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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게이머, 그만두고 싶습니다-207화 (207/326)

207화. 지연보다는 학연, 학연보다는?

미라쥬와의 경기 바로 다음 날.

2월 중순, 설 연휴를 맞아 며칠간의 휴가가 주어졌다.

어제 경기 종료 직후 사옥에서 준비한 잔치 음식들을 먹으며 팬들에게 설 인사 라이브를 했고.

이제 각자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지금 팀에는 아주 멀거나 교통이 불편한 곳에 사는 사람은 없었기에 모두 여유롭다.

“야. 상준아. 잘 들어라.. 형이 진짜 이 바닥에서 오래 굴러봐서 아는 건데..”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숙소 휴게실에 모였다.

“최은호, 그만 좀 해라.”

“아니, 고생은 원딜이 했는데 왜 서폿이 칭찬받아?”

“니가 나한테 고생했다고 하는 날이 오다니.”

“그 포인트 아니야.”

그리고 최은호는 어제 경기 후 자아분열이 일어나고 있었다.

최은호는 유상준에게 꽤 많은 양의 피드백을 전달했다고 한다.

슬쩍 들여다보니 제법 진심이 들어가 있어서 최은호를 다시 봤다.

뭐, 좀 진정한 서포터란 원딜에게만 충성을 다하는 것, 절대 정글에게 뻐꾸기 날리지 말 것 따위의 자기도 지키지 않는 교리들이 좀 들어가 있긴 했는데.

그런 건 내가 몰래 빼버렸다.

“서포터가 말이지. 어? 항상 겸손하고 또 겸손해야..”

“그래서 내가 잘했다는 거지? 원딜 최고라는 거지?”

“아니.. 그게 아니라..”

최은호는 또다시 방방 뛰려고 하자.

이민이라도 가는 것처럼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나온 문백산 코치님이 조심스럽게 내게 속삭였다.

“근데, 저기. 권건 선수..”

“말씀 편하게 하세요.”

“그럴까요? 그럼 혹시 친추부터 할까? 우린 이제 친구잖아.”

뭐지, 이 새로운 캐릭터는?

이유찬 마크 2인가?

내 떨떠름한 표정을 본 문 코치님은 머리를 박박 긁었다.

“아차. 이게 아니지. 이거 이렇게 은호 상준 라이벌 구도가면 곤란한 거 아니야? 내가 김 코치님께 말씀드려서 미팅 슬롯 어레인지 좀 할까? 프라이빗하게..”

그냥 직장인이 된 이유찬인가?

나는 피식 웃었다.

이 사람도 딱히 기억에 남아있던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어쩌면 이유찬이 올라오면서 빛을 발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FWX는 참 신기한 팀이다.

어디서 이렇게 새로운 인물이 나오지?

“말은 저렇게 해도.”

목소리를 크게 낮춘다.

“어차피 은호 형이 추천했고, 저건 글쎄요. 서폿 공감성 수치 같은데요.”

“그게 뭐지?”

“음..”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까.

최은호는 팀에게 꽤 미안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

자기 폼이 올라온 것과 별개로 지난 해에 아프다는 사실을 오랫동안 숨기다가 폐를 끼쳤으니까.

일부러 숨겼다기보다는 자각의 문제이기도 한데, 어쨌든 결과는 같다.

그래서 유상준을 자기 아바타로 생각한다고 해야할까?

혹은 서포터라는 포지션 자체에.

“과몰입 하고 있다는 거죠.”

“아. 오. 와. 오. 설명 잘한다. 혹시 설에 나랑 게임할래?”

“문 코치. 집에 안 가?”

곤란하던 차에 최 코치님이 불쑥 끼어들었다.

따로 직급을 나누지는 않았지만 최 코치님은 헤드 코치 역할이다.

“가겠습니다!”

“가는 길에 방향 같은 애들 좀 태워다 줄 수 있어?”

“넵! 알겠습니다!”

그리고 나이가 어린 문 코치님은 ‘코치’라기보다는 선수들과 감코진 사이의 세대 연결을 위한 연결 고리 역할이고.

“건아, 편하게 가방마저 싸고. 설 잘 보내.”

“예.”

