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화. 천하삼분지계
“야. 니 쉬고 와서 손 다 녹슨 거 아니냐? 그걸 죽네. 반응 못해?”
“맞아. 못 해. 나 은퇴해야 할 것 같아.”
연습하던 곽지운은 태연하게 참관인의 공격을 받아넘긴다.
“그래서 후계자 양성하다가 경고받았지 뭐야.”
“네 사촌 동생? 뭐.. 나이치고는 잘하긴 하더라. 초등학생이 어떻게 그렇게 하지? 슬라임이랑 달팽이 사냥할 때 아닌가?”
“서폿 시키면 너보다 잘할 듯.”
“지랄하지 마라. 선 넘네. 걔 이즈 장인인 거 다 알거든?”
최은호는 곽지운에게 가운뎃손가락을 날리고 머리를 흔들었다.
“요즘 걔, 뭐냐. 2군 원딜이었던 걔는 뭐한대? 은퇴한 애.”
“일도? 군대 간다던데.”
“미친 거 아니야? 군대를 왜 가! 봉구도 아직 안 갔는데! 왜 이렇게 일찍 가!”
슬슬 회의 시간.
게임을 마친 곽지운이 귀를 막으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너 너무 시끄러워. 보통 그때쯤 간대. 그리고 어차피 너도 가야 해.”
“거짓말이라고 해줘. 나 아파. 아파서 못 가.”
“하긴..”
“하긴이라니 그 말이 더 기분 나쁜데?”
“어쩌라고.”
“그럼 걔 군대 스포츠단 뭐 이런 데 가?”
시간이 제법 흘렀음에도 상무 e스포츠 팀 창단 문제는 여전히 제자리걸음 중이었다.
이전 세대의 모 선수의 거대한 승부조작 사건 연루됐고 해당 게임에 대한 관심이 식으면서 자연스레 해체 수순을 거쳤기 때문이다.
“아니. 그냥 육군. 육군 간대. 신검 그마라던데.”
“하긴 걔 성격은 소심한데 키랑 체격이 특수 부대급.. 아니, 그게 아니라 왜! 왜! 왜!”
두 사람 역시 슬슬 군 문제가 밀려오고 있는 것이 느껴지긴 하지만 아직 시간은 남았다.
“뭐.. 그냥. 걔 결정이잖아.”
바텀 듀오는 드물게 잠시 숙연해진다.
병역 문제에 관해 여러 가지 시각이 제시된 지는 시간이 꽤 지났지만 해답은 한가지 뿐.
LOS가 아시안 게임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만큼, 금메달을 따와 예술 체육 요원으로 복무하는 것.
국위선양으로 얻어낸 유일한 긍정적 면제.
사람이라면 욕심이 나지 않을 수 없다.
“올해 그거 했으면 좋았을걸.”
하지만 2026년 아시안 게임은 과거 팬데믹 이슈로 인한 개최 지연 및 일정이 월드컵과 겹치는 것을 피하기 위해 한 해 더 뒤로 밀렸다.
매년 전성기가 끝나가는 바텀 듀오의 입장에서는 아쉬운 일이다.
물론 이전에는 언급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어쨌든 지금 선수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전성기 동안 입대를 미루는 것뿐.
사람마다 차이는 있지만.
수많은 팬은 물론 이 문제에 직면한 당사자들 역시 입대를 두려워하면서도 반드시 가기는 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한국을 떠날 생각은 없었으니까.
그래도 위안이 있다면.
지금처럼만 잘 풀리기만 한다면, 자리를 비운 사이에도 FWX가 잘 풀린다면 전역 후에도 사람들이 자신을 기억해줄 수 있으리라는 것 뿐이다.
지금 스트리머로 활동하는 지니, 강동흔처럼.
“에이씨. 어차피 갈 거면 난 나중에 무조건 백골? 백골 부대 갈 거야. 완전 0티어 메이커 사단.”
“거기서 너 같은 약골을 받아주겠냐? 그리고 가고 싶다고 가지는 거 아니거든? 그냥 일단 올해 최고로.. 열심히 해보자고. 그러면 또 모르지. 내년에 좋은 일이 있을지도..”
