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화. 기연
“어때, 상준아.”
“좋.”
“좋? 얘 이거 이렇게 대답하는 거 맞아?”
“아.”
“좋다고 한 거야, 아니면 은근슬쩍 욕하고 있는 거야?”
“요.”
최은호는 새 서폿의 기강을 잡는 데에 실패했다.
“최고.”
“좋은 것 같은데?”
김예성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유상준이 고개를 끄덕인다.
“좋을 수밖에 없겠지.”
곽지운은 피곤한 표정이었다.
“얘 어제 나한테 피흡 엄청 했잖아.”
유상준에게 늦은 시간까지 시달린 탓이었다.
“하긴.”
최은호는 목뒤를 긁으며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출격.”
유상준의 눈빛이 안경 너머로 희번덕거린다.
“바텀. 폭격기.”
목소리는 칠판을 긁는 것 같았고 약간 긴장한 듯 우물거리는 얇은 입술과 날카로운 송곳니는 어떤 변온 동물을 떠올리게 했다.
“얘 이렇게 좀 못 웃게 하면 안돼? 너무 음산해.”
“몰라. 포기했어.”
제주 F.L.E에서 건너온 서포터.
유상준은 최은호와 아예 궤가 다른 서포터다.
지극히 말수가 적고 문장보다는 단어를 선호하는 이 선수는 애당초 최은호와 선호하는 서포터 풀이 달랐으며, 플레이 스타일도 완전히 달랐다.
정상적인 서포터의 역할을 해낸다기보다는 과거에서 올라온 것 같은 ‘로머’ 스타일.
포지션을 버리고 제2의 정글러처럼 돌아다닌다.
어떤 의미에서는 귀한 매물이 맞지만.
어떤 의미로는 계륵이다.
특히 서브 오더 역할의 서포터가 필요했던 제주 F.L.E 입장에서는 그랬다.
팀 체급 자체가 약했던 F.L.E는 이 선수를 기용하는 것이 어려웠으며, 지난 시즌의 메타에도 썩 잘 맞는 편은 아니었다.
피지컬이 굉장히 높은 편이라는 점과 이 선수의 열정을 높이 평가했던 F.L.E였지만.
결국 탑으로의 포지션 변경을 제안하는 협상을 마지막으로 서로 결별할 수밖에 없었다.
유상준은 포지션에 대한 고집이 대단한 선수였기 때문이다.
“아직 상대는 우리 매치업 모르지?”
“예.”
다섯명의 호흡을 맞추기에도 바쁠 이 리그에서, 여섯번째 인물을 데려와 더블 스쿼드를 운용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지난 시즌 멤버를 그대로 들고 온 FWX였기에 투자해볼 만한 선택.
FWX 감코진은 섬세하게 스쿼드를 구성했다.
그리고 이 선수가 충분히 어울릴만한 대세를 만들어내는 데에도 성공했다.
“오늘 서포터 헥사 선발인가?”
“아무래도 그럴 것 같아요.”
“헥사 선수랑 벨 선수는 좀 괜찮대?”
하지만 여기에는 무엇보다도 권건의 발언이 컸다.
FWX의 지난 협상 테이블에서 공공연하게 가장 큰 발언권을 가졌던 것은 정글러.
물론 그가 최초로 언급한 서포터로는 사파 서포터의 선두 주자라 불리는 유니버스 이주원과 광주 미라쥬의 서포터이자 일전에 불법 침입 사건의 피해자로 한창 시끄러웠던 헥사, 왕지우가 있었지만.
“네. 이번 시즌에는 완전히 제대로 컴백한 것 같아요. 헥사 선수는 방송 쪽 계약은 줄였다고 하더라구요.”
“별일 없었던 게 다행이지.”
이미 호흡을 맞춰놓은 기존 서포터 최은호가 있는 상황에서 이주원과 왕지우 두 사람은 지나치게 메인 식사에 가까운 무게감을 가졌다.
그때, 지정 선수 협상 제도를 통해 유상준이 일찍 시장에 공개되면서 이야기가 달라졌다.
“상준이 괜찮겠지?”
그야말로 서브.
메인 오더가 감당해줄 수만 있다면, 마지막 키로 적합한 사람이 그였고.
“말은 많이 없긴 한데. 열정은 대단해요. 정말..”
“저는 지쳐서 나가떨어졌습니다. 그 친구, 아예 체력이 무한대예요.”
