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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게이머, 그만두고 싶습니다-203화 (203/326)

203화. 어필

“어어어어어어, 이거, 이거, 이거!”

평소와 똑같이 삼분할 화면을 내보냈을 뿐인데 실컷 피드백만 수집한 옵저버가 화면을 바텀으로 고정했다.

“지금 각 보나요? 이거 제대로 딜교 들어가면 쭉 밀려나서 받아먹을 수밖에 없거든요, FWX!”

“미라쥬 바텀, 강합니다!”

왼쪽 귀로 들려오는 해설진의 볼륨을 낮추고, 서브 요원의 전달 사항에 잠시 귀를 기울였다.

바텀 주목, 서로 같은 의견이다.

미라쥬의 움직임은 명확하게 공격적인 자세.

밀릴 것 없는 타이밍에도 기가 막히게 딜교환에 실패한 사이다의 탐진치가 세자의 아펠과 함께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오늘은 FWX의 두 번째 서포터가 필드에 처음으로 나오는 날.

프로게이머로 뛰어본 적은 없지만, 최근 골프에 푹 빠진 옵저버는 이 감정을 비슷하게 이해했다.

머리 올리는 날.

인도어에서 휘두르는 것과 달리 진짜 필드에 나가는 일.

특별히 대단한 일이 아님에도 괜히 긴장되고 실수가 연발되는 것.

옷차림부터 장비, 각종 사전 준비와 매너 공부까지.

이 선수가 F.L.E에서 뛰어 본 만큼 이 경기장이 정말 처음은 아니었지만.

오늘의 경기는 이제 꽤 무게감 있는 FWX라는 팀에서 멀쩡한 서포터 대신 출전하고,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중요한 한 판이다.

사이다라는 선수가 이 경기에서 주변 사람들을 비롯해 코치진에게 자신을 증명하지 못하면.

더 이상 이 선수가 기용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비싼 그린피를 내가면서 굳이 초짜를 필드로 데려 나오고 싶어 할 동반자들은 없을 테니까.

여태까지의 움직임은 썩 대단하지 않았다.

좋지 않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어차피 세자의 아펠을 키워내는 것이 그 목적이겠지만, 실점만 면한 수준.

그 선수가 경력직이건 아니건 호흡을 맞춰왔건 아니건.

첫판부터 많은 것을 기대하는 사람은 없다.

미라쥬 역시 그 점을 명확하게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권건이나 차니처럼 2군에서 콜업된 선수가 아니니까.

그래서.

지금 이 공격을 받아낼까?

“이 사실을 FWX도 알고 있거든요?”

아니면 뺄까?

“하지만 빼게 되면 손해 좀 봐요, 이거, 이거, 중요한 라인인데요!”

존재감 없이 옵저버라는 자리에서 오랫동안 일해 온 그는 리그의 역사를 잘 아는 사람이다.

어쩌면 해설자들보다 더 그럴지 모른다.

모든 경기를 가장 많은 모니터로 지켜봐 온 사람이니까.

경기장 아래층에 위치한 이 모니터링실은 리그의 모든 것들이 모여있다.

영상 제작팀과의 중요한 협력점에 있는 만큼 각 팀 선수들의 보이스에서 흘러나온 사적인 이야기가 흘러들어와 고이고.

각종 업데이트 정보다 리그의 데이터가 보존되어있는 곳.

옵저버는, 세계수 아래에 있는 지혜의 샘인 이곳의 파수꾼이다.

“정확하게 들어가는 고구미의 스킬샷!”

“이거 지금 미라쥬가 선렙 타이밍 잡았어요!”

“강합니다, 이거 확 밀고 들어가요?”

“순간적으로 빈틈 알아차렸나요? 이대로 밀려나요, FWX!”

야, 고구미도 제법이네.

아펠 무기 교체 장전 딜레이를 계산했어?

탄 수를 셌나?

감각?

이번 세대에서 가장 고평가받는 원딜 중 하나인 고구미 선수.

마찬가지로 순간 판단력 하나만큼은 최고라고 평가받는 서포터 헥사 선수.

고구미는 나름의 이유가 있어 트릭스터를 떠났고, 두 사람의 결합은 꽤 흥미로운 일이 됐다.

또 그 결과가 지금 눈앞에 나와 있다.

“뒤로, 뒤로, 퇴각합니다, 세자!”

“밀려요! 이거, 어어어어어, 어어어어어어! 양 팀 스펠 빠집니다!”

“쫓겨요? 점화 붙습니다? 이거! 정글 모두 멉니다!”

볼륨을 다시 조절한다.

