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갱 오지 마세요
딸깍, 클릭 소리와 함께 캠 뒤로 깔끔하고 고급스러운 방 풍경이 비친다.
김예성의 방이다.
널찍한 방에는 온풍 기능이 있는 공기 청정기가 소리 없이 돌아가고 있었고.
그 근처에는 관리가 잘 된 대형 관엽 식물이 인공풍에 한들한들 흔들린다.
구석에는 계절이 넘어갈 때마다 다시 정리하는 오픈형 행거가 놓여있다.
키와 체격이 있는 편인 김예성도 편히 잘 수 있는 넓은 침대 위에는 벽지와 톤을 맞춘 겨울 이불이 포근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보랏빛이 좀 더 섞여 차가운 느낌이 드는 마젠타 컬러지만 충전재는 오리털로, 커버 소재는 단모 극세사로 선택해 시각적 보온성까지 높였다.
한참 캠을 바라보던 김예성은 이불을 쓰다듬어 이질적으로 튀는 부분을 없앴다.
갑자기 방송을 켜더라도 보러와 주실 팬분들이 있으니 혹시라도 지저분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김예성은 조심스럽게 캠 각도를 조절하고 머리를 다듬었다.
그새 삐친 머리끝에 오일 제품을 바르다가 문득 탈색한 곽지운에게 주면 좋겠다 싶은 생각이 들어 새 제품도 하나 챙겼다.
어머니인 고 여사의 자사 브랜드 제품이다.
“니 지금 뭐하냐? 얼씨구?”
“나가, 김예린.”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 되냐?”
“시끄러워.”
“근데 그거 신상 나왔는데.”
“어딨어. 내놔.”
“건이 오빠는 언제 소개해 줄 건데?”
“너 하는 거 봐서.”
“SNS 계정만 줘. 내가 알아서 할게. 나 어제 대둔근 조졌어. 투데이? 암 쏘 핫.”
“돼지가 말을 하네.”
“너 자꾸 이러면 방송할 때 나 들어와 버린다.”
“들어오면 너만 손해지. 아무도 못 알아볼걸?”
“과연 그럴까? 내 팔로워가 몇 명인 줄 알아?”
“과연 그렇지. 여긴 니가 살던 업계가 아니거든?”
갑자기 쳐들어온 여동생 김예린과 말다툼도 한번 벌이고.
“야. 싸가지. 이거 나 광고 찍은 거야. 건이 오빠 갖다줘.”
“그만 좀 쿵쿵거려. 바닥 무너지겠다, 돼지야.”
“닥쳐. 뽀리기만 해봐. 죽여버린다.”
“너나 뒤져.”
“엄마! 김예성이 나 뒤지래!”
서로 주먹 감자를 갈기는 싸움 끝에 간신히 다시 방송 준비를 할 수 있었다.
어떻게 저딴 게 인기가 많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다.
다 계략에 속고 있는 거다.
김예성은 투덜거리며 매니저에게 연락을 마치고, 방송이 준비되는 사이 텀블러에다 최은호가 준 아연 영양제를 털어 넣었다.
단맛도 쓴맛도 아닌게 신기한 맛이다.
일상에도 팀원들과의 생활이 묻어나는 것 같았다.
“저 지금부터 방송합니다!”
집에서는 드물게 큰 소리를 내서 가족들에게 알린 뒤.
“안녕하세요?”
방송을 시작하는 순간, 우르르 쏟아져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선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누굴 닮았는지 조금 전과 완전히 다른 사람 같은 모습이었다.
- 라하
- 라하!
- 형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이번 주 경기 안 함?ㅠㅠ
- 복복복/////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리고 김예성이 게임을 켜는 순간.
우연이라기엔 너무 운명처럼 새로운 접속자가 뜬다.
권건이다.
“어.”
김예성은 씩 웃었다.
알림말을 방송 중으로 바꾸고.
권건이 먼저 말을 걸어 줄 때까지, 잠시 대기.
“연휴인데 어디 안 가셨나요?”
- 가긴 어딜 가 형 방송 봐야지
- 지금 내려가는 중이에용
- 오니~오니~라온이~ 오늘도 야사시이네ㅠㅡㅠ
- 지금 뭔가 뷰튜버 보는 것 같은데
- !티셔츠 정보
- 오프화X트같은데?
- 그걸 왜 집구석에서 입어 형..?
