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FWX의 시계는 더 빨리 돈다
게임을 시작하자마자 간단하게 승패를 점칠 수 있는 방법들이 있다.
솔랭에서는 그렇다.
좋은 픽.
AD와 AP, 포지셔닝의 조화로운 구성.
경험이 충분한 팀원들로 구성되어 있는가?
이건 뭐.
꼭 LOS같은 AOS 장르가 아니라도 1인칭 슈팅 게임 FPS에서도 그럴 거다.
좋은 무기.
균형 있는 돌격과 저격, 공격과 지원의 구성.
승리를 많이 해 본 팀원들로 구성되어 있는가.
다른 장르 게임이나 스포츠에서도 그렇다.
사실 이게 전부다.
실력이 비슷하다는 전제 아래.
게임이란 건, 스포츠란 건 결국 이런 요소로 결정되어야 하는 게 맞다.
리그 스포츠가 되는 순간 상호 간의 협력이 좀 더 요구된다는 것 정도?
하지만 언제나 예외는 있었고.
우리는 지난번에 이들을 만나 패배했다.
그리고 갚아줄 기회가 없었다.
트릭스터가 월챔 무대에서 워낙 빨리 퇴장했으니까.
그렇다면 오늘의 인천 트릭스터와 대전 FWX.
이 경기는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조화로운 구성, 확인.
경험이 충분한 팀원들, 확인.
좋은 픽?
어차피 두 팀 모두 누군가의 말처럼 중소기업 박람회 느낌을 물씬 풍긴다.
연구, 좋지.
새 픽, 좋지.
하지만 트릭스터가 영원히 알 수 없는 한 가지.
망망대해의 해류처럼 미묘하게 움직이는 메타 속에서.
그 부력을 상쇄하는 가장 훌륭한 봉돌의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나라는 점.
여태까지 무기를 숨겨오다가.
하필이면 우리에게 이렇게 싸움을 걸어 온 건 틀림없는 트릭스터의 실수다.
조금 늦었겠지만 힌트를 주자면.
트릭스터는 초반 선빵 필승에 모든 것을 걸었어야 했다.
마치 강팀을 상대하는 약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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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트릭스터가 전령을 가져가긴 했지만.”
남동현 해설은 빠르게 눈을 굴렸다.
“권건 선수가 뒤통수를 때리는 카정을 해냈죠.”
“이거 진짜 희한해요. 전령을 앞에 뒀을 때 보통 먹냐, 먹지 않냐는 선택을 하지! 전령 치는 사이에 돌아들어 가서 간 크게 카정을 하고 전령 지연만 시키고 가지는 않거든요.”
“이건 트릭스터에서도 약간 실수가 나와야 하는 거였거든요. 근데 대체 어떻게 읽어낸 건가요?”
“어쨌든 람블의 진영 파괴 능력이 제대로 나왔습니다. 확실한 건, 이 선수 선을 잘 그을 줄 아는 선수예요!”
“이러면서 불리했던 FWX 탑 쪽에서 많이 회복했고, 미드는 압박 쭉 이어갈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이게 목표였어요. 지금 갱을 가기 어려운 챔피언이거든요.”
“트릭스터의 정글 쟈크의 선택지가 좁아졌습니다. 반드시 다시 전령을 솔로 트라이해야 하고, 상체 쪽 리젠 타이밍이 맞지 않아 그다음 동선 역시 뚜렷해집니다.”
상대가 뭘 원하는지 알고 있다.
상대가 무엇을 의식하는지 알고 있다.
짧은 시간 해설진은 권건의 생각의 흐름을 좇아 감탄했다.
전장에 개입한 것은 단 한 번.
버릴 건 버리고, FWX의 챔피언들의 특성을 살린 한 수.
킬도 나오지 않은 경기.
하지만 자연스러운 운영.
“사이다, 사이다, 사이다! 궁극기! 정확하게 메다꽂습니다!”
“아펠, 쓰러져요!”
“정글의 발이 묶인 사이 바텀에서는 드디어 라인 솔로킬이 터졌습니다!”
“여태까지 정말 잘 버텨왔던 트릭스터의 바텀인데! 원딜이 먼저 쓰러지면서 퍼블이 닐랴에게 넘어갔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첫 소식이 들린다.
