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만조
고수호는 바다를 보러 갔던 기억이 있다.
파도는 잔잔했고, 바람은 짠맛이 나지만 선선했다.
하지만 밤이 되자.
하얗게 부서지던 파랑(波浪)은 검게 물들었고.
바다에서 육지를 향해 불어오는 바람은 모래와 뒤섞여 따가웠다.
밀물을 맞아 성큼 다가온 물이 두려웠다.
그래.
꼭 지금처럼..
“F-W-X!”
해안선을 넘고.
방파제를 넘어.
여전히 멈추지 않고 언덕 위로 들이치는 검은 물결.
셰나의 안개.
“아, 이런, 젠.. 아뿔싸.. 또.. 이런.. 아, 이래서 버티는 구도 들어가는 게 피곤한데..”
“와아아아아아아안벽하게! 시야 측면에서 쏟아져 들어옵니다!”
- 뭐야????
- 지금 점멸 써서 벽 넘은 거야???????
그리고 그 안에 있던 망령은..
- 원딜이??????????????????
- 지금은 원딜이 아니라 야쓰오입니다만ww
- 원딜이랑 서폿이랑 정글 셋이서 플로 벽 넘음
- 씨발 그건 진짜 미친 새끼들 아니야?
“야아아아아아아쓰으으으오오오오오오오! 세자, 세자아아아악! 미쳤어요! 살아있는 바람 그 자체!”
미친 칼잡이와의 뜻밖의 조우에 소스라치게 놀란 고수호가 칼같이 점멸 반응을 했지만 정면에서는 이미 다른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뺏은 아자르 궁으로 이니시를 걸 것이라는 1안.
뽀비가 먼저 들어오면서 혼전 양상을 만들 것이라는 2안.
컨디션 상 가능성은 작지만, 바론으로 향하는 길목을 메가 냐르가 틀어막을 것이라는 3안.
이 모든 예측을 뒤집고 가장 먼저 돌입한 것은.
“지금, 지금! 야쓰오와 셰나, 그리고 뽀비까지 셋 다 점멸 써서 넘어간 거거든요?!”
“이런 미친 투자가 어디 있어요? 예, 여기 있습니다!”
한명이라면 예상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두 명이라면, 그래.
이것까지도 예상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 명이 뒤에서 나타날 줄은.
아예 상상하지 못한 트릭스터는 틀어막히고 말았다.
“FWX가 화가 많이 났어요. 너어어어무너무 화가 많이 났어요!
앞에는 바다.
뒤에는 파도.
FWX, 확신의 진영.
“아.”
트릭스터 누군가 단말마와 비슷한 소리를 내뱉은 순간.
어느새 모두 한 자리로 뭉쳐버린 트릭스터는.
“쭈우우우우우욱 따라 들어온 라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온의 황제의 진여어어어어엉!”
“뜹니다아아아아아악!”
“소리에게에에에에엑!”
“돈!”
고수호가 겪었던 고통을 모두 함께 나눌 수밖에 없었다.
- 아 시바아아아ㅏㅏ아아ㅏ아ㅏ
- 야~~~~~~~~~~~호~~~~~~~~~~~
- 닥쳐
- 경치~~~~~~~~~~~좋~~~~~~~~다~~~~~~~~~~
- 제발
“아직 허공에 붙들려있어요!”
파도가 바다를 향해 다시 내달린다.
빨려 들어간다.
“이거, 이거, 이제, 순간, 순간, 순간, 마지막으로 궈어어어어어어어어언거어어어어어어어어언! 망치이이이이!”
“나가신다!”
“다시 한번 제자리 허공 점프! 완벽한 망치 컨트롤!”
- 한명 정도는 집으로 돌려보내 줘도 괜찮잖아..
- 개같은 놈아..
- 숙련된 셰르파 권건이 안내하겠습니다~
- 고객님 어떻게 저희가 준비한 협곡 패러글라이딩이 마음에 드세요?
- 네.. 좋은데 이제 내려가고 싶어요.. 제발
“이거.. 이거.. 내려온다고 해서..!”
“내려오는 순간..!”
그리고.
거대하게 합쳐진 파도는.
“차아아아아아아아아아니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 냐아아아아아르!”
“흐이이이이이이이익! 벽에! 벽에! 아자르 벽이! 아자르 궁은 벽 판정이거든요!”
방파제에 부딪히면서 거센 포말로 부서진다.
- 으아아아아ㅏ아ㅏ아!!!!!!!!이거야!!!!!!!!!!!!!!!!!1
- 시발 방금 딛유 시 댓?
- 키야 지르박으로다가 들이박네
- 지르박이 머에여?
