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하루
오프시즌 휴가.
이유찬은 눈을 떴다.
벌써 점심이다.
분명 어제 일찍 잤는데.
믿을 수 없이 하루가 빠르게 끝난다.
원래 좋아하던 격투 게임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사람들의 함성이.
소중한 가족들이.
집중의 선 끝에서 닿았던 그 순간이 잊히질 않는다.
그 감정은 머리카락 끝에 간질간질하게 남아 떨어져 나가지 않는다.
“찬아.”
“엉.”
“너 친구네 집에 김치 좀 가져다주고 와라.”
“엄마. 우리 집 김치 맛없는데? 폐기 처분 하는 거임?”
“누가 가르쳤는지 버르장머리가 없네..”
“그러게. 진짜 누군?지? 모르겠다?”
전보다 나아진 엄마의 표정을 보니 온몸이 따뜻해진다.
FWX에서 누나에 대한 대학 지원을 해줬다.
계약과는 별개다.
모기업에서 지원하는 프로그램에 채택되었다고 했다.
“누나 언제 와.”
“내년 학기 시작할 때 오겠지.”
“나 배고파.”
“밥 먹고 친구네 다녀와라. 맛없다고 어디 바닥에 버리지 말고.”
“밥 주면.”
“저기 식은 밥 먹고 바로 다녀와. 나 일 가야 해.”
“나는 LOS 해야 하는데? 엄마 그냥 휴가 써라. 응?”
“내일부터 휴가야. 너 집에서 게임만 하는지 감시하려고. 그렇게 살면 건강 나빠진다. 움직이고 그래야지. 운동도 하고. 밥도 잘 먹고.”
예전의 엄마다.
자식들을 해외로, 사옥으로 하나하나 보내며 아이처럼 울던 우리 엄마.
사별만으로도 가슴이 미어졌을 터인데.
어떻게든 일어서보려고 바닥에서 몸부림치던 그 모습이 아니라, 예전의 엄마.
이유찬은 웃었다.
“밥 잘 먹게 밥 좀 줘. 나 된장찌개.”
“하.. 웬수.. 밥 차려주기 귀찮다. 합숙할 땐 대리 육아 진짜 꿀이었는데. 너 군대는 언제 가니?”
이유찬은 더 크게 웃었다.
#
권건은 산책을 나갔다.
바람이 분다.
일반인 외에도 누군가 숨어서 말이라도 붙여보려고 기다리는 기색이었지만 신경 쓰지 않는다.
추운 날씨, 깊이 눌러쓴 모자와 마스크에도 용케 알아본 몇몇 팬들이 들러붙는다.
“와. 미친 거 아니냐. 실물이 더 잘생겼어.”
“맞아. 지금 굴이 제철이래.”
“뭔 굴?”
“권건 얼굴..”
“맘마미아, 존나 똑똑해.. 이 샛기 문과야.. 앗. 선수님께 한 말이 아니라.. 저도 굴이 제철이라고 생각은 하는데..”
권건은 자연스럽게 웃었다.
“응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너무 팬이에요..”
두 팬은 열심히 앞머리를 가다듬으며 초롱초롱 눈을 빛낸다.
“저 새해 복 많이 받으라고 해주세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야, 내년 니 복 다 끌어다 썼다.”
“쉿, 호덕 얼빠.”
“흐흐흥, 얘가 도대체 무슨 말을?”
“환승하면 손모가지 부러지는 거 안 배웠냐?”
“환승?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 이제 내 인생에 환승은 없다. 그리고 너 나 아니었으면 LKL도 안 봤을 거잖아.”
투닥거리는 여고생들을 뒤로하고 권건은 발걸음을 옮겼다.
“FWX 팬이에요!”
“저도요! 영원히 사랑해!”
이제는 제법 멀어졌지만 가볍게 고개를 숙여 팬들에게 인사를 건넨다.
겨울 과일이 또 뭐가 있더라.
귤?
사과?
아니면 무화과가 아직 있으려나.
