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게이머, 그만두고 싶습니다-223화 (223/326)

223화. 여기가 좋습니다

“그래, 건아. 어서 와라.”

FWX 박진현 감독은 권건을 맞아들였다.

“따뜻한 아메리카노. 맞지?”

“예.”

박 감독은 준비해놨던 음료를 내밀었다.

적극적인 스탭들이 시간 맞춰 준비해놓은 터라 아직 음료가 뜨겁다.

“조심해서 마셔.”

“감사합니다.”

권건이 느린 손짓으로 리드를 열자 컵 안에서 증기가 올라온다.

방 안을 가득 채운 향기.

선수들의 혈기 왕성한 연령대 때문일까, 대부분 얼죽아이거나 제조 음료를 좋아하는 친구들이 많다.

하지만 권건은 따뜻한 음료를 선호했다.

샷 추가도 하지 않은 스탠다드.

얼음을 띄워서 식혀달라고 하지도, 조금 식었다고 다시 데워달라고 하지도 않는다.

참 별거 아닌 평범함이지만 걸어 다니는 팬클럽 제조기인 권건을 두고 이것조차 검소하고 배려심 있다며 칭찬하는 스탭들이 많다.

뭐라도 해주지 못해 안달이다.

그래서 한동안 옆에 각설탕과 크림, 시럽, 꿀이 별도로 제공되던 적도 있었지만 권건이 손도 대지 않으면서 결국 또 그는 배려의 아이콘으로 못 박혔다.

박 감독도 매우 동의한다.

커피 향이 감도는 피드백 룸이 가열식 가습기가 틀어져 있는 것처럼 포근하게 느껴졌다.

어쩌면 이것도 배려?

물론 권건은 제조 음료의 당이나 유지를 좋아하지 않았고 그냥 날이 추워서 자기가 선호하는 걸 마실 뿐이었지만.

박 감독은 콩깍지가 씌어도 단단히 쓰였다.

문득 얼마 전 해머스의 한동규 감독이 칭얼거리던 잡담이 떠오른다.

작년에 한 감독이 박 감독을 위로한 후, 둘은 사적으로 가까운 사이다.

그는 이름을 말해주지 않은 모 선수가 특정 브랜드의 특정 음료가 아니면 입에도 대지 않는다며 고충을 토로했다.

그리고 반대로 한 감독이 물어본 요즘 어떻게 지내냐는 말에는.

“권건을 보여주었습니다..”

“예?”

“아니다. 아니야. 그만큼 좋다는 거지.”

“네.”

어쨌든 그런 특이점이 온 선수들은 어디에나 있기 마련.

박 감독은 자기 멋대로 굴어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못할 이 선수의 무던함에 늘 감사함을 느꼈다.

그래서인지 항상 벽이 있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이번 자료는 괜찮았고?”

“아주 좋던데요. 텍스트 자료 효과는 예성이가 가장 크게 보고 있는 것 같고, 유찬이는 최수철 코치님이 만들어주신 영상 자료에 만족스러워합니다. 문백산 코치님이 탑 전담 코치 역할을 잘 수행해주셔서 저도 시간을 많이 줄였고요. 이유찬은 직접 피드백이 많이 필요한 타입이라.”

권건이 제공했던 데이터 분석 방식.

이건 이제 FWX의 표준이다.

“그리고 김한빛 코치님이 주도하신 선수 버릇 분석과 타 팀 전략 역분석이 큰 도움이 됐습니다. 특히 트릭스터 전에서 그랬어요. 원딜 귀환 습관에 대한 예측이..”

다만 FWX 역시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내부 분석팀을 통해 다양한 시도를 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이 정글의 판단은 게임 내에서뿐만 아니라 밖에서도 정확하다.

팀워크나 개인의 실력과는 별개로 선수 자신도 판단하기 어려운 피드백 효과.

이를 인게임에서 판별해주는 요원이 있다는 건 감코진에게도 큰 도움이 된다.

게임 밖에서 ‘이 선수가 이 자료를 잘 받아들이고 있다’, ‘정확히 어떤 시점에 도움이 됐다’를 판단하는 건 쉽지 않으니까.

권건의 가치는 피지컬 혹은 오더 같은 요소에 그치지 않았다.

