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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게이머, 그만두고 싶습니다-191화 (191/326)

191화. 누가 곰이 느리다고 했어?

문득 강준윤이 며칠 전 내게 보낸 메시지가 떠오른다.

- 강준윤 : 야ㅋ;;^^

- 강준윤 : 나한테 친한척하더니;; ^^;;;ㅋ;;;

- 강준윤 : 많이 아쉽다?????;;;;;;;;

- 나 : 간다고 한 적 없는데요^^

- 강준윤 : 말하는 꼬라지 좀 봐라^^;;;;;;

- 나 : 선배님 보고 많이 배웁니다^^

- 강준윤 : 두고 보자;;;;;;;;;

보이스 채팅에 초대받았지만 내가 들어가질 않다 보니.

이 사람은 뭐가 그렇게 아쉬운지 하루가 멀다 하고 내게 시비를 걸었다.

어쩐지 항상 대화의 마무리는 두고 보자인데.

이거 뭐, 너무 하찮은 유사 악역 아니야?

스토브 리그에서 스톰의 프런트는 오히려 나를 바란다는 이미지를 잘 이용해서 다른 부분에서 이득을 취했다.

물론 찔러보기는 들어왔지만 나 역시 붐보이에게 유감이 있을 뿐, 스톰이 폭망하기를 바라는 건 아닌 터라 빠르고 정중하게 의사를 밝혔다.

강준윤의 의사와는 다르겠지만 뭐.

- 강수달 : 있자너~^^

- 강수달 : 다른 애들 팔 부러뜨려주기로 한 거.. 잊지 않았지? ^^

그리고 친절한 원딜 강수달은 종종 나에게 청탁을 날리곤 했다.

- 강수달 : 어떻게 하냐니? 니가 제일 잘하는 게 사람 묵사발 만드는 거 아니야..?

- 강수달 : 정신적 타격도 타격이잖아..^^

살살 웃는 모습과 달리 음험한 면이 좀 있다.

날 너무 이상한 사람으로 보는 거 아니야?

누가 들으면 내가 도장 깨기라도 하고 다니는 폭군인 줄 알겠어.

- 강수달 : 나는 빼고.. 알았지? 살살해주세요 제발*^^*

어쨌든 날 그렇게 찾았으면 얼굴을 보여주는 게 인지상정.

“여기 와드 시야. 이쪽으로.”

모두가 어느 정도 성장을 했음에도 스톰이 위축된 탓에 특별히 큰 싸움이 일어나지 않았던 시간.

이제 라인전을 더 지속할 것인지 혹은 진영을 바꿔 올릴 것인지 결정해야 할 시기.

다이브를 받아낸 후.

지저분하게 라인을 형성했던 탑이 성실하게 미드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오케.”

약간의 손해를 감수하고 이유찬을 돌린다.

“나는 노출.”

와드가 박혀있는 부쉬 방향으로 들어가면서 상대의 시선을 잠시 빼앗는다.

나는 여기에 와드가 있다는 걸 알고, 상대 미드인 강준윤 역시 내가 와드를 체크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확인.”

나를 의식하기는 했지만 과하게 빼지는 않는다.

정글이 행차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손해를 볼 수는 없으니까.

적당한 거리감.

나는 ‘우리 미드 그만 괴롭혀라’ 라는 메시지를 전달했다는 듯.

발걸음을 물리는 시늉을 한다.

스톰에 영입된 빅스 출신 정글러는 안정적인 타입이다.

용 동선을 타다가 나를 발견하고 발걸음을 돌렸을 거다.

하지만 이미 완성된 삼각진.

“누가 김미드 농사 망쳐?”

“리산. 자꾸 냉해 입혀.”

한 걸음.

그리고 귀를 찌르는 핑.

“못 참아.”

대화가 미처 끝나기도 전.

“차아아아아아아니, 멈출 수 없는.. 히이이이이이임!”

시야를 피해 잠시 거석처럼 몸을 숨겼던 돌대가리가 빛처럼 돌진한다.

나와는 대각선으로 반대 방향.

안심하는 순간 의표를 찌르는 공격.

“킹의 리산! 반응했어요!”

- 뻥궁

- 돌덩어리 대략 멍해짐

- 이걸 반응해?

- 하지 그럼ㅋ 프로가 뭐 제기차기 해서 따는 자리냐?

- 난 못해ㅋ

- 나도..ㅋ 이래서 내가 프로가 못 됐네 ㄲㅂ

- 피하냐 못 피하냐가 어리다 늙었다의 지표 아님?

