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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게이머, 그만두고 싶습니다-200화 (200/326)

200화. 그랬던 때가 있었지

스프링 1라운드가 제법 많이 진행된 시점.

우리 팀원들은 한바탕 야단법석을 떨었다.

현재까지 전승.

게임은 쉬워졌고, 재밌어졌으며.

“이거 이러다가 우리 건이 덕분에 진짜 레전드 가는 거 아니야?”

“은호 형, 그 말 건이 오기 전부터 했잖아.”

“내가 그랬어? 내가 다 건이 올 줄 알고 그랬던 거잖아. 그치? 내가 제일 먼저 말 걸었었잖아. 그치? 기억나지? 어? 건아, 대답 좀 해줄래?”

기하급수적으로 팬이 늘어난 데다 우리는 스스로의 영향력을 실감하고 있었다.

“야, 최은호. 니가 재작년에 니가 이길 때마다 저금하겠다고 했던 돼지 저금통이 텅텅 비어있었던 건 아냐?”

“어? 그러고 보니 그거 어떻게 됐지?”

“그거 나랑 최 코치님이랑 둘이 갈라서 아이스크림 사 먹었어.”

“그걸 왜 니 맘대로 찢냐? 존나 골때리네.”

“니가 숙소에 버리고 갔잖아. 올해는 안 해? 올해도 해라. 올해는 회식 가능할 듯.”

“도둑놈. 싸가지 없는 놈. 더러운 숟가락. 남의 물건에 손대는 쓰레기.”

“아니 선생님. 선생님이 버리고 가신 물건을 왜 저한테 그러세요?”

“사람이 그렇게 살면 안 되는 거야. 이런 게 우리 주장이라니.. 나 진짜 어이가 없다.”

오랜만에 건수를 잡은 최은호가 비난을 쏟아내지만 곽지운은 태연한 표정이었다.

“근데 너 진짜 너네 엄마랑 똑같이 생겼다.”

“갑자기 왜 패드립을 쳐?”

“이게 왜 패드립이야? 내가 틀린 말 했어? 너 엄마 안 닮음? 고우시던데.”

“어. 어? 엥?”

“은호 형 또 멍청한 표정 짓는다. 고장 났네.”

“저 형은 절대 지운이 형 못 이겨.”

이제 우리는 같이 있었던 시간이 꽤 길어졌다.

나는 일상처럼 투닥거리는 바텀 듀오 두 사람을 보다가 입을 비집고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터뜨렸다.

“건이 웃는다.”

“오늘 은호 형 한 건 했네. 발 뻗고 자겠다.”

“내가 무슨 건이를 위한 기쁨조인 줄 아나 본데 당연히 그게 맞지. 우리 수장 건아, 많이 웃어라.. 이 형은 와드 막타, 그거 하나면 된다..”

오랫동안 합숙 생활을 하면 신기한 일이 생긴다.

군대처럼 위계질서가 생기거나, 아니면 상호 스킨십이 많은 아이돌 그룹처럼 서로 의지하게 되거나.

둘 다 같은 합숙이지만 그 결이 다르니까 결과 역시 천차만별이다.

팀마다 다르고, 아이돌이라 해도 당연히 다를 것이며.

군대도 부대마다 분위기가 다를 거라고 생각한다.

이건 정말 모인 사람들의 성향과 그 환경마다 다른데.

종종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테스토스테론과 에스트로겐의 차이가 아닐까 하는.

결국 팀 내에서도 파워 게임을 하는 스타일이 있고, 반대로 스스럼 없이 다가가 부대끼는 타입들이 있는데.

여기는 그 중간 정도다.

나이에 따른 위계질서는 나를 포함한 막내 라인이 유상준까지 넷이 되면서 애저녁에 무너졌고.

감정적 의존을 스킨십으로 표현하는 성향은 없으니까.

나는 둘 다 별로 안 좋아하거든.

편 가르기를 통한 감정 소모 역시 마찬가지다.

생각해보라.

사람이 다섯명, 아니 감코진까지 포함하면 열에 가까운 숫자인데.

그 안에서 자기 영역과 자기 사람을 가르지 않으려고 할까?

괜찮은 신입이 들어오면 일단 자기 라인을 타게 만드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하는 놈들이 분명히 있다.

그런 건 유치원 때부터 있었으며, 학교에서도 있었고.

