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렛 더 파이널스 비긴
바로 지난 스플릿의 우승팀의 연고지에서 결승전을 치른다는 발상과 실천.
리그의 극초창기부터 연고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기에.
초기에는 마찰이 있었다.
각 지역자치단체에서 ‘시즌 오프인 널찍한 스타디움을 하나 내주고 컴퓨터 게임을 틀어주면 된다’ 정도로 여겼던 것.
그래서 오프닝 무대 준비부터 네트워크 트래픽, 음향, 중계까지.
깔끔하게 모든 곳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차라리 게임 방송사에서 결승을 진행하던 먼 과거가 좋았다는 의견이 쏟아졌고.
청년층에 지자체를 홍보하기 위한 수단은 오히려 독이 되어 돌아왔다.
하지만 젊은이들을 타게팅한 정책과 새로운 세대 문화의 중요성이 대두되면서 흐름을 탔고.
성적이 좋지 않은 팀에게는 아쉬운 일이지만, 특정 팀들의 연고지만 결승 무대를 나누어 가지기 시작하면서 현시점에는 크게 안정됐다.
특히 결승 무대를 여러 번 준비해왔던 인천.
인천은 기존에도 다양한 스포츠나 인프라 등을 유치하는 데에 뛰어난 역량을 보였고.
이건 LOS 리그 결승전에서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회 결승 개최에 재미를 본 인천은 LOS에 상당히 호의적인 입장으로, 이번 결승 행사에도 꽤 많은 공을 들였다.
FWX 관전방 운영자, 지세현은 친구 최인규와 인천을 찾았다.
“와! 푸드 트럭 냄새 뒤져!”
“골라라. 내가 사준다.”
“압도적 감사. 그럼 스테이크로.”
“꺼지고 타코야끼나 드세요.”
9월 초.
일교차가 크고 날씨는 흐렸지만 많은 사람이 경기장을 찾았다.
“코스프레 미쳤다. 개 멋있네? 저거 뭐야! 나도 띠모 모자 사줘.”
예전에는 빅스 팬이었던 최인규는 마지막 경기까지 지켜본 후 완전히 FWX로 갈아탔다.
아니, 그 전부터 이미 유니폼을 가지고 있었다.
“미친. 꺼지세요. 이런 데는 여친이랑 왔어야 하는 건데..”
“그런 천사? 최소한 너한테는 없어.”
“니 입에 들어가는 코코넛 쉬림프가 이제 작별 인사를 하고 싶대.”
“아이쿠. 제가 성전환이라도 할까요?”
“이 새끼 또 욕 나오게 하죠?”
한참을 낄낄대던 두 대학생은 즐거운 마음으로 축제를 즐긴다.
LOS 결승전이나 월챔은 또 그만의 매력이 있었다.
직접 오기 전에는 몰랐던 결승 무대 밖의 다양한 행사.
“쏘닉스 이벤트 좆된다. 돌림판 가자.”
“가자. 내가 야바위 실력 보여준다. 키보드 바로 따버리기?”
“야바위랑 돌려돌려 돌림판이 무슨 상관?”
타겟 연령이 더 넓은 유서 깊은 스포츠 경기의 광고는.
엔진 오일, 중고차 앱, 스포츠 게임, 연금 보험, 영양제 등 이미 차량 등의 재산을 지니고 있으며 경제 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한 광고가 눈에 많이 들어온다면.
LOS 리그는 타겟이 좀 더 어리다.
그래서 컴퓨터 주변 기기, 게이밍 체어, 영 캐주얼 의류, 그리고 은행의 신규 카드 발급이나 생애 최초 적금 등의 부스가 관중들을 반긴다.
물론 치킨과 피자, 햄버거는 어디에 가나 있고.
“이야. 또대급, 또대급 했지만 오늘은 진짜 역대급이 맞다..”
“이벤트 꿀이고.”
지나가는 사람들은 모두 저마다 응원하는 팀의 굿즈나 유니폼.
때론 페이스 페인팅이나 챔피언 분장을 하고 지나간다.
종종 소리를 지르며 트릭스터 화이팅! 이라거나 GO! FWX GO! 따위의 말을 외치는 사람도 있다.
그럼 주변에서 모두 다 소리를 지르며 환호한다.
이 외침에 국적은 상관없다.
“존나 재밌는 일이 벌어질 것 같다.”
경품과 굿즈로 양손이 무겁다.
“나도. 오늘만큼은 내가 바로 인싸다.”
흥겹게 모든 부스를 쏘다니며 지세현이 영상 촬영을 하는 것을 돕던 최인규가 어느새 사람들이 사라졌다는 것을 느낀다.
“야! 입장! 입장!”