“그리고 이거. 이건 어머니께 드려. 별 건 아니고.”

최 코치님은 나에게 작은 롤케익 세트를 건넸다.

백화점에서 주문한 듯 포장이 고급스럽다.

하지만 이미 손은 꽉 차 있었다.

관련 업체에서 보내준 설 선물이 넉넉했으니까.

팀에서 준비한 육류나 홍삼, 과일 세트 등은 집으로 배송했는데도 그렇다.

아, 물론 팀에서 내려온 명절 보너스도 두둑하게 받았다.

특히 이번에 스폰서 계약을 맺은 메타버스 테일즈에서 보내온 선물은.

모기업의 디지털 콘텐츠 기프트 카드를 대량 포함하고 있어 모바일 게임을 좋아하는 선수들에게 극찬받았다.

그래, 편의점에서 사는 그거.

“너무 많은가?”

“아뇨. 좋죠. 감사합니다.”

선물을 보내오는 건 꼭 계약 관계가 아니라도 많았다.

우리를 사랑해주시는 팬분들이 보낸 선물.

LKL을 비롯해 앞으로 좋은 관계를 가지고 싶어 하는 다른 스포츠팀.

아직 계약을 진행한 건 아니지만 간을 보고 있는 광고주들.

우리와 협업하고 싶어 하는 기업형 스트리머들.

심지어 우리 집에 도착한 선물 중에는 알 수 없는 페이퍼 컴퍼니에서 보낸 선물도 있었는데.

집에 있던 가족들이 열어보니 왠지 약과에 중국 팀 이름이 찍혀있더라, 하는 연락을 받아 우리 단지에 있는 이웃들에게 나눠드리기로 했다.

여기저기서 휴가의 시작을 알리는 연락들도 오기 시작했다.

2군 선수들에게서도 꽤 많이 연락이 왔고,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인연이 있었던 사람들도 오랜만에 메시지를 나눴다.

- 강준윤 : 야;;^^

- 강준윤 : 이 싸ㅏㄱ지 없는

- 강준윤 : 선배님한테 설 인사 안하냐;;;;

- 나 :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강준윤 : 엎드려 절 받냐?;;;;;;;ㅋ

- 나 : 답장?

- 강준윤 : 말하는 꼬라지;;;;

- 강준윤 : 오냐;;ㅋ 새해 복 많이 받아라ㅋ;;;;

- 강준윤 : 근데 붐보이 그 새기 진짜 스레기더라 해머스랑 경기했는데 우리가

스톰은 우리보다 하루 먼저 휴가가 시작됐다.

아마 그 경기를 이야기하는 것 같다.

뭐, 이겼단 얘기겠지.

내가 알 바인가?

나는 폰을 꺼버렸다.

근데 뭘 잊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 좀 드는데.

뭐더라.

“설에 뭐할 거야?”

“쉬겠지.”

“나도.”

김예성은 아주 작은 가방을 메고 있었다.

“그래도 이번 주에 방송 한번 켤 것 같은데, 그럼 방송 중이라고 써둘 테니까 말 걸 때 조심해.”

“그래.”

“설 잘 보내고. 혹시 심심하면..”

잠깐 망설이는 것 같더니.

“아니다. 그러고 보니까 이거. 어머니 드려.”

그냥 또 다른 선물을 내밀었다.

꽤 유명한 코스메틱 브랜드의 기초 관리 세트다.

“야! 김미드! 나는 왜 안 줘!”

“너 오른손에 들고 있잖아.”

“언제 줌?”

“아까.”

“말을 해야 알지. 먹는 거임?”

“아니야.”

“너 가방은 왜 그런 거 멤? 거기 바나나 한 송이는 들어가겠냐?”

“한 송이를 왜 가방에 넣어? 바나나 케이스가 따로 있는데..”

김예성이 정말로 가방에서 바나나가 딱 하나 들어가는 케이스를 꺼내서 보여줬다.

뭐 저런 게 다 있어?

그리고 왜 바나나를 들고 다녀?

바나나에 무슨 사연이라도 있어?

“너 이런 게 있는 줄도 몰랐지?”

잘난 척 하는 미드와.

