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디딤돌
“하지만 상황이 그리 녹록지만은 않습니다. 결과적으로, 지금 FWX는 쌍둥이가 하나 남았고..”
마른침이 넘어간다.
“드래이븐이 끝내 킬을 가져갔고, 조금 전 싸움에서 경기 자체가 크게 기울면서..”
“사실상 승부의 결과는 정해진 것과 다를 바 없는..”
모두가 결승이 곧 끝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한번 막아냈다고 해서 경기가 바로 뒤집어지는 건 아니다.
트릭스터가 회군하지 않고 바로 경기를 끝내려고 고집을 부렸다면 가능성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평정심을 잃지 않은 트릭스터는.
일보 후퇴 후 더 높은 고지에 자리를 잡고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
그저 우리에겐 이 무대와 작별 인사를 해야 할 약간의 시간과.
다음에 이곳을 오를 때 무엇이 필요할지, 되짚어볼 만한 주어졌을 뿐이다.
그리고 그때.
“탑, 너..!”
습관적으로 탑을 흘긋 바라본 김예성이 목소리를 높였다.
“코피.. 나잖아!”
“코피?”
“퍼즈! 퍼즈! 여기, 심판님! 의료진 부탁드립니다!”
긴장감이 넘치는 순간 다시 한번 퍼즈.
의료진이 출동하고.
객석이 술렁거린다.
의료진은 이유찬의 헤드폰을 벗기려 했지만 이유찬은 필사적으로 버둥거렸다.
오히려 나를 비롯한 나머지 선수들만 헤드폰을 반쯤 벗었다.
환자의 의사를 존중하는 훌륭한 의료진은 마이크의 위치만 조절한 채 이유찬의 고개를 들어 응급처치에 들어갔다.
잠시 고개를 들어 코에 거즈 따위를 넣고 있던 이유찬은 허공을 바라봤다.
퍼즈 원인이 매우 직관적이었기에.
관중은 퍼즈에 대해 화를 내기보다는 응원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외치고 있었다.
아마 따뜻한 말인 것 같다.
의료진은 곧 이유찬에게 고개를 숙이게 한 뒤 우리에게 협조를 요청했다.
“혹시 선수님께서 아스피린 계열 약을 드셨어요?”
“아뇨, 아뇨, 아무것도 안 먹었어요. 응. 맞지? 네. 맞대요.”
“아.. 출혈이 생각보다 심해서, 코치 박스에 가서 자세한 정보 요청하겠습니다. 얼음도 좀 부탁드립니다.”
의료진 중 한 사람이 사라지고.
“진짜 깜짝 놀랐다.”
“나도. 얘 완전 건강해서 코피 한 번도 나본 적 없다며.”
“흥분했나? 긴장했나? 무리했나?”
“괜찮을 거야..”
불안의 무게에 눌려 고개 숙인 모두가 한마디씩 던지던 그때.
당장 남아있는 의료진이 곁에서 의자를 잡아주고, 심판진이 옆에 서 있는 상태에서.
이유찬은 정말 느닷없이.
“나, 아빠가 없어.”
말했다.
“어?”
“아주 어렸을 때였어.”
“무슨 소리야? 내가 헤드폰을 제대로 안 껴서 잘못 들었나?”
“내가 기억하기로, 사람이 아주 많은 곳이었어. 아마 이런 경기장.”
이유찬은 멋대로 지껄였다.
처치를 위해 고개를 숙이고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아빠는 나를 안아주셨어. 그리고 큰 사고가 있었어.”
“뭐, 무슨, 무, 무슨, 그, 심판님, 혹시 그. 마이크 녹음을 잠깐 끄거나.. 아니..”
곽지운은 갑자기 튀어나온 소식에 우왕좌왕했다.
퍼즈 시간 동안 경기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는 것은 금지지만 사적인 이야기를 하면 안 된다는 룰은 없다.
오히려 식사 메뉴 따위의 사적인 이야기를 하는 시간이 맞다.