- 으앙 우리의 안전자산 바텀이
- 요즘 세상에 안전자산이 어딨어 십
- ㄷㅊ
- 자산 얘기만 나오면 민감해진다
- 형들 왜 그래? 주식이라도 했어? 혹시 폭락이라도 한 거야? 설마 코인은 아니지?ㅎ
- 나는 천 꼬라박음ㅠ
- 난 오천ㅜ
- 난 억ㅗ
- 이런 데서 허세 좀 부리지 마;;
- 킹치만.. 이런 말이라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남아있는 게 없는걸..
- 이럴 때 자랑?이라도 해야 ‘쓸모’란 것이 생긴다
- 그래.. 많이 해..
- ㅠㅠㅠㅠㅠㅠ
“그래도! 이 정도면 트릭스터 바텀도 잘 버티긴 했어요.”
“그렇습니다. 사실 FWX에서는 더 큰 이득과 압박을 기대했을 가능성이 높거든요. 아펠이 죽긴 했지만 당장 트릭스터에 어마어마한 손실이 있었던 건 아닙니다! 미드에서 리뉴 선수가 백업을 와주면서 웨이브 손실도 최소화했습니다. 센스 플레이였죠?”
“무우우우울론! 원딜 입장에서도 그렇냐고 물어보면 원딜들은 대부분 그렇지는 않다고 대답하긴 해요!”
- 그렇지 내가 먹어야지 난 돈벌레니깐ㅎ
- 우리 팀원이 대신 먹었다고 나한테 돈 줄 수 있는 거 아니자너
- 하루빨리 돈 거래 시스템을 만들어달라
- 그러면 서포터한테 삥 뜯을 거잖아
- 야 너 집에 가서 도란칼 하나 사고 300골 남겨와
- 서포터 차별 멈춰!
- ㅋㅋㅋ영락없는 짐꾼 망아지행ㅋ
- 아아 돈거래가 안되는 세계관이라니 얼마나 합리적인가..
“별수 없습니다. 안 죽는 게 최선인데 압박이 잘 이루어져서 어쩔 수 없었어요.”
“그래도! 오히려 좋아! 어차피, 예! 한 번 정도는 죽을 각오를 하고 뽑았던 픽인 거거든요! 긍정적인 마인드로 무장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그런 걸로 합시다. 아무튼 라인을 백업한 미드는 빅터르인데다가 파일럿이 리뉴 선수잖아요? 벌써 올해의 미드 자리에 거론되는 선수 중 하나죠.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 투.. 자..?
- 또 울음벨 눌린다
- 지금 사? 사지 마?
- 사지 마! 새끼야 사지 마!!!!! 저금해!!!
- 사.. 어차피 내 돈 아니니까 사..
- 원딜 : 선생님.. 투자는 본인의 선택이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 ㅋㅋㅋㄹㅃㅃㅋㅋㅋㅋ
- 아 억울하면 죽지 말라고ㅋㅋㅋ
“차니 선수가 공격적인 픽에서 수비적인 픽으로 바리에이션을 넓혔다면, 세자 선수는 그 반대입니다.”
“물론.. 사실 벌써 몇 년 전 이야기긴 하지만. 세자 선수의 시그니처 픽 중 하나가 드래이븐이었던 시절도 있었던만큼 기억을 되찾았다, 이렇게 보는 게 맞긴하지만요.”
“어쨌든, 이 틈을 타서 FWX는 미드 라인으로 복귀하는 빅터르에게 압박을 넣어주고..”
“자연스럽게 두 번째 용을..”
“어어, 이러면 이야기가 좀 다른데요.. 손해가 좀 더 커지는..”
중반에 강한 FWX와 후반에 강한 트릭스터.
“트릭스터는 드디어 전령으로 바텀 타워 공략에 성공했습니다.”
초반, 중반, 후반.
일반적으로 시기를 말하는 기준은 시간이다.
하지만 해설진은 알았다.
“강타 레벨 차이 좀 나요, 이거, 결국!”
“슬슬 FWX 상체 힘 올라오기 시작했거든요? 하지만 아직 트릭스터 바텀의 전성기는 오지 않고 있습니다!”
“두 번째 전령! FWX가 가져갑니다.”
