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탑이 둘이라니
“존나 솔직히 말해봐. 야. 권건. 너, 나 완전히 까먹었지?”
최정인의 눈매가 길게 쭉 찢어진다.
오랜만에 할 말이 없어졌다.
사실 최정인은 부탁이라는 내 말에 홀랑 넘어와서 지난 시즌 오프 때 우리를 꽤 많이 도와줬다.
도와줬다기엔 좀 웃기긴 한데.
이유찬에게 플레이 스타일을 정착시키기 위해서 내가 최정인을 초빙해왔다는 게 맞겠다.
“내가 뭐 대단한 거 바랬냐? 연락도 좀 하고, 게임할 때는 내 보이스 방에도 좀 오고, 대화도 좀 하고. 어? 가끔 방송도 좀 놀러 와주고. 그러자는 건데. 와. 생각하면 할수록 빡치네. 니 지금 나 먹버함? 지난 휴가 때 내가 어? 얼마나 어? 저 똥 싸는 기계랑 내가 게임 존나 열심히 해줬는데!”
이유찬과 최정인의 무한 일대일로 그 플레이 스타일을 쭉쭉 흡수시켰으니까.
이건 돈 주고도 못 할 훈련이다.
어쩌면 이번 시즌 이유찬이 공격적인 플레이에 특화될 수 있었던 데에는 최정인의 공이 꽤 크긴 하다.
물론 해준 거에 비해 바라는 게 좀 지나치게 많긴 하지만, 최정인은 누구처럼 단순하거든.
“형.”
“아, 니 진짜. 형이라고 부르면 다냐? 어? 내가? 어? 말이야, 어?”
“형. 침착하세요.”
“내가 그러면 어? 뭐 넘어가고 그럴 줄 아냐? 야, 너 요즘 강준윤이랑 존나 친하다며.”
“걔는 형이라고 안 부르죠.”
“그..래? 걔? 그럼 나만 형이네?”
“여기까지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최정인은 누가 자기를 대우해주는 걸 정말 좋아한다.
“그, 그래. 흠, 흐흠흠. 내가 진짜 유일한 형이니까 한 번만 봐주는 거다. 진짜로. 앞으로 연락도 좀 하고, 어?”
뭐.
순식간에 우리 팀원들부터 시작해서 꽤 많은 사람이 떠오르긴 하지만 일단은 그런 거로 해두자.
“휴가인데 괜찮나요.”
“흠. 휴가니까 오지. 시즌 중에 내가 사옥에 놀러 갈 수는 없잖아?”
나, 최정인.
그리고.
“그건 그렇네. 형 예리하다.”
이유찬까지.
우리 셋은 근처 카페에 앉아있었다.
집 앞에서 그렇게 사람을 불러대는데 안 나갈 수가 있어야지.
왠지 가족들도 환하게 웃으며 내 등을 떠민 터라 대충 모자만 눌러 쓰고 나왔다.
연휴라 그런지 적당히 조용한 분위기다.
“내가 좀 지적이고 현명하지. 그런 그 뭐냐. 그런 교란? 시키는? 그런 거는 잘못된 행동이거든.”
웃기시네.
유니버스가 사람 빼가는 데에 도가 텄고, 작년까지 유니버스 미드였던 이시환도 최정인이 꼬셔갔다는 건 이 판에 있는 사람은 모두 아는 이야기다.
제 마음에 드는 건 다 갖겠다고 설치는 악질이라서.
“나 그렇게까지는 말 안 했는데?”
“이유찬 넌 왜 반말 쓰냐?”
“형님.”
“그래, 넌 형님이라고 불러라.”
“어. 알았어.”
형님이라고만 부르면 존댓말인가?
최정인은 휴가를 받자마자 여기로 달려온 건지 등에는 가방을 메고 있었다.
설 선물은 어떻게 했냐고 물어봤더니 일반 택배로 부쳤다고 한다.
추가로 선물 받은 식품류까지 몽땅.
그러니까 케이크나 간식 종류도.
