요? 분명 남아 있는 것들이 있겠죠.”
팀에 따라 다르지만, 대부분의 감독은 그럴 권한도 없거니와 쉽게 결정할 일도 아니었다.
심지어 감독이 ‘책임’을 져야 할 수도 있다.
이 리그의 감독은 어디까지나 학교에서의 담임 선생님 역할.
생기부까지는 관여할 수 있지만 학생을 함부로 퇴학시킬 수는 없다는 뜻.
그렇게 되면 감독의 말이 곧 법이 되는 비합리적인 상황이 벌어지니까.
그래서 박 감독은 더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선수들은 이 업계에 있을 시간이 우리보다 훨씬 더 길지도 모릅니다.”
다만 할 수 있는 말은.
지금의 선수들이 과거 자신의 ‘후배’들이라는 점.
그게 박 감독이 가지고 살았던 신념이다.
예전에는 손가락질받았던 그런 마음.
고심 끝에 내놓은 말에 잠시 침묵이 이어진다.
한동규 감독도 알았다.
그가 한 말이 얼마나 어려운 말인지.
“으하하하하하하!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눈물 난다.”
한 감독이 웃음을 터뜨렸다.
“박 감독님, 왜 이렇게 재밌어요? 나 진짜 박 감독님만 만나면 웃음이 빵빵 터져. 빵 터짐. 그 짤 알죠? 빵 옆구리 터진 거? 예? 너무 옛날 말인가? 아~놔. 진짜.”
분위기가 완전히 가라앉기 전 너스레를 떤 한동규가 박 감독의 어깨를 펑펑 두드렸다.
이 이야기를 더 하지 말자는 제스쳐다.
대신 한 감독은 고맙다는 눈빛으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고, 박 감독은 그 신호를 수신했다.
“험, 험.”
“흠, 흠.”
제 양 뺨을 쭉쭉 늘린 한 감독이 슬쩍 미소 지었다.
“그래서, 한약은 뭐 먹는데요?”
“예?”
“애들 뭐 먹냐고요. 진짜 살짝 말해줘요.”
“뭐더라. 한약은 아니고, 기본 비타민 챙기죠. 또 다 같이 먹은 게 흑마늘 진액. 예성이는 아로니아? 은호는 아연. 그리고.. 또.. 쏘팔메토인가..?”
박 감독은 기억을 더듬어 대답했다.
“쏘팔..메토요..? 갑자기..?”
“입에 착착 붙는 게 어디서 들은 것 같은데.. 이건 아닐 수도 있습니다.”
FWX 사옥 그 어디에도 없는 물품이다.
“나도 그거 어디서 들은 것 같다. 진짜 애들이 그걸 먹어요?”
모니터링 중에 발견한 것일 뿐.
“정말 아닐 수도 있습니다만..”
하지만 박 감독이 그 모든 걸 기억하기는 어려웠다.
“일단 알겠습니다. 리멤버. 리멤버.”
한 감독은 미심쩍은 표정이었지만 입으로 열심히 건강기능식품 이름을 되뇌었다.
결국 그는 먼 미래에 행복한 다둥이 아빠가 되어 종종 이 순간을 떠올리며 어쩌면 이때가 인생의 전환점이었을지도 모른다고 회상하지만.
이건 아직 벌어지지 않은 이야기.
“이제 슬슬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도 화장실에 갔던 지운이가 좀 오래 걸리는 것 같아서.”
“들어가세요. 뭐 좋은 정보 있으면 꼭 좀 부탁드립니다. 정말로요.”
“알겠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두 감독은 갈라졌다.
#
나는 쭉 걸어 나갔다.
“귀한 몸 왔냐?”
길 끝에서 썩은 가시가 악취가 풍기고 있다.
“주장.”
내 발걸음 소리에 고개를 돌린 허진수 앞에서 곽지운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건.”
곧은 발걸음이 곽지운을 향한다.
“나는 안 보이냐, 씹새야?”
“왜 여기 있어요? 감독님은? 가드님들은.”
“어. 나 그냥 잠깐. 화장실.”
곽지운이 머쓱하게 머리를 긁었다.
가만히 훑어보니 이건 대화라고 취급할 상황이 아니다.