심판 역시 당황했지만 경기 룰을 어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 보이스가 객석과 방송, 캐스터 석에 나가지는 않아도 경기 관계자들에게는 전달되고 있을 게 틀림없었지만.
“엄마는 많이 아프셨고, 아주 힘들어하셨어. 아빠가 없어서 더.”
이유찬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내가 어렸을 적부터 누나가 돈을 열심히 벌었어. 누나는 해외에 있어서 자주 만날 수가 없어. 그래도 다행히 FWX에 소속되고 나서는 내가 가장이 됐어.”
“아.. 그래서 누나 나이를.. 잘 몰랐.. 아.. 나는.. 나는.. 유찬이 너 완전.. 사랑받고 큰 줄.. 알았는데..”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다고 생각했던 부끄러운 시절을 거친 최은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다.
“예전에는 내가 아빠 대신 없어졌어야 하는 게 맞지 않았을까 생각도 많이 했는데.”
내가 김예성을 바라보자 김예성이 손사래를 친다.
“아니, 아니, 이 정도로 많이 알고 있었던 건 아니었어.. 정말.. 그냥.. 돌아가셨다는 것만..”
선수들은 선수이기 전에 사람이다.
길을 오가는 사람들이 각자의 사연을 가지고 있듯.
모두 자신의 인생사를 걸어왔던 십 대 후반과 이십 대 초중반의 청년들.
갑자기 바닥으로 피가 투두둑, 더 떨어지기 시작한다.
“그럼, 그럼.. PTSD 같은 게 있었던 거야? 그래서 긴장했던 거야? 그러면 나오지 말았어야지!”
멀리 앉은 곽지운은 당장이라도 이유찬을 토닥여야 한다는 표정으로 반쯤 몸을 일으켰지만.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직 경기는 끝나지 않았다.
반대편에서도 피가 나는 것을 확인한 의료진이 황급히 이유찬의 고개를 들었다.
“아니? 나 그런 성격 아니야. 피티에스드? 그게 뭐야.”
의외로 고개가 들린 이유찬은 울고 있거나 슬픈 표정이 아니었다.
“그런 복잡한 생각을 해서 뭐해. 나는 나고 지금 여기서 숨 쉬는데.”
이유찬은 웃고 있었다.
“그냥 미안했어. 막상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면서 이 속에 서 있는 나 스스로가 너무 멋있는데. 얼굴도 잘 기억이 안 나는 우리 아빠한테 이래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했어. 함성이 들릴 때마다 너무 좋고 행복한 나 자신이 두려웠어.”
얼음이 왔다.
“근데, 지금은 아니야. 가족이라고 말해줬잖아.”
이유찬이 고개를 들어 나를 봤고.
“나 혼자서 다 하지 않아도 된다고. 잘했다고, 자랑스럽다고.”
곧.
커다란 얼음주머니가 이유찬의 얼굴을 가렸다.
“내 보물 1호, 가족. 우리 엄마, 누나..”
하지만 목소리는 보이스를 공유하는 팀원에게 선명히 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팀 FWX. 감독님, 코치님. 모두 다, 내 가족. 내가 있는 여기는 무서운 장소가 아니라, 가족이 있는 곳이니까.”
그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우리는 트릭스터와 싸우고 있었지만.
이유찬은 그것보다 더 거대한 자신의 과거와 싸워 이겼다.
.
그날은 비가 왔다.
따당, 따당.
돌아가는 길, 차량 루프를 빗방울이 거세게 때리는 소리가 차 안의 모든 아우성을 묻었다.
우리는 뭉쳤다.
비가 늦더위를 완전히 물리고.
완벽하게 새로운 계절의 디딤돌이 되는 날이었다.
겨울이 왔다.
그리고 곧.