- 성급한 일반화 멈춰!

“반응은, 했는데..!”

“이게..!”

얼음 무덤에 스스로를 가둔 적 미드가 어둡게 반짝인다.

강준윤 선수, 너무 의식했죠?

손에 땀 나죠?

덜덜 떨리죠?

강준윤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진짜 너무하지 않나요, FWX!”

아마 나를 욕하고 있지 않을까?

“이거! 킹 선수, 실수인데요!”

“이게 끝이 아니라는 게 문제입니다!”

- 아.. 아.. 존나 개멍청

- 저 새기 뭐 어디 시선 뺏겼냐?

- 점멸을 써야지 거기서 왜 궁을 쓰고 지랄이야

- 개답답해 내가 해도 저거보다 잘하겠다

- 그래서 쟤 제기차기로 프로 된 거 맞지?

“순서상 미스가 있었죠!”

“점멸을 먼저 썼어도 바로 다이브가 들어왔을 것 같긴 한데, 그럼 최소한 교환 정도는..”

나는 몸을 다시 돌린 지 오래다.

이제 똑똑히 보고 있을 거다.

1초.

시간을 쪼개 재빨리 몸을 한번 털어준다.

왼쪽으로 한번, 오른쪽으로 한번, 터치 마이 바디.

강제 관람이라고.

알지?

“드디어 잡았다. 농사를 망치는 고라니 같은 녀석.”

귀여운 발걸음으로 다가가는 농사꾼 김예성의 네잎 클로버가 흔들린다.

강준윤을 열받게 하기에 걸맞는 근본 스킨.

“아니! 베이거라는게 이게, 라인 압박을 안 할 수도 없는 챔피언이잖아요!”

“이거, 이거, 완전! 낙장불입!”

“얼음..”

2.5초.

이제 내가 나설 차례.

춤추던 앞발을 바닥에 붙인다.

그리고 뒷발에 힘을 준다.

“땡!”

“정확한 타이밍에! 라온, 사건의 지평선!”

- 앗

- 앗아아

- 야 이거.. 조합.. 이거..

- 무슨 CC가 이렇게..

- 킹 시발거 베이거 처음 상대하냐?

- 오랜만이긴 하겠지··················..

땅이 움푹 패는 느낌이 든다.

그대로 박찬다.

곰은 언뜻 미련한 이미지가 있지만.

사실은 굉장히 영악한 포식자라는 점.

그리고.

“달려어어어어어어어어어! 옵니다아아아아아아악!”

단거리에서는 폭발적인 속력을 낼 수 있다는 점.

안녕.

너무 반갑지?

“지금 단계에서 사실상 주력 딜러는..!”

“곰이..!”

양손을 높이 들었다가 내려찍는 순간.

“찢어요!”

번쩍.

한쪽 눈이 찌푸려진다.

어휴, 아프겠다.

“궈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언건!”

“아니, 이거 타이밍 아주 미쳤어요! 바로 근처에 비예고 있었는데!”

“살짝 방심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었거든요. 오히려 시야가 집중력을 방해했어요!”

- 이거 뭐냐 무슨 딜이 저렇게 세냐?

- 아이템 창 저거 준비물 뭐냐?

- 저 곰 새끼 지금 자객 되려고 하는 거냐?

- 어? 재밌겠다

- “두근”

- 설레지마 미친새기들아;;;;

“이렇게.. 득점합니다!”

게걸스럽게 강준윤을 먹어 치운 뒤.

빠르게 쇼핑을 마치고 바텀으로 달린다.

상체에서는 토론이 한창이다.

“이거 재미없는 것 같은데?”

“아니야, 탑. 잘 생각해봐. 재밌다니까?”

“딜이 안 나오잖아.”

“여진 딜 있잖아.”

“그게 무슨 딜이야. 주먹으로 팬 것도 아닌데.”

“아니지. 대지의 힘인 거야. 그거 되게 세. 네가 딜 다했어.”

“그래?”

“나중에 그래프 봐봐. 이번에 상향됐어. 깜짝 놀랄걸?”

대체 뭘 놀란다는 거야?

여진 안 들었잖아.

그새 까먹은 놈이나, 알고도 거짓말하는 놈이나.

“알겠어.”

어쨌든 김예성이 이유찬에게 꾸준히 탱커 인식 개선을 주입하는 사이.

“어.. 이거 바로 뛰어요?”

“빨라요?”

“경기 스피드 점점 올립니다. 이거.. 그러니까.. 지금.. 볼베가 코어? 코어가 나왔거든요?”

- 코어?