- 흠 흠흠
- 흠 난 몰라 흠
“정확하게, 힘차게에에엑! 모조리 기절하면서!”
“트릭스터가, 트릭스터가, 정말로, 정말로!”
“무슨 키 하나도 못 눌러보고, 못 눌러보고!”
“여기서, 여기서, 여기서어어어어어어어어억!”
“고양이를 끝으로! 전멸! 합니다아아아아아아아아악! 갱플 궁은 축포일 뿐입니다!”
“완벽한 한타, 완벽한 콤비네이션, 완벽한 배분! 상상과 전혀 다른 순서로 시선을 끌면서 결국! FWX가!”
“전투를 선언한 FWX가, 전투의 종결마저 선언하고야 맙니다!”
만조(滿潮).
끝까지 다가온 밀물이.
트릭스터를 집어삼켰다.
“...”
“...”
트릭스터는 순식간에 표정이 굳어버린 채로 양손을 마우스에서 뗐다.
시간이 길게 끌린 탓에 재생성 시간은 한참 멀었다.
이 말은.
넥서스가 깨지는 꼴을 눈으로 봐야 한다는 뜻이다.
“결국! 아까 권건, 세자, 클래스 선수가 과감하게 돌아들어 가면서..”
“트릭스터 선수들은 직선으로 진영을..”
“하지만 결과적으로 트윗치가 오히려 적의 주둥아리 쪽으로 점멸 반응을 하게 된 결과..”
“아니 그러니까 바텀이..”
- 비오스 형 바텀만 잘못한 게 아니라고ㅠㅠㅠㅠㅠ
- 지금 굽는 방향 잘못됐어 형 ㅠㅠㅠㅠ
- 존나 빡치는 꼼짝마 콤보네 그냥 우리 팀 미드를 밴할걸 시발 퓨처새기ㅠㅠㅠㅠ
- 눈맵한거 아니냐고 시바류
- 뭐 눈이 어디 달려서 눈맵을 함ㅋㅋㅋㅋㅋㅋ 지금이 먼 용산 전쟁기념관 시절인 줄 아나ㅋㅋㅋ
- 그냥 존나 깔끔하게 우리가 졌는데..?
- 테마파크 구경 잘하셨나요?^^ 또 이용 바랍니다
차가운 침묵이 흐르지만 뜨거운 환호가 울리는 소리가 들린다.
트릭스터 선수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아.. 이딴 점멸 포지셔닝이 어딨어.. 아.. 이건 원딜의 수치다 진짜.. 지운이 형.. 유사 원딜 배신자 진짜..”
고수호는 억울한 표정이었다.
“아씨. 이럴 거면 그냥 나도 AP 트윗치 할걸. 약병이라도 던지고 뒤졌으면 딜이라도 했겠다.”
“야..”
철없는 말을 뱉은 원딜이 살짝 눈치를 본다.
자려고 누우면 다시 생각날 것처럼 몰살당했다.
이런 타이밍에는 어떤 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의외로 나붓한 대답이었다.
“천천히 하자.”
탑, 이상하.
“우리가 유리해.”
“상하 형, 혹시 숫자 셀 줄 몰라? 유리? 이거 코시 아니야. 7판 4선승제 아니라고.”
오히려 그 말에 고수호가 다시 불만을 토로했다.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정글러 김은검은 어깨를 으쓱했다.
지금 이 상황 자체는 고수호의 탓이 아니었지만, 사실 바텀이 1레벨 싸움에 지지 않았다면 이야기는 달랐을 거다.
고수호는 원래 저렇다.
약간 응석받이 타입.
아니, 원딜들이 원래 다 그런가?
“알아.”
이상하가 태연히 대답하자.
“에휴. 미안해. 내가.. 너무 못했어.. 다들 진짜 미안.”
고수호는 금세 사과했다.
“아니야. 다음 판 집중하면 돼.”
그래도 밸런스가 잘 맞는 팀이다.
FWX는 이미 훌쩍 밀고 들어왔다.
이번 세트는 곧 끝날 것이다.
이상하는 심호흡했다.
“근데 얘들아. 내가 말했지.”
이상하는 ‘명가’ 스톰 출신 선수였으며, 트릭스터에서는 해설진피셜 LKL 최고의 탑.
사실 해설진은 상위권 팀 선수들에게 다양한 별명을 붙여서라도 최고로 만든다.
라인전 최강 누구, 뚫리지 않는 방패 누구, 1인 군단, 솔킬의 제왕, 대황xx, 킹x, 갓x.
그러니 전 스플릿 우승팀 탑이 최고가 아니라는 것도 웃긴 말이다.
“내가 이겨주겠다고.”
