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시험
인기가 없는 건 익숙하다.
최고 주가를 달리고 있는 FWX.
현재까지의 성적은 7승 0패, 전 세트 승리.
팬들이 흔드는 무수한 치어풀이 팔랑거린다.
- 올해 월챔 우승 확정을 축하해요 FWX! ^,^
- 이따 팬미팅에서 만나! 내가 1빠
아직 모를 일을 제멋대로 확정지은 팬도.
- FWX 스프링 우승하면 얘 군대
- FWX 월챔 우승하면 얘 여군 지원
- 우정권! 우정권! 우정권! 우정권! 우정권!
- 오늘의 내가 희망’찬’ ‘건’ 너희 덕이’라 온’기를 느껴! 이제 마저 ‘세자’, 연속 16회 승! FWX ‘클래스’ :)
- 내 특기 : FWX 경기 예매 성공하기, LOS 파크 길 찾기, 우리 팀 응원하기
그저 주접을 떨고 있는 팬도 보인다.
오늘 선발 출전한 유상준은 무던한 눈빛으로 관중석을 훑다가 몇몇 팬과 눈이 마주쳤다.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 깍듯하게 인사를 한 그는 다시 앉아서 경기방 입장을 기다린다.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유상준은 처음 FWX에게 컨택 받았던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다.
간절하게 바라던 소원이 이루어진 기분.
감정의 고저가 높지 않고, 자신의 희로애락의 대부분을 게임에 빼앗겼다고 여긴 유상준이었지만.
이때만큼은 정말 놀랐다.
“어떻게. 나한테.”
제주 F.L.E에서 리싱 서폿을 했을 때도 그랬다.
권건의 쉔이 마치 이기어검의 고수로 보였던 그 순간의 기억 역시 마찬가지.
기연을 얻은 것 같았던 FWX.
그리고 기연을 자신도 얻었다.
“다들 문제없지?”
“응.”
“거니거니, 난 좀 이상한데. 뭔가 시야가 가렵다.”
“그렇게 말하면 건이가 어떻게 알아?”
“해상도 체크.”
“어. 이거 맞네.”
“이걸 아네. 역시..”
“잠시만요. 지금 저희 탑 화면 체크 중입니다. 네. 아. 네네, 해상도래요.”
곽지운이 나서서 심판과 대화를 주도하고 있다.
“네네! 맞대요! 믿을 수 없을 만큼 작은 창 상태. 그거 맞아요. 아, 감사합니다. 얼마 전에 결혼하셨다면서요? 축하드려요. 청첩장 주셨으면 갔을 텐데..”
심판한테 갑자기 말을 거는 난생처음 만난 초특급 인싸 원딜도 신기했고.
“야, 김미드. 손 풀렸냐?”
“너 때리는 거 정도로는 손 안 풀리지.”
“처맞아서?”
“네가 너무 흐물거려서.”
탑과 미드의 불과 물 같은 조합도 신기했으며.
“집중.”
이 많은 사람이 한 사람의 말에 순식간에 시선이 모인다는 것 역시 놀라웠다.
“미라쥬는 이빨 빠진 상어나 마찬가지야.”
“좆밥?”
“하지만 상어는 이빨이 계속 나지. 방심하지 마.”
“오케이. 거니 동잘알이고.”
“탑, 입 좀 다물어.”
브레이크 없는 탑에 대한 눈높이 교육도 마찬가지다.
유상준은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팀의 옛 탑을 비난했던 것으로 잠시 이슈가 됐던 미라쥬의 탑 사우전드는 은퇴했다.
미라쥬는 작년 한 해 가장 이슈가 많았던 팀으로 선정됐는데, 프론트가 물갈이됐다는 소문이 있는가 싶더니 과거를 청산하고 다녔다.
어느 정도 팀의 이미지를 내려놓은 것 같이 무수한 고소장도 행사했다.
그래서 악질 팬들도 제법 눈치를 많이 보고 있는 상황.
“탑.”
“자신 있어.”
“당연하지.”
새 탑은 울산 피닉스에서 영입한 텐, 도장훈.
아직 팀에 적응하지 못한 미라쥬의 약점이다.
“미드.”
“벨 형은 또 메이지 하겠지.”
“믿는다.”
“믿..? 알겠어!”
미라쥬 미드는 요즘 상한가지만 FWX의 미드는 당대 최고의 게임메이커로 인정받고 있어서 비할 바가 아니다.
그리고 저 미드는 정글이 시키면 그게 정답이 된다.
“지운이 형.”
“어. 그러고 보니 나만 노땅이잖아? 이럴 수가. 너네 다 동갑 아니야?”
“우리 늙은 왕자님..”
“상준아, 우리 형 잘 부탁해.”
“우리 딩거 밴하기로 했으니까 특별히 서포터 쪽에서 변수는 없을 거예요.”
잠담을 뚫고 낮고 또렷한 목소리가 들린다.
