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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게이머, 그만두고 싶습니다-176화 (177/326)

176화. 컴백, 낭만

흐렸던 하늘.

일기예보에는 없었던 비가 오기 시작했다.

실내 경기장인만큼 이런 기후 변화를 알아챈 사람은 휴식 시간에 간식을 구매하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웠거나 흡연 구역을 이용하던 관중들 뿐이었지만, 이 사실을 알고도 걱정하는 사람은 없었다.

당장 눈앞에서 말도 안 되는 경기가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두 번째 세트가 끝을 맺었습니다.”

“상당히 경기 시간이 길어졌는데요. 과장 조금 보태서 퍼즈 시간과 경기 시간이 비슷한 게 아니었나 싶은 정도로 경기 자체는 아주 시원했습니다.”

경기장 구석에 준비된 분석 데스크.

휴식 시간을 맞아 자리를 이동하던 팬들이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든다.

“권건 선수의 살인 예고가 정말 현실이 되는 경기였어요.”

“와. 저도 진짜 소름이 끼쳤는데요..”

“트릭스터는 나중에 가서는 킨드가 양의 안식처를 쓰는 걸 막을 수가 없었어요.”

“그렇습니다. R키를 뽑지 않는 한 막을 수가 없었거든요. 결국 트릭스터에 CC가 부족했습니다. 아니면 방법이 한 가지 더 있는데요.”

“뭔가요?”

“쓰기 전에 죽여버리면 됩니다.”

“어우.”

“근데, 잡을 수가 없는 거예요. 약한 타이밍부터, 강한 타이밍까지. 표식을 챙기면 점점 킨드의 사거리가 달라지는데 권건 선수는 모든 장면에서 마치 수만번은 플레이한 것처럼 완벽하게 적응해서 상대와의 거리 차이를 이용했습니다.”

잠시 소름이 돋은 분석가들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저는, 진짜, 이즈 킬 먹는 장면이..”

“맞아요. 저도 그 장면을 보면서 정말 소름이 돋았어요. 그럼 오더를 비롯한 해당 장면, 함께 보시죠.”

분석 데스크 아나운서 박현아의 안내와 함께 잠시 주요 장면이 나오고.

이 시간도 평소보다 길게 배분되는 만큼, 권건의 또렷한 목소리가 방송을 탄다.

모든 것이 철저하게 계산되어있었고.

그것만큼이나 확실한 명령과 수행으로 이루어진 결과.

“어떻게 이런 레전드 장면이 결승에서 나올 수가 있죠?”

결승을 맞은 분석 데스크도 열을 올린다.

“정말 소름이 끼치는 건, 이런 선수가 불과 올해 초에는 2군에 있었다는 겁니다.”

“이렇게 재능이 있는 선수가 나타났죠? 저도 정말 오랫동안 LKL과 함께했지만, 항상 LOS판은 알 수 없네요.”

- 스톰) 권건은 가슴으로 낳은 자식이다 생각하고 FWX를 응원하고 있습니다

- 인간적으로 니넨 그럴 자격 없지ㅋㅋㅋ

- 반드시 바로 잡을 기회가 있을 것..

- 개도국에서 노가다 뛰다가 전 세계 탑클래스 격투기 선수가 되는 스토리

- 스톰이 개도국으로 보이냐??

- 아니.. 형님 혹시 위대한 응가누 모르세요?

- 개추비도 아니고 세상에 그딴 똥 같은 이름이 어딧어

“이게 킬을 많이 먹는다는 게 강해진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굉장한 부담을 짊어진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네. 한번 넘어지는 건 익스큐즈 할 수 있는데, 그다음 넘어가는 건 안 되거든요.”

“그래서 이번 경기에서는 킬을 많이 먹어 강한 타이밍을 빠르게 끌어온 원딜, 세자 선수. 그리고 표식을 두둑하게 챙긴 권건 선수, 두 사람이 서로를 밀어주고 당겨주면서..”

한참 설명이 이어지고.

