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게이머, 그만두고 싶습니다-224화 (224/326)

224화. 라그나로크

총 9주차의 정규 시즌 경기 중 6주차의 경기.

“아니, 아니, 아니이이이이! 권건이! 권건이! 그냥! 이거! 그냥!”

1위 대전 FWX가 10위 수원 해머스를 상대하는 날.

전승 팀과 전패 팀의 대결.

“갸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앗!”

“이 뒤로 FWX가 똘똘 뭉쳐서 들어가는 플레이! 굉장히 좋았어요!”

“이미 넘어간 경기에 쐐기를 박는 일격!”

“정글 5밴이 쓸모가 없는 그런 경기!”

“권건을 견제하려고 했지만 사실상 아예, 아예! 효과가 없었어요!”

“결국 이 선수의 픽을 막을 수 없다는 거, 우리 모두 알고 있었던 사실이거든요?”

“근데, 근데 이거! 그렇게나 열심히 막아보려고 했는데! 해머스가, 해머스가 열심히 권건을 제어해보려고 했지만 시바나로 이런 플레이를 보여줄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이거 오늘 탑 시바나일거라고 생각했던 순간, 밴 2페이즈까지 보고 나서 단숨에 돌려버렸거든요!”

“차니 선수가 탱 시바나를 보여줬다면, 오늘 권건 선수는 극딜입니다! 이거 파이어볼 한번 맞으면 몸 녹습니다! 녹아요!”

해머스의 과감한 밴에도 FWX는 여유만만하게 포지션을 돌리고.

“드리블, 드리블, 드리브으으으으으으을! 권건 드리브으으으을!”

“이걸? 이걸 또 피해? 이걸 또 피해? 이거 너무 인간미 없는 거 아니에요?”

“예에, 인간..이 아니니까요! 지금 막 용으로 변신합니다! 이 선수 분노 관리가..”

“이거, 시바나 이거. 지금 변신 빠르거든요? 빨라요! 5초, 4초!”

“그렇습니다! 하필이면 협곡이 바람! 바람용이에요! 지금 분노 생성량 극대화!”

결국 게임을 다른 장르로 바꿔버린다.

“2초, 1초! 다시.. 변신.. 합니다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진입! 브레스으으으으으으! 피해요오오오오오오옷!”

- 데스윙.. 또.. 떴냐?

- 오너라! 필연적인 종말을 받아들여라!

- 시바 아제로S여 영원하라

- 피할 수 없고 꺾을 수 없는 파괴자

- 만물의 종결자!!!!!!!!!ㅁㄴㅇㄹ

- 내가 바로 대격변이다!!!

- ? 이건 또 뭔 겜임?

- 애들은 몰라도 돼~ 아 애들은 가라~~~~

- 요즘 애들은 하라고 해도 못해.. 풍화가 심해서(씇)

- 지금의 필멸자 멤버로는 공격대 구성이 불가능합니다!

- 테에엥 도와줘요 바론쟝!

“이거 딜은 누가하죠? 이 협곡에 나타난 새로운 용, 권건의 목에 방울을 달 자는 누구인가!”

“바론? 바론이? 바론이 딜을? 바론이? 혹시 바론이 방울을!”

“바론이 딜 해주면 가능성 있을지도 몰라요!”

해머스는 땅을 치고 후회하고 있었다.

권건이라는 정글러에게 당한 후.

우리 역시 정글 피지컬을 강화하면 될 거라고 쉽게 생각한 게 천추의 한이다.

“어어, 이거, 이거, 붐보이가 먼저?”

“권건이 어그로 튕겨냈어요?”

재작년 겨울에 가장 핫했던 중국 귀환자 붐보이 허진수가 지난 스토브 트레이드 매물로 떴다.

성남 스톰의 급처.

다각 트레이드로 손해를 볼 수밖에 없었지만, 항상 리그 수문장 소리를 듣던 해머스는 이걸 기회라고 생각했었다.

리스크 관리만 할 수 있다면 꿀 매물이라고 판단했으니까.

하지만 솔랭도 아닌 팀전에서 ‘피지컬’을 1번 기준으로 삼은 대가는 컸다.