FWX의 메인 오더 권건은 그 정도쯤은 아무렇지도 않은 선수였다.
“그래서 마른 거 아니야? 왜 먹여도 먹여도 살이 안 쪄?”
“원래 그렇대요.”
“상준이 기흉은?”
“전혀 문제 될 정도는 아닙니다. 마른 체형 때문에 그랬대요. 예전에 수술 끝났고, 계약 전 검진 모두 확실하게 했고, 앞으로도 관리만 하면 괜찮다고 확답받았습니다.”
“그래. LOS 하는 거 보면 그런 것 같긴 하더라. 근데 왜 서포터 애들은 몸이 약하지? 저체중이건 과체중이건 이상하게 몸이 좀 안 좋은 애들이 많아.”
“그러게요. 이상하게 탑 봉구나 유찬이는 한겨울에도 반팔에 슬리퍼인데..”
김한빛 코치가 헛웃음을 지었다.
“성격상 서포터들이 좀 점잖다 보니.. 어릴 때부터 잠자리 잡고 뛰어다니고 그러면서 자란 게 아니라서 그런 걸까요?”
“저기, 김 코치님. 그 라떼 토크는 대단한 미스 언더스탠딩이신 것 같습니다? 그럼 탑이 뭐가 됩니까?”
한겨울에도 반팔 유니폼을 선호하는 탑 전담 코치 문백산이 묻고 드는 걸 보면서.
김 코치와 박 감독은 포지션 과학설에 신뢰의 한 획을 더 그었다.
“그럼 문 코치는 잠자리 못 잡아?”
“아뇨? 당연히 잡죠? 저 매미도 잡아 본 적 있어요! 저 초등학생 때 한창 매미 캐치 숏 클립 인증이 유행이었거든요.”
“완전 인싸네? 대단하다. 역시.”
“암요.”
순식간에 넘어오는 단순함.
과거 미드와 서포터 루트를 탔던 박 감독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냥 너희가 서울 촌놈들인 거지. 매미나 잠자리 잡은 게 뭐가 대수라고.. 너네 어릴 때부터 핸드폰 잡고 게임만 했니?”
“?”
“당연하죠?”
“그렇구나. 그렇겠네. 밀레니엄이네.. 밀레니엄 시티 피플..
말하자면" >피플.."
말하자면 시골 출신에 가까운 박 감독은 어깨를 으쓱했다.
“어쨌든..”
기존 서포터였던 최은호의 팔은 이제 충분히 괜찮아졌다.
시즌 오프 동안 근력 운동은 빼먹었어도 재활 운동은 꾸준히 했기 때문이다.
호성적을 기록해 입스 역시 남지 않았다.
통원 치료를 졸업하고 운동 허락이 떨어진 후, 조용히 나선 권건이 최은호에게 달라붙어 꾸준히 근력 운동까지 시키고 있어서다.
“은호 걔도 건이한테 평생 절해야 한다.”
“운동요? 아니면 피드백?”
“둘 다.”
“하긴. 습관 만드는 게 쉬운 일이 아니죠.”
최은호는 입으로는 투덜거리면서도 곧잘 권건의 커리큘럼을 따라가고 있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 최은호는 변했다.
전보다 태도 점수도 훨씬 올라갔고, 선수 개인의 가치 역시 수직으로 상승했다.
다만 이 사실이 지난 시즌 중간에 있었던 건강 이슈 데이터가 스토브 리그 중 타팀에 교란을 줬고.
FWX는 신속하게 최은호와 합리적인 계약을 할 수 있었다.
아마 다음 시장이 열린다면 수명이 긴 편의 서포터인 최은호는 완전히 다른 세상을 볼지도 모른다.
이건 아직 최은호가 전혀 모르는 일이었다.
“좋아.”
“좋습니다.”
“일단 상준이 1세트 올려보고, 혹시 모르니까 은호 준비시키고.”
“벌써 준비 다 했더라고요.”
“오케이.”
“갑니까?”
“가자.”
팀은 발걸음을 옮겼다.
#
- (FWX) 님들 그거 암?
지금까지 FWX가 전부 스윕한 거?
ㄴ 아ㅎ 전승? 알지알지
ㄴㄴ 근데 좀 약팀들만 만나서 날치기 승리한 거 아님?
ㄴㄴ 언제부터 유니버스와 스톰이 약팀이었습니까?