“시간이 이렇게 빠른가요? 세 번째 용 타이밍도 벌써 코 앞이거든요!”
선카정.
상대의 오브젝트 공략을 ‘지연’ 시켜 카정과 동선을 억제하는 것.
그리고 자신들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오브젝트를 빠르게 가져가는 것은.
서로 다른 시간대를 살아가게 하기 위함.
이 게임에서의 시기의 기준은 시간이 아니다.
아이템과 성장의 상태.
대체로 이 흐름은 시간을 따라가곤 한다.
하지만 절대적인 기준이 뒤틀리는 순간.
트릭스터의 초반은 FWX의 중반이 되고.
트릭스터의 중반은 FWX의 후반이 된다.
그리고 트릭스터에게 후반이 왔을 때, FWX는 게임을 종결할 것이다.
“이번 세트의 영혼은 화염이거든요!”
“화염의 협곡!”
트릭스터 선수들의 마음에도.
경기에도 불이 붙기 시작했다.
“3용 막을 수 있어?”
“지금 안될 것 같은데.”
“왜 차이 나지?”
선수들도 몇 가지 근거는 추론할 수 있다.
최소한 바텀에서 퍼블을 당했다는 것이 유일한 근거가 아니라는 건 모두가 알고 있다.
하지만 인게임에서의 완벽한 즉시 분석은 어렵다.
해야 할 일은 많고.
시야는 차이 나니까.
이건 코칭 박스에서 해야 할 일.
“그러면.”
트릭스터 미드 채지한은 답답하다.
용케도 FWX가 여기까지 왔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이제 내가 상대니까.
얄팍한 수단은 통하지 않는다.
CS는 거의 완벽하다.
하지만 이상하게 옴짝달싹도 할 수 없다.
그저 상위권 수준의 팀을 만났을 때는 괜찮았지만.
타이밍 운영까지 탄탄한 팀을 만나자 목이 옥죄어 온다.
LKL 수준이 이렇게 높았던가.
이건 사람이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 건데.”
버겁다.
모든 오더를 하는 건 불가능하다.
내가 주인공이 아니었나?
아니면 이게 주인공에게 주어지는 시련인가?
부족한 놈들을 데리고 끝내 승리하라는 미션?
아니.
그렇다기엔 이 선수들의 지난 스펙이 그리 떨어지지도 않았다.
“용.. 주자.”
“3용을 그냥 준다고?”
“그리고 끊어먹자.”
“나도 이번 코어만 나오면 괜찮거든? 이번에는 용 자체를 노리기보다는 끊어먹을 기회 엿보자.”
원딜이 동의한다.
그리고 벌어진 전투.
“2대 3 교환!”
“FWX에서 탑과 서포터!”
“트릭스터에서는 탑과 정글, 서포터가 쓰러집니다!”
조급한 마음.
“지금 쟈크가 무리하게 스틸 시도했어요! 시도는 좋았지만 강타 싸움 실패하면서 결국 킬이 넘어가고 맙니다! 젤리 두번 죽어요!”
“아니, 쟈크가 왜 이렇게 E를 아꼈을까요? 진작에 들어갔어도 좋았을 걸!”
“나는 섬기는 E 없는 암살자다?”
“오! 거..참! 문제로군요! 결국 무사 선수가 스스로를 암살하고 맙니다!”
- 아니 시;바 우리 정글 뭐 하는데
- 그는 용을 빼앗기지 않아 건끼얏호우
- 어? 보급품 떨어진다 감사요 ^오^
- 젤리가 친절하고 쟈크가 맛있어요
- 헤으응 마음 상냥
- 우리 실버쏘오드 무사쟝 경기장까지 오기 힘들 텐데 그냥 입간판 세우고 게임할걸 그랬어
- 존나 딜레마네 안 뺏으면 안 뺏었다고 지랄 뺏으러 들어가면 죽었다고 지랄
- 그것이 권건과의 게임
- 정글러들 존나 피꺼솟
“그나마 정글 킬 교환할 뻔했는데 이거 유체화 람블이 너무 빠르거든요! 스킬을 맞아 주질 않습니다!”
“애당초 갱을 염두에 두지 않은 스펠이었나요? 필드에서 카뮐 말고는 절대 CC가 없는 상황, 권건이 돌아다니는 걸 어떻게 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미드라이너 같은 플레이!”
