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화. 봄이 오고 있다
트릭스터에서 우정권을 외치던 두 사람, 미드 오미래와 원딜 고수호가 이적한 뒤.
“야. 채지한.”
“왜.”
“저쪽 미드 만만한 애 아니다. 너 중국에 있던 때 제일 셌던 놈 생각하고 해.”
미드의 빈자리는 중국에서 돌아온 리뉴, 채지한이 메웠고.
원딜의 빈자리는 부산 호넷 소속이었던 헤인즈, 목해인이 메웠다.
“솔직히 한국 미드들 다 고만고만하던데.”
채지한은 특수 경량화 안경을 쓱 치켜올리며 이마를 툭툭 두들겼다.
자주 없는 ‘금의환향’ 케이스.
중국을 비롯해 해외에서 좋은 성적을 내고 있을 경우 선수들이 돌아올 이유는 적다.
애당초 해외로 나간다는 것은 더 좋은 자리와 압도적인 보수 탓인데.
정작 해외 이적 후 폼이 급격하게 떨어지거나 조용히 잊히는 선수들은 수두룩하다.
가장 큰 이유는 언어를 바탕으로 한 팀원과의 소통 문제지만.
이를 비롯해 음식, 문화, 향수병, 게임 서버의 변화 등이 적응을 방해한다.
프로들 사이에 해외 이적하기 전에 최소한 해당 국가 키보드 정도는 숙지하고 가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챔피언 검색조차 불가능하니까.
거기에 더해 알게 모르게 인종이나 국적 차별도 있다.
물론 어디에나 예외는 있지만, 잘못 걸리면 ‘수준 높은 게임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부채질과 ‘게임만 잘하면 다 된다’는 스카우터의 달콤한 감언이설에 속아 넘어가 스크림 노예가 되거나 벤치 수문장이 될 수 있는 것.
특히 중국 시장에서 살아남으려면 운이 정말 좋거나, 실력이 굉장히 뛰어나거나, 아주 독해야 한다.
혹은 셋 다거나.
“니가 그렇게 말할 상대는 아니다. FWX 미드 뒤에는 항상 정글이 있으니까.”
그래서 금의환향이다.
팬 입장에서는 잊힌 선수들을 모두 인식할 리 없으니 그냥 잘하다가 한국이 그리워 돌아온 것 같지만 프로들 사이에서는 공식화된 표현.
“우리는 뭐 정글이 없나? 어이. 실버소드, 잘 해줘.”
정작 그렇게 힘들게 자리를 잡은 뒤 다시 돌아온다는 건 불필요한 리스크다.
수명이 아주 길지 않은 이 판에서는 더욱.
그렇다 보니 돌아온 선수들은 항상 고액 연봉을 기록하곤 한다.
하지만 한국에 돌아왔을 때 팀과 호흡이 맞지 않아 기대만큼 성적이 나오지 않는다면?
고액 연봉 계약을 마쳤지만 메타가 바뀌어서 자연스럽게 실력이 떨어지면?
더 큰 요구사항이 떨어지고.
팀 내에서도 멸시하는 분위기가 흐른다.
저 선수가 나보다 고액 연봉자라는 것을 모를 리가 없으니까.
“존나 부담되네. 나 아까 먹은 거 체한 것 같다. 형한테 실버소드가 뭐냐?”
“그러니까 죽 먹었어야지.”
그런 날카로운 시선들 속에서 채지한은 꼿꼿하게 트릭스터를 캐리하며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고 있었다.
“와.. 말하는 거 봐.”
반대로 지난해 스톰의 정글러였던 붐보이 역시 그런 드문 ‘귀환’ 케이스였지만.
실력만 있다면 안하무인으로 굴어도 눈감아주는 중국의 정서와 달리 한국은 그렇지 않았던데다 권건의 분노유발자라는 인식이 강해지면서 한국에서도 밀려났다.
“사람이 다 너처럼 혹독하게 살 수는 없어. 어휴, 우리 미드 소름 끼쳐. 아침부터 거의 미음만 먹지 않았냐? 그걸로 게임이 돼?”