왜 과거의 프로 구단에서 챌을 두고 마스터, 심지어 다이아를 데려다 썼는지 알 것 같다.

그게 다 선조들의 지혜였던 거다.

“지금! 붐보이! 개인플레이 위험해요, 해머스! 개인! 개인! 비긴어개인 안 돼요!”

“갠플 안됩니다! 노 개인! 노! 노오오오오! 노 패인 노 개인!”

- 게임 개인 플레이 이것이 너희의 패인 패배는 그저 페인

- 그들의 손에 쥐어지는 합격 목걸이

- 이것이 근대 힙합?

- 어개인 앤 어개인 앤 어개인 앤 어갠앤어개인~

- 노 페인 노 게임!

- 새임 팀 노 게임

- 이제 그만해

- 킹치만 널 위해 준비한 오백가지 멋진 드립이 남았는데

- 남은 드립은 혼자 치도록 합시다

그들의 속도 모르고 달아오르는 장내 분위기.

“급해요, 급하단 말이에요! 다른 선수들이 준비가 안 됐는데!”

해머스, 지금의 그들에게 없는 것.

바로 팀웍.

특히나 허진수는 FWX만 만나면 더 제멋대로 굴었다.

마치 권건에게 개인적인 감정이라도 있는 것처럼.

혹은 뭔가 증명하고 싶은 것처럼.

하지만 그걸 가만히 두고 볼 리 없는 권건이었고.

“아아아아아아아! 이거! 이거! 이거! 이거어어어어어어! 결국! 결국! 바론이! 바론이! 바론이 선택한 팀으으으으으으으으은!”

“F-W-X!”

결과는 다르지 않았다.

“해머스의 성의가 너무 부족했던 모양인데요! 소원 안, 아니 못 들어줬습니다!”

“바론도! 용 스택이라도 모아서 드래곤볼로 소원을 빌어야 들어주는 거거든요! 제물이라는 게 있어야 하는데, 지금 솔직히! 너무! 따로따로 들어와서 플레이한 거잖아요, 해머스! 정신 차려요!”

따끔한 질책이 쏟아지고.

“결국!”

- [월간 레이드] 토벌 실패

- 해머스머해머스머해머스머해머스머해????

- 부활 횟수가 모두 소진되었습니다

- 권건의 남은 체력 : 92.8%

- 다음 시즌에 재도전하세요 ^^

- 해머스는 왜 다 하나같이 트롤이니 ^ㅗ^

- 근데 솔직히ㅋㅋ 해머스 애들이 존나 못따라오긴함ㅋㅋㅋ

- 여기 있으니까 붐보이 피지컬 좀 돋보이긴 하네ㅋㅋㅋㅋ 군계일붐

- 피지컬만 좋으면 다냐? 혼자 들어가면 어쩌라고

“FWX는 챔피언이 가진 잠재력을, 팀이 가진 잠재력을, 선수가 가진 잠재력을 그대로 뽑아내는 팀입니다!”

“현 1위 FWX가! 동부 마지막 전선의 해머스를 상대로! 완벽한 승리를 가져갑니다!”

- 축))))) FWX 11승

- FWX의 새로운 미래! 새로운 세기! 뉴 월드!

- 오늘 클래스쟝ww 두 번 다 출전했다능 하히후헤호

- 춋또 자기가 다 했다는 것처럼 기뻐하는 저 모션www

- 노 얼탱이 저스트 카와이www

- 저걸 또 받아주네ㅋㅋㅋㅋ 애들이 참 착해ㅋㅋㅋㅋㅋㅋ

- 걍 오늘 경기는 쉬어가는 경기ㅋㅋㅋㅋㅋㅋㅋㅋ

- 덕분에,, 목요일 밤,, 행복하게,, 보내겠읍니다..

- 그들은 시간의 수호자야.. 취미 생활할 수 있는 저녁을 만들어줬어..

“GG!”

아무런 이변도 없이 경기는 종료됐다.

두 세트 연달아 패배.

두 번째 세트는 바론까지 간 경기다.

아주 빠르게 끝난 경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선수들은 알았다.

이건 경기를 끝내는 타이밍을 FWX가 결정한 것일 뿐.