봄이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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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KL) ‘딱 한 대 차이.., 넥서스 체력 9’ 치열하고 아슬아슬했던 레전드 결승전! ]
[ 트릭스터의 화려한 와이어 투 와이어 우승! ]
[ 기울어진 경기에도 ‘포기하지 않는 FWX의 투혼’.. 팬들 눈물바다 ]
[ (사진) “아나운서 누나, 울지 마요” ]
[ ‘8989’ 맞아? 2위로. 점차 불이 붙기 시작하는 “FWX”의 가능성, 신화의 시작 ]
[ 우승 직후 FWX 선수들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는 고수호(Gogumi), 이유는? ]
[ (믿거나 말거나 겜로그) 직원이 귀띔해준 두 팀의 물 밑 전쟁 이야기와 비밀스러운 사연? ]
[ 트릭스터가 FWX 모 선수를 흔들어놓으려는 “특별한 작전”을 지시했다? ]
[ 트릭스터 감독 이길준, “사실무근. 원래 챔피언에게는 잡음이 따라오기 마련. 신경 쓰지 않는다. 누가 뭐래도 결국 우린 최강.” ]
[ FWX 감독 박진현(PerBe), “이 세계는 승패로만 말한다. 무슨 일이 있었건, 무슨 사연이 있었건. 우리의 패배를 인정한다. 이번에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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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승전이 끝났다고 해도.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바로 이어지는 월챔 준비.
[ League Of Summoners World Championship 대표 선발전 ]
[ 서머 1위 트릭스터 1번 시드(그룹 스테이지), 잔여 팀 중 챔피언십 포인트 1위 서울 빅스 2번 시드(그룹 스테이지) 출전권 즉시 확보 ]
[ 더블 엘리미네이션 토너먼트 방식.. 팀 포인트 순서는 광주 미라쥬, 대전 FWX, 대구 유니버스, 부산 호넷 (*출전권 즉시 확보팀 제외) ]
[ 3시드 대전 FWX(그룹 스테이지), 최종전 끝에 4시드 대구 유니버스(플레이 인 스테이지) 확정 ]
FWX는 달라진 모습이었다.
이전까지 어딘가 조금 엉성했던 모습과 달리.
마치 뭔가 새로운 깨달음을 얻은 팀처럼.
큰 무대의 경험과 그만큼 커다랬던 충격은 선수들을 담금질했다.
선수들은 부쩍 말수가 줄었지만 말을 하지 않아도 통하는 것들이 있었다.
[ FWX, 월챔 최초 진출! ]
[ 5년 만에 한국에서 단독 개최되는 “월챔”, 초호화 해설진 출격! ]
[ LOS, 월드 챔피언십 챔피언 및 동료 스킨 판매 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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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LOS 파크, 플레이 인 스테이지 시작 ]
[ 한국 랭크 게임에서 부적절한 언행을 보인 12명에게 벌금 3,000달러 부과, 4개 지역의 선수 및 코칭 스태프 ]
[ 쏟아져 들어오는 프로 선수 중 부동의 한국 랭킹 1위는? “말해 뭐해” ]
[ 게임사가 선정하는 “올해의 기대 선수 20인”에 FWX 권건과 트릭스터 오드(이상하)등 6명의 선수가 이름을 올려.. ]
[ 유럽 갔다 돌아온 서른살의 탑 라이너, 일본 팀을 그룹 스테이지까지 올리다! ]
[ 대구 유니버스 그룹 스테이지 진출! 한국 4개 팀 모두 “준비 완료” ]
[ 플레이 인 스테이지 종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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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룹 스테이지 시작 ]
[ A조 대구 유니버스, B조 대전 FWX, C조 서울 빅스, D조 인천 트릭스터 ]
FWX는 또다시 부담스러운 일정을 마주했다.