“아.. 그럼, 이게 처음부터 선수들이 서로를 도와주지 못하면 훨씬 더 리스크가 크고, 실패할 수도 있는 작전이었는데. 트릭스터와의 체급의 격차를 이런 식으로 메운 건가요?”

“그렇다고 볼 수 있죠. 서로를 믿었던 것 같습니다. 특히 이번 경기에선, 지니 객원 해설님께서 조금 오버하신 부분은 있지만. 원딜이 그렇게까지 해주기가 쉽지 않거든요.”

“아군 정글이 용을 가져갈 수 있게 목숨을 반쯤 내놓고, 스펠을 사용해주고. 킬을 양보하고..”

“그리고 정글은 또 전령으로, 킬로.. 그걸 돌려주고.”

잠시 박현아의 놀란 얼굴이 카메라에 잡힌다.

트릭스터와 달리 큰 경기를 처음 맞아 떨고 있던 FWX 선수들의 모습.

하지만 정말 끈끈해 보이던 팀.

- 눈나 감동했어?

- ㅋㅋㅋㅋㅋ이제 알았구나ㅋㅋㅋㅋㅋ

- 아직 겜알못인 부분 이해바람

- 혹시 그냥 눈나 포지션이 탑인 거 아니냐? 세상을 등진 솔랭 탑

- 킹능성..있지..

“FWX가 이렇게 어깨가 넓은 팀인 줄, 그전까지는 몰랐습니다.”

그들의 플레이가 점점 더 많은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온다.

#

2승을 가져가는 것은 중요하다.

FWX가 간신히 1대1로 돌려놓은 3선승제.

여기서 한 경기를 더 이기는 쪽이 압도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선다.

“이번 세트에서는 트릭스터가 빠르게 킨드를 밴했는데요.”

“그냥 하지 말라는 거죠. 저는 그게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고 봅니다. 사실, 어떤 팀에서 특정 챔피언으로 굉장히 활약하는 모습을 보여줬을 때. 다음 세트에 그 챔피언을 다시 하는가, 마는가는 반반이라고 봐도 되거든요.”

“그렇습니다. FWX같은 경우에는 평소와 다른 경기를 준비해왔죠. 그냥 챔피언이 다르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른 건 운영 양상이죠.”

“주로 상체 쪽으로 힘을 주던 모습과 달리. 확! 틀어서 바텀이 시선을 끌고 서포터의 발을 풀어 정글러를 밀어줬거든요. 하지만 이렇게 플레이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면 트릭스터 역시 막을 만 했습니다.”

“트릭스터가 그렇게 만만한 팀이 아니거든요. 이런 플레이를 한번 보여준 이상, 사실 FWX에서 다시 킨드를 할 가능성은 낮았어요.”

“그런데도. 아예 변수를 차단하고 가겠다는,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겠다는 마음가짐이라고 볼 수 있겠죠.”

“트릭스터는..”

1, 2세트 FWX 객원 해설 강동흔이 인사를 나누고 물러간 뒤.

3, 4세트를 진행하게 되어있는 트릭스터 객원 해설이 그 자리를 메웠다.

“저희 팀이어서가.. 아니라, 굉장히 꼼꼼한.. 팀이거든요.. 자기객관화를.. 참 잘합니다..”

트릭스터의 객원 해설은 두 해 전 은퇴한 탑 라이너, 강비오.

선수명 비오스.

트릭스터의 전성기를 이끌기도 했지만 은퇴 직전에는 부진에 기여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랑을 받았던 선수다.

그는 여전히 이십 대 중반이었지만, 평소에는 나이에 비해 어른스럽고 허허로운 사람이었다.

“빅스 같은 팀이 아니거든요.. 빅스는 좀 자기..객관화가 안 되는 면이 있죠.. 우실줄, 우틀않.. 그래도 우리는 강하다, 뭐 이런 것에 매몰되고..”

나쁘게 말하자면 젊은 꼰대 중 하나이기도 했고.