“아, 거. 급하시긴. 우리 자리는 어디 보자.. 아주.. 가까운 VIP석입니다.”
“위대한 지세현님을 찬양합니다.”
‘지인 찬스’로 얻은 티켓.
두 사람은 여전히 가벼운 마음으로 실내 경기장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이미 시작된 듯, 간신히 유도등의 불빛만 희미하게 보이는 어두운 장내.
지세현과 최인규는 조용히 해달라는 스탭의 수신호를 받아 조심스럽게 몸을 옮긴다.
그때.
덜컥, 불현듯 화면이 켜진다.
LKL의 로고.
팀파니의 진동이 느껴진다.
잔잔한 오케스트라 선율이 메아리치듯 들려온다.
LKL에 참여한 열 팀의 영상.
패배하고, 승리하고, 울고, 웃고.
악을 쓰기도, 흥분하기도, 아쉬워하기도 하는 해설진.
그리고 감정을 모두 공유하는 팬들의 모습.
그 속에서 발을 내딛고 앞으로 나아가는 선수들, 그리고 역사.
지세현은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는 그냥 게임일 뿐이었던 LOS가 가진 또다른 이야기.
멀리서 속삭이던 음악 소리가 점점 또렷해진다.
선율이 미끄러지는 것처럼 흐른다.
첼로의 애절함과 콘트라베이스의 묵직함이 얽힌다.
가녀린 바이올린은 깎아지르듯 올라가며 긴장감을 고조한다.
오로지, 우승.
모두가 꿈꾸는 그 자리를 향한 간절한 손짓.
그리고 올 한해.
선수들의 여정이 끝에 다다랐을 때.
빛이 쏟아져 나오는 문 앞에 서 있는 것은 오직 두 팀뿐.
- 부우우우우우우
문득.
거대한 호른이 울린다.
둥, 둥.
북소리.
공간을 메운다.
발밑이 흔들리는 것 같다.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에 젊음을 바쳐.
어느덧 2025 LKL 서머 스플릿 결승전.
둥, 둥, 둥, 둥.
이제 점점 음색은 빠르고 강렬해지기 시작한다.
그 위를 멜로디가 덮고.
브라스가.
드럼이.
그리고 함성과도 같은 합창이 따라오기 시작하면서.
고조된다.
심장이 뛴다.
서로 다른 음색들이 하나가 되어 뭉쳤다가 흩어지고 다시 합쳐지고.
또다시 내달린다.
지세현은 이 현장감에 잡아먹힐 것 같았다.
이윽고.
최고 속도에 다다른 모든 악기가 부딪혀 산산이 깨지는 그 순간.
거대했던 소리만큼이나 장엄한 고요가 찾아오고.
여유로운 표정의 스프링 우승팀이 그곳에 선착해있다.
- TRT Odd (TOP) : 가을의 향기는 익숙해요.
- TRT Odd (TOP) : 지금은 우리의 시즌을 추수하는 계절이니까요
2024시즌 스프링에 잠시 주춤했었던 것을 빼면.
3위 밖으로 벗어나 본 적이 없는 인천 트릭스터.
- TRT Musa (JUG) : 풋풋한 풋내기. 제가 그런 말을 했었죠.
- TRT Musa (JUG) : 하지만 이제 FWX를 그렇게 부르긴 어려울 것 같네요.
- TRT Musa (JUG) : 우리를 적수로 만났으니까.
트릭스터는 강팀이다.
- TRT Future (MID) : 상대 키 플레이어요? 권건 선수죠.
- TRT Future (MID) : 정말 잘하는 선수라는 걸 인정해요. 매력적인 선수고요.
- TRT Future (MID) : 근데 우리 은검이(Musa) 형도 어디 가서 꿀리는 정글은 아니거든요.
미드 중심 게임으로 FWX에게 당한 빅스와 달리.
체급 차이가 여실한 상황에서 FWX에게 후반 조합과 백도어로 패배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트릭스터는 FWX의 플레이오프 진출을 요행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 TRT Gogumi (AD) : 아직도 그때 생각이 나요.
- TRT Gogumi (AD) : 지운이(seZa)형의 가짜 원딜 시비루 한무 푸시.. 와. 자다가도 이불을 발로 찬다니까.
FWX가 빅스를 꺾어내면서 더 확실해졌다.
트릭스터 입장에서 본 빅스는 체면치레가 있는 팀.
하지만 트릭스터는 그렇지 않다.
- TRT Gogumi (AD) : 근데, 중요한 건.
- TRT Gogumi (AD) : 그 이후에 맞아본 적이 없다는 거죠.
- TRT Gogumi (AD) : 미리, (FWX에게) 미안합니다.
