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잘못된 경로입니다
작년과 달리 활달하고 수다스러웠던 멤버들이 많이 빠져나가면서 다소 차분해진 트릭스터의 보이스.
“미스터 채. 어떻게 된 거야.”
정글러 김은검이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며 입을 열었다.
벌써 첫 번째 세트가 허망하게 끝나가고 있었다.
“방심했어.”
미드 채지한은 이 사이로 짧은 된소리를 뱉었다.
“오늘 쟤네 서폿 컨디션이 유독 좋아 보이더라. 클래스 형이 원래 강약약강 스타일인데..”
새 원딜 목해인도 앓는 소리를 냈다.
권건 선수한테 자기가 지운이 형보다 낫다고 말했는데 보여줄 기회도 없이 경기가 기울었다.
예상치 못한 상대 서포터의 로밍 때문이었다.
“...”
트릭스터 서포터 강민찬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감독님에게 한 소리 듣겠지.
조심하라고 하긴 했는데.
좀 더 반복적으로 미아 콜을 했었어야 했나?
하지만 그럴 수도 없다.
와드 타이밍 따위에 하나하나 지나치게 미아 콜을 하면 다른 라인이 위축될 테니까.
그럼 없어도 될 손해까지 보는 거나 마찬가지다.
과잉 콜은 없느니만 못한 경우도 많아서 항상 어려운 문제다.
하지만 결과는 미드 퍼블.
내가 뭘 잘못한 게 아니어도 딱 하나의 킬이 경기 양상을 뒤집어 놓을 경우.
그중 오늘 같은 케이스는 원딜보다 서포터가 욕을 먹기 십상이다.
옆에서 눈치 보던 원딜 목해인이 재빨리 토닥였다.
“민찬이 형. 다음 세트에서 잘하면 돼. 괜찮, 괜찮.”
원래도 기력이 없고 우울한 서포터는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아니.. 됐어.. 난.. 쓰레기야..”
평소에 최은호가 자주 하지 않던 이른 로밍, 그리고 타 라인 경험치 뺏어 먹기.
바텀에서 쏘아 올린 이 작은 눈덩이는 미드에서 퍼블로 한 번 더 굴렀고.
미니언 도살자 김예성의 완벽한 라인 처리에 웨이브 스페어 처리.
상대 괴물 정글은 이런 걸 두고 볼 놈이 아니다.
자강두천의 싸움에서 살짝 기울어진 균형은 정글 주도권으로 빠르게 이어지고.
결국 정글 벌목꾼이 그대로 숲을 밀어내면서 오브젝트 균형마저 무너졌다.
킬이 많이 나온 경기도 아니었고, 킬이 많이 나올만한 팀 간의 경기도 아니었기에 회복은 불가능했다.
“나 그냥 뒤질게.. 그게 나을 것 같아..”
“아, 진짜. 형 말버릇 좀 고쳐. 걱정하지 마! 분위기 너무 다운되지 말자. 이거 진짜 말렸어. 누구의 탓도 아닌 거고.”
원딜 목해인은 노력했다.
대부분의 원딜들이 그런 면이 있듯, 그 역시 게임 중에 말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여기서는 조금 달랐다.
“은검이 형, 혹시 바론 스..?”
“틸 같은 말은 제발 꺼내지도 마라.”
“어떻게 살짝 은검이 형이 들어가서.. 훔치는 척하면서 시간 끌다가.”
“훔치라고?”
“역시 그건 좀 힘들겠지?”
“그치. 권건 쟤 강타 치트 쓰잖아.”
김은검은 권건에게 좋은 감정이 있지는 않았지만 인정할 건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시간 끌고. 살아 나오라고?”
“아니, 그냥 바론 뺏어주면 안 돼?”
“훔치지 말고 훔치고 뺏지 말고 뺏고 스틸은 안 해도 되는데 스틸해 줘? 1차 중급 닌자 시험 같은 소리하고 있네. 안돼. 돌아가. 못해. 난 진작 글렀어. 레벨 차이 좀 봐.”
“넹. 다음엔 우리가 주도권 더 잘 잡아 줄게. 플레이 나쁘지 않았어.”
