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윈터
결승 직전.
우리는 버스 업그레이드를 받았다.
아니, 지급이 맞겠다.
그전까지는 탈 일도 없었을뿐더러 드물게 다른 팀이 사용할 일이 있더라도 대여를 하는 식이었으니까.
선수 숫자가 적은 만큼 우리는 보통 밴을 타고 경기장으로 이동하곤 하는데, 이건 경기도에 있는 사옥과 서울에 있는 LOS 파크를 오갈 때 이야기다.
국내 결승 경기장은 인천.
거리는 서울과 비슷했지만, 이동하는 인원도 많고 챙겨갈 짐도 많다.
그렇다곤 해도 꼭 버스가 필요한 건 아닌데.
이건 보여주기식 소비다.
어쩌면 우리가 부어준 사이다에 대한 보너스 개념일 수도 있고.
“선수님들, 올해 한국에서 개최되는 월챔 때도 타고 이동하셔야죠. 일산이 좀 멀죠? 편하게 가실 수 있게.”
김수연 단장은 손을 내저었다.
“그리고 매년 결승에서 쓰게 될 텐데.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단장은 눈을 여우같이 홉뜨며 나를 바라본다.
꽤 대단한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네.
“편하면 좋죠.”
내가 어깨를 으쓱하자.
“또 모르죠. 이듬해나 그다음에는 해외 월챔이니까, 전용기라도..”
얼마나 먼 미래를 이야기하는 거야.
구단주가 석유 부자라도 돼?
위대한 스포츠맨 곽지운과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여기에도?
“그리고 의류도!”
이번에는 협찬 팀이다.
“헤이! 떼껄룩! F/W 시즌 신상으로 최대한 다양하게 셀렉하고, 원단도 급이 떨어지는 것들은 걸렀어요! FWX 자사 의류 브랜드에서 새로 런칭한 영캐주얼 스포츠 라인인데..”
함께 온 협찬 팀 스탭도 신난 표정으로 이것저것 설명한다.
“우리 선수님들한테 너무 잘 어울릴 것 같죠? 유니폼이랑도 찰떡! 사복으로도 최고! 어유, 요즘 애들은 키도 크고 얼굴도 작아! 우리 팀이라서 그런가?! 난! 너무! 좋아!”
산더미처럼 쌓인 의류 박스.
대부분의 선수는 설명을 알아듣지 못하는 눈치였지만 김예성은 화색을 띤다.
“이건 롱 패딩. 그리고 후리스. 주머니가 많아서 더 좋아요. 요즘 날씨가 춥잖아요?”
9월 초, 여전히 낮에는 20도 중반을 웃도는 기온.
아침에는 좀 쌀쌀하긴 하지만.
“이건 발열 이너! 체온을 보존해줘요!”
체온이 높지 않은 편인 나조차도 어깨를 으쓱할 의류 구성이다.
“털장갑, 패딩 모자까지! 고산 지대에서 조난당해도 일주일은 끄떡없어요!”
“우와..”
“대박.. 정말. 너무나. 포근하겠는데요? 역시 고..어..텍스 소재를 활용한. 상품 답군요?”
“관계자분 아니니까 여기서 PPL 하지마..”
참나.
지금이 무슨 겨울, 혹한기인 줄 아나.
진짜 오버 아니야?
“그래도 좋음! 종류가 늘었어. 전엔 반팔이랑 후드밖에 없었는데!”
아.
얘넨 F/W 협찬을 받아 본 적이 없구나.
“엄마도 한 벌 사드리고 싶다. 이거 혹시 구매하면 할인되나요?”
“물론이죠! 넉넉한 사이즈로 좀 더 챙겨드릴까요?! 이건! 비밀!”
“우리 할머니도.. 이런 거.. 입고.. 산책이라도..”
뭐, 음..
가을이 춥긴 하지.
눈 깜빡할 사이에 겨울도 올 테고.
“FWX가 이렇게 좋은 팀입니다.”
앞서 뻔뻔했던 태도와 달리 작은 목소리로 한마디를 남긴 단장은.
민망한 얼굴로 결승을 준비하는 선수들의 시간을 더는 방해할 수는 없다며 자리를 떴다.
그래도 이런 어필은 귀여운 수준이다.
여전히 다른 팀에 가면 후회해주겠다는 식으로 말하거나.
더 과거에는 선수가 이적 시장 룰 등에 미숙한 것을 이용해 협박, 신변을 좌지우지했던 사람도 있으니까.
