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화. 눈을 공격해
“다이.”
“왜? 왜 갑자기? 왜 서렌?”
“카메라. 너무. 많다.”
다시 시작한 게임.
이 카드 게임은 종장에 다다랐다.
“못. 하겠다. 현기증..”
“상준이 괜찮아?”
“야, 빨리 메디컬 체크 들어가!”
“그냥 얘 하기 싫어서 그러는 것 같은데?”
“그럴 리가 있어? 은호 형은 어떻게 사람을 항상 그렇게만 봐?”
“아니, 진짜 누가 봐도..”
“너무 못됐네.”
“이런. 큰. 촬영. 처음이라..”
바짝 마른 유상준의 팔이 제 눈을 가린 채 맥락 없이 좌우로 흔들린다.
운동이 먼저일지 식단이 먼저일지 고민되는 팔뚝이다.
나는 아직도 유상준에 대한 피지컬 플랜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언뜻 보기엔 말랐어도 근력과 체력은 최은호보다 나은 것 같은데.
헬스보다는 클라이밍이 어울리는 실전 체육인 타입인가?
“하긴, 생각보다 우리 카메라가 좀 많긴 해. 개인 캠도 있고 그러니까.”
“게임. GG.”
“그래, 그래. 그럴 수 있어.”
“유상준 저거 지 패가 안 좋아서 저러는 것 같..”
“아, 유죄은호 질투하지 말라고.”
“혹시 그거 내가 유죄 인간이란 뜻이야?”
“그렇긴 해. 근데 건이가 유죄인 거랑 네가 유죄인 거랑은 죄질이 달라.”
“나는 무슨 죄인데? 너무나 팬을 사랑한 한 죄?”
“그걸 말로 해야 아는 네가 너무 자랑스러워.”
“이..”
“감독님! 감독님! 형들 또 싸워요!”
다시 싸움 아닌 싸움이 붙은 사이.
휘청이듯 팔을 내린 유상준이 슬쩍 내게 몸을 기울인다.
핸드로 들어오는 카드 한 장.
타짜야?
“장땡. 후방 지원.”
귀를 스치는 쇠를 긁는 목소리.
내가 가지고 있던 카드 위로 겹쳐 들어온 카드는 선명한 퀸(12).
공개되어있는 내 패와 합치면 최고에 가까운 조합.
“밑에서. 한. 장.”
한쪽 눈썹을 찡긋거리는 것 같았는데.
착각인가?
“두 장. 올리고. 또. 한. 장.”
“...”
나와 이유찬의 공개된 패는 킹(13).
동률.
손에 쥔 카드가 승패를 좌우한다.
“이유찬은. 손에 구땡. 들고 있을. 것이여.”
입술조차 움직이지 않고 말을 쏟아낸 유상준이 남은 자기 초콜릿을 슥슥 쓸어 담았다.
얘는 대체 어떤 인생을 살아온 걸까?
전에도 뭐더라.
조직 폭력배가 하는 일을 기가 막히게 알아듣지 않았나?
다시 보니까 깡마른 이 몸.
어떻게 보면 살무사, 독사, 행동대장 따위의 호칭이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언뜻 안경 너머로 얇은 눈빛이 희번덕거리는 게 비친다.
김예성이 여우 같은 계략과 앙칼짐을 지닌 사람이라면 유상준은 뱀의 독을 가진 빌런의 눈이다.
“나는. 여기. 걸게.”
그리고 그 초콜릿들은 그대로 내 앞에 쌓인다.
“유상준..”
바텀을 말리는 척하던 김예성과 유상준의 눈빛이 허공에서 부딪힌다.
짧고 빠른 수신호가 오가고 김예성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유상준도 끄덕인다.
얘네 뭐야.
지금 이거 장르가 맞아?
“야야, 그런 게 어딨어! 다른 사람한테 초콜릿을 주면 어떡해?”