목해인은 아주 희박한 가능성이라도 제시하며 계속 분위기를 업시키려고 했지만.
“아니. 나빠. 다음 세트에는 더 집중하고 바텀 쪽 대응 단계 높이는 걸로 해. 헤인즈, 케비. 할 수 있지?”
미드 채지한이 단박에 말을 끊고 실효성 있는 말을 꺼냈다.
뭐라고 하지, 결과 중심 T와 감정 중심 F의 차이?
상황상 맞는 말이긴 하지만 퍼블을 당한 미드가 무슨 말이라도 해주면 좋을 텐데.
귀환자들이 원래 이런가?
“음.. 어. 그러자.”
목해인이 입을 다물자 채지한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껌을 더 세게 씹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여태까지 다른 경기에서 한 세트도 패배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FWX에서 가장 먼저 행동 개시를 하는 게 서포터라는 예상은 하지 못했다.
그런 팀이 아니니까.
“날 만나고도 긴장을 안 해?”
채지한은 상대 미드에 대한 평가를 수정했다.
솔랭, 스크림에서 본 것보다 훨씬 수준 높은 경기 집중력.
사실상 CS를 거의 놓치지 않은 것과 다를 바 없는 꼼꼼함.
지리적 포인트를 비롯한 세세한 타이밍 파악.
김예성의 플레이 스타일에서 동족의 냄새가 난다.
“제법이네. 데이터 싸움 좀 할 줄 아는 놈인가?”
놓아 줄 건 놔줘야 한다.
이번 세트는 틀렸다.
두 번째 세트에서 대응 단계를 올려 유연하게 플레이하면 된다.
하지만 동시에 아쉬운 점이 떠올랐다.
한국으로의 귀환에 가장 결정적이었던 분석 자료 포맷.
기본적으로 미드들이 가지고 있는 완벽주의자 성향을 만족시켜주는 완벽한 그리드와 다양한 시각.
정확한 메타 해석.
“다음 세트.”
그리고 과거 LKL에서 제공되던 것들보다 훨씬 구체적인 것들.
이런 팀의 지원이 뒤에 있다면 선수는 더없이 든든하다.
그냥 여기서 먹고 자면서 게임을 많이 해라 같은 주먹구구식 구단 운영이 아니니까.
선수들마다 팀을 선택하는 이유는 다르지만 채지한은 이런 팀의 백업을 중요시하는 사람.
한국에 돌아온 이유는 이 리그에서 불멸의 주인공 미드가 되기 위해서.
이런 팀과 함께라면 다를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정작 트릭스터에 돌아온 뒤, 이전의 그 재기 넘치는 분석가는 퇴사하고 없는지 예전만큼의 수준은 아니라는 점이 아쉬웠다.
“이기면 된다. 진심으로 가자.”
물론 채지한은 몰랐다.
트릭스터가 가지고 있던 분석 자료는 지난 해 msl 시기 FWX에서 제공했던 것을 기점으로 내부 개조를 거쳐 제공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안타깝지만 그 원본 데이터와 포맷을 제공한 진짜 주인이 바로 FWX의 권건이었다는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잘못된 경로를 선택하고 말았다.
#
[ FWX, “딱 한걸음” ]
[ 역사상 최초의 ‘세트 무패 라운드’ 일보 직전.. FWX, 약진 ]
[ 그가 말한 것은 틀린 적이 없다, 권건 인터뷰 돌아보기 ]
[ “목표는 전승 우승입니다”, 권건의 한마디가 불러온 현재까지의 행보 ]
[ 결승전에서 만났던 두 팀의 경기.. FWX, 압도적인 1세트 승! ]
[ FWX 세트 연속 17연승, 득실 차 17-0! 1라운드 종료까지 긴장의 끈을 늦추지 마라.. ]
[ ‘From the New World!’ 2026 LKL 스프링을 주목하라! ]
[ 신조어 사전, Gun’d : 권건이 ‘권건’했다 :) ]
[ 새로운 역사가 쓰이고 있다.. 연휴의 아쉬움을 시원하게 날려버릴 FWX의 경기 ]
[ 사이 좋았던 두 팀, FWX와 트릭스터의 불화설. 돌아선 이유는 ‘왜’? ]
ㄴ 이 판에 사이좋고 사이 나쁜 것도 있음?