설마 그런 핵 폐기물 같은 인간이 있겠냐고?
끔찍하지만 과거에는 종종 일어나던 일이었다고 한다.
수면에 떠오르지 않았던 사건까지 포함하면 제법 많기까지 하다.
그나마 이제는 많은 개선을 거쳐 공식 인증 에이전시 제도가 존재하고, 전과 같은 일은 보기 드물다.
어쨌든.
신나서 대낮부터 패딩을 껴입은 선수들이 버스를 구경했다.
“와.. 미쳤다. 진짜 미쳤다. 나 그냥 여기서 살래..”
“여기 커튼 달린 거 실화냐?”
“니 커튼 치고 뭐하게?”
“뭐하긴 시벌, 짜장면 시켜 먹으려고 그런다.”
“아! 짜장면 좋아하시는구나!”
뭐.
FWX는 보수적이고, 성적 또한 구설수와 거리가 먼 팀이어서.
애처로운 의미로 클린하긴 했다.
어쨌든 선수들이 마냥 좋아하는 걸 보니.
“이거.. 빅스보다 좋아. 빅스는 의자가 전부 두 개씩 붙어있었거든. 이건 꼭 공항 리무진 버스 같네. 온열 시트도 있어.”
“이겼다.”
“이겼어.”
팀에서도 꽤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음.
어쩌면 FWX는 LOS 팀에 돈을 쓰고 싶어도 못 쓰는 상태였는지도 모르겠다.
장거리용으로만 쓰일 텐데도 완전 신차인 버스를 즉시 출고 받았다는 것도 그렇고.
평소에 사용하게 될 밴 역시 2026 버전으로 업그레이드 예정.
하긴.
지금 우리는 연봉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좋은 성적을 내고 있으니까.
사실 그 외에도 FWX는 은근히 투자했었다.
사옥의 규모도 그렇고, 식사도 그랬으며.
운동 시설, 관리단, 2군 숙소를 비롯해 갖은 복지 혜택들이 그렇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스프링 성적은 좋지 않았고, 제아무리 김예성이 자기 뜻을 밝혀 여기로 넘어왔다고 한들.
빅스의 연속 준우승에 기여한 김예성을 데려오는 데에 돈을 적게 썼을 리는 없다.
준우승 전문가 김예성.
“이번에는.. 꼭.”
그렇다는 이야기는.
이 팀에서 나를 제외한다면.
결승 무대를 겪어 본 사람은 김예성 뿐.
계속 2위로 머물러있던 이 선수는 이번 결승을 통해 최고의 미드로 거듭나고 싶을 것이다.
“꼭 이기자. 우리.”
“우리가 예성이 황제로 만들어! 킹은 이겼으니까 이번에 킹갓엠페러 만들어버려!”
“만들어버려!”
“잠깐! 근데 내가 세잔데?”
“어쩌라고? 니가 지었지 우리가 지었냐? 너 그래서 강준윤 아들이라고 소문났잖아.”
“스톰? 걔넨 탈락했잖아.”
“어. 우리가. 우리가.. 크큭.. 이겨서.. 왕위.. 찬탈..”
“후후후.. 낯선 천장이로군.”
“하하하하하!”
“으하하하하하!”
그래서.
지금.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F-W-X! F-W-X!”
“언더독! 언더독! 언더독!”
“너네 믿어! F.L.E 대신 명예를 회복해 줘!”
“우정권! 우정권! 우정권! 우정권! 우정권!”
“건아아아아아아아악! 너 때문에 비온다아아아아악! 심장마비이이이이이이익!”
흐린 하늘이 비를 물고 있는 오늘.
이곳은, 결승 무대.
평소 경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의 함성과 인파로 들어찬 곳.
원래의 내 자리.
“다들 침착해.”
“다, 다들. 알았지.”
“예성아, 니가 제일 긴장한 것 같은데.”
“내가, 제일 긴장한 건 아닐걸. 왜냐면..”
“저거 어떡하냐 저거. 유찬! 이유찬!”
“...”
“지금이라도 약 먹을래?”
“괜찮아요.”
내가 예상했던 것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우리는 여기에 왔다.
#
“매번, 매번 해서 여러분들이 지겨울 수도 있는 말이긴 한데. 진짜 이번 결승, 역대급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대진은 지난 스플릿에도 없었고, 작년에도 없었으며, 올 타임 LKL 역사상 최초!”
“트릭스터와 FWX, FWX와 트릭스터의 경기!”
결승.
