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게이머, 그만두고 싶습니다-211화 (211/326)

211화. 규정 준수

정말 오랜만이다.

“권건 선수가 계속 달립니다. 지금 저 가스 스치면 안 되는 거거든요..”

- 최악의 숨바꼭질이야ㅋㅋㅋㅋ

- 맵이 실시간으로 줄어든다고?

- 콩쥐야 우리 ㅈ대써

이제 이 놀이에 모두 합류했다.

“우리 시청자님~ 여기 있네~”

“까꿍~”

“마구간에 있으면.. 모를 줄 알았어..?”

- 뛰어! 뛰어! 런! 런!

- 개웃기네ㅋㅋㅋㅋ 이기라는 것도 아니고 1초라도 더 살아남길..

- 야 이제 바텀 애들 컸다 시바 ㅋㅋㅋㅋ

- 문어 여자~ 피의 남자~

시즌 중 협곡 시참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시간도 시간이지만 ‘감’도 있어서.

대부분의 팀은 스킬 쿨이나 아이템이 다른 이벤트 모드, 시청자 참여 게임 등을 피하는 걸 권장한다.

상황이 안 좋거나 팀이 엄한 경우 아예 금지할 때도 있고.

- 형들 제발 살려주세요 (현 미드8_8)ㅋㅋㅋㅋㅋㅋㅋ

- 그거 칠 시간에 도망을 가ㅋㅋㅋㅋ

- 장르가 이런 거면 미리 말을 해주지 그랬어ㅋㅋㅋㅋ

- 숨바꼭질 잘하는 챔프 골랐어야했다ㅋㅋㅋㅋ

- 케틀 아웃 케틀 아웃

- ‘금’을 밟으셧군요..

- 근데 이게 낫다ㅋㅋ 실력은 어차피 안되니까ㅋㅋㅋㅋ

- 좋은 방향성이야ㅋㅋㅋ

어느 정도만 게임을 해도 대부분이 알고 있을 것이다.

AI와 게임을 하는 것이 실제 게임에 그리 큰 도움이 되지 않거나, 혹은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을.

요는 실력 차이다.

리그 팀들도 2군이나 실력 차이가 크게 나는 팀들과 스크림을 피하니까.

나에게도 시참이 사치였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그때 굳어졌던 습관은 쉽게 달라지지 않아서 이런 자리 자체가 꽤 낯설다.

“야, 권건.”

최정인은 내 옆에 앉아서 라면과 탄산음료를 마시고 있다.

벌써 두 캔 째다.

먹으러 온 건가?

“?”

“시청자 너무 괴롭히지 마라.”

내가?

“죄송한데 써머님.”

흐뭇한 미소와 함께 간헐적 중계를 이어나가던 김예성이 입을 연다.

차가운 말투.

“뭘 그렇게 드세요?”

“맞춰봐, 새꺄.”

최정인은 피식 웃으며 의자에 몸을 붙인다.

- 오 쌈난다

- 오ㅋㅋㅋㅋ

- 내가 정인이형 저기 껴들 때부터 알아봤어

- 존나 눈치 없긴 해ㅋㅋㅋ

“빅스에서 1993년에 출시한 순한 라면. 그리고 블랙 체리 탄산.”

고요한 목소리가 들리자 잠시 침묵이 흐른다.

“어..”

최정인이 급하게 바탕 화면에서 자기가 주문했던 메뉴를 확인한다.

끓인 라면.

식품 명가 빅스 라면, 순한 맛 옵션.

“어.. 아닌데?”

“거짓말하지 마세요. 얄팍합니다.”

“야. 여기 캠 있냐?”

“우리 캠 안 켰어.”

“내가 그걸 몰라서 물어보냐?”

“그럼 왜 물어봄?”

“그러게. 나 왜 물어봤지?”

우리 미드가 귀믈리에.. 라기보다는 아마 우리가 있을 만한 장소와 주력 메뉴, 최정인의 평소 취향에 관한 문서를 참고했겠지.

최정인은 거의 다 먹은 라면을 옆으로 치워놓고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좋아. 그럼 너 1점.”

“?”

“축하한다. 라온. 빅스 출신이라 그런지 아주 잘 알고 있구나.”

“!”

- 써머형 미쳤어?

- 진짜 도라이 아니야? 여기서 빅스가 왜 나와?

- 왜 저래?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몰라 눈새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경기보다 토크가 도라방스ㅋㅋㅋㅋ

“빅스 말씀이세요.”

김예성은 정중하게 말을 받았다.

