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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게이머, 그만두고 싶습니다-186화 (186/326)

186화. 준비

모든 로스터가 발표되고, 권건의 소식으로 유일한 승자가 된 것은 FWX.

마지막까지 입덕 부정기를 거치던 팬들이 쏠리면서 FWX의 굿즈 샵은 여러 번이나 서버를 재점검 해야 했다.

그 해의 올스타전은 간소하게 진행됐다.

각 팀 감독들과 은퇴 3년 이상 된 선수들, 그리고 스트리머들이 나와서 올스타전을 펼쳤다.

과거의 선수들을 추억하던 팬들에게는 즐거운 시간이 됐지만 앞으로의 시즌에 관심이 쏠렸기에 큰 인기는 얻지 못했다.

그래도 마치 솔랭과 같은 밴픽을 선보인 감독들은 민망한 표정으로 서로 친목을 다졌다.

“이야. 우리 박 감독님..”

“박 감독님..”

“박..”

박진현 감독은 전에 없던 인기에도 차분히 친목을 쌓아 나갔다.

이 중 몇 인연은 제법 도움이 될 터였다.

그리고 12월.

LKL 어워드.

한 해가 끝날 때마다 해당 해의 성적을 종합해 시상하는 행사.

모든 팀의 스타들이 모이는 이 오프라인 이벤트에 또다시 수많은 사람이 줄을 섰고, 표는 순식간에 매진됐다.

“휴가 잘 보내고 있어?”

당연히 FWX 선수들도 이 자리에 왔다.

“맨날 디코로 만나잖아. 뭔 반가운 척이야?”

최은호의 말에 곽지운이 틱틱거린다.

선수 계약이 끝났던 최은호는 빠르고 신속하게 FWX와 재계약했다.

곽지운은 이 점을 내심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당연하다는 듯.

놀라울 만큼, 그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심지어 최은호 본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깍지 이 새낀 아는 척해줘도 지랄이네.”

곽지운의 머리는 눈을 맞은 것처럼 하얗게 탈색되어 있었다.

“머리부터 화장까지 뽀얀 것 좀 보소? 눈송이세요?”

“메이크업이라고 해줄래?”

“뭐가 다름?”

“언어, 글자 수, 뉘앙스 다 다르다, 허접아.”

오랜만에 만나도 여전히 사이좋은 두 사람의 모습에 박 감독이 웃음을 터뜨렸다.

LKL 어워드는 팀보다는 개인 중심의 시상이었기에 자리가 지정석이었지만.

FWX는 사실상 팀원 변동이 없었기에 모두 비슷한 테이블에 앉아있었다.

“어, 상준아!”

그리고 박 감독이 새로운 이의 이름을 부르자 모두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쪽이야!”

“넵.”

이제 막 장내에 들어서 두리번거리던 한 선수가 FWX 선수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안녕하세요.”

“안녕..?”

어색한 인사.

“네. 안녕. 안녕. 하세요.”

박 감독의 옆에 털썩 앉은 깡마른 선수가 고개를 까딱여 인사한다.

선수들이 미처 다 인사를 나누기도 전에.

“안녕하세요.”

주인공이 등장했다.

“악, 시발 지저쓰 정장.. 쟤는 메이크업 안 하는 게 밸런스 맞는 거 아니냐? 옷이라도 좀 실험적인 거 입히던가..”

“내 눈! 내 눈!”

“야! 빨리 고개 숙여! 카메라에 같이 잡히기 전에! 우리 박제된다!”

“옛썰!”

주접 바텀 듀오가 눈을 가리고.

“오랜만이야.”

권건,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의 김예성이 나란히 등장했다.

#

“올해의 정글러, 권건 선수! 축하합니다!”

박수갈채가 쏟아진다.

“특별상! 올해의 실력 왕, 권건 선수! 다시 한번 박수를 부탁드립니다!”

카메라 플래시가 터져 눈 앞을 가리지만.