“물론이지. 게임은 손만 움직일 수 있으면 되는데.”
하지만 결국 붐보이 허진수는 노력 부족이다.
중국에서도 한국 선수들 간의 커뮤니티가 잘 구성되어 있었던 터라 그를 잘 알고 있는 채지한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잊었나 본데, 나 포도당 사탕도 먹었어.”
“니 똥 굵다.”
그놈이 쓰레기라는 건 유명했다.
어차피 중국에서 단물 다 빨고 도망치듯이 한국으로 간 거였으니까.
정글러 매물이 급했던 스톰은 그것도 모르고 미끼를 덥석 문 거고.
뭐, 지금이라도 버렸으니까 됐다.
보수적인데다 마음이 급했을 스톰이 어떻게 그런 선택을 한 건지는 모르겠는데 훌륭한 판단이다.
“어쨌든 난 별로 걱정 안 해.”
하지만 정작 오늘 맞붙을 권건이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긴가민가했다.
“걔 뭐 폭력적이라는 소문도 있던데. 조심해라. 수틀리면 주먹질할 수도 있대. 너 안경 써서 한방에 골로 간다.”
“좀 별로긴 하지.”
“어어. 노려보는 거 진짜 뒤지더라. 사람한테 살기가 있다는 게 그런 느낌?”
“결승 때 기억나냐?”
“지고 나서 존나 살벌한 눈빛이던데. 지들이 졌으면서.”
권건의 플레이가 좋은 건 눈이 있고 귀가 있는 사람이면 다 안다.
당연히 분석과 스크림도 했고, 솔랭에서도 마주친 적이 있으니 알지만.
어디 정상인 척 플레이하는 놈들이 한둘이야?
프로게이머 사이에서도 분명히 있다.
실력 밖의 다른 것들을 동원해서라도 경기에서 승리를 가져가려고 하는 쓰레기들이.
“에이. 형들,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 왜 그렇게 말을 부풀려. 혹시 지한이 형이 권건 모른다고..”
권건의 ‘친추 멤버’라는 명예 감투를 쓰고 있는 원딜 목해인이 입을 열었을 때.
“하.”
채지한이 어처구니없다는 것처럼 말을 잘랐다.
“웃기지도 않아.”
트릭스터를 최상위권에 고정해놓은 미드, 채지한이다.
강력한 발언권에 잠시 분위기가 조용해진다.
“나도 한국에서 태어난 한국 사람이거든? 그런 대륙 같은 일이 있을 리 없지.”
이번 시즌부터 한국에서 다시 활동하기 시작해 인맥이 없는 그가 피식 웃었다.
여전히 넓게 친분을 쌓지 않은 선수다 보니 권건은 소문만 무성했다.
작년에 좋은 관계였다가 올해부터 살짝 관계가 틀어진 두 팀.
올해부터 트릭스터 소속인 채지한이 권건에 대해 접한 소문은 악담이 더 많았다.
누굴 때렸다더라, 사람을 찔렀다더라, 말수도 별로 없고 싸가지없다더라, 얼굴만 믿고 나댄다더라, 여자를 만나고 다닌다더라.
FWX에서 철저하게 관리하는데도 뜬소문은 누가 지피기라도 하는 것처럼 일어났다.
이런 것들은 비교적 경력이 길지 않지만 갑자기 크게 뜬 신인들에게 더 자주 있는 일이긴 하다.
게다가 이런 건 팀의 이름 아래 보호되기도 하는데.
그런 면에서 이제야 덩치를 불리기 시작한 FWX 팬덤의 역사는 짧았고, 타 팀이 다년간 쌓아온 단단한 장벽에 비할 것은 못 됐다.
“뭐. 그게 다 가짜인지, 아니면 하나쯤 진짜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여자친구에게 중절 수술을 강요했다는 소문이 돌았던 자극적인 중국발 찌라시보다는 훨씬 약하다고 해야 할까?
뭐, 실제로 일어난 일이었을 수도 있고.
대륙은 알아도 알아도 놀라운 곳이니까.
“어차피 중요한 건 실력이지.”
경기를 앞둔 그가 차갑게 웃었다.