게임을 할 때만큼은 성격이 180도 변하는 것으로 유명했던 선수이기도 했다.

- 아니 이 형은 또 뭐야ㅋㅋㅋㅋㅋ

- 오늘 객원 해설들 진짜 아이고 뭔 일이고ㅋㅋㅋㅋㅋㅋㅋㅋ

- 갑자기 빅스를 때린다고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빅스 어리둥절ㅋㅋㅋㅋ 의문의 1패

- 가뜩이나 탈락해서 서러운데ㅠㅜㅠㅜㅠㅜㅠㅜ

“그러면서 풀린 픽이 있었죠. 바로, 셰나.”

“정글이 성장형인것 보다는 원딜이 성장하는 게 낫다는 거거든요. 최소한 후반부에나 영향력을 끼치니까.”

“그리고.. 바텀에서는.. 충분히.. 셰나를 대처할만한.. 것들을 준비했겠죠. 당연히. 2세트에서는 우리 바텀인 수호와 민찬이가 좀 방심을 하지 않았나. 캬, 탑에서는 진짜 잘 해주고 있는데.. 바텀이.. 어휴.”

- 얘는 자기 객관화가 아니라 자기 팀 객관화를 하고 있어ㅋㅋㅋㅋ

- 결국 우리 바텀 애들이 잘 못 해서 진거다ㅋㅋㅋ

- 얘도 웰던이야? 탑으로 굽네ㅋㅋㅋㅋㅋㅋㅋㅋㅋ

“FWX에서 셰나를 가져갑니다. 이거, 트릭스터가 일부러 풀어준 것 같은 게 티가 났는데요. 근데 또 안 먹자니 아쉽고. 달콤한 경험이 있거든요. 세자 선수의 셰나 숙련도가 매우 높기도 하고요.”

“그쵸. 그리고 FWX가 수행 능력이 있다는 사실은 모든 팀이 잘 알고 있어요. 약간 너프를 당했지만 못 쓸 정도는 아니거든요. 대신 상대 픽을 견제할 필요는 있겠죠.”

FWX에서는 원딜을 견제하고, 트릭스터는 정글을 견제해가며 밴 페이즈가 끝나간다.

“이거 원딜을 안 보여주네요, 트릭스터?”

“유마를 가져갔다는 것 자체가 2세트처럼 완벽하게 공격 일변도 전술을 펼치지 않겠다는 뜻이거든요. 한타를 보고 있습니다.”

“근데 원딜 이제 밴이 많이 됐거든요?”

그리고.

“오!”

“고구미 선수가!”

“드디어어어어!”

“트릭스터가 마지막 픽으로 트윗치를!”

자주 볼 수 없는 ‘특별한 픽’에 경기장은 환호로 뒤덮인다.

2세트와 동일하게 리스크는 있지만 강력한 바텀 조합.

“오늘의 3세트를 갱플, 비예고, 아자르, 트윗치 유마 조합으로! 결정합니다!”

관객들은 이 ‘리스크’에 흥분할 수밖에 없다.

“셰나를 준 게 이런 생각이었군요! 트릭스터도 이런 면에서 굉장한 강점이 있는 팀이거든요!”

“예! 고구미 선수의 시그니처라고 하면! 선수명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게 코구모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짝짜꿍으로 손잡고 다니는 원딜 친구들을 살펴보면 트윗치나 드래이븐 같은 친구들이 있어요!”

“생존력이 떨어지더라도 확실한, 아주 확실한 딜을 뿜어낼 수 있는 챔피언!”

“오우.. 저런.. 바텀에서.. 팀 자원을.. 독점하시겠다..?”

“이거.. 예쁘게 누워있다가 셰나를 단숨에 터뜨려버리겠다는 의도가 보여요? 셰나도 누워야하긴하지만, 트윗치는 셰나보다 기상이 이릅니다!”

“일찍 일어나는 쥐가?”

“넥서스를 깨는 법!”