“덕분에 다른 인터뷰 시간에 선수들 개인에게 집중하기 좋다. 항상 고마워.”

“별말씀을요.”

선수별 각 15분, 그리고 권건에는 추가로 5분 더 배정된 인터뷰 시간.

몇 가지 필수 질문과 더불어 추가 일정까지 전달한 뒤 박 감독은 마지막 질문을 건넸다.

“여기 생활은 마음에 드니?”

“...”

권건이 짧게 침묵하자 박 감독은 심장이 떨리는 걸 느꼈다.

여태 이 선수는 이 질문에 평범한 즉답을 해왔다.

‘나쁘지 않다’, ‘감사하다’, ‘괜찮다’.

“혹시 불편한..”

혹시 권건이 불편한 대상이 사람이라면?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지?

선수들끼리 맞지 않는다면, 이럴 때는..

분명히 스포츠 지도 수업에서도 배웠는데.

수많은 갈등 해결론이 머리를 스쳐 지나가지만 이 순간에는 아무짝에도 쓸모없게 느껴졌다.

머릿속이 하얘진다.

“아뇨. 좋아요.”

“좋다고?”

하지만 그에게 돌아온 답은 긍정.

“네. 좋은 것 같아요. 아니, 좋습니다.”

박 감독이 당황을 감추기 위해 들었던 자료를 슬쩍 내리자, 그 너머에는.

자기도 이게 어떤 감정인지 잘 모르겠다는 것처럼 희미하게 미소를 띤 권건의 모습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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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KL) 대전 FWX, 2라운드에도 ‘또’ 연승 ]

[ 도전 정신을 계승 중입니다, 부산 호넷에서 마이 재등장 ]

1라운드와 이어지는 경기였던 부산 호넷과의 일전.

[ 도대체 이 픽에 숨겨진 비밀이 뭐길래? ‘마이 정글’ ]

부산 호넷은 화제가 됐던 픽을 한 번 더 보여주며 초반에 모든 것을 거는 전략을 시도했지만.

[ 힘 앞에 장사 없다.. ‘차니’ 이유찬, 정글에 탑까지 잡아먹으며 하드 캐리 ]

[ 바텀 압박의 신, ‘세자’ 곽지운과 ‘클래스’ 최은호 듀오! ]

FWX가 그 힘을 받아넘기며 1세트를 가져가고.

[ ‘비밀 요원 사이다’ 유상준, 또 한 번 출격.. FWX, 2세트에서 바텀 티릭 - 마이 조합으로 되갚아줘 ]

[ 호넷 JUG ‘세모’ 장민성,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1세트 밴픽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

[ (포토) 오늘도 댑(dap), 선글라스를 쓴 박진현 감독 ]

이어 2세트에서는 오히려 상대를 들이받아 서부 진입을 시도하던 호넷을 거꾸러뜨렸다.

[ FWX 감독 박진현(PerBe), “사이다(유상준)의 잠재력 보고 고민 없이 기용, 앞으로도 종종 출몰 예정” ]

[ 호넷 감독 차규정, “그게 우리는 아니었으면 바랬다. 처음에는 마이 정글인 줄 알았고, 그다음에는 탑, 그 뒤엔 미드나 원딜일 줄 알았으며, 결국 서포터 포지션이 그걸 쥐고 비원딜로 플레이할 때는 눈앞이 캄캄했다” ]

[ FWX 감독 박진현(PerBe), “(유상준은) 언제든지 무슨 역할이건 할 수 있는 선수. 하지만 나머지 팀원들이 받쳐주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 ]

[ 호넷 감독 차규정, “오늘 경기에서 또 한 번 영감을 받았다, 목표는 스프링 PO 진출” ]

[ FWX 사이다(Cider), “이 모든 건 팀 덕분” ]

순위 차이도 꽤 났고, 사적으로는 사이가 좋은 편인 두 팀은 화기애애하게 인터뷰를 진행했고.

“지운이, 너 좀 얼굴 폈다? 관리해? 살 빠졌네?”

과거 미남 컨셉을 밀어붙였던 호넷의 선수들은 우르르 대기실에 몰려와 수다를 떨었다.

“어.. 건이가 나 운동시켜..”

“좋겠네.”

“좋은가? 좋은가.. 좋은건가..”

“좋지. 누가 돈도 안 받고 운동을 시켜주냐?”