곽지운은 툴툴 털고 자리를 일어나 이제 막 게임을 마친 유상준에게 향했다.
“가자, 전진 부대 인간 병기.”
“응.”
“유상준이 왜 인간 병기인데?”
“그런 게 있어.”
“뭔데!”
방방 뛰는 최은호를 향해 곽지운이 측은한 눈빛을 보냈다.
뭔가 불길한 기분을 느낀 최은호가 재빨리 가로챈다.
“너 또 뭔 얘기 하려고 하냐? 나 상준이랑 친하거든?”
“그래. 그러니까 하루에 한 번은 꼭 이야기도 나누고 그래라. 너무 질투하지 말고.. 그래도 너 군대 가면 후계자인데..”
“아니! 나 군대 지금 안가! 그리고 질투도 안 한다니까?”
“다들 그렇게 말하지. 2주 만에 대화하는 건 좀 너무하지 않냐?”
“아니, 진짜 진짜 그건 아닌데?”
“형. 나. 말. 걸어줘.”
“이 미친놈들이? 유상준! 너 원딜 라인 타? 어? 내가 형이고! 내가 서포터인데! 어? 말할 때 척수 반사로 하는 거 어디서 배웠어? 좌뇌 안 거쳐?”
“은호 형, 나 다 들었어. 폭언 신고합니다.”
“서폿 형 너무하네. 우리 05즈 무시하네. 야. 유상준. 가자.”
“정말 실망입니다.”
“권건.. 너마저도!”
낄낄 웃은 선수들은 방방 뛰는 최은호를 가운데에 두고 회의가 진행되는 피드백 룸으로 향했다.
피드백 룸에서 감코진이 기다리고 있었다.
온풍기 때문인지, 승부욕 때문인지 피드백 룸은 열기로 가득했다.
선수들이 자리에 앉은 것을 확인한 박 감독이 가습기 분무량을 낮추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다음 상대는 인천 트릭스터다. 스프링 1라운드 마지막 경기야.”
“와.”
“이제 우리 대진표에도 터치가 들어온 것 같은데.”
“그러게요.”
지난 시즌 가장 아슬아슬했던 결승.
인천 트릭스터와 대전 FWX의 경기.
LKL도 이것이 흥행 보증 수표라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리그 시작 첫날의 흥행 대진을 포기하고 끝으로 돌린 것이 두 팀의 경기.
시청자를 끌어야 하는 LKL에서도 대진표를 어느 정도 매만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FWX는 8승 0패로 현재까지 1위 자리를 놓치지 않고 있다.
득실 차 16의 완전무결한 전 세트 승리.
“트릭스터는 7승 1패. 2위. 득실 관리는 10점으로 아쉬운 상태. 하지만 우리가 만약 이 경기를 지게 되면, 그다음에는 더 많은 부담감을 짊어져야 할 거다. 득실은 승패 다음이니까.”
그 뒤에 이번 시즌 팀을 재정비한 성남 스톰이 과거의 영광을 되찾으려는 의지로 동률을 기록하고 있었고.
4위로는 5승 3패의 유니버스, 5위에는 4승 4패의 광주 미라쥬가.
그리고 부산 호넷, 제주 F.L.E, 서울 빅스, 수원 해머스, 울산 피닉스가 뒤를 잇고 있었다.
이제 앞만 보고 달리는 FWX 입장에서는 드디어 만나게 된 걸림돌이었다.
이 경기에서 이겨 차이를 확실히 벌리지 못하면.
FWX 원톱 체계를 잃는다.
“얘들아.”
박 감독이 무겁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말했다.
“이런 말이 부담될 수 있겠지만.”
휴가 후 첫 경기를 준비하는 회의.
아까까지 들떴던 선수들의 이목이 단숨에 박 감독을 향한다.
“트릭스터만큼은.”
이제 본론이다.
“반드시 이겨야 한다. 알지.”
트릭스터와의 결승전에서 겪었던 일을 아무도 잊지 않았다.
처음으로 올라선 큰 무대.
FWX의 약점을 휘둘렀던 트릭스터.
알음알음 퍼져나간 함성의 원인.
비겁하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비난할 수 없는 일이다.
무슨 사연이 있건 결국엔 경험 부족이었으니까.