경기장 밖에서 어떻게 행동하건.
게임 내에서 FWX를 부숴버리면 자기의 임무는 끝이다.
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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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온, 라온, 라온, 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오오오오오오오온!”
“리뉴, 리뉴, 리뉴우우우우우우! 쓰러.. 집니다!”
“미드에서! 이른 타이밍! 퍼블을 기록합니다아아아아아아악!”
“이건 라온 선수도 대단했지만, 그 뒤에는 클래스의 완벽한 로밍이 있었어요! 어떻게! 어떻게 이 타이밍을 계산했죠?”
“옆에 서서 경험치 살짝 받아서 스킬 찍는 순간 바로 치고 들어갔어요! 이 선수 완전 도사에요, 도사! 이제 클래스 선수가, 이런 플레이를 해냅니다! 이런 플레이를 한다구요!”
“아직 스프링이라기에는 추운 겨울, 클래스 선수가 꽃망울을 터뜨려냅니다!”
- 그래!!!!!!!!!!!!!!!!!!!!!!!!!!!!!
- 장하다!!!!!!!!!! 래스야!!!!!!!!!!!!!!! 이거지!!!!!!!!!!!!
- 진짜 많이 컸다!!!!!!!!!!!!!!!!! 진짜!!!!!!!!! 이제 프로해도 되겠어!!!!!!!!!!!!!!!
- 어이어이www 연하의 사이다쟝 지켜봐달라구?www
- 스게에(씇) 서포타 센빠이로서 춋또 “나이스”한 모습 보여주고 싶었달까
- 우리 클래스가 여태까지 저런 플레이를 못 했던 게 아니라 안 했던 거랍니다. 자신이 너무 강하다는 사실을 알려주면 바텀 견제가 심각하게 들어올 수가 있으니까 그만큼 힘을 숨기신 거죠. 유부녀 챔프를 좋아한다는 말이 있는데 그냥 여캐와 여자를 좋아하는 거지 절대..
-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여러분 다들 잘 숨기시라구요? 이런 건 오히려 마플이랄까w
- 얘는 팬도 좀 이상해; 마사카? 그래서 나도 어떻게 되어버린걸까나w
- 에엣 이래서 애들 앞에서는 말을 조심해야한다굿w
“지금 리뉴 선수가 이마를 짚고 있거든요? 이 선수의 이런 모습, 오랜만에 봅니다. LKL에서 퍼블을 내준 기록 역시 최초입니다!”
“아까 포인트로 짚어드렸죠? FWX와 트릭스터의 오늘 싸움의 핵심은 바로 미드!”
“트릭스터가 아주 오랜만에 리빌딩을 크게 했습니다. 그 중심에는 리뉴, 채지한 선수가 있었죠. 결과는 성공적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정말 잘 증명해오고 있었거든요?”
“예! 그렇습니다, 트릭스터의 일등 공신이자 모든 플레이의 핵심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제가 접한 스크림 발 소식이 있는데. 개인기로만 따지면 지금 이 선수를 제칠 수 있는 선수가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네! 그만큼! 날랜 선수인데요!”
- 중국에서 돌아온 ‘귀환자’와 FWX에서 다시 태어난 ‘환생자’
- 회귀나 빙의는 어디 없냐?
- 내가 봤을 때는 권건이 좀 의심스러움
- ㄹㅇㅋㅋㅋㅋㅋㅋㅋㅋㅋ 혹시 대웅이 형이야? 들리면 대답해.. 형.. 삐삐칠게.. 11771556..
- ? 그 정도로 옛날 사람임?
- 아니 Rise 형이 빙의한 건 아닐까?
- 아휴 틀딱!
- 그럼 미스터 협곡주나 북극곰?
- 땅콩쿤은 어때?
- 왜 니들만 아는 얘기하는데..
- 내가.. 무슨 얘기를 한 거지..? 저들은.. 누구..?
스프링의 마흔한 번째 경기.
우리는 트릭스터와 막다른 곳에서 만났다.
“하지만 결국 FWX 대 트릭스터의 경기이자! 이번 시즌 최고 미드를 가르는 이 자리에서! 라온 선수가 클래스 선수와의 협력으로 훌륭하게 선취점을 가져갔습니다!”