자연스럽게 손으로 눈가를 가리며 미소를 보낸다.

“그리고 올해의 루키! 권건!”

또 한 번.

“마지막으로..”

이제 주변에서는 박수 치기도 지치는 얼굴로 미리 나를 바라보고 있다.

“올해의 선수상은.. 권건 선수입니다!”

마지막 꽃가루가 허공을 수놓는다.

우리 팀에서는 올해의 원딜, 그리고 가장 많은 골드를 가져온 선수인 골드러쉬 상으로 곽지운이 수상을.

최고의 펜타킬 상을 김예성이 가져왔다.

하이라이트 상 후보로 이유찬이, 최고의 베이비 시터 상으로 최은호가 이름을 올렸지만 아쉽게 받지 못했다.

만약 최은호에게 이슈가 있었을 때, 내가 서포터로 출전했다면 상이 하나 더 늘 수도 있었겠는데.

이건 좀 아쉽다.

그랬으면 5관왕인데.

“혼자 다 가져가니까 좋아?”

“좋네.”

이유찬이 쓸데없이 시비를 걸었지만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상 받는 거 짜릿해. 늘 새로워.”

“아. 루키 상 정도는 나한테 양보하지.”

“그래. 너 가져.”

나는 손에 들려있던 수많은 트로피 중 하나를 이유찬에게 건네고 인터뷰 석으로 걸어갔다.

“야. 김미드. 거니가 나 이거 줬다?”

“거기 이름 새겨져 있는데.”

“엥.”

“멍청한 탑.”

수많은 이들이 내가 다시 이 팀을 선택한 것에 대해서 많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

“권건 선수, FWX를 다시 선택하신 것에 대해..”

“이 자리가 그 이야기를 하는 자리는 아닌 것 같은데요.”

놀랍기도 하고, 아쉬워하기도 했으며.

“하지만 대답해드리자면. 이 팀에는 뭔가 다른 점이 있다는 말씀을 드리면 될 것 같네요.”

‘의리’나 ‘동화적 상상력’을 지켜줬다는 점에 대해서 만족해하기도 했다.

다만 이 선택이 나, 개인에 대한 팬이 되어버린 많은 이들에게는 아쉬운 결정일 수는 있었겠지.

“어차피 이렇게 될 거였다면 좀 더 빨리 행선지를 결정했다면 어땠을까요. 팀들에게 헛된 기대감을 심어주기보다는 말이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끝까지 내게 오퍼를 넣다가 이번 스토브 리그를 말아먹은 모 팀의 팬으로 보이는 기자가 마이크를 들이밀었다.

예의 없는 발언에 주위에서 눈총이 쏟아졌지만.

“그렇겠죠. 제게 많은 시선이 쏠렸으니까.”

나는 왼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웃는다.

“하지만 이번뿐이겠어요? 매번 그럴 텐데.”

어디서 화풀이야?

“다음에는 좀 더 적극적으로 좋은 이야기를 많이 해보면 좋겠습니다. 실례지만, 어느 팀 팬이신지?”

기자는 입을 꾹 닫고 인파 속으로 사라진다.

아쉽네.

한마디만 더 했으면 얼굴도 못 들게 해줬을 텐데.

“이번 프리 시즌 패치에서 정글 챔피언 폭 변화와 카정이나 동선 변화가 어렵게 변한 점에 대해서..”

“정글링 안정성 패치에 대해..”

이제야 좀 쓸만한 질문이 나온다.

어쨌든 나는 이번 삶에서의 마지막 행선지로 이곳을 택했고.

이제 정해진 길은 하나뿐이다.

이 팀을.

챔피언으로 만든다.

반드시.

#

“방학이 너무 짧아.”

“그러게.. 밀린 드라마랑 애니 다 못 달렸는데.”

팀은 휴가와 워크샵을 마치고, 시즌을 앞둔 상태에서 다시 합숙을 시작했다.

“탑. 오프 시즌 휴가라고. 방학이 아니라.”