FWX 팀 보이스가 커진다.

“걸렸다.”

메인 옵저버 최고의 혜택이 여기에 있다.

“지운이 형. 살짝 앞으로 나가주고.”

바텀이 목소리를 높여야 할 것 같은 이때.

오히려 말을 하는 것은 FWX의 정글러다.

흘긋 본 정글 고정 화면, 권건은 이 말을 하는 중에도 정글링을 머뭇거리지 않고 있다.

“상준. 교차.”

단출한 오더.

무슨 뜻일까?

파도 소환사의 축복을 두르고 끈질긴 추격자처럼 총격을 내뿜어내는 루시언 앞에서.

“어어?”

세자의 아펠이 타워 안쪽으로 들어가는가 싶더니.

“어어어, 이거, 이거, 죽어요! 죽어요, 세자! 죽어요!”

마치 화가 난다는 것처럼 홱 돌아서서, 따당 땅.

몸으로 루시언의 두 대를 맞아내며 한 대를 때리는 아쉬운 딜교환을 한다.

- ?

- 에바야

- 저걸 왜 싸워

- 서폿 잘못 아님?

- 안녕하세요? 저는 강도예요 FWX 퍼블 ‘줘’

권건이 건넨 오더를 엿들었지만.

얘네 지금 실수한 건가?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체력이 뚝 떨어진다.

마지막 타격 한대면.

퍼블이 나올 것 같다.

두 원딜의 시선이 교차한다.

그 짧은 시간 속.

경기를 지켜보는 모니터링실의 파수꾼은 눈살을 찌푸렸다.

잠깐이나마 미래가 보였다.

마치 이제야 명백한 실수를 알아차린 것처럼, 세자의 점멸.

세자가 점멸을 사용할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고구미의 따라가는 점멸.

그리고 그 미래는 그대로 이루어진다.

바텀에서 눈부시게 빛이 터지는 찰나.

“심연 잠수!”

그리고 두꺼비를 닮은 챔피언의 느린 몸뚱이를 이끌고 깊이 들어갔던 선수가.

“그러면서, 그러면서, 어어?”

“이거, 걸린 것 같은.. 저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억중!”

“썰물이.. 세자에게.. 닿지.. 않습니다!”

“세자, 피 1! 피 1! 어떤가요! 이거, 어떤가요!”

“마무리..가..! 안됐어요! 못 잡았습니다! 타워! 타워! 타워! 타워! 고구미 선수, 타워!”

다시 세상 밖으로 뛰쳐나와 루시언을 띄워 올린 순간.

세자는 이미 마지막 타격까지 받아내고 몸을 깊숙이 숨긴지 오래였다.

“나이스 컷.”

확신 어린 권건의 목소리가 들리고 옵저버는 완전히 깨달았다.

연기였구나.

“놓칩니다! 닿지 않아요! 이러면 반대로..!”

무기 장전 타이밍부터.

화난 움직임, 조금씩 뒤로 밀려나던 모습까지.

“사아아아아아아이이이이이다아아아악!”

여태까지 뒷걸음질 치던 것이 거짓말이었다는 듯 달려드는 서포터의 모습을 보면서.

이 선수가 어떤 선수였는지를 떠올린다.

“끝까지 쫓습니다! 루시언, 빠져나가기 어려워요! 무빙, 무빙이..”

“예상했습니다! 채찍, 제대로 들어갑니다아악!”

사이다는, 받아치기보다는 먼저 들어가는 선수.

한번 문 먹잇감을 놓치지 않는 공격형 서포터.

“결국 이렇게! 고구미 전사! 퍼어어어어어어어블!”

“속이 뻥 뚫리는 쓰아아이다의 맛!”

- 어

- 이걸 살리네?

- 사이다 좀 치네?

- 커버 좋았다?

이 팀에게는 매번 이렇게 속게 된다.

“FWX에서 훌륭하게 빨아들이면서! 선취점을! 가져갑니다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살았어요! 결국에 살았어요, 세자, 또, 저걸! 또 저걸 살았습니다! 이걸 어떻게 계산했죠? 이거 알고 있었나요? 살 거라고 알고 있었나요?!”

이토록 오랫동안 경기를 지켜보던 자신조차 믿을 수 없는 행동을 하곤 하니까.

“지금 체력이! 체력이 거의 한자리? 한자리? 맞아요?”

옵저버는 툭, 세자의 아펠 위로 마우스 커서를 올려 모두에게 그 사실을 알린다.

아펠의 남은 체력 12.