“그렇긴 하지.”

“우리는 요즘 우리는 컨셉 너네한테 뺏겨서 말도 아니야. 콘텐츠가 먹히질 않아. 조회수 떡락.”

곽지운은 전부터 인연이 깊었던 호넷의 미드 안우진과 사담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래, 근데 잘생긴 거 한 철이다.”

“오히려 좋아. 게임에 집중할 수 있는 분위기가 됐어.”

각 팀과 선수에게 사정이 있듯.

호넷 선수들 역시 그 나름의 고충이 있었다.

중하위권이었던 그들이 살아남았던 방법이 바로 그 컨셉이었으니까.

“그전까지는 매일 SNS에 올려야 한다고 사진을 찍어서 좀 피곤했거든.. 그거 팔아야 한다고.. 아침마다 사진 찍고, 몰래 동영상 찍고. 직찍 컨셉 하고.”

리그 성적이 어떻든 팀은 돈을 벌어야 한다.

그게 채널이건 화제성이건 간에.

들어간 돈은 많지만 성적이 받쳐주지 않는 팀이 할 수 있는 두 번째 선택은 방향이 어느 정도 정해져 있다.

“그건 몰랐네. 진짜 그런 걸 해?”

“어. 진짜 해. 너 FWX에만 있어서 몰랐냐?”

물론 원래부터 자본만큼은 튼튼했던 FWX는 예외였지만.

“그래도 또라이 같은 컨셉으로 좀 밀어붙여서 이제 ‘또라이’, ‘낭만 팀’ 같은 소리 들어서 좋다. 게이머는 게임으로 떠야지. 남성 팬도 많이 늘었다.”

“아무리 그래도 마이 정글은 좀.”

“너넨 뭐 바텀 마이 안 했냐?”

“그건 우리니까.”

“하..”

안우진은 씩 웃으며 곽지운을 툭툭 쳤다.

“그래, 다 가져가라. 우리도 너희 뒤에서 좀 받아먹으면서 가게. 아무튼 우리 감독님은 진짜 많이 만족한다. 이제야 좀 게임 팀 같다고.”

“다행이네.”

패배했지만 FWX와의 경기는 항상 도움이 된다.

몇 구단에서는 의미가 없을 줄 알면서도 LKL 측으로 최대한 FWX와의 경기 일정을 앞당겨달라고 요청할 정도.

그런 면에서 2라운드 첫 경기를 FWX와 시작한 호넷은 운이 좋다.

“나 그래서 요샌 염색도 안 해도 돼.”

“팀에서 염색도 시켰었어?”

“어. 옷도 다 협찬. 넌 아니야?”

“난 그냥 한 건데. 옷은 협찬 맞긴 해. 엄청 많이 주셨어. 맨날 입는 거만 입지만.”

“우린 방송할 때도 한번은 갈아입으라더라. 티 안 나게. 춥거나 더운 척하면서.”

안우진은 고생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곽지운의 하얀 머리를 흔들었다.

꾸준히 뿌리 탈색을 거치고 있지만 모근이 꽉 찬 곽지운은 아직 한참은 더 이 스타일을 유지할 수 있을 것 같다.

얼굴은 잘생겼지만 모발이 부족한 안우진은 10년 뒤를 상상했다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최근에는 샴푸도 바꿨다.

빼앗긴.. 들에도.. 봄이 올 것인가..

“모근.. 얘기.. 그만하자..”

“모근? 그래.”

“거 뭐야. 너 막내 컨셉으로 좀 뜨더라? 솜털 머리 막내상이라고.”

“내가 막내? 그래, 뭐, 팬분들이 좋아하면 그만이지.”

장유유서 따위에 관심 없는 곽지운이 어깨를 으쓱했다.

“차니 쟤도 머리만 잘 잘라놓으면.. 아이돌로 쳤을 때..”

하지만 호넷에서의 짬이 가득한 안우진은 손가락으로 FWX 선수들을 하나하나 꼽는다.

“광기의 장꾸상.”

“앞에 건 맞네.”

“저기 뭐야, 2세트 나온 서포터 사이다 쟤는 진짜 힙합 외길 인생상.”

“아!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방구석에서 힙합 하는 그런 거. 근데 의외로 범죄나 약은 절대 안 함.”