우리 미드는 이미지 관리가 철저하다.

특히 팬 앞에서.

솔직히 말해서.

김예성은 제법 잘 감춘다고 생각하겠지만, 얘도 보통 꼬인 게 아니다.

한동안 우울과 슬럼프에 빠져 나약한 모습이었던 적도 있지만.

사실 얘도 다른 미드와 별반 다르지 않아서 자신이 완벽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경기 날 항상 목욕재계하는 남자.

장비 각을 가장 잘 맞추는 선수.

철저한 계산 하에 움직이는 모략의 대가.

“형님 이제 큰일 났다.”

“왜? 난 인정 했잖아. 나 이런 말 잘 안 하는 사람인데.”

최정인은 아직 현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 라온 형 지금 형만 캠 켜져 있는 거 알지?

- 와우

- 극대노한 것 같은데

- 저 표정으로 뭘 어떻게 구분함? 걍 무표정인데

- 너.. FWX 팬이 아니구나?

- 얘도 FWX 휴보 마개조 #2849임

- 발작 on 빨간 버튼이 권건 얘기고 파란 버튼이 빅스 이야기임ㅋㅋㅋㅋㅋ

“유니버..”

“예성. 우리 방송 중이야.”

선수들끼리 방송을 하다 보면.

서로 친하건, 친하지 않건 말실수가 나오기 마련이다.

내 한 마디에 정신을 차린 김예성이 잠시 개인 마이크를 껐다가 다시 돌아왔다.

“지금 행복하세요?”

사근사근한 목소리에 따뜻한 표정.

“갑자기? 응. 재밌다. 친구들이랑 피시방도 오고.”

“친구? 네네. 즐기세요. 3주 남았으니까.”

오, 저런.

대진표 이야기다.

“3주? 그때 나 생일인데. 알고 있었어?”

“네. 3월 8일.”

“올.”

오, 이건 더 세상에.

- 생각보다 분위기 좋은데?

- 이러다 친해지는 거 아님?ㅠㅠㅜㅠㅜ

- 우리 써머 형 FWX로 넘어오는 거야?

- 이제 존나 우리 형 같긴 해ㅋㅋㅋ

- 그래도 자리가 없어서 그건 안 되겠는데?

- 코치로 어때

- 문백산 코치도 유니버스 출신이잖아

- 오 그러네 두 팀이 사이가 나쁠 이유가 없었네

- 모야 싸우는 줄 알고 걱정했네ㅎ

하필.

“야, 라온이. 너 좋은 놈이네?”

“네.”

독사 김예성한테 찍히다니.

“기다릴게!”

“네.”

그냥 숨바꼭질이나 계속하자.

#

- (FWX) 라온 방송에서 권건 시참

권건 혼자 존나 런닝맨.gif

ㄴ 아ㅋㅋㅋ 제대로 놀아주네ㅋㅋㅋ

ㄴㄴ 추격전 재밌겠다ㅋㅋㅋㅋ

ㄴㄴ 재밌다구요?

ㄴㄴ 시청자들의 움직임에서 공포가 느껴지네요.. 연기 점수 9.8점 드리겠읍니다

ㄴㄴ 연기라구요?

ㄴ 진짜 오랜만에 방송 짤이다

ㄴㄴ 어휴 여보 방송할 때는 나한테 말 좀 하고 하라니까 어휴 참

ㄴㄴ ?

ㄴㄴ 근데 뭔가 건신 전보다 되게 부드러워진 것 같지 않음?

ㄴㄴ ㅇㅇ 말도 많아지고 장난도 잘 침

ㄴㄴ 로봇이 휴먼이 되어가는 과정 샤샤샤

ㄴㄴ 혹시 써머 때문인가?

ㄴㄴ 정인이 형.. 아직도 성불 안했냐?

ㄴㄴ 걍 전보다 되게 편하게 게임하는 것 같음

ㄴㄴ 보기 좋아

ㄴ 그래서 진짜 설 언제 끝남? 연휴 끝나기를 기다리는 건 처음이야..

ㄴㄴ 5

ㄴㄴ ㅠㅠ 5일을 어떻게 기다려

ㄴㄴ 4..

ㄴㄴ 3..

ㄴㄴ 2..

ㄴㄴ 1

#

“다들 잘 쉬었어?”

휴가에서 복귀한 FWX 선수단은 금세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진짜 많이 먹었어요.”

“너 왜 코가 한라봉이 됐냐?”

“온종일 먹기만 했어..”

팀에서는 선수들에게 최정인과의 만남에 대해서는 지적하지 않았다.