“오케이. 나만 믿어.”
곽지운이 가벼운 말투로 대답하면서 열광적으로 마우스를 클릭하는 시늉을 한다.
“상준.”
유상준의 차례다.
시즌이 시작되고 스크림에서, 숙소에서 같이 있었지만 아직 어색하다.
그리고 이 자리에 같이 나와 앉은 건 처음이다.
무슨 말을 할까?
“오늘은 로밍보다는 라인에 있어.”
유상준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조금 실망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늘 듣던 말이니까.
하지만 이어지는 말은 달랐다.
“상대 원딜이 고구미니까.”
고구미는 인천 트릭스터에서 미라쥬로 이적한 원딜, 고수호.
불현듯 권건이 곽지운에서는 서포터 이야기를 하고, 자신에게 원딜 이야기를 꺼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 정글이 오늘 자신을 테스트하고 있다는 사실 역시.
“...”
유상준의 눈이 반은 의심, 반은 흥미로 반짝였다.
이 시험에 합격하고 싶다.
#
“경기 시작합니다!”
“메타 대 혼돈의 시대! 오늘의 밴픽 역시 꽤 평이한 편입니다!”
“이걸 평이하다고 말해도 될까요?”
“특히 탑에서는 최근에 차니가 솔랭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주면서 체급으로는 어디 가서 지지 않는 선수가 됐거든요!”
“그래서 블루 진영의 FWX가 권건의 자르반을 앞세워서! 미드에서는 리산, 바텀에서는 아펠 탐치 조합을 가져왔어요!”
“탐치가 요즘 썩 좋은 픽이라고는 말씀드리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아주 애매한 패치가 있었거든요? 장기적으로는 키웠을 때 탱커가 되는데, 초반 견제력 부분에서 성능이 떨어졌습니다.”
- 에이 뭐 대단한 서폿 하나 했더니ㅋ
- 팀에 맞춰야지ㅋ
- 하긴ㅋ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받쳐주는 픽 해야지ㅋㅋ
- 여기서는 리싱 이런 거 못할 듯ㅋㅋ
“그래서 미라쥬도 루시언과 냐미를 구성했구요. 이게 고구미 선수가 상당히 좋은 평가를 받는 원딜인데요! 그 이유 중 하나가 공격적인 원딜을 정말 잘하는 선수라는 점이에요! 이거 가만히 두면 진짜 큰일 납니다!”
- 지금보니 진짜 쥐와 지우 한 팀 됐네
- 거봐 그거 스포였다니까
- ㅋㅋㅋㅋㅋㅋㅋㅋㄹㅇ 고구미 헥사 조합.. 기대된다
- 근데 서폿 헥사도 F.L.E 출신 아니야?
- 오ㅋㅋㅋ ㄹㅇ 지금 둘 다 F.L.E 출신? 서폿 수출 명가 F.L.E네
- 그건 아직 모르지 FWX가 데려간 사이다는 사기 매물일지도ㅋ
- 요즘 사기가 횡행하다고..^^
- 야 스크린 샷 찍어둬라 마지막 출전일 수도 있으니까ㅋㅋ
여전히 새 멤버에 대한 불신은 팽배했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레드 진영의 미라쥬는 갱플, 리싱, 아칼린, 루냐미로 경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근데 하나 우리가 빼먹은 게 있죠?”
“탑. 오늘도 차니 선수는 때릴 생각이에요. 그냥, 때릴 생각밖에 없어요, 저 선수는!”
“아크산. 아크산이 갱플에게 달려가고 있어요!”
- 팀원? 팀원이 왜 필요해?
- 협력? 살려주면 되잖아
- 아ㅋㅋ 1부활이면 1기여라고ㅋㅋ
탑 쪽으로 시선이 살짝 돌아가면서 경기가 시작됐다.
두 팀의 정글러들이 모두 개입 타이밍이 이른 편이었기 때문에 제법 긴장감이 가득했다.
해설들은 라인전이 시작되기도 직전까지는 바텀에 대한 이야기를 했지만.
이제 더는 새로운 선수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단지.
- 삼분할 OUT
- 정글 얼마나 잘 먹는지 보고 싶어
- 그냥 괜히 권건이 궁금해 정글 ASMR
- 부뚜막에 올라가기 전의 얌전한 권건 영상.. 귀합니다..
- 옵저버님 혹시 탑-정글-미드를 쓰리샷으로 보여주실 의향은?
팬들은 세 라인이 동시에 나오는 화면에 대한 투정을 부리고 있었고.
“요즘 초반 라인전 구도를 보여주기 위해서 삼분할 화면을 많이 쓰긴 하는데.”
“이러면 시청자분들은 정글링을 못 보는 게 좀 아쉬울 수 있죠. 저희는 모니터링이 가능합니다만은..”
“이건 정글에 대한 차별이 아닙니까?”
“아니 뭘 또 그렇게까지 말씀을..”