그들은 라인전부터 한타까지 단 한 순간도 FWX의 시선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마치 내가 챌린저 앞 플래티넘이라도 된 것처럼 압도당하는 기분이었다는 걸.

“얘들아.. 수고했다..”

꽤 오랫동안 해머스에 몸을 담았던 원딜러 이염이 입을 열었다.

격차는 개인의 실력에도 있었지만.

상대는 정글은 팀원들에 맞춰 플레이하지만 우리 정글은 혼자 플레이한다는 데에서 더 드러났다.

그래도 무슨 차이, 무슨 차이라는 말을 싫어하는 이염은 생각을 지우려고 애썼다.

슬프지만 허진수가 피지컬이 뛰어난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

내가 이해해야지.

내 실력이 부족해서 못 따라간 걸 수도 있어.

우리 정글이 먼저 들어갈 만한 사정이 있었겠지.

남들이 뭐라고 해도 우리 팀원은 우리가 먼저 챙겨야지.

그는 나이가 많은 원딜이다.

드문 이십 대 중반, 곧 후반.

곽지운이 만든 원딜 채팅방 [왕자님 모임]에서도 최고령자.

선수들 사이의 정신적 지주이자 주장이라는 이유로 은퇴를 미룬 이.

“에이, 씨발. 쓰레기 같네.”

하지만 자리에서 일어나 팀원들을 훑으며 짧은 한마디만 뱉고.

장비 정리조차 하지 않고 대기실 방향으로 향하는 정글러.

“허진수..”

“하..”

“...”

“형, 어떡해..?”

다른 선수들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염아..”

무거운 발걸음으로 걸어나온 해머스의 한동규 감독이 불안한 얼굴로 이염의 어깨를 감쌌다.

“도저히 안 되겠습니다.”

꾹 닫은 입이 다시 열린다.

집에서 게임을 하던 때와 달리 여기는 직장이자 일터.

팀이 저 정글에게 묻어놓은 돈.

틀림없이 높은 연봉, 사회로 치자면 나는 사원이고 그는 팀장급.

연봉도, 복지도, 사람도 썩 나쁘지 않았던 회사 해머스.

무책임하게 회사를 흔드는 ‘나쁜 사원’이 되고 싶지 않아 피해왔지만 이제 도저히 버틸 수가 없다.

“그..”

“못하겠어요. 감독님. 저, 이제 못하겠습니다.”

수문장이었던 해머스는 속절없이 무너지고 거기에는 감정 노동에 지친 이만 남아있었다.

모두 뼈저리게 깨달았다.

자기 직장을 퇴사하고 싶어지는 건.

그리고 프로가 프로게이머를 그만두고 싶어지는 건 정말 한순간이라는 걸.

수원 해머스.

파멸의 전조는 있었지만 그게 우리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순위의 몰락은 있었지만 그래도 돌려놓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헤임달의 최후가 라그나로크를 불러왔다.

#

우리 분위기는 더할 나위 없다.

경기 승리 후, 최은호는 가방에 달아놨던 인형을 팬들에게 던졌다.

뭐라도 보답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고 했다.

인형은 윤도형이 우리에게 선물로 나눠주고 간 것들이다.

눈이 큰 여자아이, 무지개색 고양이, 유니콘 모양 등 다양한 형태를 가지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귀엽긴 했다.

“어이어이! 클래스쟝! 이쪽으로도 던져달라고!”

“여기에 나도 있다고!”

그런데 언젠가부터 최은호의 팬들이 점점 어떤 색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건 왜일까.

“여러분의 사랑에 감사드려요!”

“죄은호~ 인기 많은데?”

“후후, 클래스 클래스.”

본인이 좋다면야 뭐, 됐다.

“수고 많았어!”

“고생했다.”

“건아, 나도 우통을 드는 것에 대해..”

“거니거니거니거니형님! 제가 레드 뺏은 거 보셨습니까?”

“말 끊지 마.”

숨 쉴 틈도 없이 감겨드는 FWX는 언제나 내 말에 충실했고.

이제 가끔은 내 예상을 넘어서는 특별함을 보여주고 있다.

나는 얼마 전, 감독님의 일상적 질문에 ‘여기가 좋다’고 답했다.