“이렇게 날이 선 경기일수록 한 번의 득점이 전황을 쉽게 뒤집을 수 있는 법이거든요!”
“생각보다 아주 빠르게 기세가 FWX에게로 넘어갔습니다!”
- 내가 저거 리뉴 저거 밑천 드러날 줄 알았다ㅋㅋㅋㅋㅋ
- 야 FWX가 중국 귀환 선수들 전담팀이자너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이제 신고식 해야지?^^ ‘선배’라고 불러봐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다 뒤졌어 진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역시 트릭스터의 시대는 갔나?
- 이제 신세계가 오는 것인가?
“2026 LKL, 프롬 더 뉴 월드! 지금 여기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곳! LOS 파크입니다!”
막다른 골목에서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가 있다.
벽을 넘어 지나가거나, 돌아 나와 다른 길을 찾거나.
하지만 팀원들은 두 가지 선택지 중 그 무엇도 선택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은호. 빠른 바텀 복귀 부탁.”
“좌측 샛길 통해 내려가는 중. 시야 체크?”
“오케이. 하고 와.”
“와드 확인. 이따 미드?”
“아니. 이번 웨이브 밀고 가기엔 빠듯. 웨이브 피해 극대화가 나을 듯.”
“건. 어떻게 할까?”
“지금 없애지 마세요. 제가 처리합니다.”
“확인.”
오히려 잔뜩 날이 선 모양으로 트릭스터를 위협하고 있다.
아주 꼼꼼하게.
나야 수만번 거쳐온 일인 만큼 항상 일정한 컨디션과 일정한 경기력을 가지지만.
항상 승부욕이 있을 것 같은 선수도 경기 집중력은 고저가 있는 편이다.
우리가 늘 펜타킬로 경기를 끝내는 것이 아니듯, 사람이 매번 불탈 수는 없으니까.
무엇이 그들을 화나게 했는지는, 글쎄.
나도 조금 알 것 같아서.
“죽여버리죠.”
“건신께서 죽이랍신다~”
“죽이신다~”
“죽?”
“고요 속의 외침 하고 있냐? 기호 1번 서포터, 집중 안 해?”
“그러니까 항상 콜은 정확하게..”
“저 배은망덕한 놈들 죽여.”
“오케이.”
경기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한다.
나는 기억하고 있다.
그전 삶까지 돌아오지 않았던 이가 이곳에 있음을.
드물게 월챔 결승에서 만났던 팀, CQG.
중경(Chongqing)을 기반으로 둔 CQG는 중국 팀 중 독보적인 최강자는 아니지만 손에 꼽히는 강팀이다.
굳이 LKL에서 비슷한 팀을 말해보자면 지금의 스톰이나 유니버스 정도.
물론 위상이 그렇다는 거지 팀의 힘을 이야기하는 건 아니다.
CQG은 지난해 중국의 연간 어워드에서 CQ는 팬 투표를 기반으로 하는 최고 인기 팀이었으며.
채지한은 그중에서도 ‘최고의 용병’ 상을 받은 개인이다.
그러니까 중국에서도 꽤 인정받고 있었던 선수.
그리고 올해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았다면 아마 2026 LPL 연간 어워드 자리에서 최고의 미드 상을 받았을 선수.
왜?
이것 역시 어떤 나비의 날갯짓이었겠지만.
지금 당장 경기 중인 내가 염두에 둘 부분은 아니다.
어차피 이 순간만큼은.
아니, 앞으로는.
FWX와 트릭스터의 입장이 전과 다를 것이다.
“될 것 같지?”
“충분하지.”
증명해야 할 것은 우리가 아닌 트릭스터.
우리는 길 끝에서 제3의 선택지를 골랐다.
이곳이 ‘막다른 길’이 아니라.
우리가 있는 곳이 곧 길의 끝이라는 것처럼.
여기가 바로 우리가 정한 장소라는 것처럼.
이곳에서 싸우고 1위의 자리에서 비켜주지 않는다.
전쟁에 임한 적들은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