“응애, 나 애기 유차니.”

“더러워.”

“응, 니가 더 더티.”

“탑, 너 더티 스펠링은 알아?”

“알지.”

“뭔데.”

“일단 T로 시작해. 그리고 E도 들어가고..?”

“이 수준 낮은 빡대가리가 우리 팀 탑이라니.”

전보다 훨씬 편해진 이유찬과 김예성은 스스럼없이 서로를 깎아내렸다.

“예성이 욕 못하는 거 아니었어?”

“여태까지 낯가렸나 봐. 나도 넘모 무섭다. 죽으면 형 나가 뒈지라고 할 것 같다.”

이제 누가 무슨 사연이나 이야기를 가졌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한 팀이었으니까.

“친하면 욕하는 게 정상이던가요?”

하지만 드물게 진지한 권건의 물음에.

“어.. 보통..”

“아니, 아니야. 아니야. 건아. 친구라서 욕을 하는 게 아니라 친구니까 욕을 해도 괜찮은 거야. 선후관계가 절대 그렇게 되는 게 아니야.”

최은호가 섣불리 대답하려고 하자 박진현 감독이 당황한 눈치로 말을 끊었다.

“어! 혹시 건이 너 친구 없어?”

“최은호 니도 친구가 있는데 건이가 친구가 없겠냐?”

“아니? 나 친구 없는데? 우리 다 비즈니스 관계인데? 님 저 아세요?”

“그래. 그런 거로 해라. 친구 없는 새끼야.”

“은호쿤, 오늘도 딜교에 실패해버리고만.”

다른 선수들이 순식간에 다른 화제로 떠들어버리는 사이.

자신이 굉장히 오랜 기간 ‘비즈니스 맨’으로만 활동했었다는 것을 느낀 한 사람은 조용히 머리를 쓸어 넘겼다.

“흠, 흠. 패치 적응은 다들 했니?”

평소와 다르지 않게 화면을 켠 박진현 감독이 준비해온 자료들을 연달아 띄운다.

곁에 앉아있는 코치진은 플레잉 코치 최수철, 멘탈 코치 김한빛이 있었고.

새롭게 합류한 문백산 코치가 노트를 펼치고 있었다.

“다들 알겠지만, 이번 프리 시즌 패치가 그대로 갈 수도 있고. 조금씩 바뀔 수도 있다.”

박 감독은 꼼꼼히 예측 내용을 적은 주제를 두고 회의를 시작했다.

한 해가 끝나면 LOS는 크게 바뀐다.

월챔 직전에는 대회 밸런스를 의식하는 방향으로.

그리고 연말에는 유저들이 계속해서 LOS에서 좋은 경험을 할 수 있게 만드는 방침.

프리 시즌에 적용되었던 내용들이 무조건 유지된다는 보장은 없었지만, 게임사가 원하는 방향성을 보여주기에는 충분했다.

“주된 내용은 각 역할군이 좀 더 뚜렷해졌다는 점.”

“라인별 안정성 강화로 초반부 서로의 개입력을 약화시키고..”

2026 시즌, 일명 체급 패치.

말 그대로 높은 랭크의 한 명이 부계정으로 내려와 게임 전부를 지배하는 경향을 감소시키고.

각 포지션이 어느 정도 성장한 후 협력을 통해 승리를 얻는 것.

그리고 갑자기 분 정글러 붐에 대응한 듯 정글 입문 유저들을 위한 편의성 향상, 상대적으로 후반에나 영향력을 보일 수 있었던 라인들의 밸런스 강화, 삭제되었던 아이템의 부활이나 삭제, 가격 변동 등 다양한 변화가 있었지만.

가장 주된 점은 정글러의 개입력과 동선이 기존보다 제한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었다.

한참 설명과 분석이 이어지고.

“정글 평준화? 이거 완전 권건 대응 패치 아니에요?”

“그럼 이제 초반부터 정글 개박살 내는 거 힘들어진 거?”