“어. 몰랐어. 그럼 바나나 넣어 다니기 편하겠다. 맨날 뭉개졌는데.”

“그건 니가 깔고 앉으니까..”

“인정.”

모든 걸 인정하는 탑의 과일 토크가 이어진다.

상극 같은 두 사람은 제법 잘 맞는 면이 있다.

“너 진짜 슬리퍼 신고 가? 안 추워? 눈 왔는데..”

“어. 니는 잠바 좋아 보이네. S급임?”

“캐시미어 코트야.”

“캐시템 좋지. 니 그거 또 맞춘 거잖아. 옷 그거.”

“OOTD?”

“어어. 그거.”

“정말 알아?”

“오티디? 그거잖아. 드라마 보는 사이트.”

“?”

뭐, 둘의 관심 분야가 워낙 달라서 중간중간 헛발질하는 것도 있긴 하지만.

“그럼 됐어. 이제 가.”

어쨌든 이제 슬슬 나가야 할 시간이다.

“우린 동네가 같으니까. 님 모름? 우리 고등학교 동창. 나는 거니와 학연이 있다는 말씀.”

이유찬이 나에게 어깨동무를 시도해서 재빨리 피했다.

자연스럽게 팔을 내려서 혼자 팔짱을 낀 이유찬이 당당하게 김예성에게 축객령을 내린다.

“잘가라. 김미드.”

“...”

김예성은 잠깐 미묘하게 찌푸리더니.

“학연? 두고 보자.. 난.. 혈연으로..”

알 수 없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먼저 출발했다.

“건아, 설 잘 보내.”

곽지운도 마지막으로 인사를 하러 오고.

“형도요.”

“건. 즐. 설.”

유상준도 마찬가지였다.

“그래. 즐설.”

“아, 깍지! 너 왜 쟤랑 같이 가냐고!”

그리고 여기 빠질 수 없는 최은호도 끼어든다.

“상준이랑 내가 집 방향이 같은데 어쩌라고?”

“그럼 난 혼자 가냐고!”

“뭘 혼자야. 너 집 제일 가깝잖아.”

“그래도!”

“미미파!”

“뭔 소리야?”

“도 미미솔?”

“왜 노래를 불러?”

“니 목소리. 미 레레파 솔솔?”

“아, 곽지운 진짜 지랄하지 마!”

“솔솔라!”

“꺼져!”

오늘도 최은호 놀리기에 곽지운이 열을 올리자.

무표정하게 서 있던 막내 서포터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형. 설. 행복.”

“어, 어, 상준아. 아. 어. 진짜? 설에 행복한 적이 없었는데 이번엔 다르다고? 그래.. 그럴 수 있지.. 내가 미안해.. 네 맘을 이해를 못하고..”

“진짜 뭐래? 최은호 과대 해석 실화냐?”

“야, 애가 얼마나 불쌍하냐? 여태까지 설에 맨날 눈칫밥 먹었을 거 아니야? 응? 원딜이 돼가지고! 이 어린애를! 어이구, 이 화상!”

“그런가?”

왠지 결혼 10년 차 부부같은 바텀은 막내 서포터 손에 남몰래 각자 한 개씩 선물을 더 쥐어주고 먼저 인사를 고했다.

“같이 나가.”

“건아! 그리고 그때 약속한 거 잊지 말기다.”

“네.”

곽지운의 말을 마지막으로 이제 세 사람 마저 숙소를 떠났다.

드르르륵, 무거운 짐을 끄는 캐리어 소리가 텅텅 빈 숙소를 울린다.

합숙은 선수들만큼 빡빡하지는 않지만 기본적으로 감코진도 함께하기 때문에 이런 연휴 기간에는 사옥이 텅텅 비게 된다.

우리는 시즌 시작 약 한 달 전부터 시즌 중, 그리고 길어진다면 플레이오프나 월챔 시즌 내내 함께한다.

그리고 이렇게 시즌 중간에 쉬는 건 민족 대명절인 설과 추석, 두 번에 불과하다.

천재지변이라도 있는 게 아닌 이상.

리그는 항상 굴러가고 있으니까.

그러다 보니 실제로 집에서 가족들과 보내는 시간이 그리 길지는 않다.