“지금, 지금 맵이 화염의 협곡이라! 아주 그냥 운동장처럼 넓어요!”
그리고 천천히 스코어에 변동이 생기기 시작하고.
“끊어먹기만 하자고 했잖아. 왜 스틸하러 들어갔어?”
“왠지 될 것 같아서.. 용 원한 스택 있으니까..”
“아냐. 시도는 좋았어.”
“그래. 괜찮아. 기죽을 거 없어.”
“진짜 이번 템만 뽑고 싸워도 돼.”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고 부정하고.
“이대로 진다고?”
“우리가?”
“기억 안 나, 처바르던 거? 쟤네 아직 멀었어.”
현재와 다른, 먼 과거 이야기가 나온다.
“역사는 바뀌지 않아.”
그리고 결국.
“남동풍만 불면 돼. 남동풍만 불면..”
기도 메타가 시작된다.
게임에서 질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 사람들은 안다.
얼마나 이 상황을 벗어나기가 힘든지.
하지만 그래도 해야 한다.
1라운드의 종결이 코앞이다.
왠지 그런 기분이 들었다.
여기서 FWX를 이기지 못한다면.
이들이 손에 잡히지 않는 곳으로 뻗어나갈 것 같다는 그런 기분.
“이제요, 옵니다. 진짜 와요.”
“이거 옵니다.”
“4번째 용을 먹게 되면 화염 용의 영혼을 가져가게 되는 FWX.”
“그리고 지금까지 내각 타워를 훌륭하게 수비 해내고 있는 트릭스터.”
“바론, 그리고 용.”
“곧 출현합니다.”
시끌벅적하지만 고요한 분위기.
“FWX에게는 두 가지의 선택지가 있지만.”
“트릭스터에게 선택지는 없습니다.”
양보할 수 없는 싸움의 마지막 전투.
훨씬 더 강한 상대를 앞에 두고.
트릭스터의 마지막 기회가 다가온다.
전투의 승패는 머릿수나 강대함만으로 결정되는 게 아니었기에 관중들은 모두 숨을 죽인다.
“람블 극딜이니까 빠른 처리 부탁.”
“서폿이 어떻게든 탑 요내 합류 못하게 잡아만 두고.”
“쟈크가 딱 뭉치게 하면 내가 월광포화로 쓸어버릴 수 있으니까. 어차피 저쪽 탱 없다.”
“아자르 노궁. 쿨 돌아오기 전에 전투하자.”
“거리 조절만 잘하면 지금 닐랴 무의미해. 닐랴 노플.”
“람블 궁 조심. 어차피 필드 넓으니까.”
“내가 카뮐로 들어갈 테니까 질리얀 궁 나 봐. 내가 확정 맞다이 깐다.”
“오케이.”
용으로 인해 반쯤 무너진 협곡.
출렁이는 거대한 수역.
곳곳에서 붉은 화염과 검은 연기가 피어오른다.
끊임없이 이어진 전쟁의 흔적.
그들은 각각의 군영을 중심으로 천천히 용 앞으로 걸어 나간다.
반쯤 무너져 넓게 열린 용 둥지.
툭, 툭.
용을 밀었다 당겼다 하며 두 팀이 거리를 유지하는 사이.
딱 적당한 ‘어느 순간’.
숨을 죽였던 강철의 그림자가 절벽을 달린다.
길게 뻗어나간 갈고리가 벽에 닿았다가 쭉 늘어나는 순간.
바다가 갈라지듯 드러나는 권건의 모습.
적의 핵심.
의심은 찰나.
하늘로 도약했던 카뮐이 물 위로 상륙하며 적에게 최후통첩을 선포한다.
- 잠깐만..
- 잠깐만 이거..
- 이거 안될 것 같아 트릭스터 제발 정신차려!
- 멈춰..!! 과거의 나 자신!! 제발!! 내 목소리를!! 들어!!!
- stay!! stay!!!!
그리고 그때.
“교전. 허락?”
“클리어 투 인게이지.”
“라져. 댓.”
FWX에서도.
드디어 명령이 떨어졌다.
탱커 아닌 탱커.
서포터 아닌 서포터.
권건의 원래 픽을 가져온 제 2 서포터의 지저분한 안경이 빛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