현재 레벨의 초당 체젠을 생각하면 아까는 명백하게 한자리였을 것이다.

그것도 한없이 0에 수렴하는.

세자는 팀을 위해서라면 줄타기를 서슴지 않는 보기 드문 배짱형 원딜이다.

“나이스!”

“바텀 굿 샷!”

“와! 나 이번엔 진짜 죽는 줄 알았다!”

“루시언. 점멸.”

“상준아, 형 죽을 뻔했다니까?”

“나. 퍼블.”

“?”

“아쉽.”

“욕한 거야?”

FWX 선수들의 보이스가 들려온다.

그는 조용히 리플레이를 준비한다.

“이게 계산이 되는 건 좀 너무한데요! 추우우우웅분히! 잡을 만 했거든요!”

“신이 버렸어요, 이거, 이제 루시언 점멸 없단 말이에요. 아직 권건이 오지도 않았는데!”

“해볼 만 할 거라고 생각했을 거거든요. 딜이 지금 깡패였어요, 그전까지 투자해놓은 것도 있고.. 기세 싸움에서..”

- 이게 이렇게 되네

- 저 새끼 무지성 돌격 전용 아니었음?

- 정석 서폿도 할 줄 아네?

- FWX에선 뭘 가르치는 거지 대체

- 인조인간 개조 (6/6)..

완벽한 계산을 해주는 정글러가 있더라도, 수행하는 것은 라이너들의 역량.

그런 면에서 일단 사이다는 트러블 샷을 성공시켰다.

만약 여기서 실점했더라면 비난을 피할 길이 없었을 테니까.

반대로 지금처럼만 한다면.

글쎄.

분명히 나쁘지는 않다.

여태까지 밀리는 것처럼 보이다가 순식간에 반대로 득점했으니까.

하지만 만약 클래스가 출전했다면 처음부터 이런 위기를 맞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라쥬 바텀도 상대가 만만해 보여서 밀고 들어왔을 테니.

결과적으로 초반 손해를 생각하면, 약간의 이득 정도.

FWX에서 사이다를 기용하는 이유가 이런 식의 운영을 하기 위해서는 아닐 거다.

무슨 생각인 걸까.

어쩌면 세자라는 원딜이 방금 해낸 플레이 방식에 힌트가 있지 않을까?

옵저버는 조용히 화면을 정글에 고정했다.

자신의 무언가를 바치고 지혜를 얻어간 것 같은 이 선수.

결국 모든 해답은 여기에 있을 것이다.

#

경기는 어느덧 중후반으로 접어들었다.

바텀은 조용히 플레이했다.

유상준은 제 버릇을 버리고 평범한 서포터처럼 굴었다.

이유찬이 탑에서 솔로 킬을 두 번 내고.

김예성이 미드에서 충분히 상대 아칼린을 압박하는 사이.

나는 바텀을 중심으로 여러 번의 이득을 챙겼다.

그 사이 탑 다이브로 상대 역시 득점했지만, 우리 역시 바텀 쪽으로 전령을 밀어주며 성장을 꾀했다.

“쟤네 부를까?”

“바론 쳐볼까?”

나는 귀환을 잠시 고민했다.

경기가 확 벌어지지 않은 이유는 아직 우리 새로운 서포터의 데이터를 쌓기 위한 작업 중이라는 데에 있다.

미라쥬에게는 좀 미안한 일이긴 한데.

우리가 실전형으로 면접 보는 중이거든.

물론 혹시 모를 최은호의 컨디션에 대한 대안으로 영입된 거기도 했지만.

어쨌든 이 선수를 제대로 된 ‘무기’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주어진 시간 안에 충분히 많은 것들을 보여줄 수 있는지 확인이 필요하다.

스프링 정규 시즌 경기는 18회.

승리할 수 있는 세트 수는 최대 36개.

이 경기를 최은호와 나눠서 출전한다고 했을 때 기회는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이 선수를 유용하게 돌리려면 최초 경기에서는 최대한 평범한 픽으로 이 서포터의 첫인상을 심고 차근차근 빌드업해야 한다.

이건 생각보다 꽤 귀찮은 일이다.

“아니.”

귀환을 취소한 나는 핑을 찍는다.

“상준.”

말을 따로 하지 않아도 탑은 알아서 쫓아온다.

우리가 바론 이야기를 꺼낸 만큼, 상대도 시야가 궁금할 때가 됐다.

“둘, 혹은 셋. 대비.”

“적 미드. 바텀. 텔. 있음.”

“미드 라인 정리 완료.”

“예성, 아래쪽 무빙.”

“오케이.”