그중에서도 이상하는 여러 가지 면에서 ‘최고참’이자 ‘최고’의 선수.
높은 방어력을 기반으로 탄탄한 라인전을 이끌어가며 각이 보인다면 솔킬로 스포트라이트를 훔치는 괴물.
스물넷의 나이, 팀의 정신적 지주.
“리그는..”
그리고.
“게임으로만 하는 게 아니거든.”
파고들 구멍은 거침없이 파고드는 승리를 향한 집념.
“있어 봐.”
전 세트, 코치 박스로 돌아가던 길에 우연히 본 광경이 눈앞을 스친다.
“어차피.. 얘네 못이겨.”
리그에서 오래 구른 탑, 이상하는.
“결국, 결국에는 말이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
“이-유-찬!”
“진짜 잘했어!”
“거봐! 한다면 하잖아! 형은 니가 정말 자랑스럽다.”
“네가 시선 다 끌어준 거야! 진짜 덕분에 이긴 거야!”
코치 박스에 돌아온 우리는 탑에게 아낌없이 칭찬을 퍼부었다.
“잘했어.”
이유찬은 힘들어 보였지만, 그래도 아까보다는 훨씬 나아 보였다.
그리고 심지어 작은 목소리로 나에게 말을 걸어오기까지 했다.
“근데 상대 탑이 잘 안 읽혀..”
그거야 이상하가 잘하니까 그렇지.
아무리 네가 인간 복사기라도 실력을 날로 먹으려고 하면 쓰나.
이상하는 정말 훌륭한 탑 라이너다.
그의 유일한 단점은 변화를 싫어한다는 것.
챔피언 이야기가 아니다.
그는 로스터와 환경 변화에 민감하며 장비 강박증도 가지고 있다.
트릭스터에 있었을 때, 이 탑은 내게 매우 큰 도움이 됐지만.
반대로 가장 발목을 잡는 타입이기도 했다.
트릭스터가 내수용인 가장 큰 이유가 저거거든.
홈에서 무쌍 특성.
“괜찮아.”
나는 바나나를 깠다.
바나나는 당을 채워주는 데에 도움이 되기에 항상 구비되어있다.
“적당히 참고만 해.”
“근데..”
그리고 바나나는 좋은 단백질원이자.
손 떨림을 막아주는 철분을 가진 완벽한 과일이다.
“먹어라.”
나는 이유찬의 입에 바나나를 쑤셔 넣었다.
“나도.”
“?”
“나도 바나나 좀.”
“까먹어.”
내가 바나나를 건네자 김예성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
“야.. 유찬아.. 너 지금 극찬받은 거야.. 알지..”
“쟤 이런 거 안 하잖아.. 형들이 말하는 거 딱 들어라.. 너 지금 그 바나나..”
“다들 드세요. 안 넘어가더라도, 드세요.”
나는 모두에게 하나씩 쥐여줬다.
앉아있던 윤도형에게도 마찬가지다.
“나.. 나는 출전 안 하는데.. 나는.. 아까 반 송이 먹었는데..”
“반 송이? 반 개 아니고? 혹시 여기 관전하러 오셨어요?”
“네. 관전하러 왔는데요? 출전할까요?”
“죄송합니다. 많이 드세요.”
윤도형과 이야기하던 곽지운이 바나나를 높이 든다.
“건배! 마지막 승리를 위하여!”
이걸로?
“쟨 진짜 지치지도 않냐?”
최은호는 진이 빠진 듯 고개를 젓고.
“거, 건배..”
김예성도 마찬가지다.
“나도 건배! 건아 나 이제 배불러라는 뜻.”
“윤도형.. 진짜.. 지랄.. 하지.. 마라..”
한 경기.
한 경기만 더 잡으면 국내 우승이다.
이 시기의 나는 우승을 한 적도 있긴 하지만.
서머 중반에야 콜업되어 다른 선수들과의 합 때문에 출전 기회를 얻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그런 면에서 이 팀은 성장이 빠르다.
하지만 성장에는 성장통이 있는 법.
트릭스터의 뒤통수를 이미 두 번이나 쳤고, 보여주지 않은 카드는 없거나 실전에서 증명이 덜 된 것들.
그리고 슬슬 체력과 정신력이 떨어질 때가 왔다.
몇몇이 강한 집중의 후유증으로 두통을 호소한다.
내가 정한 올해의 목표는 결승과 월챔 무대 밟기.
그 이상의 성취를 가져오는 건 당연히 좋겠지만.
트릭스터도 가만히 있을 팀은 아니다.