지금 연휴라 택배가 시간이 좀 걸릴 텐데.
며칠 뒤 택배를 받아 봤을 때 안에서 식품류가 어떻게 되어서 나올지 상상하다가 관뒀다.
“너네 떡값은 좀 받았냐?”
자신을 업계 대선배라고 생각하는 최정인이 거드름을 피웠다.
“형님. 떡값이 뭐냐?”
“보너스.”
“아, 용돈? 받았어.”
“얼만데.”
“님 선.”
“어디 건방지게 님 선이야?”
“형님 선.”
“흠. 나는 이 정도..”
와.
진짜 존댓말 기준 너무 넉넉한 거 아니냐?
놀랍게도 최정인은 봉투를 열어서 직접 보여줬다.
갓 받아온 듯 유니버스의 로고가 곱게 새겨진 봉투다.
현금 지급이라니 레트로 감성인가.
“어때.”
최정인이 실실 웃으며 날 바라봤다.
제법 두둑하긴 한데 솔직히 FWX와 비교할 정도는 아니다.
이게 뭐, 일종의 레버리지 효과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번에 우리가 받은 보너스는 시즌 인센티브에 가까웠다.
계약에 없는 불로소득인데도 꽤 큰 액수라 나도 FWX를 재평가했고.
케바케지만 그냥 명절 선물로 대체하는 팀도 많거든.
처음 2군 숙소를 봤을 때부터 느꼈지만 확실히 돈 쓸 기회를 놓치지 않는 팀이긴 하다.
“봉투 보니까 이제 마음이 좀 바뀌냐? 아직 기회가 남아있어..”
바뀌긴 뭐가 바뀌어?
어쨌든 유니버스가 이러라고 명절 보너스를 주지는 않았을 텐데.
“형님, 우리는..”
이유찬이 뭔가 대답할 것 같아서 말리려는 찰나, 진동벨이 울린다.
“음료 나왔다. 이유찬, 가져와.”
“내가 왜?”
“네가 막내니까.”
“어? 맞네.”
이유찬은 수긍이 빨라서 편하다니까.
“야. 권건 제대로 됐네. 그치, 이런 건 막내 시켜야지.”
이상한 데서 또 한 번 인정받은 건 좀 별로지만 그냥 빨리 이야기를 돌리자.
선수끼리 돈 얘기를 해서 좋은 꼴을 본 적이 없다.
“집은요?”
“별로 안 멀잖아. 광역 버스 타면 금방이야.”
게임만 해서 거리 감각도 이상해져 버렸나?
집으로 갈 때 B만 누르면 갈 수 있다던가.
어쨌든 이유찬은 거의 엎어질 것처럼 빠르게 음료를 들고 왔고 다시 시시껄렁한 대화가 시작됐다.
“그러니까 왜 연락을 그렇게 안 해? 어? 형이 월수금 이렇게 딱 정해서 니 문자 확인하고 있는 거 모르냐?”
아, 그래서 화목토일에는 전화가 왔구나.
이래서 집착하는 사람은 싫다니까.
“형님 대단하네. 요일을 기억해?”
“그래. 내가 계획적이고 성실한 타입이거든. 그런 말 많이 들어.”
가만히 보고 있으면 최정인은 정말 대단한 수다쟁이다.
“그렇게까지는 말 안 했는데.”
잠시도 대화가 끊이질 않는다.
그래서인가?
항상 기자들에게 인기가 많은 게.
하지만 겪어봐서 아는 건데.
최정인이 조잘거리는 걸 들어주다 보면 정말 끝이 없다.
유니버스 최악의 복지가 바로 저 탑이다.
“아니. 근데 여긴 음료를 왜 이따위로 만들어? 왜 민트 초코 맛이 나지? 나 민초 싫어하는데.”
“그냥 마셔. 형님이 시켰겠지.”
앞에서 이유찬이 말하고 있는 걸 보면 더 기가 찬다.
“에이씨.. 내가 한번 봐준다, 진짜.”
그리고 카페 직원분들은 죄가 없다.