해설 로테이션은 다양한 방식으로 분배된다.
그중 결승전의 경우, 베스트 조합이자 가장 평가가 좋은 해설가들이 자리를 차지하게 되기에.
“안녕하십니까! 해설을 맡은 현수진입니다!”
“강기수입니다!”
권건과 친분이 있지만 상대적으로 경력이 짧은 남동현은 이 자리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카메라가 관중석에 앉아있는 남동현을 잡는다.
남동현은 시선을 의식한 듯 왼손에는 트릭스터를, 오른손에는 FWX 응원봉을 들고 있었지만.
왜인지 흔들리는 것은 FWX 응원봉 뿐이다.
그리고 경기장을 찾은 전 프로, 감독 등도 제법 많이 비춰 관객들의 환호를 듣고 난 뒤.
“오늘은 이렇게 많은 분이 경기장을 찾아주셨는데요. 여기에도 새로운 손님이 있습니다!”
화면은 캐스터 석으로 돌아왔다.
“FWX 전 주장이자 현재는 스트리머로 활동하고 계시는 지니 선수를 소개합니다!”
“안녕하세요, 오늘 1세트와 2세트의 객원 해설을 맡은 지니 강동흔입니다.”
강동흔이 어색하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예전에 지갈공명이라고 불렸던 지니 선수인데요. 기억하시는 분이 많을 겁니다.”
사실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채팅창은 뜨겁다.
- 나 쟤 알아 와우
- 형! 형 군대 다녀왔어? 군기가 바짝 들었네ㅋㅋㅋㅋㅋㅋ
- 지니 형의 라스트 댄스.. 아직도 생각나네.. 잘.. 지내니? 밥은.. 먹었고..?
- 언제 갔다 왔어? 시간 금방이네
- 니가 가봐라 ㅅㅂ
- 머리 너무 긴데?? 요즘 군대 ㅉㅉ 빠져가지고
- 전역하고. 벌써 반년은 댓으니가 그러치. 시벌아. 니 몃살이야. 통화 함 하자.
- 아직 안 다녀왔습니다 형님
- 알갯다. 해병대로 다녀와라.
- 예 형님.
- 쟤 빅스 형님 아니냐?
- 지니를 어캐암 ㄹㅇ 삼국유사부터 공부하셨어요?
- 그는 환승에 ‘진심’이다
“자! 지표부터 살펴보면서 시작합니다!”
새롭게 촬영한 FWX 선수들의 프로필 사진과 함께 주요 지표들이 나열된다.
“야, 이거. 이기니까 선수들 얼굴이 훨씬 훤해졌는데요.”
- 와 결승이라고 메이크업 뽀얀 거 봐ㅋㅋㅋ 인물이 훤허네
- 어떻게 선수 사진이랑 실물이랑 이렇게 똑같을 수가
- 이게 무슨 아이돌 그룹인 줄 아냐? ㅉㅉ 얼빠들
- ? 남자도 잘생긴 남자 좋아해 스벌아
- 겜 잘함 + 잘생김이면 걍 게임 끝났지 바로 우리 형임
- 여친까지 없으면 완벽한 천연기념물
- 이야~~~ 여기가 그린벨트였고~~~~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청정수들ㅋㅋㅋㅋ
“그렇습니다! 그리고 주목해야 할 부분이 더 있는데요. 이거, 이런 픽들을 보시면..”
- 아니 어이탱 지표 사기꾼들
- FWX만 썼던 픽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이거 허수 너무 심한 거 아니냐고ㅋㅋㅋ
- 지들만 게임하죠?ㅋㅋㅋㅋ
“FWX가 시그니처라고 부를만한 픽들을 여럿 남기면서, 상당히 메타에 혼란을 줬죠. 모데, 녹턴, 자르반, 트페, 리산, 아칼린, 바도! 아니 하나하나 다 말하기에는 너무 많아요!”
“그대로 써보려고 했다가 대형 참사가 난 게 한두 번이 아닙니다. 되게 좋아 보이는데, FWX만 성공했다 이겁니다!”
“이것 또한 FWX의 새로운 무기라고 볼 수 있겠죠. 이게 올 시즌이 끝난다고 해서 사라지는 게 아니거든요!”
트릭스터는 고전적인 픽들에서 강세를 보였다.
승리 수가 많은 만큼 높은 승률.
“하지만 중요한 점은 그겁니다.”
“예!”
“이거 지니 선수 앞에서 이야기해도 되는 부분일까요?”
“일단 한번 말씀해보시죠.”