- 형 부자야? 방 존나 럭쪄;
- 혼자 켠 거야?? 스튜디오?? 아님 집이에요??? 개좋다;;
- 방이 아니라 거실이라고 말해줘 제발
- 행거에 옷 무야?? 오늘 룩북 콘텐츠 함?
이제는 전보다 훨씬 다양해진 연령대의 팬들이 그를 반긴다.
김예성은 머쓱하게 머리를 긁으며 웃었다.
“집이에요. 방이고..”
다들 이렇게 사는 게 아닌가?
방 공개를 처음 해본 김예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태생이 깔끔한 그는 합숙 때도 그렇지만 자주 오지 않는 집도 청결하게 관리했다.
종종 청소를 도와주시는 분이 오긴 하지만 김예성은 방에 남이 들어오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체로 스스로 정리한다.
- 방 보여주세요ㅠㅠㅠ
- 형 온라인 집들이 함 가자
- 라온이의 사생활 콘텐츠~
- 저게 남자 방이라고? 시발 도대체 난 왜 돼지우리에 사는 거지
- 혹시 당신이 돼지인 건 아닐까요
- 설마 쟤도 발 냄새 정도는 나겠지
- ^_^; 깔끔한 척?
정리의 문제였나?
여동생인 김예린의 방을 떠올리자 수긍이 간다.
지저분하다.
물론 김예성은 자신이 지나치게 깔끔하다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
“제 방 별거 없는데..”
- 보여줘! 보여줘! 보여줘! 보여줘! 보여줘!
- 밀착 취재 프로게이머의 방
아직 권건이 말을 걸지 않았다.
김예성은 슬쩍 캠을 기울여 방 측면을 비췄다.
“이쪽에는 제 콘솔 게임기가 있고..”
- 형.. 방인데.. 콘솔 공간이.. 따로 있어..?
- TV인데? 저거 아무리 봐도 거실용 TV인데?
- 저게 콘솔용 모니터야? 겜기도 종류별로 다 있네..
- 나 저렇게 살고 싶어..
- 프로게이머들 다 이렇게 살아? 다 존나 갑부야?
- 아냐 시바 안 그래 그냥 고향 집 같은 애들도 개많아
- 아ㅋㅋㅋㅋ 방한 폼 블록 붙여놓고ㅋㅋㅋ 꽃무늬 벽지ㅋㅋㅋ
- 거기에 빼놓을 수 없는 불투명한 유리창ㅋㅋㅋㅋ
- ㄹㅇㅋㅋㅋ 존나 냄새날 것 같은 침대ㅋㅋㅋ
- 파워 버튼? 그게 왜 필요해? 마우스 흔들면 컴 바로 켜짐
- 아ㅋㅋㅋ 겜만 되면 충분하다고ㅋㅋㅋ 그것이 프로
“여기는 제 옷, 그리고 제가 좋아하는 것들이 있구요..”
베란다 공간을 확장한 곳에는 FWX 유니폼과 각종 굿즈가 깔끔하게 진열되어있다.
- 박물관이세요?
- 형.. FWX 소속이 아니라 FWX 팬이야?
그중 가장 조명이 밝은 곳에는 권건의 사인.
자기 대신 권건의 이름이 마킹된 사인 유니폼.
그리고 각종 피규어나 굿즈, 광고 브로마이드 등이 소중히 보관되어 있었다.
- 존나 권건 굿즈 다 모은 것 같은데? 하나같이 권건 센터네
- 저 피규어 나 품절돼서 못 샀어
- 라온님이 싹쓸이 주범이었구나 ^^
- Hoxy 권건 사생..?
- 아이구 우리 건신 침투력 대단하구랴.. 여기서 또 보네? 홍야홍야
- 권건은 인정이지..
- 야 삼성역에 권건 생일 광고 뜨면 라온이 보낸거다
- 권서방 잘생겼ㄸㅏ^ㅡ^ㅎ
딱히 부정할 말도 없는 것 같아 김예성은 쑥스럽게 웃었다.
“그리고 저쪽에는..”
쭉 방향을 돌리던 김예성이 손을 흠칫했다.
아.
김예린 미친.
- 와! 라온 형!
- 라온선수도 뭘 좀 아네ㅋㅋㅋㅋㅋ
- 찾았다 [인간미]ㅋㅋㅋㅋㅋ
- 형.. 형도 남자였네~~~~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저게.. 그러니까. 하..”