즉석에서 구성된 짧은 스펠 빼기 작전.

스크림에서는 나쁘지 않았지만.

나 역시 이 서포터가 정말로 내 계획에 끝까지 따라올 수 있을지는 판단을 보류 중이다.

“상준.”

“알겠어.”

그래서 이번 경기를 유상준의 첫 선발 경기로 요청했다.

나는 유상준이라는 사람을 알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았지만.

트릭스터였던 고수호라는 원딜에 대해서는 잘 아니까.

승리 원동력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거 아니겠어?

그리고 꽤 어려웠던 과제를, 지금까지는 곽지운과 내 지시를 바탕으로 어떻게든 수행해내고 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때.

아슬아슬 시야 선에 상대의 발끝이 방향을 드러낸 찰나.

유상준의 핑이 나보다 먼저 찍히며 원형의 벽 우측 너머를 향해 정신 집중.

한발 빠르게 행동한다.

자신 있는 구도가 있다, 이건가?

“이거, 심연 잠수! FWX!”

미처 이야기되지 않은 움직임이지만.

“간다.”

아군 서포터의 스킬 선입력에 나 역시 적 좌측 깃창 레펠 하강 준비.

이것만으로도 우리 팀의 1번 서포터와 스타일 차이가 느껴진다.

길게 늘어난 창에 몸을 싣고.

순간 바닥에 나타난 탐치의 흔적에 살짝 몸이 흔들렸던 적들과 허공에서 눈을 마주친다.

리싱과 갱플, 그리고 냐미.

넉넉한 시야 팀 구성 인정합니다.

렌즈까지 돌리고 계셨구나?

근데 어쩌지.

우리가 다 밖에서 날아와서.

“찬.”

짧게 탑을 호명하고.

1.35초.

깊이 잠수했던 서포터가 지상으로 올라오는 그 순간에 딱 맞춰.

“권건, 권건! 대격벼어어어어어어언!”

판단을 강요하는 궁극기를 내리꽂는다.

“이거 완전 엇박 진입인데요?! 따닥!”

포위.

“이거 상대가 보였나요? 보였어요? 보고 들어간 거에요, FWX?”

“이거 FWX 시야 상 안보였을 것 같은데! 아님 살짝 보였나요?!”

미친개처럼 달려들어 적을 교란하는 유상준의 움직임.

“미라쥬, 미라쥬! 여기서 끊기면 위험해요! 위험합니다!”

“이거 구도 잘 잡아야 해요, 이거 여기서 혹시 정글러라도 끊기면 그대로 바론 나갑니다!”

상대의 전열이 순식간에 흐트러진다.

거의 동시처럼 느껴질 타이밍.

프로다운 반응을 보인 미라쥬의 탑과 정글은 서슴없이 스펠을 소모하며 멀어졌지만.

벽에 둘러싸여 뭍으로 올라온 반인 반어는 뒤따라온 우리 탑의 먹잇감이 되고 만다.

“이거 진짜 빨랐거든요, 미라쥬도 피해는 최소화했습니다만.. 서포터 끊기고 스펠 소모 커지면서 이거, 당분간 싸움 보기 어렵습니다!”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소규모 작전이 킬로 이어졌다.

하지만 내 반응이 늦었더라면 위험한 행동이었을 거다.

적이 한 점 돌파를 시도할 가능성이 있으니까.

“이러면 시야 주도권 한동안 내줘야 할 것 같은데요? 이거 FWX가 득점 크게 가져갑니다!”

장내가 순식간에 화르르 달아오른다.

유상준, 라인전은 약하지만 중간 교전에 강점.

뛰어난 피지컬.

최은호가 안정적인 견제와 시야 관리 측면에 두각을 드러내는 것과 달리, 전투 판단과 순간 메이킹에 재능있는 타입.

어떻게 이렇게 반반씩 나눠 가졌을까?

둘이 합쳐서 하나가 되면 딱 좋겠는데 말이야.

그럼 너무 완전체인가.

나는 몇 포인트를 집어 준 뒤 미뤘던 귀환을 시작하며 유상준에게 몇 가지 질문을 건넨다.

“내가 바로 안 따라갔으면 위험했을 텐데?”

“너. 허언 안 함.”

음.

“내가 먼저 들어가도 됐잖아?”

“너.”

유상준은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야무지게 대답했다.

“점멸. 아껴.”

여전히 쇠를 긁는 것 같은 목소리지만 유상준의 말에는 감동이 있다.

이렇게 짧은 말로 사람의 심금을 울릴 수가 있나?

너, 좋은 서포터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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