“은호 형도. 뽀찌. 받았어.”
물론 진작에 다 날렸지만.
“그건.. 그건..”
“상관. 없어. 날려도. 항상. 우리. 정글. 믿어.”
“억.. 너 또 플러팅..”
음.
그래, 뭐 어떻게 살아왔건 현재가 중요하지.
그때.
“잠깐.”
좌중을 가로지르는 낮은 목소리.
“동작 그만. 지켜보고 있다.”
하나, 둘, 세엣.
분명 자기 초콜릿을 세는 데에 여념이 없어 보였던 이유찬.
다투던 바텀 듀오도, 눈빛을 주고받은 미드와 2번 서포터도 침을 삼킨다.
“카드 내려놔!”
이미 여럿이 아웃된 상황.
카드를 내려놓을 사람은 나와 이유찬뿐.
나는 핸드 카드를 테이블에 내려놓고 몸을 뒤로 쭉 빼 앉았다.
“내가 빙다리 핫바지로 보이냐?”
직진 또라이의 눈에 광기가 넘실거린다.
게임 테이블에도.
멀리서 구경하던 감독님과 코치님, 갤러리들도.
그리고 촬영팀의 카메라 위로도 묵직한 침묵이 가라앉는다.
압도.
“어이, 꽁지꾼.”
“왜.”
이 판을 뜨려던 유상준이 눈을 가늘게 뜨고 더벅머리와 눈싸움을 벌인다.
뱀과 호랑이의 싸움.
“꽁지꾼이 뭐야.”
“돈 빌려주는 사람.”
“아.”
소곤소곤한 갤러리들의 목소리 위로 칼처럼 날카로운 언사가 올라온다.
“갈 땐 가더라도 손모가지는 내놓고 가셔야지?”
“개. 소리.”
“자, 모두들 보쇼!”
순식간에 모든 이목과 카메라가 테이블로 모인다.
이유찬은 평소처럼 우렁우렁하게 외쳤다.
“너는 아까부터 혼란을 저장했지. 그리고 거니에게 카드를 건넸을 것이여.”
혼란을 저장이 아니라 분란을 조장이겠지만.
제법 예리한 추리다.
“증거. 있어?”
“증거? 있지.”
“시나리오. 쓰고. 있네.”
“좋게 봐주려고 했는데 안 되겠구먼.”
탁, 소리가 나게 자신의 카드를 내려놓은 이유찬이 짐승처럼 날렵하게 테이블 위로 뛰어오른다.
혼자 운동 좀 했나 본데?
FWX의 휴게실에 있는 묵직한 카드 테이블은 성인 남성의 무게에도 미동조차 없다.
이런데도 돈을 썼다니.
참 대단한 팀이야.
“무슨. 짓. 이야.”
“야, 이건 좀..”
“김마담. 넌 빠져.”
어딘가 뒤가 구린 미드는 살짝 시선을 피하고.
드디어 이유찬이 유상준의 카드에 손을 올렸다.
흩어지다 만 카드가 한자리로 모인다.
“나는 하트. 거니는 스페이드. 김미드는 다이아. 깍지 형은 클로버.”
트럼프 카드의 무늬는 4종.
우리는 여섯 명.
“예언자 맛 쿠키도 클로버, 그리고 유상준 너는.. 거니와 같은 무늬를 골랐어. 스페이드.”
두 개의 덱을 사용하는 만큼 무늬의 중복이 나올 수밖에 없다.
“무늬가 같은 두 허접은 일찌감치 탈락했고, 이제 너와 거니가 남았지. 그래서 나는 너를 쭉 지켜봐 왔다, 이 말이여. 알아들어?”
“이유찬이 똑똑해 보이는 건 처음이다.”
“나는 쟤가 정상적인 말을 이렇게 길게 하는 걸 처음 봐.”
“근데 깍지야, 두 허접이 우리를 말하는 거냐?”
“그런가 본데.”