- 에이린 좋아하시는구나~
- 알지 알지~ 우리 눈나 존예지ㅋㅋㅋ
- 닌 몇살인데 이린이가 눈나야ㅋㅋㅋ
- 라온님도 이번 드라마 보셨어요?? 요망한 매력 에이린쟝
- 어쩐지 LKL 눈나들이랑 눈도 안마주치더라ㅋㅋㅋㅋ 여배우는 못이기지ㅋㅋㅋ
- 에이린! 에이린! 에이린! 에이린!
- 와^0^ 넘 이뿌다ㅎㅎㅎ 권건이랑 잘 어울릴 듯/// 손해 많이 보셨네요^^ ㄹㅏ.온.님?
당했다.
화면이 닿은 곳에는 언제 붙였는지 김예린의 브로마이드가 깨작깨작 매달려 있었다.
보자마자 폐지함이 버린 게 왜 저기에 있지?
김예성은 이 방에 왠지 여동생이 침투해있는 것 같은 강렬한 기시감을 느끼면서.
때마침 곽지운이 보낸 메시지를 클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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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지금부터 경기가 시작됩니다..”
최대한 조용히 입장해 피시방 사장님과 사진을 한번 찍고.
그래도 따라오는 시선에 양해를 구한 다음, 5대5 내전을 할 수 있게 넓게 마련된 공간을 통째로 빌리는 등 다소 복잡한 과정은 있었지만 어쨌든 우리 집 앞에서 만난 두사람과 나는 정상적으로 게임에 접속했다.
“지금 이 경기를 준비하고 있는 선수들은 FWX의 탑 차니, 정글 권건, 원딜 세자..”
오늘 나는 선약이 있었다.
그건 곽지운이 내게 부탁했던 간절한 부탁, 사촌 동생과 딱 한 판만 게임을 해달라는 것.
하지만 불량한 두 탑이 등장하면서 변수가 생겼다.
“금빛 초등학교의 ‘태조샷건’ 선수..”
갑자기 끼어든 이유찬과 최정인 때문에 곽재훈의 친구 두 명의 자리가 없어졌고.
그래서 3대4, 3대3 등 다양한 논의가 오가던 중 곽지운이 제안했다.
부계도 번거로우니 차라리 시참을 하자고.
사촌 동생 입장에서는 자랑하고 싶었을 테니까.
“그리고 유니버스 서머. 닉네임으로는 ‘정글맘에안드네’님입니다.”
마침 방송을 켰던 김예성이 선뜻 협조와 중계를 맡아줬다.
목소리가 꽤 높고 딕션이 훌륭한데다, 원래부터 주요 콘텐츠가 강의식에 가까웠던 김예성이다.
하지만 방금의 소개말에 살짝 리스크가 있긴 했는데.
나는 그냥 침묵을 선택했다.
우연히 김예성의 방에 들어온 팬들은 뜻밖의 콜라보에 환호했다.
- 와ㅋㅋㅋㅋㅋㅋㅋㅋ정인이형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소원성취했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개웃기네 저기 왜 껴있냐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정인이 형 낄끼빠빠 좀 해라 제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누가봐도 FWX 모임인데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아 빨리 방 열어줘요 제발ㅋㅋㅋㅋㅋㅋ큐ㅠㅠ
“여기가 어디라고 기어들어 온 건지 모르겠는데. 어쨌든 좋은 경기를 기대하면서, 지금부터 방 입장 시작하겠습니다.”
우리는 모두 같은 보이스 방에 들어와 있다.
실시간 화면 공유를 받는 김예성이 방송 음성을 끄더니 북풍한설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야. 왜 저 사람이랑 같이 있어?”
관전 겸 중계인 김예성.
“몰?루. 갑자기 왔어. 친구 없나 봐.”
이유찬.
“나 은찬이한테 들었는데 탑 성격 별로라더라.”
곽지운.
“저도 저 사람 몰라요! 근데 저 지금 너무 신나요! 저 근데 어디 가면 되나요? 저 원딜 해도 되나요? 저 이즈 장인인데요!”
곽지운의 사촌 동생, 곽재훈.
“미친놈들아. 나도 지금 이 보이스 방에 들어와 있거든?”
그리고 최정인.
이게 오늘의 멤버다.
“탑, 기억 안 나? 쟤가 걔잖아. 건이한테 템퍼링.”
“템퍼링이 뭐지?”
“방법이 없는 건 아닌데.”
“아아아아아! 그 말! 그 말 했던 게 정인이 형님이었구나!”
“그걸 까먹으면 어떡해?”