BJ 사이에서도, 팀에서도 있었으니 직장인 사이에서도 있을 것이다.

“밥 왔다! 오늘 연어 포케 시킨 사람?”

“나.”

“거니는 연어, 나는 목살 포케.”

“탑. 너 또 건이 따라 해?”

“어쩌라고.”

“포케가 뭔지도 몰랐으면서.”

“일본 전통 음식 아니냐?”

“전혀 아닌데요?”

뭐, 어쨌든.

여기는 그런 것들이 적다.

중심이 아예 없었거나 만민 평등 사상가가 중심이었던 이 팀의 중심은 이제 내가 됐고.

리더인 내가 그 전쟁에 관심이 없으니 우리 팀의 힘 싸움은 메뉴 편 가르기 정도의 귀여운 수준이다.

“근데, 건아.”

“어.”

“진짜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이제 막 식사를 시작하던 차에 김예성이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시즌 오프 때 여소 받을 생각..”

“나!”

자리도 먼데 귀신같이 알아들은 최은호가 벌떡 일어난다.

“장유유서 몰라? 예성아! 나!”

“예성이 체면도 좀 생각하고 손을 들어라.”

“내가 뭐가 어때서?”

“후.. 이제 이런 얘기 그만하자. 너 속상하니까..”

“미친 새끼 아니야, 이거?”

하지만 마이웨이 김예성은 최은호 쪽으로 시선도 안 주고 말을 잇는다.

“스물 한 살, 키는 172cm고 발 사이즈는 240mm, 몸무게는 아마 55kg 정도..”

“예성이가 뭐래냐? 저게 무슨..”

“혹시 위키 읽고 있는 거 아니지?”

“그분이랑 신검 같이 갔었어?”

“그런 게 아니라.”

김예성은 난처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한참을 생각하고 말을 잇는다.

“눈 세로 길이는 1.7cm정도..”

“참신한 저세상 소개법인데?”

“님, 님, 라온 님. 혹시 몽타주 그리는 중이세요?”

“근데 너무 예쁘실 것 같다. 완전 내 이상형이네.”

“최은호 넌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냐? 저걸로 어떻게 상상이 돼?”

“이제 다음은 뭐야? 본관이랑 출생, 학력 이런 거야? 너무 설렌다.”

“닥쳐, 죄은호.”

“닥쳐, 꼬맹이. 넌 키에서 탈락이야. 너보다 크시네.”

“아닐걸? 나 컨디션 좋을 땐 더 클 수도 있어.”

“지랄.”

곽지운은 키가 작다는 사실 따윈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야, 유찬. 너는 이상형이 어떻게 돼?”

“어.. 리분? 아칼린?”

“쟤한테는 그냥 이런 거 물어보지 말자.”

“확인. 똥이나 싸라 그래.”

“은호 형 말 들으니까 똥 마렵다.”

“유찬아, 넌 제발 똥 싸고 물이나 좀 내려라.”

“나 물 내리는데?”

“쌩구라 사절. 맨날 내가 내리잖아. 내가 니 마니똥임? 형이 깨자마자 니 용변 색깔을 봐야겠어?”

“와우. 내 컨디션 들똥나버렸죠? 사실 자랑하고 싶은 날이 있지 않아? 너무 잘 빠진 날.. 그런 날 바로 물 내리기 미안하지 않아? 솔직히 말해봐. 나만 그럼?”

“그게 말이야 똥이야?”

“너희 똥 먹는데 밥 얘기 좀 그만해라. 유치원생이냐?”

다른 사람들이 삼천포로 빠진 사이, 여전히 김예성은 도저히 ‘예쁘다’라거나 ‘성격이 좋다’ 따위의 말을 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길게 늘이고 있었다.

이럴 거면 말을 왜 꺼낸 거야?

나는 또 한 번 터지는 웃음을 참아내며 고개를 저었다.

“아직 관심 없어.”

“아. 역시 그렇지? 다행이다.. 걔가 좀 단점이..”

김예성은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말을 흐리며 다시 수저를 들었다.

“근데 혹시라도..”

하지만 여전히 미련이 남은 것처럼 말을 끌고 있다.

뭔가 사연이 있는 것 같긴 한데.

뭐지?

전여친이라도 되나?

왜 저렇게 꺼리는 표정을 짓고 있는 거지.