오히려 권위 있는 이미지를 고수하던 유니버스에서 이 방송 후 본격적으로 ‘선수들의 만남’ 콘텐츠를 제안했다.

최정인이 긍정적인 평가를 전달했기 때문이었다.

콘텐츠는 시즌 오프 때 유니버스와 관계가 깊은 특급 호텔 한식당에서 미팅을 진행하고 짧은 대화 콘텐츠를 만들어보자는 식이었다.

돈으로 선수들에게 유니버스에 대한 인식을 갈아 끼우고 권건과 정당하게 만나보고 싶다는 의도가 투명히 보였기에 FWX에서도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실제로 유니버스에는 공식 권건 스토커 최정인을 비롯해 우정권을 외치고 다니던 트릭스터 출신 오미래, 과거에 강도 높은 트래시 토크를 했지만 이제는 곽지운을 상당히 좋아하는 원딜 강은찬이 소속되어 있는 등 관계상 FWX가 우위에 서 있었고.

먼저 숙이고 들어온 쪽이 유니버스였기 때문에 FWX도 콘텐츠 자체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었다.

“이거 공문 받고.”

“니 또 사고 쳤냐? 내가 그럴 줄 알았다. 깍지 인성 진짜.”

다만, 권건의 예상대로.

팀은 김예성과 곽지운에게 원칙대로라면 게임 이용이 불가능한 나이에 해당하는 사촌 동생과 ‘방송’을 함께한 것에 대해서는 가벼운 주의를 줬다.

“맞아. 나 사고 쳤어. 크게 반성하고 있어.. 잘못했어요, 감독님.”

“누구나 할 수 있는 실수야. 앞으로 안 그러면 되는 거야. 은호도 너무 뭐라고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억.”

FWX는 예로부터 고지식하고 철저한 원칙주의 팀.

LOS는 12세 이용가.

곽재훈은 어려서 자신의 계정을 만들 수 없다.

부모님 혹은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만든 계정을 사용한 것.

사실 이것은 유저들 사이에서 공공연한 일이었고 게임사 측이나 게임 등급 위원회 등에서 특별히 저지하지는 않았지만.

FWX는 그게 프로에 의해 공식적으로 인정되는 것처럼 보인다면 문제가 있다는 면에 주목해 두 선수를 비롯해 나머지 선수들에게도 짧은 공문을 돌려 프로로서의 주의점을 다시 알렸다.

일반적으로는 크게 이상하지 않거나 악의가 없었던 일인데도 문제가 될 때가 있다.

프로는 그 영향력만큼이나 타의 모범이 되어야 하니까.

욕설이나 트롤, 탈주처럼 일반적으로 예민한 일은 물론.

잠깐 콘텐츠 때문에 저레벨 혹은 저티어 계정이 필요해서 편집자의 계정으로 게임을 돌리는 경우.

과정에서 편집자의 허락이 있었고 실제 플레이 한 것이 AI전이나 연습 모드라고 할지라도 결과는 도용이다.

이건 계정 판매, 계정 대여, 대리.

사측에서 절대 허용하지 않을 일과 큰 차이가 없다.

설혹 시청자들을 비롯해 방송을 보던 그 누구도 이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어도 그렇다.

다행히 이 경우 그 주체가 선수가 아닌 함께 게임을 했던 시청자였기에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그럼 재훈이랑은 앞으로 게임을 하지 않는 게 나을까요?”

박 감독은 살짝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노출될 때는 항상 조심하면 좋지. 사실 우리 중에 부모님 주민등록번호 안 외운 사람이 있겠냐만은.. 프로잖아.”

“넵. 감사합니다. 조심할게요. 너무 신냈었나 봐요.”

계속 이겨나가던 선수들은 이 일을 계기로 잠시 반성하는 시간을 가졌다.

“저도 조심할게요. 제가 괜히 초등학교라는 말을 흘려서.”

그래서 FWX는 조용히 방송 다시 보기를 잘랐고, 콘텐츠 편집에도 역시 포함되지 않으면서.

권건이 탑으로 플레이했던 흔적은 몇 개의 짤만 남아 돌아다녔다.

나중에 이 소식을 접한 사람들은 조작된 게 아니냐고 의문을 표했지만 그것이 실존했다는 증거만큼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 권건이 탑이었다니까?

- 솔랭?

- 아니 시참에서 용 둥지를 홀로코스트했다고!

- 심각한 헛소리 중독입니다 싱지드라뇨?