대신 그만큼 강해지면 된다.
선수들은 이때의 기억과 조용히 삼키던 울음이 아직도 눈앞에 선했다.
“보여주자.”
“네.”
드물게 이유찬이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권건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코피맨, 힘내.”
분위기가 더 가라앉기 전에 박 감독은 손뼉을 쳐서 무게를 흩어냈다.
“요즘 우리가 뭐라고 불리는지 알지?”
“워라밸 메이커요?”
“그치.”
박 감독이 눈을 반짝였다.
“이번에도 그렇게 해보자.”
“근데 우리 1경기인데요. 퇴근은 우리만 하는데.”
“아무튼.”
#
온라인을 땅으로 치자면 아주 머나먼 지방.
그리 활성화되지 않은 작은 커뮤니티에 때아닌 이슈가 일고 있었다.
- 이제 FWX 슬슬 본색 나올 것임ㅇㅅㅇ 시참 못 봄?
그 주체는 어떤 미꾸라지였는데.
- 이번 영상 삭제된 거 다들 알제? 급하게 삭제하는 건 다 이유가 있는거임ㅇㅅㅇ
자칭 ‘전문가’이자.
- FWX 애들 인성 개빻았다는 거 모르는 사람도 있음? ㅇㅅㅇ 사실 유니버스도 마찬가지임 끼리끼리 노는거제
‘관계자’라고 말하며.
- 내가 선수 사옥 스탭이었는데 ㅇㅅㅇ FWX가 돈으로 통제하고 있는거ㅇㅇ
그랜드 마스터 티어를 인증한 한 유저가 시작이었다.
- ??? 갑자기 뭔 ???
- 나 시참한 사람인데 그냥 다른 오류 나서 삭제한 거 아님? 내 전적 인증함
- 난 그냥 그때 봤었는데 별일 없었는데; 라온이랑 써머랑 분위기 잠깐 안 좋았던 거 빼고
- ㅇㅅㅇ 그거 매니저가 컷한 거
- 엥 설마 그럴 수가 있나
- 나 전적 인증했다니까??? 아무 문제 없었다니까 그러네
- 또또 저런다.. “가자”
대부분은 부정하거나 관심을 끊었지만.
이상하게도 높은 티어가 하는 말은 개소리라도 약간 설득력이 있었다.
- 예전에 권건 폭행 사건 연루됐던 거 모름? ㅇㅅㅇ
- 그거 스톰에서 사과했잖아 2군 감독 짤리고
- 아ㅋㅋ 너 그때 그 감독이니? 이름도 뭐더라 역겨웠는데;
- 그것도 묻은 거라니까 ㅇㅅㅇ;; 안 믿으면 말고;; 나도 직장 걸고 말하는 거임
그리고 영상 다시보기가 어려운 지금, 진실일지 아닐지 모르는 말 역시 마찬가지다.
- 근데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 그런 말 있지 않음?
- 라온도 빅스에서 싸우고 나갔다는 소문 있긴 했지
- 오..
- ㅇㅅㅇ;;
잘나가는 팀을 향한 억측과 헛소문은 금세 그 덩치를 불리기 마련.
조금씩 스노우 볼이 구르려고 하고 있었다.
#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의 해설진은 기분이 좋았다.
FWX의 경기가 있는 날 로테이션이 돌면 항상 좋았다.
“연휴 잘 쉬셨습니까? 2026 LKL 스프링 첫 번째 라운드, 그 마지막 주! 오늘 경기에서는 많은 분이 기다려왔던 두 팀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시청자가 많은 것도 많은 거고.
경기도 시원시원하고 재밌는 데다가.
일찍 끝나니까.
“대전 FWX와 인천 트릭스터! 인천 트릭스터와 대전 FWX, 작년 결승에서 만났던 두 팀이 결국 다시 맞붙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이런 경기가 설 연휴가 끝나고 있는 만큼 많은 분이 손꼽아 기다리셨을 것 같은데요, 수요일부터 이런 경기를 만날 수 있다는 건 정말 행운이죠?”
하지만 오늘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아니, 어쩌면 두 팀이 지독하게 싸워서 경기가 길어질수록 좋을 것 같다.