어쨌든 답은 정해져 있다.

“월즈 우승하면.”

“아, 우승하면.”

김예성은 고개를 빠르게 끄덕였다.

“그때 생각해보자.”

“그래, 그래. 좋아. 가족. 가족. 열심히. 열심히. 우승, 우승.”

우리 미드는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웃었다 울었다 한다.

어쨌든 우승을 하고 싶어진 것 같긴 하다.

거듭된 승리로 불어난 자신감만큼 잔뜩 다른 이야기를 나눈 우리는 연습 시간 내내 게임을 하면서 자신의 현실 스펙에 대해 주절댔다.

으레 그렇듯 각종 거짓말과 부풀림이 난무했고.

그 후에는 LOS 챔피언들의 키와 몸무게 추측부터 시작해서 닮은꼴 챔피언 이야기, 게임 아이템을 실제로 들고 다닐 근력에 대한 이야기까지 흘러갔다.

그리고 결국 240으로 키와 몸무게, 남자의 사이즈까지 분배하는 토론까지 갔다가 끝내 아무도 이 문제에 대한 정답을 알지 못한 채 숙소로 돌아갈 시간이 오고 말았다.

“다녀왔습니다.”

나는 습관처럼 인사를 뱉으며 방에 들어왔다.

요즘 들어 릴리가 나타나는 빈도가 확실히 줄어들었다.

이유에 대해서는 확실히 말해주지 않으니 잘 모르겠지만 제 나름대로 LOS에 대한 지식을 쌓았고 팀 FWX에 대한 애정을 가지게 된 것은 틀림없다.

전에도 내게 이유찬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말해줬으니까.

이유찬은 나를, 그러니까.

아버지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FWX라는 가족을 유지하기 위한 키이자, 자신에게는 없었던 가족.

팀에 마음을 붙이지 못하던 김예성은 나를 유비로, 자기는 제갈량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고.

탑과는 여전히 장비와 제갈량 정도의 관계이긴 하지만 점점 더 여기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내가 떠날까 두려워했던 곽지운은 나뿐만 아니라 팀을 모두 동등한 원탁의 기사처럼 생각하고 있었고.

자신이 버려질까 무서워했던 최은호는, 어느 순간부터 우리가 제국에 대한 정당한 반란군이며 내가 그 리더라고 여겼다.

마음을 읽었다기보다는.

틈틈이 돌아다니며 주워들은 이야기들을 수다처럼 풀어낸 것들의 결과다.

[ 안녕. ]

하지만 오늘은.

기분 탓인지 어쩐지 키가 조금 커진 것 같은 릴리가 캐비닛 위의 제단에 앉아있었다.

악마의 샐쭉한 눈이 찢어지며 호선을 그린다.

내가 제사 지내는 것처럼 젤리를 쌓아놨거든.

오늘은 과일이 없지만 우리 악마님은 그럭저럭 만족하신 것 같다.

코리안 가챠에도 맛 들였거든.

[ 아, 또 클래스 스티커 나왔네. 이거 이상하게 꽝이 많다니까? ]

FWX 콜라보 젤리를 열어본 릴리가 허공에 스티커를 던졌다.

으레 그렇듯 휙 사라지는 묘기가 인상 깊긴 하지만 왠지 꽝 취급당하는 최은호에게 잠시 묵념.

[ 어때? ]

아마 이 질문은 스티커에 대한 게 아닐 거다.

“그럭저럭.”

[ 솔직하게. ]

“좋아.”

나는 그냥 대답했다.

릴리가 주는 정보는 소중했지만.

그렇다고 내가 아주 알 수 없는 것도 아니었다.

아까 말한 것처럼 여기 사람들은.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은 순해 빠진 사람들 뿐이니까.

경기도 경기지만 이 분위기, 이 관계가 무너지지 않기를 바라고 있는 내가.

지금 어떤 마음인지 잘 모르겠다.

[ 잘 됐다. ]

오늘따라 간지러운 말을 하는 탓에 목뒤가 간질거리는 기분이다.

“그렇지.”

아직 나는 이 악마를 완전히 믿지 못한다.

열정이니 뭐니 좋은 말을 늘어놨지만.

시간의 감옥 속에 갇혔던 나로서는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내 열정을 꺼뜨리는 행동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곤 했다.