- 볼베의 코어가 보통 어? 얼어붙었거나 강철인 심장 뭐 이런 거 말하는 거 아니냐?

- 아 곰에게 제일 중요한 건 발톱이라고 아ㅋㅋㅋㅋㅋㅋㅋ

- ㄹㅇ 남만야수궁 곰이었던 거임

나는 다음 행선지로 향한다.

“이제 우리 턴 왔냐?”

얌전하게 바텀에서 머무르던 듀오가 화색을 띤다.

“노인 공경 좀 해줘라. 가능하면 먼저 좀 와줘. 안 그래도 느려졌는데..”

“칙칙폭폭! 효도 관광 기차 내려갑니다. 미니맵을 확인하세요!”

“개유찬..”

최은호의 투정은 이유찬의 노인 공격으로 막혔다.

“이거, 이거, 이거, 이거!”

“스톰도 합류 중!”

이윽고 곰은 최고 속력을 내기 시작한다.

“뭐에요? 권건 선수 신발 이거.. 혹시 돈이 부족했나요? 이러면 둔화 효과 감소 외에는..”

“아니면 아예, 맞을 생각이 없는 부분?”

“이러면 지금 갑자기 풍속이 확 빨라지는 느낌이 드는데요..!”

“오고.. 오고 있습니다. 뭔가 오고 있어요!”

항상 모든 픽에는 장단점이 있다.

뉴메타나 자주 나오지 않는 픽은 단점이 더 많고.

반드시 파훼할 방법이 있다.

그래서 범용성이 없다는 거다.

하지만 프로씬에서 볼 일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 방비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그 약점을 떠올리는 것보다 게임을 터뜨려버리는 속도가 더 빠르다면?

“바로 들어갑니다.”

“오케이. 기상 캐스터 쟌나님 나와주세요!”

찌링찌링.

“주간 일기예보입니다! 연일 화창한 날씨 속에 학살이 예상됩니다!”

경쾌한 핑이 울려 퍼진다.

이제 가까워진 바텀 방향에서 서포터의 순풍이 불어오기 시작한다.

최고 속력을 넘어.

점점 더 빨라진다.

#

“지금 권건! 타이밍 밀당하면서 템트리를 최대한 빠르게 끌어당겼는데요? 이거 리스크 있습니다!”

“말도 안되게 강해요! 하지만, 여기서 이득을 못 보면 너무 위험해요!”

- 존나 물몸

- 신개념 야수의 심장 십ㅋㅋㅋ

- 우리 건이 탱시키는 줄 알았더니ㄷㄷㄷㄷ

- 제아무리 세자의 배인이라도 역시 혼자 딜하는 건 마다마다 무리무리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ㄹㅇ 배인 불신 사회~

“스톰, 이 움직임 예측하고 있죠?”

“분명 알고 있습니다! 지금 탑에서도 의식하고 있어요. 스톰 탑만 추가 합류 가능한 상황! 정글 미스터 선수, 귀환 후 바로 바텀 방향으로 머리를 돌렸죠!”

벽을 넘는 것도.

시야를 체크한 것도, 시간을 들여 잠복하는 것도 아니다.

정직하게 나아간다.

“근데 권건! 이걸 그냥 바로 쭉 들어갑니다!”

“망설임 없이 밀고 들어가요! 이거!”

그저 그 속도가 믿을 수 없는 정도일 뿐.

“너무 빨라요! 너무 빠릅니다! 이동 속도라는 게 시간에 따라 상대적인 부분이라!”

“신발 선택부터 패시브 활용까지..”

이제 스톰 선수들의 눈에 곰이 보이기 시작했다.

“바텀 라인전이 워낙 정적이어서 아직 신발을 다 올리지 않았거든요?!”

저 멀리서 안개가 다가온다.

스톰의 정글도 최선을 다해 달려오고 있다.

그 순간.

곰은 바닥에 네 발을 붙인다.

수풀 따위를 타지 않은 채.

유닛 충돌을 무시한 채.

항상 사이드 투 사이드 무빙을 선보이던 바람의 정령을 당당히 앞세운 짐승이.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고 있다.

이족 보행이, 순풍을 탄 사족 보행을 이길 수 있을 리 없다.

위기를 직감한 스톰 선수들은 공기가 부족한 것처럼 숨이 막힌다.

바람의 흐름은 FWX편으로 넘어가고 있다.

“막아줘!”

원딜 강수달이 날카롭게 외쳤다.

바짝 긴장한 서포터 진주호가 야생의 곰과 맞서기 위해 철마의 고삐를 쥔다.