ㄴㄴ 있어 ㅄ아ㅋㅋ
ㄴㄴ 잘 생각해봐 누구랑 콜라보를 하는지만 봐도 보여
ㄴㄴ 아아 그것은 ‘동맹 관계’라는 것이다
ㄴㄴ 삼국지가 따로 없네ㅋㅋㅋ
ㄴ 왜 돌아섰겠어? FWX가 작년 트릭스터 msl 준비할 때 존나 잘해줬는데
ㄴㄴ 경기 버전 스크림도 따로 파서 휴가 반납하고 도와줌
ㄴㄴ 근데 결승에서 어땠지? 배신자 새기들
ㄴㄴ 트릭스터가 존나 비열했다는 카더라가 있던데
ㄴㄴ ?
ㄴㄴ 믿말겜로그 못 봄?
ㄴㄴ 그딴 게 어딨음? 게임으로 말하면 되는 거지
ㄴㄴ 하긴 맞아 우리가 진 건 진 거야^^ 인정할게!
ㄴㄴ 그래서 저희도 보여드리려고 합니다^^ 지금은 어떻지?
ㄴㄴ 우리 리뉴 형이 잠깐 컨디션 안 좋았을 뿐임 원래 하드캐리 머신임
ㄴㄴ 응~ 우리 라온이도 만만치 않아~
ㄴ 근데 LOS가 미드 게임임?
ㄴㄴ 틀린 건 아니지 이번 시즌뿐만 아니라 미드가 중요하지 않았던 적이 있음?
ㄴㄴ 아니.. LOS는 ‘팀 게임’이다..
ㄴㄴ 십ㅋㅋㅋㅋ 맞는 말이긴 한데요ㅋㅋㅋ 현실은 좀 다르다구요ㅋ
ㄴㄴ 1세트 처맞아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
ㄴㄴ 하긴 그럴 수도 있겠다ㅋ 라온이한테 리뉴가 졌으니까ㅋ
ㄴㄴ 거 같은 R씨 성을 가진 사람들끼리 이러지 맙시다
[ ‘설마’ FWX, 2라운드까지 전승 가나? ]
ㄴ 이건 너무 설레발인데
ㄴㄴ 이곳은 곧 성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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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LOS 파크, 그 어느 때보다 뜨거운 현장!”
“FWX! FWX! FWX!”
“트릭스터! 트릭스터! 보여줘! 보여줘!”
“최강 FWX! 밟아버려! 밟아버려!”
“건시이이이이이이이인!”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수많은 기사가 빗발치고, 관중석은 더욱 뜨거워졌다.
올 시즌 중 가장 주목받는 경기로 꼽힌 두 팀의 경기.
첫 번째 세트는 다소 일방적이었지만 결코 허무한 게임은 아니었다.
“1세트! 치열한 싸움 끝에! 결국 FWX가 처음 잡았던 승기에서 단 한 번의 실수도 하지 않으면서! 끝내 승리를 가져갑니다!”
계속해서 틈을 노려 찌르고 들어오는 트릭스터와 그 모든 공격을 무사히 막아내는 FWX.
서로 굴리는 방법과 구르는 것을 막으려는 장군과 멍군이 오간 게임.
“극초반 이후 선수들의 집중력이 올라가고 있다는 게, 느껴져서, 저도! 숨을 쉴 수가 없었어요!”
“저는 남 해설님 기절하시는 줄 알았어요.”
그리고 절대 만만치 않은 두 팀 사이에서 다음 세트에서 큰 게 온다는 걸 느끼게 만드는 분위기.
“다음 세트에서 승패가 정해질 것인가, 정말로 FWX가 대기록을 세울 것인가, 트릭스터에게 복수에 성공할 것인가, 그리고 과연 해설진은 칼퇴근하고 집에서 쉴 수 있을 것인가! 이 모든 것이 다음 세트에 달렸습니다!”
“잠시 쉬었다가 두 번째 세트로 만나 뵙겠습니다!”
온라인에서는 분석 데스크가 진행되고, 현장의 팬들이 여전히 식지 않은 열기로 아무 소리나 외치며 들끓는 사이.