“만약 이 경기에서 트릭스터가 이기게 된다면 승패로는 FWX와 동률이 됩니다. 그리고 3위와 4위의 차이가 조금 있는 상황에서 현 3위 스톰까지 더해 새로운 삼파전이 시작되게 되는 건데요.”
오늘 경기는 의미가 아주 큰 경기니까.
“그렇습니다! 이건요, 오늘 트릭스터가 천하삼분지계를 준비해왔을 거라는 얘기입니다. FWX는 지금 단 한 번의 세트 패도 기록하지 않으면서 넓은 LKL 중원을 모두 집어삼킬 것 같은 기세로 달려 나가고 있거든요!”
기존 1황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트릭스터는 이번 시즌의 FWX가 당혹스럽다.
이상한 유행을 몰고 다녀 세상에 혼란을 줄 뿐만 아니라 천하 통일을 할 기세다.
“하지만 만약 오늘! 트릭스터가 FWX를 저지하는 데에 성공한다면 상황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천하삼분지계.
“네, 동의합니다. 그렇게 되면 1라운드가 종료되었을 때 FWX의 승패에 스크래치가 생길 뿐 아니라 1, 2, 3위의 차이가 그리 크지 않게 되겠죠. 순위 싸움을 해볼 만 하다는 얘깁니다.”
- 유비! 관우! 장~비! 복숭아나무 아래에서!
- 악적 FWX 물리쳐라!
한 팀이 황제에 자리에 앉아있는 것과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것.
이건 선수들의 마음가짐에도 영향을 준다.
산의 제왕으로 군림하는 거대한 존재에 맞서는 것보다는.
상처 입은 호랑이와의 전투를 준비하는 쪽이 좀 더 공략법이 명확해지니까.
황제의 자리에 앉아봤던 트릭스터이기에 더 잘 알았다.
강한 팀이라는 이름이 얼마나 무게가 있는 것인지.
강팀이라는 인식이 얼마나 적들을 약하게 만드는 것인지도.
지금은 입장이 많이 바뀌었다.
결승 자리에서 기다리던 전과 달리.
필드에서 벌어지는 이 정규 시즌에서 새로운 세상을 개척한 난세의 간웅 FWX.
승승장구 전승.
정신이 풀어지는 연휴 직후.
방심할 만한 타이밍.
트릭스터는 FWX가 약할 이유에만 주목했다.
“천하가 셋으로 나뉘게 되면 서로의 힘이 비슷해집니다. 서로 견제하게 되죠! 어느 하나가 특별히 강해지면 불안해진 나머지는 연합하게 되고, 그럼 한 세력이 튀어 나가지 못하게 됩니다.”
- 오 그럼 FWX가 조조야?
- 감독 : 편견 없는 인재 중용
- ㅋㅋㅋㅋㄹㅇ 2군 섭외왕
- 탑 : 대학살 쳐돌이
- 정글 : 0티어 카리스마
- 미드 : “꾀가 많다”
- 언제부터 FWX가 악역이었어ㅠ
- 악역이라뇨 쬬가 왜 악역이죠?
- 정의는 승리한다 ^촉^
- 트빠 왔니? 월챔 통일도 못한 게 까불어
- 대답도 못하고 빤스런했죠?
결승.
어떻게든 다시 결승 자리까지만 끌어온다면.
트릭스터는 다시 한번 FWX를 잡아먹을 준비가 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 바텀은??
- 원딜 : 키 작음
- 서폿 : 유부녀?도 가리지 않고? 좋아함?
- 상상도 못 한 특징
- 어? 설득!
- 클래스 당신은 천의 얼굴 ㄴㅇㄱ
다만 자신들이 어느새 이번 시즌 순위 싸움에서 이기는 것보다 결승으로 마지막 전투를 미루고 싶어 하고 있다는 사실을.
공포를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그래서 오늘 트릭스터가 노리는 것은 명확합니다!”
반드시 FWX를 꺾어야 한다.
“바로 FWX의 첫 패배, 트릭스터의 승리죠!”
차가운 겨울은 FWX를 적벽으로 끌고 왔고.
피할 수 없는 싸움을 앞두고 있다.
대전 FWX와 인천 트릭스터, 성남 스톰.
힘의 균형은 유지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