어쨌든 다 큰 성인 남자들이 엄마가 보고 싶다거나 하는 건 좀 우스워 보일 수도 있긴 한데.

꽤 오랜 시간을 반복한 나도 매번 오랜만에 부모님을 뵐 때마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걸 보면 이건 나이 같은 것과 관계없는 것 같다.

아.

그러고 보면 가끔 집에 가지 않는 선수들도 있다.

특히 성적이 안 좋을 때 그런 경향이 있는데, 그건 연휴에 직장에 출근하거나 실적이 좋지 않을 때 일부러 크런치 모드를 만들어 야근하는 심리와 비슷한 게 아닐까.

물론 그냥 가족들이 여행을 가버렸다던가.

숙소가 더 마음이 편해서 그런 경우도 있긴 하지만.

우당탕, 어디선가 황급하게 올라오는 소리가 들리고.

“얘들아, 기다렸니?”

집이 코 앞인데도 굳이 우리를 데려다주겠다고 나선 박 감독님이 문을 벌컥 열고 등장했다.

약속이라도 있는지 오랜만에 사복을 잘 차려입은 모습이다.

박 감독님의 사복은 김예성의 평가에 의하면 스트릿 패션 파.

남몰래 블랙 뮤직과 힙합의 혼을 숨기고 사는 사람이다.

모르긴 몰라도 왠지 학생 시절 커다란 헤드폰을 귀에 쓰고 내려놓지 않는 타입이었을 것 같다.

“괜찮습니다.”

“어우. 아냐. 짐 줘. 내가 들게.”

박 감독님은 단숨에 내 보스턴 백을 뺏어 짊어진다.

갖은 선물로 가득 찬 가방이 무거워서 휘청대시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괜히 틈새 운동 찬스를 잃은 것 같긴 하지만.

표정이 너무 진지해서 그대로 두기로 했다.

우리는 박 감독님의 작은 SUV로 향했다.

“택시 타도 괜찮은데요. 교통비도 나오고.”

“안돼. 위장한 택시 기사한테 납치라도 당하면 어떡해.”

여기가 한국이 아니라 디트로이트였나?

“그러시다면야..”

“감독님. 차에서 흙냄새 나요.”

“어, 유찬아. 그거. 그.. 얼마 전에 식물 마켓을 다녀와서..”

“풀 키우세요?”

“내가 키우는 건 아니고..”

아무래도 박 감독님의 사생활 역시 잘 진행되고 있는 것 같다.

“그럼, 얘들아. 설 잘 보내고. 과식하지 말고 잘 챙겨 먹어. 부모님께 인사 전해드리고. 감기 조심하고. 또..”

“데리러 오시나요?”

“그럼. 미리 연락해.”

이유찬의 뻔뻔한 질문에도 박 감독님은 그저 웃었다.

어쩐지 이런 모습을 보면.

김예성이 이 팀에 오게 된 사연 중 가장 중요한 게 박 감독님과의 관계였다는 사실이 떠오른다.

어떻게 보면 내 콜업도 마찬가지고.

뭐.

성실함과 노력은 만점이지만 운이 없었던 거로는 최악이었던 우리 감독님.

어쨌든 처음부터 성격이 좋았던 걸로 따지면 이만한 감독이 없긴 하지.

감독들의 팀 내 텃세도 무시할 건 못 되니까.

이제 마지막 멤버였던 이유찬과도 인사를 나누고.

“거니거니.”

“설 잘 보내라.”

“우리 피시방 갈래?”

“가라.”

“오케이. 바이.”

나는 가족들과 예약해뒀던 파인 다이닝을 즐기며 단출한 핵가족의 연휴를 시작했다.

그리고 채 24시간이 지나기도 전.

바로 다음 날 점심시간에 우리 집 앞을 찾아온 건.

“야아아아아아아아! 거니!”

이유찬.

“당장 나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그리고 내가 완전히 잊고 있었던 그 사람.

“이 나쁜 새끼야아아아아아악! 버로우 타면 다냐아아아아아악!”

우리보다 하루 늦게 설 연휴가 시작된 대구 유니버스의 최정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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