실제로 나는 모든 걸 그만두고 싶어 했으니까.

그래서 이 악마의 행동이나 모습이 무해하다고 해서 완전히 믿지는 않는다.

그리고 또 모르지.

이 모습도 가짜일지도.

나는 여전히 한 줄기의 의심을 남겨 둔 채, 여태껏 궁금했던 질문을 던졌다.

“궁금한 게 있는데.”

이건 꽤 중요한 이야기다.

[ 뭔데? ]

FWX에 들어온 것은.

전에 없던 이유찬의 연락과 옆에서 나를 달달 볶았던 릴리의 영향이었다.

이건 전에 없던 일이었다.

“이유찬. 이유찬이 경기장에서 어떻게 널 봤던 거지?”

나는 조작되지 않은 내 삶을 원한다.

알고 보니 이건 다 꿈이나 환각이었고, 사실은 장기매매를 당하기 일보 직전이었다는 최후는 원하지 않으니까.

[ 으으으으음.. ]

그러기엔.

이제 나에게 주어진 이 팀원들에게.

제법 정이 들어버렸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 아마 그 정도 마음일 것 같다.

릴리는 볼을 톡톡 두들기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항상 말을 돌리던 것과 달리 오늘은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 후보였으니까? ]

“후보?”

[ 너처럼, 후보. ]

불현듯 나와 닮은 부분이 있는 이유찬이 머릿속을 스친다.

“그래서.”

나는 자세를 곧게 하고, 숨을 크게 쉬었다 내쉰다.

순간적인 근육 이완을 통해 정신을 가다듬는다.

[ 더는 말하기가 좀 곤란한데. 비밀이라서. ]

순간 말투가 지나치게 어른스럽게 들려서 가벼운 오싹함이 스친다.

나는 가벼운 말투로 대답했다.

“후보가 세 명이었구나.”

[ 맞.. 합. ]

하지만 이 악마는 여느 때처럼 속아 넘어가고 말았다.

세 명.

넘겨짚은 게 맞았구나.

삼위일체도 셋이잖아.

“남은 하나는 누군데?”

[ 비밀인데.. ]

악마는 이 끝으로 젤리를 갉아먹으며 동그랗고 큰 눈을 굴린다.

곰돌이 모양 젤리의 귀 끝이 잘근잘근 떨어져 나간다.

내가 침을 삼키는 순간.

[ 그래도 나 정말 너밖에 없어. ]

상대의 입에서 툭 떨어진 말에 긴장이 풀리고 만다.

고백이야 뭐야.

오늘 다들 분위기 왜 이래?

릴리는 큰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불씨를 가진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거든.. ]

“불씨가 뭔데.”

[ 음.. 한국어로는 설명하기가 어려운데.. ]

영어로는 된다는 소린가?

아니면 노스 코리안 랭귀지 팩으로?

[ 너 버르장머리 없는 생각 했지? ]

이걸 알아채네.

[ 어쨌든 나도 한배를 타고 있다는 사실은 알아줘. 안 그래, 무적함대 FWX의 전.함? ]

“...”

약간 머쓱해진 나는 코를 긁었다.

“사람 마음 마음대로 읽지 마라.”

[ 너. 그만두고 싶다고 했었잖아. ]

“음.”

나 역시 침묵했다.

우승이 과제처럼 느껴졌던 적이 있다.

그래서 중국을 생각했던 거고.

[ 하지만 지금은 다르잖아? ]

지금은.

내게 있어 우승은 또 다른 의미가 됐다.

[ 어쨌든 빛길 엔딩은 릴리가 처치했으니 안심하라구! ]

어딜 보고 말하는 거야.

현지화가 너무 심하게 된 거 아니야?

내가 수상쩍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자 릴리가 대뜸 나를 노려봤다.

[ 뭘 봐? 나 할 말 다 했어. ]

“...”

[ 당장 자고 일찍 일어나서 밥 먹고 운동하고 하루종일 게임이나 해. ]

이게 진짜 패악질 아니야?

작은 악마의 행패에 나는 털썩 침대에 누웠다.

“릴리야.”

[ 더 물어봐도 대답 안 해줄 거야. ]

“불이나 끄고 가라.”

[ 머리 좀 뽑아줄까? 탈모인으로 제3의 인생을 살아볼 테냐? ]

거절이다, 이 악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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