들린 말도 그렇고.
“야. 권건.”
대화는 사람끼리 하는 게 대화니까.
“말 한번 하는 것도 뒤지게 힘드네.”
불쾌한 말본새.
퉤, 깨끗하게 닦인 바닥에 더러운 허진수의 침이 달라붙는다.
“온실 속에 처박혀있으니까 세상 굴러가는 것도 몰라?”
글쎄.
뭘 믿고 이렇게 자신만만한 건지.
온실에 들어가 있는 게 누군지 모르고 있는 것 같다.
“니가 왜 여기 있는지 모르겠네.”
“니? 나한테 니라고 했냐? 왜 나한테는 반말? 지나가는데 말 건 건 얘야. 얘.”
곽지운이 뭐라고 대답하려는 찰나.
“물어볼 거 있으면 물어봐라. 다른 사람 통해서 묻지 말고. 내 번호라도 줘?”
허진수가 그보다 더 빨리 입을 연다.
“우린 비슷한 타입이잖아.”
불쾌한 언사.
“내가 너랑?”
그 입가에는 묘한 만족감이 서려 있었다.
“어. 기회주의자.”
아하.
어떤 상황인지 알겠다.
“야, 나 진짜.”
곽지운이 손사래를 치며 무슨 말을 하려고 하길래 나는 고개를 저었다.
“꺼져. 상품 가치 없는 새끼야.”
그저 우리 원딜이 들은 말을 그대로 돌려주고.
“갑시다.”
곽지운과 함께 몸을 돌린다.
“야, 이 씹..”
자기가 한 말을 돌려받을 거라고는 생각 못했나 보지?
순식간에 얼굴이 시뻘게진다.
같은 포지션인 허진수와 나.
상품 가치?
아마 끔찍할 정도로 날거다.
하지만 평소처럼 더 심한 욕을 뱉으려던 허진수가 혀끝을 깨물어 말을 삼키고 다시 아무 말이나 지껄이기 시작했다.
“병신.. 친구놀이라도 하냐? 걔가 뭐라도 됨?”
글쎄.
나는 본의 아니게 허진수를 잘 안다.
뒤틀린 호감, 이간질, 일진 놀음.
잘나가는 사람과 친해지고 싶어서 주변을 깎아내리는 행동.
이건 ‘친구’라는 단어를 내가 불신하게 되는 데에 큰 역할을 했었다.
어차피 거기서 거기인 주제에 자기만 잘났다고 말하는 쓰레기들이 내가 가진 걸 보고 친구랍시고 다가올 때.
친구라는 이름 아래 더 많은 혜택을 요구할 때.
그거 되게 역겹지 않아?
이딴 게 친구라면 세상에 친구 같은 건 없다고 느꼈다.
“나 정보 좀 있는데? 커넥션도 좀 있고. 거기 애들은 모지리라 존나 도움이 안 돼요.”
모든 걸 비즈니스로 해결하는 게 안전하다고 느껴서 어느 순간부터는 좋은 사람들이 있어도 마음을 열지 않았던 내 모습은 그것 때문이다.
그리고 솔직히 나이 차이도 좀 많이 나잖아?
친구는 동년배끼리 하는 거 아닌가?
“어차피 이거 다 비즈니스 아니냐고!”
음, 비즈니스라니.
왜 나랑 똑같은 말을 하지?
기분 나쁘게.
비즈니스 아닌데.
“뭐라도 되는 건 맞네.”
나도 모르게 오른쪽 입꼬리가 뒤틀리며 올라간다.
그리고 동시에 꽤 민망한 깨달음이 정통으로 내리꽂힌다.
내가 결국 이게 마지막 선택이라는 걸 알면서도 다시 FWX와 계약한 이유.
제 자리를 양보한 문봉구.
은퇴하면서도 우리만 보던 정일도.
은퇴하는 원딜을 잡으며 엉엉 울던 이지호.
자기 밑바닥의 밑바닥까지 다 뒤집어 깐 이유찬.
제가 강한 줄도 모르고 계속 가스를 들이켜 약자가 됐던 김예성.
제일 잘나가고 싶다고 하면서 정작 높은 곳보다 낮은 곳을 더 둘러보는 멍청한 곽지운.