“같이 누웠다가 일어나보자. 일어나서 보자! 이거거든요, 지금!”

“지금 이렇게 되면 FWX가 뽑아둔 픽들! 그러니까 냐르, 뽀비, 사일이 장거리 개입력이 아주 뛰어난 챔피언들은 아닙니다”

마지막 픽을 남겨둔 FWX는 숨을 죽였다.

“이야..”

어차피 건너편까지 들리지도 않겠지만 모두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오늘 은호.. 아주 물이 올랐네?”

“이렇게 또 제가 한 건 합니다.. 이럴 줄 알았어요..”

“드디어.”

선수들은 주먹으로 입을 가리고 고심하는 척했다.

하지만 입가로 새어 나가는 웃음이 카메라에 잡히지 않을 리 없다.

“FWX가 웃고 있어요?!”

“아.. 저 이거 등줄기를 관통하는 어떤 느낌이 오는데요, 이거? 왜 웃는지 알 것 같아요!”

“설마요. 나 진짜 설마. 나도 짚이는 게 있는데, 아.. 진짜 한다고? 진짜?”

“FWX, 이 픽 데이터 아예 없거든요? LKL 리그에서 FWX는 공식적으로는 단 한 번도 꺼낸 적 없는 카드거든요?”

“물론 팀이 받쳐줘야 하는 상황에서야 꺼낼 수 있는 픽이긴 한데..”

- 뭔데

- 왜 너네만 아는 이야기하는데

- ㅅㅂ 리싱 서폿이라도 하게?

- 셰나 세라핌?

- 뭘 해도 약해 보이는데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이거어어어어어어어어! 지이이이인짜 나왔어요어어어어어어어어어억!”

“이 결승, 이 중요한, 누가, 이, 다음, 경기를, 지배할지를 결정하는, 경기에서어어어어억!”

“FWX가, 또 한번, 완전히이이이이이이이이!”

“새로운 무기를 꺼내듭니다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넓고 넓은 우주의 별들 아래 찬란하게 빛나는 최초의 과학! 우리별 1호! 야아아아아아쓰오!”

“이러면 셰나가 서폿! 야쓰오 원딜!”

- ????????????

- 오. 발사.

- 세자 이거 할 줄 알아???????????

- 서당개도 3년이면 풍월을 읊는데 쟨 5년차다ㅋㅋㅋㅋ

- 존나 상상도 못 했네;; 진짜 미친 바텀 게임으로 만들어버리냐고;;

- 선 넘지 시발 감히 트릭스터한테.. 근데 왜지? 이 설레는 기분?

- 치직.. 여기는.. 치직.. 2025.. 치직.. 지금 야쓰오가.. 치직.. 결승 정거장에.. 치직.. 도킹하는.. 모습을.. 보고.. 치직.. 있습니다..

- 치직.. 세월이.. 흘러도.. 치직.. 변하지.. 않는.. 치직.. ‘낭만’..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이거 먼데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거대한 함성이 홀을 뒤덮었다.

“야! 쓰! 오!”

“야! 쓰! 오!”

“야아아아아아쓰으으으으오오오오오! 원딜 야쓰오오오오오오! 세자아아아아!”

일순간 경기장이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차는 듯했다.

습해진 날씨 탓에 마치 구름이 생기는 것처럼 보인다.

“지금 반응이! 너무 뜨겁습니다! 물이 끓는 온도! 100도씨!”

“아아아아아아아! 이 미친 예능감까지 갖춘 사랑스러운 팀을 어떻게 하면 좋아요, 진짜아아악!”

이 세계를 등지고, 자신에게 빛날 또 다른 세상을 찾아 은퇴하는 누군가의 가장 소중했던 픽.

이건 선수들이 타인을 추억하는 또 하나의 계기.

“2025 LKL 서머 더 파이널! 여러분들과 만나고 있는 이곳은! 인천! 시립! 유니버시아드 체육관입니다!”

이곳에 올 수 없었던 그와 함께.

3세트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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