“..야.. 목소리까지 전신이 킬포네.”
그는 멀어졌지만 두 사람의 대화는 이어졌다.
“나도 전신 자상.. 과다 출혈.. 너 오빠가 딸기 들고 있는 건 봤어?”
“응. 너무나 꿀귀인 것..”
“인! 정!”
“건이 오빠 단 거 좋아하나 봐..”
“아, 우리 오빠? 원래 단 거 좋아해. 오빠 취향 아직도 몰랐어?”
“누가 니네 오빠야? 하.. 진짜 너무 과일과일해.. 아씨, 나 지금 립 제대로 먹었냐?”
“제대로 먹긴 했다. 많이 먹어서 배부르겠네.”
“너 존니 도움 안돼..”
“응, 너도.”
“나 그냥 오늘부터 완팬. 총공 다짐.”
“응, 나도.”
뒤에서 깔깔거리며 웃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그 소리는 권건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끊임없었다.
#
늦은 오후.
김예성은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원래도 아주 일찍 일어나는 편은 아니었지만 요즘 들어 불안이 생겼다.
혹시나 권건이 떠날까봐.
팀에서는 반드시 잡겠다는 확답을 했고.
권건 역시 김예성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런 식으로 떠나가는 선수들이 한둘이 아니다.
그런 바닥이니까.
“오이오이.”
“뭔데.”
거실로 나오니 오랜만에 만나는 여동생이 누워있다.
배를 벅벅 긁고 있는 모양이 영 마뜩찮아서 김예성은 고개를 돌렸다.
“야. 김예성.”
“왜.”
“나 건신 소개 좀.”
“너 게임 안 보잖아.”
“건소! 건소! 건소! 건소!”
“무슨 건소야. 네 방 청소나 해.”
“스포츠 선수랑 연예인이랑 잘 어울리는 거 모르냐?”
“말하는 거 보니 안 되겠다.”
“오.빠.제.발.”
김예성의 연년생 여동생인 김예린은 연기자다.
예능 따위에 출연하지는 않지만 나름 아역 시절부터 차분하게 플모를 쌓아온, 제법 인지도 있는 연기파 배우.
“싫어.”
“용돈 줄까?”
“필요 없어. 나도 돈 많아.”
“힝. 까비.”
주변에는 비밀이었다.
김예성의 어머니인 고 여사는 코스메틱 사업에까지 손을 뻗은 꽤 유명한 패션 디자이너고.
아버지는 유명한 상을 탄 세계적인 사진사라는 것까지.
그는 예술가 집안에 비죽 튀어나온 돌이긴 했지만, 편견 없는 가족의 지원 하에 탄탄대로를 밟아 온 타입이었다.
“진짜 안돼? 진짜.. 아니면 세자 오빠?”
김예린이 양 볼에 손을 가져다 대며 손끝을 톡톡 두드렸다.
화려한 미인상은 아니었지만 모델처럼 맑고 훤칠한 스타일이 보기 좋다.
“와..”
하지만 아무리 예쁜 표정을 지어봤자 김예성에게는 혈육.
예쁜 척하는 꼴을 보니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진다.
“네 키가 더 클 텐데.”
“뭐 어때? 플랫 신고 안고 다니면 되지. 우리 지운이 오빠 씩씩한 콩알 미친 졸귀탱.”
김예성에게 문득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혹시 클래스 형은 어때.”
“누구?”
“은호 형.”
“누구?”
“...”
김예성은 고개를 저었다.
어쩐지 불안하던 마음이 조금은 나아진 것 같았다.
아니지.
권건이 말한 정체불명의 연상의 여인 이야기가 생각난다.
수상한 사람보다는 확실한 우리집 똥덩어리가 낫잖아?
그리고 권건에게 이 웬수를 소개시켜주고..
혹시, 진짜 혹시라도 잘되면?
태조.. 왕건?
혈연.. 동맹?
나쁘지.. 않을지도..?
#
곽지운의 집은 떠들썩했다.