“클로버가 뭐 어때서?”
“약간 레번클로 취급이긴 해.”
“?”
감탄과는 별개로.
테이블 위의 이유찬은 유상준을 향해 낮게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이유찬은 내가 유상준의 패를 받은 걸 확신하고 있다.
동체 시력이 좋다는 게 이런 식으로도 유용한 모양이다.
“쫄?”
하지만 유상준은 아직 흔들림이 없다.
안경 너머로 어떤 눈을 하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다.
“아니.”
“해보자고.”
그리고.
“어어어어!”
“놔두세요.”
“하지만..”
뒤집기 시작한다.
유상준이 이를 악문다.
“어어, 어어어어어!”
“괜찮아요.”
석 장, 넉 장.
“어어어어어어어어어!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해?”
일곱장, 여덟장.
그리고 전 판과 그 이전에 사용해 무덤으로 넘어갔던 카드까지 모두.
그리고 총 열세장이어야할 유상준의 카드 패는.
“한장이..”
이유찬의 허연 이가 음울한 조명 아래 빛난다.
“없네?”
총 열두장.
“유상준의 퀸은 어디로 갔을까?”
침묵.
소용돌이 같은 침묵이 공기를 빨아들인다.
“퀸은.. 발러..한테.. 간 거 아냐..?”
분위기를 잘 타는 최은호가 몸을 가볍게 떨며 불안한 듯 사방을 둘러본다.
가벼운 콘텐츠로 시작했던 카드 게임이 이제 사람 목숨이라도 달린 것처럼 험악해졌다.
“패를 까보면 모든 것이 밝혀지겠지.”
이유찬은 이제 짐승 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어떻게 생각해.”
나는 늘 유지하는 그 표정 그대로.
양손을 천천히 들어 남아있는 카드가 없다는 제스처를 취한다.
“이게 퀸이라고?”
그리고 톡, 톡.
카드를 두 번 두드린다.
“터치 금지!”
"저 녀석들을 주시해!"
“오케이!”
다들 예민하긴.
“퀸. 그건 스페이드 퀸이다.”
이유찬과 나의 열린 패는 동일.
한 장으로 승부가 결정된다.
지금 시점에서 이유찬이 들고 있을 수 있는 카드 중 숫자가 가장 높은 건 에이스(14).
그다음으로는 9.
하지만 반대로 재밌는 건.
이유찬이 내 패가 퀸(12)이냐, 아니냐를 나에게 따지는 이 행동 자체가.
자신의 카드가 에이스(14) 같은 광땡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에 가깝다는 거지.
내 패를 확신한 이유찬이 퀸보다 낮은 카드를 들고 있다면 이 게임에서 이길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이 패가 퀸이라는 데에. 올인.”
숫자 싸움이 아니라 다른 싸움을 벌이는 것.
“그래?”
나는 미소 지었다.
뒤로 물러나 있던 유상준이 재빨리 내 눈치를 보다가.
“야. 유포터. 이거 지면 니 초콜릿도 나가리야. 알겠어?”
이유찬의 부라리는 눈빛에 한 발 뒤로 주춤 물러난다.
“...”
끝까지 악으로 깡으로 버티던 유상준이 무너지기 시작하자 상황은 극단으로 치달았다.
“까? 깐다?”
남은 건 기 싸움.
나는 다시 한번 카드를 툭 쳐 테이블 가운데로 밀어낸다.
카드는 이유찬의 발치에 닿는다.
“거니 너..”
“후달리냐?”
슬쩍 푸시.
“아니? 그럴 리가? 오냐, 여기에 형님 호칭까지 건다.”
“형님?”
이건 나도 잠깐 멈칫했다.
이유찬보고 형님이라고 부른다고?
잠깐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한 일이다.
콘텐츠 제목 떴네.
[ FWX 형님배 카드 게임 #밑장빼기 ].