그 누구보다도 팀을 따라가기 위해 소리 없이 발버둥 치는 최은호.
그리고 과거 이기적이었던 최은호의 손에 이끌려 합류한 유상준.
FWX의 ‘선수들의 요람’ 정책.
감독님, 코치님, 그리고 아무리 돌고 돌아도 뻔히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몇몇 사람들.
여태 겪지 못했던 새로운 에피소드와 드라마.
그들은 모두 나를 중심으로 돈다.
하지만 반대로.
“친구.”
조연 없는 주연 없듯, 그들이 없으면 나도 돌지 못한다.
참 오래도 기다려줬다.
내가 타인인 것처럼 꼴사납게 ‘일이니까 일만 하자’는 태도로 침묵을 고수할 때.
봄비로, 햇빛으로, 때론 폭풍으로 날 두드렸던 거다.
아무도 나를 비즈니스로 대하지 않았다.
친구는 단순한 지인이 아니다.
함께 웃고 함께 우는 사이.
이 팀의 사람들이 울고 웃을 때 그 모습을 관망하던 나도 어느새 그 안에 들어가 있었다.
어쩌면 꽤 오래전부터.
“친구 맞아.”
생각해보니까.
설마 나 사춘기 청소년 같아 보였던 거 아니야?
아무도 내 사연을 모르니까 그렇게 생각할 만도 하다.
‘우린 친구도 아니야!’ 같은 말을 외치면서 불안 때문에 마음의 문을 닫고 방에 들어가 있는 그런 거.
근데 사실은 누가 말을 걸어줬으면 하는 그런?
와우..
내가 아무리 일을 잘해도 그렇지, 완전 흑염룡 말기 증상 아니냐고.
진짜 그렇게 보인 건 아니겠지?
“어?”
다행히 허진수가 더 멍청한 표정으로 서 있다.
하필이면 저딴 걸 보고 치료를 해?
왜 남들이랑 다르게 나만 이렇게 구린 데서 깨달음 얻고 그래?
이거 맞아?
정말 오랜만에 훅 들어오는 감정 변화에 나 자신이 낯설다.
“허진수. 청각에도 노화 왔냐?”
계기는 불쾌하긴 하지만, 그래.
인정할 건 인정하자.
난 완벽한 사람이 아니었다.
결과는 명백하고 모든 인간은 성장하는 거니까.
“얘 내 친구 맞다고.”
개똥도 약에 쓴다고 얘도 쓸데가 있네.
봉인한 사람이 봉인을 풀어주는 뭐 그런 설정인가?
“친구가, 씨발, 밥 먹여주냐?”
“양팔이 박살 났으면 먹여줄 수 있긴 한데? 그냥은 좀 어렵고.”
이제 좀 정상적인 표정으로 돌아온 곽지운이 태연하게 말대꾸한다.
“만약 제 팔이 부러지면 부탁드릴게요.”
“간병해주실 분을 불러주는 걸로 해도 될까? 나는 그때 바쁠 예정이라.”
“그것도 낫 배드.”
“오케이.”
하긴, 곽지운도 기죽을 타입은 아니지.
그리고 다행히 내 발언에 크게 의미를 두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니가 뭔데 끼어들어?”
“나? FWX 원딜.”
“그리고 주장이죠.”
“그건 맞지.”
물 샐 틈 없는 수비에 개똥이 뒷걸음질 치면서 끝내 싸구려 악역 같은 대사를 쏟아낸다.
“후회할 거다!”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하자 사람이 모이는 게 느껴진다.
“뭘?”
“결국! 후회할 거야! 너는 결국 FWX처럼 살 거다. 밑바닥에서 허우적대는, 그런 벌레들처럼 살 거야!”
와우.
나를 걱정해주는 거야?
니가?
나를?
“세상에서 제일 쓸데없는 걱정이네.”
웃음이 나온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아니었다.
“상관 없어. FWX처럼 사는 거. 내가 FWX니까.”
이 쓰레기를 완벽하게 치워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말 다했으면 꺼져.”
민망했던 내 과거에 고함.
“친구도 없는 새끼야.”
고마움의 의미로 조만간 상품권을 하나 보내줘야겠다.
누군가에겐 유용하게 쓰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