“세상에 저항받는 건신?”

나름 각자 패치를 이해하고 있었지만 전체적인 그림을 마주한 선수들은 각기 반응이 달랐다.

아직 팀에 다 적응하지 못한 문백산 코치가 불안한 듯 눈동자를 굴리며 권건을 바라본다.

“별로 걱정할 필요 없어요.”

하지만 그 시선을 받아낸 사람은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정글링 안정성이 늘었죠.”

문 코치는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각 라인 영향력이 올라갔고. 카정의 효율이 떨어졌습니다.”

이제는 노트에 적기 시작했다.

“제가 상대 정글을 쉽게 잡아먹기 힘들어졌다는 얘기가 되죠. 근데, 상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맞지, 맞지.

뭐라도 적으니 제법 그럴듯해 보이는 내용이 완성됐다.

하지만.

“그러면 어떤 정글 챔피언이 떠오를까요?”

훅 들어온 권건의 질문에 문 코치는 잠시 멍하니 펜을 내려놨다.

문백산은 한 세대 이전에 많은 팀을 전전했고 마지막을 유니버스 탑으로 졸업한 우수생이었다.

은퇴한 지 비교적 오래되지 않아 선수들과 나이 차가 적었고, 짧게나마 LKL 분석 데스크에서 활동했던 이력을 가졌지만 코칭 경력은 없다.

그는 전체적인 분석보다는 탑 라인 전담 코치로서 FWX에 몸을 담았다.

“어. 음. 음.. 잠시만요.. 선수님.. 팔로우업하고 있습니다.. 델리케이트한 액세스가 요구되는 아젠다라..”

“그.. 수철아, 문 코치는 말투가 왜 저래? 외국 다녀왔어?”

“아뇨? 전혀 아닌데요?”

요즘 뜨는 정글이 뭐더라?

문 코치는 머리가 복잡해졌다.

박 감독과 다른 코치진이 흥미롭다는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프레시맨에 대한 이런 프레셔?

혹시 이거 동료 평가?

“리.. 싱?”

간신히 내놓은 답은 특별하지 않았다.

리싱은 메타를 가리지 않고 항상 사랑받는 정글이다.

권건은 자기보다 반 십년은 어린 선수이자 후배인데도 어쩐지 무서워서.

분명히 존댓말까지 써주고 있지만 고양이 앞의 쥐처럼 오그라드는 부분이 있었다.

그래, 최소한 리싱이면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뭐.. 그렇지..”

“문 코치.. 상상력.. 점수.. 체크..”

기존 감코진이 그를 놀리자 어쩐지 겁이 난 문 코치가 입을 열었지만.

“아니..”

“리싱은 언제든지 꺼낼 수 있죠.”

권건은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다른 챔피언들도.”

“다른 챔피언?”

“뭐?”

“전부. 다.”

정글러가 씩 웃었다.

“원하는 모든 것.”

“모데?”

누군가는 자신이 활약했던 픽을 불렀고.

“재드?”

누군가는 자신이 좋아하는 픽을.

“..트윗치?”

또 누군가는 고대 시절 나왔던 픽을 호명했다.

아무렇게나 던져본 말에도 그는 부정하지 않고 말만 하라는 듯 팔짱을 끼고 등을 기댔다.

“홀리몰리? 하겠다고?”

“나 머릿속이 갑자기 복잡해지려고 해.”

“말하는 대로.”

“야, LOS 재밌다.”

“백 투 더 퓨처.”

순식간에 걱정스러웠던 회의 분위기가 묘한 열의로 가득 찬다.

“그럼 유마는?”

“야! 그건 내가 좀! 다메다메 다메요!”

“아, 진짜 아무리 그래도 할 수 있는거랑 팀 전체 동의는 다른 부분이지!”

누군가의 선 넘는 말에도.

“원한다면?”

태도는 변함이 없다.

이제, 그들에게 불가능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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