그냥 둘이 음료가 바뀌었을 뿐.
싫어하는 음료도 주는 대로 먹는 놈이나.
자기가 뭐 시킨 지 기억도 못 하고 있으면서 남한테는 그냥 마시라는 놈이나.
나는 그냥 지적하는 걸 관뒀다.
한 포지션이 한 명일 수밖에 없는 건 신께서도 다 생각이 있으셨기 때문이리라.
“혹시..”
갑자기 우리를 지켜보던 손님 하나가 다가와 조심스레 말을 건다.
“FWX.. 차니거니..?”
흘긋 옆을 보니 마치 알아봐달라는 것처럼 유니버스 유니폼을 입고 왔던 최정인이 이마를 가리고 있다.
이건 또 뭐야.
가리려면 입을 가리던가 눈을 가려.
“건이 형, 진짜 팬입니다.. 진짜 진짜 팬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에 또.. 만수무강하세요.”
우리와 사진을 찍은 팬이 종종걸음으로 사라진 뒤.
옆을 보니 최정인이 얼빠진 표정으로 날 보고 있었다.
“왜 나한테 사진 찍자고 안 하지?”
“FWX 팬이신 것 같아요.”
“어쩌라고? 나는 유니버스의 써머잖아.”
“어쩌라고? 지금은 윈터잖아.”
“?”
“형님 영어 몰라? 겨울.”
“알아, 개새야. 넌 존나 노답이야.”
“오. 나 그런 말 많이 들어. 나 봄이 스프링인 것도 아는데.”
“넌 어떻게 이런 탑이랑 게임을 하냐?”
최정인이 거울 치료를 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속이 좀 뚫리는 것 같다.
“이제 슬슬 자리 뜨죠.”
“왜? 밖에 추워.”
“다른 분들 더 오실 수도 있으니까요. 형, 유명하잖아요.”
언론사 한정이긴 하지만.
“어? 어. 그치. 그치. 유명하니까. 나는 유명하니까.”
“갑시다.”
“그럼..”
“게임하러.”
내 말에 최정인의 표정이 확 밝아진다.
“홀리 쓋. 오늘을 기다렸어. 이런 날이 오기를.”
“오우야. 얼른 가자. 격전 뭐 이런 거 해? 애들 부를까?”
“닌 꺼져. 어차피 맨날 같이 게임하잖아.”
“어? 그 말도 맞는 말이네. 형님은 왜 거니랑 게임 못하지? 아, 알겠다. 유니버스에는 거니가 없지. 거기 탑 불쌍하다.”
와.
탑이 탑혐한다.
“이 새끼 뭐야? 야. 막내, 니 왜 이렇게 싸돌아다녀? 설인데 집에 안가냐고.”
최정인이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나자 짐이 한가득이다.
여기로 바로 달려오신 분이 할 말은 아닌 것 같긴 한데.
“형님. 나 엄마한테 쫓겨났어. 그래서 못 들어가.”
“아, 진짜? 미안..”
“대청소해야 하는데 쓰레기가 집에 있으면 곤란하겠더라고. 그래서 튀었지. 형님도 그런 거 아님?”
“진심으로 꺼져.”
“조용히 좀 갑시다.”
이 좋은 연휴에 탑이 둘이라니.
정말 너무 피곤하다.
“나 근데 예전부터 너 이야기 진짜 많이 들은 거 아냐? 권건 네가 기억할지는 모르겠는데 박기준이라고 지금 빅스로 넘어간 2군..”
“야, 야. 저기 우리 학교 앞에 기억남? 나 저기 언덕에서 미끄러진 적 있음. 근데 그때 내가 궁으로 하늘을 날아서..”
“걔도 정글인데 터틀이라고.. 근데 2군에 있었을 때부터 너랑 알고.. 원래는 미드 라이너였는데 포변을..”
“피가 바닥을 적시고..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일어나서 정상에 우뚝.. 결국..”
“사실은 내가 너의 가치를 가장 먼저 안..”
“탑이라는 것을..”