“남 해설이 정글 출신이다 보니.”
“이게 사실 정글은 라인 고정이 안 되어 있어서 기술적으로 그렇게 쉽지는 않거든요. 사실 이 시간, 우리 옵저버가 진짜 커피 한 모금 들이키는 유일한 휴식 시간인데.”
“FWX 경기일 때는 삼분할만 켜면 채팅이 올라온다고 옵저버가 읍소하고 있습니다.”
해설들도 평이한 극초반 구도와 중계 화면에 대해서 짧은 농담을 나누고 있었다.
실제로 삼분할은 타 리그에서 건너온 기술이었는데, 시청자들의 피드백이 이어지면 중계 측도 별수 없이 새로운 기술 개발을 해야 한다.
어딘가에서 개발팀이 탄식을 흘린다.
그리고 그사이.
“수호, 나 시야 체크하고 올게. 약한 타이밍. 몸 사리자.”
“응.”
미라쥬의 바텀 듀오가 대화하고 있었다.
금세 호흡을 맞춘 이적한 원딜 고수호와 서포터 왕지우.
벌써 팬들 사이에서 호우 듀오나 쥐와 지우 듀오 따위로 불리며 큰 사랑을 받는 바텀.
예전에 탑 중심 팀이었던 것과 달리 미라쥬는 힘의 무게가 아래로 내려가 있었다.
하체가 튼튼하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지만, 최근의 메타에서는 좋기만 한 것도 아니다.
동부와 서부 사이에 간신히 걸쳐있는 미라쥬의 순위가 그 답이다.
“얘네도 진짜 생각하는 거 잘 모르겠다. 어떻게 쟤를 쓰지?”
미라쥬의 바텀은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왕지우가 입을 비죽거렸다.
그나마 FWX 서포터 자리는 비집고 들어갈 만했는데.
나한테 트레이드 콜이 올 줄 알았는데.
칼 든 미친 새끼 앞에서 한바탕 인연이 있었던 만큼 내적 친밀감이 있었던 팀이라 아쉬움은 더 컸다.
아직도 그 순간의 등이 잊히지 않는다.
별로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클래스는 최근 들어 자기만큼 좋은 평가를 받고 있으니까 그렇다 쳐도.
어쨌든 지금 출전한 상대 서포터 사이다는 지난 시즌 3티어 혹은 아예 평가가 불가능한 선수다.
유상준의 최대 단점은 약한 라인전이거든.
그런 서포터가 어디 있어?
너무 꿀 빠는 거 아니야?
“사이다 쟤 좀 알아?”
왕지우의 물음에 고수호가 잠시 눈을 굴렸다.
“글쎄..”
얼버무리는 대답에 왕지우는 어깨를 으쓱했다.
하긴 뭐, 알기야 알겠지.
이 판에 서로 닉네임 한 번 못 들어 본 관계는 없으니까.
“어쨌든 좀 있으면 해볼 만 한 것 같으니까. 선렙 타이밍 잡을 수 있을 것 같거든?”
“권건 동선 확인되면 그때 걸까?”
“오케이. 나머지 라이너들 들었지? 협조 부탁!”
“오케이.”
“오케이..”
아직 팀에 적응을 다 못한 탑의 대답이 유독 작게 들렸지만 어쩔 수 없다.
이왕이면 권건이 탑으로 가줬으면 좋겠다.
쟤 약하니까 미끼 역할이라도 하게.
여전히 왕지우는 오만한 구석이 있었지만 판단은 정확했다.
“쟤 오늘 여기 처음이잖아.”
“그치.”
살짝 버벅거리는 모습이 보인다.
“우라가 심하네.”
“?”
“기복 있다고. 너무 절잖아.”
FWX에게 인정받고 싶었던 마음은 질투가 됐고.
“짜증 나는데 죽여버릴까?”
자기보다 부족한 사람이 배려받는 모습, 특히 저 포지션에서 그러고 있는 꼴을 보자니.
어딘가 서포터에게 닿는 편견 어린 시선이 떠올라 눈꼴 시리다.
가뜩이나 유상준은 자기 마음대로 픽을 해서 포지션 욕을 먹이는 사람.
서포터에게도 자존심이 있다.
완벽한 이니시, 훌륭한 조력자, 팀원들에게 내미는 손길.
희생의 특권을 가진 포지션이자.
개인보다는 팀을 캐리하는 포지션.
그게 서포터다.
“해볼 만 할 것 같은데? 어차피 아펠 타임 오려면 멀었으니까.”
그리고 원딜이 허락하는 순간.
“머리 올리는 날에는 잘 풀리는 일이 없는 법이지.”
그 감정은 약간의 분노와 욕심이 됐다.
FWX에게 나라는 서포터의 가치를 인정받고 싶다.
두 서포터는 각자 시험에라도 응하는 듯 천천히 움직였다.
바텀에서 기싸움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