“하하, 네. 이번 서머, FWX는 트릭스터를 이기지 못했습니다. FWX, 단 네 번의 매치 패 중 두 번이 트릭스터전입니다. 세트 승은 있지만 승률은 33%에 불과했는데요..”
트릭스터는 한 단어로 정리하자면 ‘밸런스’.
베테랑과 실력 좋은 젊은 선수들로 고르게 구성되어 운영과 피지컬 양쪽에서 팔방미인이라 평가받고.
팀의 시간 쪼개기가 훌륭하며.
전략적 움직임 역시 나쁘지 않다.
무엇보다, 여러 차례 선수들이 대를 잇는 과정 중에서도 상위권을 계속 유지함으로써.
위닝 멘탈리티와 큰 무대 경험에 대한 노하우를 잘 이어받은 팀이다.
다만 각 라이너의 피지컬이 초월급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점.
그래서 라인전 체급이 월등하게 뛰어난 상대를 만나면 능력을 발휘하기 어려웠고.
튼튼하게 기초를 쌓는 것을 선호하다 보니, 자신들보다 속도가 빠른 팀을 만나게 되면 휘둘리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국제전보다는 내수용이라는 별명이 붙은 팀.
하지만 이 바늘구멍 같은 약점을 공략하는 것은 지금의 FWX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 중, FWX가 이긴 대부분의 경기는 말 그대로 ‘성장형을 바탕으로 한 시간 끌기’ 전략이 주효했죠. 극단적으로 처음 트릭스터를 이길 때 FWX는 권건 선수의 드리블을 바탕으로 카사딤, 셰나 등을 기용했습니다.”
“그 경기가 아직 기억이 나는군요. 그런데 지금 무대에서는 또. 이 전략을 FWX에서 쓰기가 어려운 면이 있거든요.”
“그렇죠. 큰 무대입니다. 완전히 달라요. 당연히 트릭스터는 이 점을 대비했을 테고 최소 세 경기를..”
- 킹치만 ‘FWX 얕보기 역사’의 시작은 트릭스터자너 ㅋㅋㅋㅋㅋ
- 감사합니다 덕분에 이렇게 장성하여 어른이 되었네요
- 와 ㅆ FWX 강등 말소될 줄 알았는데ㅋㅋㅋ
- 말소요? 혹시 말린 소고기의 줄임말인가요?
- 말?레이시아 소?비에트 연방
- ? 말차라떼 소몰사이즈로 부탁드립니다!
- 진짜 지랄 아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어쨌든 오늘 경기를 FWX 역시 와신상담하면서 준비했을 겁니다.”
“상담은 많이 받을수록 좋은 거니까요. FWX는 그런 체계가 잘 갖춰져 있습니다.”
“?”
- 지니 형 재미없어
- 아님 와신상담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거임?
- 아저씨가 돼서 돌아왔네
- 형이 긴장했어? 혀 좀 풀고 와 제발ㅋㅋㅋㅋㅋ
모두가 들뜬 분위기 속.
“좋습니다! 일단 첫 번째 세트를 가져가는 게 중요합니다. 첫 세트를 가져가면 최종 우승 확률이 88.7%! 사실상 90%, 대부분이 최종 우승을 차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거든요!”
- 사실 빅스한테 컷당할 줄 알았음 솔까말 빅스랑 결승하는 게 나음
- FWX는 묘하게 불편해ㅡㅡ
- 빅스가 진짜ㅋㅋㅋ 존나 나이브하게 플레이함
- 아아 [강자]가 [약자]에게 지는 클리셰란..
- 근데 빅스는 대체 어떻게 하면 세미 파이널에서 나이브한 플레이를 함?
- 종종 그런 개 같은 일이 일어나..ㅠㅠㅠㅠㅠㅠㅠ
- 그래서 드라마가 나오곤 하지
- 그래도 트릭스터는 이제 방심만 안 하면 질 수가 없다ㅋㅋㅋ
- 사실상 FWX는 계절학기 뛰고 있는거자너ㅋㅋㅋ
- 그렇긴 하네ㅋㅋㅋ 방학이어야 하는데 어째서 나? 학교에?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집으로 돌려보내드려~
그렇게 첫 번째 세트.
“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
“어어어어, FWX, FWX! 지금, 이거! 이거어어어어어어어억!”
LKL 2025 결승.
인천 시립 유니버시아드 체육관.
수만의 별 앞에서, 국내 최고로 꼽힌 두 팀의 경기가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