간절한 표정이다.

하지만 철마가 고개를 높이 들고 하늘로 짓쳐 오르는 순간.

“초대형급 태풍에 철저히 대비하세요!”

날씨를 예보한 바람의 정령이 불러낸 울부짖는 돌풍이 불어온다.

아뿔싸, 에어본.

금기였던 직선적인 움직임.

“뒤로 쭉..!”

치사한 건 상대 역시 직선형이라는 점이다.

스톰의 서포터가 FWX 서포터와 눈을 마주치고.

“이상, 쟌나였습니다!”

곰의 진입 능력을 메꾸며 여기까지 인도한 바람의 정령이 우아한 턴으로 흩어지는 순간.

“방향 꺾으면서어어어어어어어! 그대로! 바로 타워를 향해..!”

마지막까지 렐이 간절한 인력으로 상대를 끌어당겨 보려 했지만.

“더어어어어어엉크슈우우우우우웃!”

적은 달리는 가속도로 그대로, 그대로 들이받아 버린다.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 경고! 경고! 경고! 경고!

- 스톰 팬은 이 방에서 모두 나가주세요!

- 매우 잔인한 광경이 나올 예정입니다!

번쩍.

눈앞에서 번개를 보는 것 같다.

끝내 곰은 문명의 힘에 구애받지 않았다.

“볼베의 스토오오오오오오옴브링어! 궁극기! 타워 무력화됩니다!”

“권건! 바로 돌입!”

한층 거대해진 곰의 포효가 사지를 얼어붙게 한다.

“허머나..”

바텀으로 상륙한 자연재해 앞에서, 원딜 강수달은 어이없이 웃을 수밖에 없었다.

“미친 쓰벌..”

살아남기 위해 마지막 순간 점멸을 사용했지만.

완벽히 싱크로된 타이밍에 들어온 권건의 맞점멸과 선입력된 곰의 번개 강타에 다리가 굳고.

“상상보다 더 아프네..”

어떻게든 역전의 기회를 노리기 위해 다시 총을 꺼내 봤지만.

느려빠진 줄만 알았던 곰은 자객 같은 발톱을 드리워 날렵하게 등 뒤에서 자신을 찢어발긴다.

이게 성인 인증을 요구하는 게임이었더라면.

틀림없이 슬로우 모션으로 글로리 킬 장면을 보여줬을 것 같다.

물론, 곰 시점에서.

- 아 시발 또 권건 중심 게임이야?

- ? 지난 시즌 내내 건신은 받쳐주기만 했는데? 피지컬 존나 아까웠음

- 아니.. 지 혼자 저딴 템트리가면 다른 애들은 부담 어떻게 감수하냐?

- 뭘 감수? 겜 터뜨려줘서 감사하겠지

- 저게 말이 됨? 타워 사이에서 원딜이 터지는 게 말이 되냐고 존나 이번 패치 FWX 눈치 봤나 보네 LOS 망했다

- 뭔 개소리야 니네 정글 아직 안죽었잖아ㅋㅋㅋ 정글 보호 정책이구만ㅋㅋㅋ 님은 왤캐 화가 나셨어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불만 있으시면 너네도 쓰세요 자객 볼베ㅋㅋㅋㅋㅋㅋㅋㅋ

“다른 원딜들 팔 좀 부러뜨려 달라고 했더니.. 권건 저 새낀 대체..”

번개 뒤에 따라오는 천둥처럼.

“얘들아.. 괴물이다.. 도망쳐..”

끝내 따라와 틀어박히고 마는 재앙의 앞에서 할 수 있는 말은 경탄뿐이었다.

“이런 타이밍에 존나 미안한데.”

마지막으로 눈을 질끈 감은 탑의 목소리가 들리고.

“나.. 바텀 텔 찍었다..”

“...”

“...”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 너넨 저딴 팀에 정이 가냐? 겜 드럽게 하네

- 응~ 존나 정가~ 세상에서 제일 위대해 아주 맘에 쏙 들어

- 아ㅋㅋ 처바르면 정 존나 들지 ㅋㅋ

- 건신이 너네 팀 안가서 화났니?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얼마나 가나 보자 저거; 어차피 볼베 초중반 원툴임

- 다 땡겨다 쓴거임 시팔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거친 바람이 불어온다.

처음에는 쟌나의 작은 돌개바람이었던 것이 눈 깜빡할 새 덩치를 불렸고, 이제 막을 수 없다.

스톰보다 더욱 폭풍 같은.

거대한 자연재해가 불어닥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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