ㄴㄴ [올해부터]
ㄴㄴ ㅋㅋㄱㄹㅋㄲㄲㅋㅋㄹ맞워요^^^^^
ㄴㄴ 아직 스프링 초입이라 그런 건 있겠지 더 봐야 암
ㄴㄴ 그래그래 더 보자 실컷 보자 이미 플옵은 간거나 마찬가지야
ㄴㄴ 플옵이 이렇게 가벼운 단어였던가?
ㄴㄴ 앙 플옵 깃털찡
ㄴ 이러다가 우리 진짜 레전드 가는 거 아님?
ㄴㄴ 예전에 16 세트 연패한 적 있는데
ㄴㄴ ? 어느 팀 이야기임?
ㄴㄴ 유입임? FWX에는 슬픈 전설이 있지..
ㄴㄴ “유감”
ㄴ 그럼 이번에 16 세트 연승 가주는 거야?
ㄴㄴ 이게 진짜 데칼코마니 치료지ㅋㅋㅋㅋㅋㅋㅋㅋ
ㄴㄴ 키싯키싯키시시시시싯 제물은 정해졌다..
ㄴㄴ 그게 바로 너.. 미라쥬..
ㄴ 님들ㅇㅅㅇ 동부 냄새나니까 꺼지세요ㅉㅉ
ㄴㄴ 적진에 혼자 들어온 미라쥬 팬이야? 어린 애 같은데 봐줄 테니까 얼른 집에 가라..
ㄴㄴ 얘쨰래그~~~~~ㅇㅅㅇ 꼴빠새기들아 권건 원툴 새기들 쪽팔리지도 않냐
ㄴㄴ ? 굳이 유치한 어그로를?
ㄴㄴ ㅂㅁㄱ
ㄴ 근데 나 어쩐지 미라쥬가 동부에 있는 걸 본 것 같아
ㄴㄴ 너두? 나두
ㄴㄴ 그건 시즌 초라서 그런거임 ㅇㅅㅇ 알고나 말해라 ㅉㅉ 너네 티어 낮지??
ㄴㄴ 지금 쟤네 몇 위임?
ㄴㄴ 쟤넨 4고 우린 1^^
ㄴㄴ ㅎ
ㄴㄴ ㅎ
ㄴㄴ ㅎ
- (MRG) 그냥 FWX 빼고 게임하면 안 되냐?
저 새기들 존나 물흐림 왜 자꾸 이상한 픽 하는거임? ㅇㅅㅇ;
요즘 메타 물타기 하는거임?
이거 게임사에서 제재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ㄹㅇ
ㄴ 존나 꼬움ㄷㄷㄷ
ㄴㄴ 신고하자
ㄴㄴ 한번 맞아봐야 정신을 차릴 듯 사형 청원 ㄱ
ㄴㄴ ? 얘들이 뭐라는 거야
ㄴㄴ 이런 애들 한번 쓸려나가지 않았음?
ㄴㄴ 1인 다역이야? IP 확인 좀 해봐라 얘들아 이건 너무 억깐데;
ㄴㄴ 전에 FWX가 우리 팀 보호해줬다는 찌라시 돌았자나.. 걍 둘 다 좋은 경기 했으면
ㄴㄴ 그걸 믿음? ㅇㅅㅇ FWX 언플이겟지 븅
ㄴㄴ 왤캐 화가 났지?
ㄴㄴ 우리 팀 팬은 맞냐 저거? 생성된 지 얼마 안 된 아이디인데
ㄴㄴ 걍 미꾸라지인듯?
“프롬 더 뉴 월드! 신세계로부터!”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2026 LKL! 벌써 설 연휴를 앞두고 있습니다! 중계석에서 인사드립니다! 캐스터 안은우입니다!”
“안녕하십니까, 해설을 맡은 강기수입니다.”
“남동현입니다.”
남동현은 꽤 기분이 좋았다.
권건에게 연락을 받았기 때문이다.
설 연휴 잘 보내시라는 의례적인 인사에 불과했지만 무려 설 연휴 일주일 전에 보냈다!
이건 아마 일곱배는 잘 보내시라는 뭐 그런 뜻 아닐까?
워낙 무뚝뚝한 선수니까..
“강기수 해설 위원, 왜요. 왜 그렇게 봐요? 남동현 해설이 뭐 잘못했습니까?”