- 그는 시참을 하지 않아

- 라온 방송이었다니까??

- 이게 다 건신이 방송을 자주 안 해서 일어나는 금단 현상이지

- 진짜라고!!!!! 아닌가???..

그 당시 숨바꼭질의 공포를 느꼈던 시청자들은 혹시 자신들이 꿈을 꿨던 게 아니냐며 한겨울의 미스테리한 공포 게임을 추억했다.

“예성이, 다른 팀 선수에게 멘트 조심한 것도 잘했다. 잘 참았어.”

“네. 더 조심할게요.”

“안 보인다고 생각되는 곳에서도 항상 조심해야 한다. 방송 중이 아니라도 마찬가지야.”

그래도 이 팀은 좀 낫다.

박 감독은 손을 톡톡 두들기며 생각에 빠졌다.

“혹시나 개인 계정 닉네임 변경할 때는 꼭 물어보고.”

생각보다 LOS 규정은 까다롭다.

현대의 언어는 지뢰투성이.

외설스럽거나 폭력적인 어원을 가진 드립이나 왠지 입에 잘 붙어서 썼는데 특정 색이 있는 단어들.

그 모든 것을 알고 있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항상.. 조심해라. 항상. 다른 것들도. 특히 감정적으로 됐을 때.”

‘정상’적으로 플레이만 하면 상관없지만.

LOS를 하다 보면 도저히 정상이 아닌 것 같은 사람들이 있기 마련.

그중에도 실력이 뛰어난 사람이 없을 리 없다.

“예전 내가 프로 준비하던 시절에는 욕설 필터링이나 관리가 거의 안 됐었지. 그래서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패드립이..”

“저희 때도 그랬는데.”

“김 코치 때도?”

“에이. 감독님이나 코치님 때만 그런 거 아니에요. 지금도 그래요.”

“지금은 그래도 좀 낫지 않나?”

“훨씬 교묘하죠. 더 더럽고.”

“음.. 하긴.”

게임과 욕설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

게임을 억울하게 지거나 내 마음대로 안 되면 욕이 나오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그걸 타인에게 표현하는 건 비정상이다.

“그리고 프로에게 가장 큰 지뢰는 인종 차별이야. 알지? 예전에 그 사건.”

글로벌 서비스 게임에서 가장 예민한 부분이자.

도박이나 승부 조작을 제외하고 가장 큰 징계를 받는 것.

“착한 중국인은..”

“알아요, 알아요. 근데 하.. 그건 진짜 너무 공감되니까.”

대서특필되는 경우는 잘 없지만 서로 국가가 뒤섞이는 월챔 시즌에는 특히 더 자주 일어나는 사고다.

한 해에 징계를 먹는 프로 혹은 감코진만 해도 두자리 숫자를 훌쩍 넘는다.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고까지는 강요하지 않겠지만. 말로 꺼내면 안 된다. 그건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야.”

“그냥 회사에서도 그런 새, 아니, 그런 사람들이 있긴 한데.”

잠시나마 다른 업계의 인턴 생활을 겪었던 문백산 코치가 허공을 바라보며 추억했다.

“어쨌든 게임에서라면.. 저는 무고하게 영구 정지 먹은 적도 있어요.”

“왜요?”

“그냥 튕긴 건데 불법 프로그램 썼다고.”

“쒯. 어떻게 됐어요?”

“일대일 문의 넣고 컴퓨터 검사한 거랑 전적 보내고 그랬어. 다행히? 그때 내 전적 폭락장이었거든. 그게 증명이 된 건지는 모르겠는데 한 2주 걸리더라.”

“그럼 그동안 게임 안 했어요?”

“했지.. 친구 계정.. 빌려서.. 비밀.. 비밀이야. 근데 내 잘못이 아니니까..”

“음.”

문 코치가 눈치를 봤지만 박 감독은 어깨를 으쓱하며 괜찮다고 표현했다.

프로그램이 기반일지언정 어쨌든 관리는 사람이 하는 일이다 보니 실수가 없을 수는 없고.

무단횡단을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사람이 없는 것처럼 단 하나의 오점도 없는 사람 역시 드물다.

“그때는 진짜 현타가.. 접을까 했는데.”

이렇게 까다로운 규칙도 있고.

때론 잘못된 판결이 내려지는 경우도 있는 이 게임을 하는 이유.

“음.. 알 것 같다.”

그리고 수많은 게임 중 LOS의 프로게이머로 활동하는 이유도 결국 같다.

“재밌으니까.”

“재밌긴 해.”

“에이.. 애증의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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