일가친척이 모두 모이는 날이었다.
“아! 그거 틀지 말라고!”
“와, 저거 막타 치겠다고 들어가는 거 보소.”
“웜마. 진짜 무빙 소름 돋는다. 와. 뒤지뿟네.”
“형, 형! 저렇게 뒤지면 팀원들이 욕 안 해?”
“내가 10년만 젊었어도! 저거보다 잘할 자신 있는데!”
큰엄마, 큰아빠, 작은엄마, 작은 아빠, 이모, 삼촌, 사촌 형과 누나들, 그리고 조카들까지.
시대를 역행하는 거대한 가족은 팔도로 흩어져 살았기에 명절도 아닌 지금 한 곳에 모이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모두 선뜻 한 자리에 모였다.
“와. 이즈 저렇게 하는 거 아닌데.”
“아니 저기서 왜! 앞 비전을!”
곽지운을 축하하기 위해서였다.
“야, 여기 예능 맛집이네! 지운아! 지운아! 어디 갔니! 지운아!”
무려 LKL 서머부터 월챔까지 다시보기로.
“세자야! 세자야! 우리 집 세자야! 왕자마마!”
“아씨! 아이디로 부르지 말라고!”
“세자야, 거 감 좀 깎아 와라!”
“아니, 삼촌! 이거 그냥 감이 아니라 홍시잖아요!”
“홍시? 홍시는 못까? 요즘 애들은 홍시를 껍질째 먹나?”
“그런가벼!”
웃음이 터진다.
곽지운 입장에서는 민망한 일이었다.
모든 가족이 나를 아이디로 부르고.
내 플레이를 보면서 부관참시?
아, 이건 좀.
“비 전하, 우리 세자 저하의 태몽은 뭐였나요?”
곽지운 덕분에 왕과 왕비가 된 부모님은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우리 자기가. 웬 보라색 여자가 갑자기 날아와서 품에 딱 안겼다잖아! 막 사방으로 팡팡팡 폭죽을 쏘면서!”
엄마가 꺄르르 웃으며 아빠의 등을 마구 때린다.
“그땐 영락없이 딸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아들이네!”
“그래서 키가 아담한가 봐!”
“아빠! 아, 쫌!”
“그래그래. 지금 생각해보면 보라색 여자는 키이사였던거지!”
“진짜 맞아? 그때 키이사가 있긴 했어? 그냥 여자 꿈 아니고?”
“하하하! 매형.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자고. 하하하하!”
“아, 아파! 그만 때려! 으하하하하하!”
와르르, 또다시 웃음이 터진다.
그전까지는 살얼음판을 걷는 듯 불안했던 어린 조카를 바라보던 가족들은 곽지운을 실컷 놀릴 수 있어서 행복했다.
게임 이야기보다는 다른 이야기를 하기 바빴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예전에도 자랑스러운 조카이자 동생, 형인 건 같았지만.
이제 단숨에 세자라는 선수명을 알아듣는 사람들이 많이 늘었고 그건 가족의 자랑거리였다.
“지우니 오빠. 요기 싸인 좀.”
“싸인? 그래. 좋아. 누가 싸인 받아달래? 반 친구들? 학교에서도 LKL이 인기야?”
“아닝. 우리 선생님. 싸인 받아주면 숙제 하나 줄여주신대.”
“아..”
“형, 나는 형 편이야. 다음에 나랑 같이 LOS 하자. 형이 서폿해.”
“좋아. 너 랭크가 어딘데?”
“나 플레. 이즈 장인.”
“엉? 생각보다 높네? LOS가.. 초등학생도 할 수 있던가..? 너 지금 나이가..”
“우리 동년배들 다 한다. 다시는 초등학생을 무시하지 마라.”
“미안.”
한참 사촌들에게 시달린 뒤.
이제 경기 영상을 배경으로 깔아두고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떠는 가족들을 바라보며 묘한 감정을 느꼈다.