“아뇨, 아뇨. 아닙니다. 그냥.”
캐스터를 가운데 두고 앉은 강기수 해설도 남동현이 히죽대며 웃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남동현이 권건의 문자를 온종일 자랑했기 때문이다.
함께 해 온 시간이 긴 형제 같은 관계라 그럴까.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것처럼, 남동현이 좋아하고 있는 꼴을 보고 있자니 괜스레 기분이 아니꼽다.
무엇보다도 아직도.
지금까지도 자신은 권건과 친추를 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통탄스럽다.
해설가 중 현 랭크가 가장 높은 강기수는 억울하다.
솔직히 사람 없는 새벽 시간대에 돌리면 진짜 우연히라도 하위 티어와 매칭된 권건이랑 마주치는 기적 정도는 기대해볼 수 있는 거잖아?
근데 뭔 놈의 이민자들이 그렇게 많은지 요즘 들어 한국 서버가 너무 북적인다.
원정 랭크는 너무한 거 아니냐고.
강기수 해설의 마음속에는 어느새 남동현, 그리고 북미와 유럽에 대한 사적인 감정이 쌓이고 있었다.
“선수들이 경기를 준비하는 사이! 저희는 오늘 경기 라인업부터 알아보겠습니다!”
“오. 이거 오늘 색다르죠. FWX가 이번에는 선수를 바꿔서 다른 맛을 준비한 것 같군요?”
“FWX에서 사이다, 유상준 선수가 선발로! 출전합니다!”
“예! 이 선수가 이번 시즌에 FWX에 합류한 선수거든요. 전부터 다양한 면에서 화젯거리가 됐던 선수인데요, 사실 그전에는 사이다 선수의 매력을 모두 보여주지 못했다는 평가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또 양날의 검 같은 존재입니다. 사실 이 선수, 작년 평가가 썩 좋지 못해요.”
“과연 이 선수가 데뷔전을 잘 치러낼 수 있을까요?”
- 엥? 사이다? 얘 누구야? 이런 애가 있었어?
- 우리 클형 어디갔어 ㅠㅠㅠㅠ
- 또 아픈 거 아님?
- 그거 아니라 함; 아픈 적 없다던데??
- 솔직히 너무 저티어 서포터 아니야? 얘 걍 이상한 픽 할 줄 안다는 거 말고 장점이 있음?
- 걍 FWX 소속 된 것만으로도 평생 감사하면서 벤치에 있어도 될 것 같은데
- ㅋㅋㄹㅇ 가만히 앉아있으면 포트폴리오 대필ㅋㅋ
- 유사 폴리 아니냐? 걔도 정글인데 서폿 가서 이상한 거 햇자나
- 아ㅋㅋ 얘는 책갈피 같은거임?
- 근데 왜 굳이 미라쥬랑 할 때 얘를 내보냈지?
- 그러게 만만한 팀들이랑 붙여서 간보는 게 낫지 않음?
- 미라쥬 만만한 팀 아님?
- ㄷㅊ
FWX의 로스터가 공개되자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임 밸류가 낮았던 만큼 일부는 아예 이 선수의 존재를 알지도 못했고.
알았다 하더라도 오늘의 경기에서 나오리라는 것을 예상했던 이는 없었다.
하지만 한명에 대한 불신보다는 강력한 FWX 상체에 대한 믿음이 컸기에 여론이 크게 나쁘지는 않았다.
서포터 하나가 게임 전체를 말아먹는 시나리오가 잘 그려지지 않았기에 그랬다.
선수 데이터를 훑은 뒤 잠시 잡담 시간.
“마지막 경기인 내일도 인사를 드리겠지만, 이제 곧 민족의 대명절 설입니다. 금주 경기 후 일주일간 LKL은 쉬어갑니다.”
“선수분들께도 좋은 재충전의 시간이 되겠죠.”
“남 해설님께서는 선수 시절에 설을 어떻게 보내셨나요?”
“아니, 갑자기 그걸 물으신다고요?”
남동현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남동현은 선출이지만 강기수는 비선출이다.
“아, 뭐, 그. 저는. 뭐.”
“그쵸. 예. 사실 남 해설님은 오히려 가을의 남자, 추석의 남자 아닙니까?”
사전에 약속되지 않은 안건이었지만 해설밥을 먹은 지 꽤 된 남동현은 지금 이 형님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순식간에 깨달았다.