“이거 지면 나한테 형님이라고 부르는 거다. 시키는 대로 다 한다는 뜻.”
센데?
“어디까지?”
“심부름부터 갱, 블루랑 레드까지.”
“우끼끼! 그건 월권이다!”
“우우우우우우!”
“국민청원 들어갑니다!”
“그럼 앞으로 내가 골라주는 스킨만 쓰기?”
“아니, 안.. 안 되는데.. 람블은 역시 슈퍼 갤럭시가..”
“스킨 정도는 괜찮은데?”
“그건 오케이죠~”
왜 그걸 너희 맘대로 결정하는데?
나는 숨을 참았다.
“...”
“진짜 깐다!”
유상준의 동공이 미친 듯이 흔들린다.
손은 빨랐지만, 자신의 스킬을 과신한 나머지 이런 상황까지는 예측하지 못한 것 같다.
“쿵짝짝 쿵짝짝..”
숨을 오래 참자 공기가 희박해지는 기분이다.
이건 좀 힘들다.
- 착!
재빠른 손놀림에 뒤집힌 카드가 테이블에 달라붙는다.
아, 진짜 힘들다.
스페이드.
“어?”
“어어어어?”
“이건..”
최약의 패.
숫자 2.
“익?”
“엥?”
“뀽?”
“큽.”
웃음을 참느라.
너무 힘들다.
“이게 왜 여기서 나와?”
“졌어?”
“건이가 졌어?”
“아니지.. 승부는 저게 퀸이냐 아니냐니까..”
“이유찬 뭔데?”
툭, 이유찬의 손에서 떨어진 카드는.
유상준이 예측했던 9.
“내가.. 내가 봤어, 카드 꼽아주는 거 분명히 봤는데..!”
“이봐. 친구.”
나는 참았던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확실하지 않으면 승부를 걸지 마라, 이런 거 안 배웠어?”
“분명히 봤는데..!”
“얘들아.”
손을 튕기자 대기열에 있던 모든 이들이 뛰쳐나와 테이블 위에서 이유찬을 끌어내린다.
“처리해라.”
“예!”
“가자, 막내야!”
“막내야, 제법이구나!”
“막내야! 또 속았구나! 하하하하하하하!”
“넌 알았냐?”
“몰랐지! 하하하하하하!”
어차피 죽었어야 할 패.
내가 왜 이유찬이 유상준의 남은 카드를 까게 그냥 뒀겠어?
“카드. 어디.”
다크템플러처럼 은밀히 다가온 유상준이 복화술로 중얼거리길래 나는 끌려 나가는 이유찬의 뒷모습을 향해 손짓했다.
뒷주머니.
이유찬의 뒷주머니에서 스페이드 퀸이 선명하게 웃고 있다.
“언제..”
“손은 눈보다 빠르다.”
나는 아까 유상준이 그랬던 것처럼 한쪽 눈썹을 찡긋거리며 테이블에 남아있는 이유찬의 초콜릿을 한 움큼 쥐어 그에게 내밀었다.
“감.동..”
유상준은 어울리지 않는 깜찍한 포즈로 양손으로 입을 가렸다.
“좋은 전략이었어.”
스겜은 언제나 환영이야.
“그리고 막내는 앞으로 스킨 쓰는 것을 금한다.”
“스킨을..?”
“형님이라고 불러라.”
“안돼! 거니 형님! 그것만은 제발! 나 우승하고 스킨 만들 거란 말이야!”
고분고분하긴.
“그것도 사용 금지다.”
“노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2인자 2유찬 2위 하다.”
“콩! 콩! 콩!”
처절한 외침과 함께 마지막 상대였던 이유찬이 대기석에 파묻히며 아웃됐다.
이게 일이라고?
“하하핫.”
솔직히 이런 게 내 필수 업무라면 별로 부담스럽지 않은 것 같다.
이 멍청이들과 함께라면.
내 안에 있던 무언가가 조금 달라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