#
- (사진) 3세트 끝나고 FWX 좋아하는 거 봐라ㅋ
ㄴㄹㅇ 무슨 우승이라도 한 것처럼 끌어안네;;
ㄴㄴ 차니 압사하겠다ㅋ
ㄴㄴ 왜 저래ㅋㅋㅋㅋ 지들이 우승이라도 한 것처럼 꼴 보기 싫네
ㄴㄴ 2세트 퍼즈 때 카메라에 잡혔잖아 차니 손 벌벌 떠는 거
ㄴㄴ 생새우인 줄~ 요즘 새우가 맛있어요~
ㄴㄴ 수전증 있나?
ㄴㄴ 긴장했나배~
ㄴㄴ ㅋㅋㅋㅋ 머 그냥 겜하는 건데 긴장을 함? 걍 졌을 때 핑곗거리 짜내는 거지 즙 빌드업이랑 비슷한 거임
ㄴㄴ 아직도 이런 쓰레기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군요?
ㄴㄴ 존나 연기일 수도 있음ㅋ 저러고 지는 게 더 역겨움ㅋ 우리는 노력했다 ㅇㅈㄹ
ㄴㄴ 틀린 말은 아님ㅋ
ㄴㄴ ;; 얘네 근데 지금 거의 바닥에서 기어 올라온 건데 뭔 그딴;;
ㄴㄴ 여러분들의 수.준.낮.은 디스퀄리파이드에. 질렷습니다. 춋도 디스거스팅.하니까. 방구석 키배를. 멈춰주세요.
ㄴㄴ 요샌 저런 애들 신고하면 잘 먹히더라~ 얘들아~ 세상이 많이 달라졌어~ 정신 좀 차려^^ FWX는 고소를 아주 잘하는 팀이야^^
ㄴㄴ 댓글 안다는 거 보소ㅋ
ㄴ 근데 단체로 바나나 먹는 거 무슨 일이냐?
ㄴㄴ PPL이라도 들어왔나 보지
ㄴㄴ 폴리 저 새끼 카메라 잡힐 때마다 바나나 처먹고 있던데
ㄴㄴ 졸귀네 10ㅋㅋㅋㅋㅋㅋㅋ
ㄴㄴ 바나나 건배 너무 건전;; 나 이제 폴리 걍 호감임 우리 팀 와라
ㄴㄴ 정글? 서폿?
ㄴㄴ 마스코트로
ㄴ 근데 생각보다 FWX가 잘하는데??? 승률 33%인가 그렇다며
ㄴㄴ 그러니까 이제 질 때 됐음ㅋ
ㄴㄴ 지금 FWX 카드 전부 다 바텀으로 쏠려있잖아
ㄴㄴ 바텀 막으면 어떻게 된다?
ㄴㄴ 상체 겜이나 미드 겜 잘하면 됨
ㄴㄴ 그게 트릭스터가 원하는 거임
#
4세트.
분석 데스크와 해설진이 경기를 정리하는 사이, 화면 밖에서 선수들이 자리로 돌아와 앉고 있었다.
FWX 선수들이 미처 자리에 앉아 헤드폰을 쓰기도 전, 갑자기 거대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트릭스터 선수 몇몇이 관중석을 향해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하고 있었다.
‘인사’는 꽤 길었다.
“우리도 해야 해요?”
“아니야. 그런 룰 없어. 얘들아, 어서 앉아.”
최은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지? 자기 홈이라 팬 많다고 꼽주는 건가?”
“지고 있을 때 팬들의 응원을 받아서 충전하겠다는 뜻이 아닐까?”
“그건 깍지 너나 가능한거고.. 나는 욕먹을까 봐 무서워서 눈도 못 쳐다볼 것 같은데.. 쟤네 깡 대단하다.”
박진현 감독은 심판진에게 저 행동이 허용된 것인지에 관해 물어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경기 진행에 지장이 될 정도만 아니면 괜찮다는 대답이었다.
실제로 지연될 기색이 있자 심판진은 즉시 트릭스터를 저지했다.
“유찬아.”
“괜찮아요.”
그리고 4세트.
태세 전환이 빠른 트릭스터는 오히려 레드 진영을 선택한 뒤 바텀에서 힘을 확 풀면서 상체, 특히 탑 방향으로 힘을 실었다.
탑에서 점점 기운이 올라온 이유찬이 상대를 잡아뒀지만 미드에서 중요한 타이밍에 큰 실수가 나오면서 경기는 기울었고.
굳히기 좋은 챔피언들을 가져간 트릭스터가 다시 한번 세트를 가져갔다.
트릭스터의 승, 패, 패, 승.
FWX의 패, 승, 승, 패.
팬들의 아우성 속에 승부는 원점.
두 팀은 마지막 세트만을 남겨두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