“탑은 나다.”
“나지.”
“까고 있네.”
내 양옆에 서서 쉴 새 없이 조잘대는 두 놈을 상대하고 있자니 이건 또 무슨 나비 효과인가 싶다.
“거니. 탑이 누구지?”
“누가 진짜 탑이지?”
내가 FWX에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이유찬과 같은 소속이 아니었더라면.
이놈이 반찬 배달할 때 주소를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이유찬이 최정인을 데리고 집 앞까지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쯤 휴대폰을 끄고 조용하고 편안한 설을 보내고 있었을 텐데.
“골라줘.”
“형님. 선 넘네? 투 탑 가?”
“막내 여무시고.”
나는 고작해야 김치와 내 평온한 연휴를 바꾼 것인가.
이거 가성비 맞냐?
“알겠으니까 이제 둘 다 입 좀 다물어.”
흠칫 놀란 시선이 모인다.
“오늘.”
호랑이를 잡기 위해서는 호랑이 굴로 들어가라.
결국 나는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탑은 내가 간다. 너희 둘은 다른 데 가.”
못난 놈들 데리고 게임할 때는 탑이 좋긴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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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형. 왜?”
곽지운과 게임을 하기로 약속한 사촌 동생 곽재훈이 불안한 듯 눈동자를 굴렸다.
“재훈아, 잠깐만.”
이런 반응이 나오면 항상 안 좋은 일이 일어난다.
놀이공원에 같이 가기로 했던 아빠한테 일이 생겼다던가.
틀렸는데도 맞았다고 동그라미 쳐뒀던 문제집의 진실을 엄마가 알아차렸다든가 하는 끔찍한 일 같은 것들이 그렇다.
“뭔데! 뭔데! 형, 형, 형, 형! 뭔데! 뭔데!”
두 사람은 설 연휴를 맞아 놀러 나왔다.
“5분만 더 기다려줄 수 있어?”
“엄마가 식사 준비하기 전까지 오랬잖아! 우리 시간 없어!”
가족들과 함께 해야 할 일이 태산이라 시간적 여유가 없다.
혹시라도 사촌 형이 안 놀아주겠다고 할까 봐 마음은 더 급해진다.
이런 일은 5분이 10분이 되고.
10분이 20분이 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친구들한테 엄청 자랑했단 말이야! 건신이랑 게임같이 하게 해준다고!”
곽재훈, 살아온 세월 십 년.
플레티넘 이즈 장인.
자칭 금빛 초등학교의 자랑.
프로게이머를 사촌 형으로 둔 곽재훈은 티어 자랑을 하는 다른 형들이 부럽지 않았다.
우리 형의 지난 시즌 성적이 엄청났으니까!
심지어 형이 랭킹 1위랑 아는 사이, 그것도 같은 팀이니까!
제아무리 다이아라도 우리 형이나 건신을 못 만난다!
근데, 그건 그거고.
“약속했잖아! 약속했잖아! 약속했잖아! 말 바꿔? 말 바꿔? 말 바꿔? 형 진짜 그럼 배신이야. 나 형 진짜 안 봐. 진짜 나 악플 달 거야! 사촌까지 저주할 거야!”
타임 리미트가 걸린 피시방에서 흥분한 초등학생은 무섭다.
“재훈, 재훈. 침착해. 침착해. 자. 봐봐.”
다행히 사촌 동생의 마음을 아는 곽지운이 은밀하고 위대하게 모바일 기프트 카드를 한 장 더 건넸다.
FWX의 선견지명에 감사하면서.
“오우. 와우. 십만원권. 와우.”
다행히 효과는 세뱃돈보다 좋았다.
“프로가 두 명 더 온다는데.”
“프로?”
“프로. 프로게이머. 내 친구들. 챌.”
그리고 이건 더 효과가 좋다.
“5분?”
“5분.”
“50분이라도 기다리겠습니다, 형님! 제 친구들도 다 꺼지라고 할까요?”
철없는 초등학생의 난동은 티어 앞에 무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