호불호를 따지는 질문에 호를 표현한 건 오랜만의 일이다.

마음을 주는 건 곧 책임을 뜻하는 거니까.

그래서 삼가왔던 그 표현이 왜 나온 건지 의문이다.

“돌아갑시다.”

“그래. 다들 잊지 말고 짐 잘 챙기고, 유찬아! 유찬아! 너 패드 또 두고 간다!”

“오우. 역시 감독님. 예리.”

“너 신상으로 바꾸려고 그러지?”

“김미드 천잰줄?”

여기서는 부담이 없다.

물론 경기에 대한 부담감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이번 시즌을 넘어 서머까지 본다면 각 팀에서도 경기력이 충분히 올라올 테니까.

그래도 이 기분을 따져본다면 안정감.

기본 업무도, 주변 업무도 과하지 않게 느껴지는 어떤 뭉글대는 감정.

FWX가 부자라서 그런가?

다른 부족함이 없어서?

생각보다는 실력이 쓸만해서?

“권건 선수, 단독 인터뷰 준비해주세요.”

아니면 다들 좀 이상한 사람이라 그런가.

같이 있으면 유쾌해지니까.

“권건 선수가 POM 1700점을 달성하면서 LKL 최초, 최고 기록을 세우는..”

거의 매 경기 만나는 아나운서의 말에 문득 지난날이 스쳐 지나간다.

“그리고 권건 선수의 데뷔 1주년을 축하하는 팬들의 현수막이..”

FWX에서 달아놓은 현수막.

팬들이 사비를 들여 만든 현수막.

직접 그린 그림, 오려 붙인 사진, 그리고 치어풀.

뒤엉켜 잘 들리지는 않지만 팬들의 환호가 들려온다.

정확한 데뷔는 스프링 4주차지만 지금은 주전 고정 시기라고 해야 할까.

콜업 축하, 데뷔전 축하, 고정 축하.

얼추 여기서 확실히 자리 잡은 기간이 그래서 우리 팀 팬들은 쭉 축제 기간이다.

그러니까 내가 콜업되고 이 이상한 놈들과 함께한 것도 벌써 1년.

이렇게 난 같지만 또 다른 1년을 살아냈다.

그리고 이 이벤트 후에는.

새삼스럽지만 남아있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는 사실 역시 깨닫고 만다.

“권건 선수, 인터뷰 감사합니다. 다음 경기도 응원할게요!”

“감사합니다.”

오랜만에 상념에 빠진 나는 인터뷰를 마치고 무대에서 내려와 천천히 대기실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어떻게 이렇게 됐을까.

분명 중국으로 건너갈 생각이었던 내가.

왜 이 지독하고 토나오는 회귀를 잊고 여기에서 웃고 있지?

같은 팀일 때는 결국 괴로워졌던 트릭스터와 미라쥬, 빅스를 거쳤던 숱한 선수들.

유니버스의 탑 최정인과 스톰의 미드 강준윤까지.

어쩌다 내가 그들과도 한 발 떨어져 채팅으로 농담 따먹기를 하고 놀 수가 있게 됐는지.

그 이유가 뭘까.

어둡고 길었던 통로 끝.

“..런 말이 아니라..”

문득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어차피 너같이 늙은 원딜들은 상품 가치도 없으니까 직접 갈 생각은 아니겠고. 그치?”

함께 들리는 목소리 역시 마찬가지다.

오랜 기억 속의 말투.

"우동 사리 좀 굴려라. 니가 왜 주장이겠냐? 누가 봐도 권건이 주장감인데 걔가 왜 주장을 안 받았겠냐고. 어?"

“뭐라고?”

“청각에도 노화 왔냐?”

나에게도.

처음은 있었다.

그리고 이 목소리는 그때 가장 강렬하게 들어박혔던 가시다.

선배로, 주전으로, 같은 포지션으로서 그랬다.

“권건 그 새끼 결국 중국 간다고 하지? 파기라도 한대? 위약금? 하긴 뭐. 안될 게 뭐 있겠어.”

“...”

“내가 그럴 줄 알았다.”

“아니!”

빛이 쏟아지는 길 끝에 서 있는 건.

지금의 내 주장과 아득한 과거 속의 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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