“완전 맞다.”

"나이스."

“그리고 권건은.. 확신의 센터상.”

권건은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호넷의 정글과 원딜, 서폿에게 둘러싸여 사인을 해주고 있었다.

차이가 작게 나야 밉기라도 하지.

게임도 져, 얼굴도 져, 키도 져, 스타일도 져.

안우진은 그냥 얼굴만 긁었다.

예전 같았으면 여드름 생긴다고 매니저가 얼굴도 못 긁게 했을 텐데.

차라리 편하고 고맙다.

“그리고 결국 모델이랑 배우 하는 그런 스타일.”

“우리 건이는 피지컬도 좋으니까.”

“쟤 이야기가 더 필요할까? 쟤는 나중에 중국 가면 한국 인구만큼 팬클럽 생기겠다. 더 되려나? 한국 인구 몇 명이냐?”

“그건.. 뭐.”

안우진은 곽지운의 얼굴에 스친 그림자를 눈치채지 못했다.

곽지운이 서둘러 말을 넘긴다.

“그럼 최은호는?”

최은호는 유상준과 함께 가방을 싸서 옮기고 있었다.

“너무 평범해서 랩이나 보컬 둘 중 하나는 무조건 잘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멤버.”

“음. 무조건 엄청나게 잘해야 함.”

“인정.”

그리고 마지막으로 두 사람 눈에 들어온 건 화이트보드에 뭔가를 끄적이는 김예성.

“그럼 예성이는? 예성이는 뭐야?”

“아, 쟤?”

안우진은 어깨를 으쓱하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여전히 그의 팬 중 대부분을 차지하는 여덕들이 물어다 준 김예성의 ‘가족 썰’이 영 설득력 없는 이야기는 아니라는 생각을 하면서.

“쟤는 무조건 배우상이지.”

“왜? 예성이가 잘생겼나?”

“꼭 뚜렷하게 생겨야만 배우인 건 아니니까. 오히려 반대지. 얼굴은 유전자 몰빵일 수도 있고.”

“하긴 쟤가 얼굴은 좀 평범해도 최은호랑은 포스가 다르지. 피부 좋고, 얼굴 작고, 키도 커. 요즘 애들은 다 그래? 다 그런 거냐고. 내가 2년만 빨리 태어났어도..”

곽지운의 푸념을 흘려들으며 김예성을 꼼꼼히 뜯어보니 확실히 그렇다.

닮았다.

“쟤랑 좀 친해지고 싶은데..”

정확히는 어떤 ‘가능성’과 가까워지고 싶다.

“그럼 말 걸어봐. 예성이 착해.”

“그래? 착해?”

“예성아!”

화이트보드를 가리고 섰던 김예성이 휙 돌아서며 고개를 모로 기울인다.

“어.”

그리고 그 뒤로 드러난 것은.

부산 호넷의 선수 닉네임을 모두 적고 그 위에 그려진 X.

꽤 오래전 일이지만 안우진이 그걸 못 알아볼 리가 없다.

호넷의 SNS에 업로드했던 FWX 도발용 사진과 동일한 구도니까.

“...”

맞다.

FWX 라온, 김예성.

자기편에게만 사근사근하고.

트래시 토크에서는 제일 공격적인 불여우.

권건한테 말 거는 사람들을 일일이 스캔하는 저 눈빛.

거기에 뒤끝까지 미쳤다.

“아니, 아니다.. 아니야..”

“말해보라니까? 예성이 진짜 착한 애야. 말도 곱게 하고 화도 안 내. 낯을 좀 가리지만..”

“감수성 없는 숟가락 새끼야, 제발 조용히 해..”

“숟가락? 말 다했냐? 근데 나 왠지 이 말 어디서 들어봤던 것 같은데..”

답답한 곽지운에게 한마디 더 하려고 할 때.

김예성의 싸늘한 눈빛과 마주친 안우진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아직 협곡이었나?

템 차이 지리네.

“바이바이, 에이린..”

“에이린? 에이린이 여기서 왜 나와?”

“룩북 콘텐츠가 됐건 연예인 초대석이건 그냥 빨리 콘텐츠 해라. 그냥 후기나 말해 줘.”

“?”

곽지운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 전에.

그에게는 뜻밖의 계기가 되는 해머스와의 일전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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