“근데 상관없지 않음? 저 형 어차피 이제 좆밥임. 늙어서 손 안 움직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나도 방에 들어와 있다고, 개새들아! 니 몇 점이야? 당장 말해!”
“저 그럼 시작하자마자 이즈 박고 시작할게요! 밴하지 말아주세요!”
아수라장이다.
이게 뭐 사람이 늘어난다고 달라지는 게 아니구나.
“아무튼 가능하면 저 사람이랑 말 섞지 마라. 뭐 옮을 수도 있어.”
“알겠음.”
“진짜 너네 미쳤니? 내 목소리 혹시 안 들려? 보이스 껐냐?”
최정인의 쨍쨍한 목소리를 그대로 무시한 채 복화술을 펼치던 우리 미드가 다시 마이크를 켰다.
- 아 못 들어갔어ㅠㅠㅠㅜㅠㅜㅠㅜ
- 쉬불 설이라 사촌 동생한테 컴퓨터 뺏김
- 권건의 첫 시참이 여기서 갑자기 터질 줄이야..
- 설 선물ㅠㅜㅠㅜㅠㅜ큐ㅡ으ㅜ우ㅜ FWX 진짜 사랑해
- 들어가신 분들 제발 20분이라도 버텨주세욬ㅋㅋ
“방이 벌써 다 찼네요. 감사합니다. 그럼 잠시 준비 후에 경기를 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아까와 달리 한없이 따뜻한 목소리다.
“미친, 쟤 목소리 갑자기 왜 저렇게 해? 라온 쟤 존나 소심한 앤 줄 알았는데 이중인격이야?”
“우리 미드가 어때서?”
“아까랑 똑같은데?”
“다 돌아버렸나? FWX 존나 무서운 놈들이네? 야, 권건! 네가 뭐라고 좀 해봐!”
내가 알 바인가?
“그럼 라인은 어떻게 갈까?”
여기에는 탑이 둘, 정글이 하나, 원딜이 둘이다.
뭐 이런 조합이 다 있어.
이거 완전 닷지각 아니냐?
“제가 탑 갈게요.”
어쨌든 약속대로 탑은 나고.
“그래? 재훈이 뭐 할래?”
“저 아무 데나 다 갈 수 있어요!!!! 정글 빼고!!!!”
원딜 이즈 장인이라더니.
이게 플레티넘의 열린 마음인가?
“그럼 나 미드.”
“내가 미드.”
“아니, 그럼 재훈이가 미드 해.”
곽지운은 미드를 두고 다투는 탑들을 빠르게 정리한다.
“아니 왜?”
“미드가 제일 안전하잖아.”
“인정.”
“하긴. 쫄보들이 미드 가지.”
“지금 무슨 말씀들을 하시는 건지 상당히 불쾌한데..”
누군가의 빈축을 사긴 했지만 주포가 미드인 사람이 없는 만큼 동의가 된 것 같다.
어차피 이 어린 친구가 없었다면 이렇게 게임을 할 일은 없었을 테니까.
“아하핫! 시참이니까 내가 바텀 가긴 좀 그렇고. 내가 정글 돌아볼게. 유찬이랑 정인이 형이 바텀? 그렇게 할 거죠, 정인이 형?”
곽지운이 정글을 선택하고.
“어? 어.. 그래. 그럴게.”
친화력 갑 우리 원딜의 자연스러운 호칭에 넋이 빠진 최정인은 주어진 포지션을 수긍했다.
최정인은 말하는 꼬라지만 보면 그렇게 보이지는 않지만 나이가 있는 편이다.
그래봤자 곽지운과 한 살 차이이긴 하지만.
“그럼 내가 원딜하고 형님이 서포터 해라.”
“꺼져라.”
아직 정할 일이 남아 있는 것 같긴 한데, 그건 뭐 둘이서 알아서 할 것 같고.
“아, 정글 오랜만이다.”
대충 픽을 마무리하고.
들뜬 시청자들과 함께 게임을 시작하려는 지금.
“스마 챔피언에도 쓸 수 있잖아. 그냥 점화랑 똑같이 쓰면 되는 거지? 나 직접 써본 적은 없어서..”
곽지운이 밝은 목소리로 나한테 묻는다.
도대체 이게 언제적 이야기야?
고작 오랜만이라는 표현을 써도 되는 게 맞아?
“탑은.. 오지마세요.”
아.
왜 탑들이 정글보고 오지 말라는지 알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