서로 너무 잘 아는 사이다.
“추석의 남자요? 추석은 9월경에나 있잖아요. 그땐 보통 서머도 끝난 뒤..”
캐스터가 잠시 고개를 기울이자.
“예! 맞죠! 하하하하하하하하하!”
남동현도 웃음을 터뜨렸다.
“맞아요! 하하하하하! 그때가 진짜 남 해설님의 시즌이죠? 솔랭 전사..”
“아! 그렇군요! 하하하핫!”
눈치 빠른 캐스터도 같이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 남동현 해설 월챔 간 적 없잖아요? 하하하하하하하!”
남동현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이 형님이?
예열도 없이 바로 공격한다고?
“하하하하하하! 간 적은 있어요! 하하하하하하! 저 모르시는구나? 저 남동현이에요! 세계구급 정글러!”
“그랬어요? 혹시 세계9급이라는 말씀이신가? 근데 설에는 항상 집에서 눈치 봤겠네요? 하하하하하하!”
“으하하하하하! 예에! 하도 성적이 안 좋아서 떡국도 못 먹고 그랬어요! 사촌들 피하고! 일부러 트로트 채널 틀고!”
남동현은 썩 성적이 뛰어나지 않았던 선수 시절의 가슴 아픈 추억이 살짝 떠올랐지만.
“와~ 엄청 눈치 보이셨겠네요! 하하하하하!”
어차피 이 형님이 날리는 펀치는 솜 주먹에 불과하다.
“그럼요! 예! 하하하하하하! 근데 이제는 다아아아 추억이죠? 방송만 하신 분들은 느낄 수 없는 그런 선수들만의 소중한 추억이랄까요! 하하하하!”
“아~ 그러시구나!”
“뭐 그래서 선수들끼리 통하는 공감대가 있고 저는 친추할 수 있지만 우리 강 해설님은 친추할 수 없는, 그런 기울어진 운동장이 생겨나고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하하하하하!”
남동현에게는 치트키가 있으니까.
“억, 윽.”
강기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고작해야 친추가 뭐가 대수냐고?
단 몇십 자리밖에 없는 데다, 방송 때마다 그마저도 채우고 있지 않은 모습 때문에 그렇다.
지금은 한국뿐 아니라 세계적인 정글러를 위에서부터 꼽을 때 둘째가라면 서러운 이 선수의 귀한 친구.
G-클럽.
그 안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선택받은 극소수의 귀인들 뿐이니까.
- ?
- 이 토크 무냐고ㅋㅋㅋㅋㅋㅋ
- 왜 둘이 이 악물고 싸우는데ㅋㅋㅋㅋㅋㅋㅋㅋㅋ
- ㅋㅋ난 알겟닼ㅋㅋㅋ
- 머임
- 안알랴쥼
- ㅋㅋㅋㅋㅋㅋㅋㅋ근데 점수는 강기수가 더 높지 않음?
- 친추는 점수로 하는 게 아니니까~~~~~
- ㅋㅋㄹㅋㄲㄲ 다마다마 칼로 물베기 싸움이지ㅋㅋ
“자, 이제 그만들 하시고. 사과하세요.”
“예. 시청자 여러분, 죄송합니다.”
“예. 저희 친합니다. 진짜 친해요.”
딱 적당한 타이밍에 이야기를 끊고 상황을 정리한 캐스터가 말을 이었다.
“결국 여태까지의 성적이 어떻건 간에, 이번 경기를 이겨야만 다음 주의 떡국 여부가 정해진다는 이야기로군요?”
“예, 그렇습니다. 이게 또 보너스가 나오는 경우가 있어요. 명절 보너스라고. 또 이게 모르는 거거든요?”
“거참! 정말로 포기할 수 없는 조건인데요? 인센티브 아닙니까!”
“감정적으로도 그렇습니다! 따뜻한 방에서 귤 까먹으면서 이야기하려면 오늘 경기, 두 팀 모두 꼭 잡아야 해요.”
“이제 이번 경기까지 치르면 양 팀은 총 8번의 경기를 한 셈이 됩니다. 1라운드, 그러니까 한 바퀴를 다 돌아간다고 할 수 있죠. 그래서..”
경기 준비가 끝나가는 그때.
아주 오랜만에 출전하게 된 유상준은 대기열에 선 채 고요하게 정글러의 등을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