어쩌면 자기가 바라던 것이 이런 환경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
LOS가 세계적이지 못해서 그런 게 아니라, 내가 뛰어나지 못해서..
“지운아.”
옆으로 막내 삼촌이 털썩 앉는다.
이제 막 사십대로 접어든 나이 차이가 적은 삼촌이다.
어렸을 적 곽지운을 많이 돌봐줬던 큰형과도 같은 사람.
곽지운도 LOS를 처음 접할 때 삼촌과 한참 수다를 떨곤 했다.
그리고 곽지운이 프로게이머가 되겠다고 했을 때, 부모님을 설득해 준 고마운 사람.
“권건 선수는 FWX에 남는대?”
“그건 아직.”
“야. 건신 빠지면 너 완전 빙다리 핫바지다.”
“그건 맞아.”
“어씨. 그걸 니가 인정하면 내가 너무 나쁜 사람 되는 거 아니냐?”
두 사람은 어렸을 때처럼 웃었다.
“프로 생활 재밌냐?”
“응.”
“그럼 됐다. 니가 좋아하는 일을 해.”
“고마워, 삼촌.”
곽지운은 배부르게 웃었다.
가족들의 웃음소리는 전보다 훨씬 소란스러웠고, 삼촌의 손길은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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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우리 가족을 위해!”
최은호는 당당하게 외쳤다.
“제가 요리했습니다!”
김치볶음밥이었다.
그럴싸한 비주얼에 다들 환호했다.
“은호야, 고맙다.”
“우리 아들이 철이 다 들었네. 예전엔 흙수저니 뭐니..”
“아잇..! 그런 이야기 그만하시고.”
“그래, 그래. 잘 먹을게.”
그리고 그렇게 한술 뜬 가족들은 모두 웃으며 숟가락을 내려놨다.
“음..!”
“몹시.. 건강한 맛이네.”
“그쵸? 제가 여기에 말린 간도 썰어 넣었어요. 철분을..”
“그리고 뭐가 들어갔니?”
“간장에는 365일 면역을 지켜주는 아연 시럽과..”
부모님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잘.. 컸다고 생각했는데.. 미각에는 문제가 있었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하지만 최은호의 시선은 열 살에 가까운 나이 차이가 나는 형에게 붙어있었다.
집을 반지하에서 아파트로 올려놓은 사람.
그게 형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다리가 불편했지만.
이를 이겨내고 외국계 대기업에서 팀장 직함을 달고 어마어마한 인센티브를 받아 가며 최은호를 작아지게 했던 존재였다.
생각보다 돈이 많이 드는 프로게이머 과정을 위해, 무거운 몸을 이끌고 해외 지부를 돌며 최은호의 뒷바라지를 하기도 했다.
부모님에게는 죄송하지만 사업이 크게 망한 뒤 길바닥에 주저앉았던 이 집을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최은성이었고.
그는 최은호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열심히 산 집안의 기둥이었다.
“흠.”
항상 게임 따위는 때려치우고 좋은 대학에 가라고 하던 형.
지속성 있는 일을 하라고 했던 형.
최은호는 합숙할 때 가장 좋았던 점이 형과 떨어져 있었다는 점이었다.
게임은 하나도 모르면서 싫은 말만 하는 최은성이 밉기도 하고, 너무 잘 나가는 형을 보면서 분하기도 했으니까.
자기 몸이 불편한데도 그걸 노력으로 이겨내고 성공한 사람에게는 어떤 핑계나 변명도 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은호는 형에 대한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
“만드느라 고생했고..”
최은성은 고개를 저었다.
“가족들에게 잘하는 걸 보니 네가 거기서 게임만 배워온 건 아닌 것 같네. 수고했다.”
하지만 이제.
최은호는 형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재계약한 거 축하해.”
이유찬은 가족에서 팀을 배웠지만.
최은호는 팀에서 가족이 어떤 존재인지 배웠다.
“그리고 이거, 할머님께는.. 드리지 마라.”
형은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최은호가 봤을 때, 형은 틀림없이.
틀림없이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