[ 비교적 쉬운 A조, D조. 그리고 불지옥 대진의 B조와 C조.. 향방은? ]
ㄴ 믿는다 트릭스터ㅋㅋㅋㅋ
ㄴㄴ 개꿀이네ㅋㅋㅋ
ㄴㄴ 일본에 유럽ㅋㅋㅋ 중국 제일 약팀ㅋㅋㅋ 북ㅋㅋ밐ㅋㅋ 웃음벨ㅋㅋㅋ
ㄴㄴ 그나마 유럽만 좀 쎄네ㅋㅋ 유럽이랑 같이 올라가면 되겠다ㅋㅋ
[ 지옥의 B조, “이 그룹은 모두가 우승 후보” ]
ㄴ FWX.. 대진.. 이 할미는 너네가 월챔 밟는 것만 봐도 행복해..
ㄴ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기다리다 늙었어요 땡벌땡벌
ㄴㄴ 내려놓자 우리
ㄴㄴ 존나 다시 봐도 신기하네 내가 이 시간에 왜 잠도 안 자고 게임을 보고 있지?
ㄴㄴ 한국 경기라 시차는 없습니다만?
ㄴㄴ 말이 그렇다는 거지 십ㅋㅋ
하지만 FWX와 우호적인 팀의 대표 주자인 호넷.
“얘네 무슨 일 있었던 거야?”
호넷은 어딘가 달라진 FWX의 기세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왜.. 왜 이렇게 스크림을 빡세게 해?”
“이게 월챔 진출 팀이다 이건가?”
“어떻게 이렇게 빨리 늘어? 얘 봤어? 탑 미친 사람 같은데..”
“우디야, 너 이제 차니 못 이기겠다. 맛세이 절대 금지다.”
“형들.. 나는 장점이 없어요?”
팀에서 비교적 신인인 탑 박태인이지만.
그는 1군 벤치 생활까지 합치면 이유찬을 뛰어넘는다.
플레이 스타일 역시 이유찬과 비슷하기로 유명했다.
이유찬이 처음 콜업되었을 때, 잠깐이지만 박태인의 하위 호환이라는 말도 있었다.
그래서 월등하게 추월당한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다.
“아냐. 나는 네 장점을 잔뜩 알고 있어..”
미드 안우진이 머리에 손을 짚고 고민했다.
“뭔데요.”
“그.. 지금은 잠깐 생각이 안 나지만..”
“?”
“아무튼 알고 있어.”
“차라리 닥치고 있으면 안 돼요, 형?”
“미안.”
얼마 전까지 비벼볼 만하다고 생각했던 상대의 새로운 모습에 몸이 굳어오는 것 같았다.
긴장을 풀기 위해서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우리 얘네 이겨본 적 있는 거 맞아..? 뭐 좋은 거 먹었나?”
“흑마늘 먹는다던데?”
“개소리 노.”
“아니 근데, 지금 진짜 무슨.. 무슨.. 스크림을.. 리플레이도 안하고.. 이렇게.. 매번 마지막 싸움처럼 하냐? 얘네 정신력 남아돌아?”
훨씬 더 일정이 넉넉했던 호넷 선수들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의 집중력.
“모르겠다. 근데 일단 이번 월챔 잘해서 시드권 넉넉하게 가져오면 좋겠긴 한데..”
한숨만 나온다.
“하. 이거.. 내년에 우리 어떡하지? FWX랑 경기하다가 설사 지릴 것 같은데.”
“그럼 일단 우리 정글 민성이 형이랑 권건이랑 바꾸자. 걔 좀 있으면 계약 끝나지?”
“야. 나 존나 섭섭해지려고 해.”
“그럴 리가 있어, 민성아? 우리가 어떻게 널 버려.”
안우진은 말끔한 얼굴로 미소 지었다.
“역시 우진이 형.”
“니가 가성비가 얼마나 좋은데.”
“우리 팀 외모 유지하느라 돈 없는 부분.”
“근데 권건이 외모도 더 잘생김.”
“진짜 존나 밉다.”
오래 쉬지도 않고 다음 연습이 이어진다.
호넷 선수들은 알지 못했지만.
어느새 주변을 삼켜가며 덩치를 불리는 불꽃은 그들의 가슴 속에 두려움의 씨앗을 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