“이번 세트, 은호가 잘 해줬다. 만약 처음 플레이가 아니었으면 지지부진해졌을 수도 있어.”
“잘하네, 형.”
“아까 그거 완전 예리했다?”
“감사합니다.”
FWX 코칭 박스의 박 감독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바깥과는 다른 분위기였다.
방음 때문만은 아니었다.
선수들은 평소처럼 유쾌했지만 숨소리는 얕았다.
차가운 분노.
그리고 다시 코칭 박스의 리더가 말을 잇는다.
“트릭스터는 첫 번째 세트에서 다소 수동적인 픽을 골랐다. 그리고 그전까지 우리와 달리 오리지널 메타 픽을 선호했지.”
새로운 메타로 천지가 격동하는 중에도 트릭스터는 큰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그저 미드를 중심으로 한 ‘원래대로’.
작년까지의 트릭스터가 전체적인 밸런스가 맞는 팀이었다면.
이번 시즌의 트릭스터는 원딜 쪽의 힘을 조금 빼서 미드에 실은 미드 중심 팀이다.
오로지 한 포지션의 특이 픽만으로 구성되지 않는, FWX가 이끈 뉴메타 유행은 최상위권보다는 중하위권의 순위 싸움에 더 큰 영향을 끼쳤고.
결국 트릭스터는 자신의 고집이 틀리지 않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하지만.”
트릭스터가 연구하지 않았을 리는 없다.
“뭔가 있어.”
수많은 불나방이 뛰어들어 뉴메타의 가치 증명을 해나가는 동안 묵묵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던 트릭스터는 틀림없이 자신들의 무기를 준비했을 것이다.
“틀림없이 확률 게임이지만.”
트릭스터가 그 무기를 이번 세트에서 보여줄 것인가.
아니면 한 번 더 숨길 것인가.
일단 한 세트를 이기고 나면 심리전은 쉬워진다.
“이번에는 그걸 꺼내 들 수밖에 없을 거다. 버전이 변경되기 전에 사용할 최종 무기를 준비했겠지. 욕심 없는 팀이 아니니까.”
“이깁시다.”
가만히 있던 이유찬이 불쑥 말을 꺼냈다.
“이기자.”
“네.”
특별히 사연을 덧붙이지 않아도 모두가 느꼈다.
과거 트릭스터와의 경기.
권건 하나 믿고 신문지만 덮고 허겁지겁 자다가 간신히 게임을 이기던 그때.
곽지운이 시비루 무한 푸시를 해서 간신히 이겼던 그때.
약자가 강자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이라고는 새로운 전략밖에 없었던 과거를.
그리고 끝내 결승 경기장에서 트릭스터가 자신의 팀 컬러로 불꽃을 쏘아 올리며 우승을 축하하던 그 순간을.
누구도 밖에서 떠들어대는 ‘몇 연승’이니, ‘최초의 기록’이니 하는 말 따위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어차피 그런 것들은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었으니까.
지금 이 순간조차도 그들에게는 신세계.
“우리는 예전과 달라.”
만만치는 않은 팀이다.
이번 시즌의 전력 보강이 확실했고 여전히 역사가 가져다준 노하우는 굳건했다.
하지만 박 감독은 조용히 상황을 관조했다.
상대가 우리에게 맞서기 위해 빅 게임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낀다.
엄숙하고도 고요한 느낌.
바다처럼 거대한 강이 잔잔하다.
“그러니까.”
마치 멈춘 것처럼 보이지만, 틀림없이 물이 흐르고 있다.
어떤 변화의 작은 파도가 일렁인다.
“이번 세트 서포터로는 상준이가 나가자. A 플랜.”
“승리 공신인 나에게 빈 찬합이라니!”
“은호.”
“알아요, 알아요.”
최은호는 웃으며 깊게 숨을 들이켰다 내쉬었다.
“야. 유상준.”
“어.”
“지고 돌아오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
“?”
최은호가 유상준에게 무언가 속삭이자 유상준의 눈이 미세하게 커졌다.
“이겨.”
“어. 꼭.”
1라운드의 종결이 코 앞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