약자에게 패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고 받아들여 더욱 강해진 팀.
- TRT KeV (SUP) : 우리는 강팀.
방심하지 않는 강자.
- TRT Odd (TOP) : 한 해의.
- TRT Musa (JUG) : 결실을.
- TRT Future (MID) : 거두러.
- TRT Gogumi (AD) : 왔습니다.
- TRT KeV (SUP) : 우리는, 트릭스터.
관중을 누르던 음악은 안개처럼 흩어졌지만.
주변의 숨을 잡아먹고 몸집을 키운 긴장감이 트릭스터의 엠블럼을 조명한다.
이곳은 그들의 영역, 인천.
시립 유니버시아드 체육관.
경기장은 트릭스터의 시그니처 컬러로 물들어있다.
지세현은 자신이 적진 한 가운데에 서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압도.
화면은 어두워지고.
이제 경기장 가운데 트릭스터 엠블럼만이 요요롭게 빛난다.
자리를 빼곡하게 메운 관중이 트릭스터의 무게감에 짓눌릴 때.
경기장 구석 어디선가.
아주 작은 빛이 날아와.
모두의 시선을 빼앗은 뒤 FWX를 형상화한 불꽃으로 터진다.
- 퍼엉!
경기장을 수놓았던 화려한 불꽃의 꼬리가 사그라들자.
“후우..”
“하.”
조금 전까지 팽팽한 감정으로 가득 찼던 경기장에 숨통이 트인다.
암전.
그리고 여전히 아무 소리가 없던 장내에.
묵직하고 몽환적인 앰비언트 사운드가 공간을 휘감았다.
이건 다른 느낌이다.
무섭기도 하지만, 따뜻하기도 한.
소리가 성큼성큼 다가올 때마다.
후욱, 무대 중앙에 불꽃이 고요하게 피어오른다.
- FWX Chani (TOP) : 증명하고 싶어요.
작은 불꽃이 하나.
- FWX GwonGun (JUG) : FWX라는 팀이 막다른 길이 아니라는 것을.
작은 불꽃이 둘.
- FWX RAON (MID) : 어쩌면 이곳이, 새로운 시작일 수도 있다는 것을.
작은 불꽃이 셋.
- FWX seZa (AD) : 이 자리까지 올 수 있게 도와준 모든 사람에게.
작은 불꽃이, 넷.
- FWX Class (SUP) : 그리고 나라는 존재를 몰랐던 사람들에게.
그리고 다섯.
점점 강렬해지는 음색과 함께 다섯개의 불꽃은 하나로 타오르기 시작한다.
- FWX Chani (TOP) : 우리가.
- FWX GwonGun (JUG) : 이곳.
- FWX Poly (JUG) : 여기에.
- FWX RAON (MID) : 있다는 것을.
- FWX Class (SUP) : 우리가, 바로.
- FWX seZa (AD) : 파이어웍스라는 것을.
그리고 그것은 마치 모든 것을 삼켜버릴 듯이.
트릭스터의 엠블럼 아래에서 힘차게 기염을 토해낸다.
다시 음악이 잦아든다.
터지듯 화려했던 염화.
모든 것을 불태우고 천천히 꺼져가는 불꽃과 함께 두 팀의 엠블럼에도 어둠이 서리고.
“...”
“...”
거짓말처럼 찾아온 고요 속에.
딸깍.
무대 한 가운데로 떨어지는 스포트라이트.
자리한 것은.
한국 리그의 우승컵이다.
컵이 천천히 회전한다.
회전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두가 그렇게 느낀다.
공기로 전해지는 무게감.
시간이 멈춰버린 것 같은 압박감.
그 누구도 입을 떼지 못한다.
순간.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자와 가장 낮은 곳에 있던 자.”
압도의 정적을 깨는 문장.
깨끗한 캐스터의 목소리가 음악을 대신해 공간을 메웠다.
“원래부터 신이었던 자와 인간으로서 신에게 도전하는 자.”
결승에 진출한 두 팀의 엠블럼이 나란히 모습을 드러낸다.
이른 봄에는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조합.
트릭스터와 FWX.
“오늘, 그 주인공들을. 만나보겠습니다.”
그리고 FWX와 트릭스터.
“이번 시즌. 더욱 단단해져서 돌아왔습니다.”
무대 좌측으로 바닥 조명이 켜진다.
하나, 둘, 셋, 넷.
그리고 다섯.
“이제 시즌 왕좌까지 마지막 한 걸음, 최후의 집행검을 들어 올립니다. 2022 서머 우승, 그리고 2025 스프링 우승팀! 트으으으릭스터어어어어!”
트릭스터 선수들이 번쩍이는 조명을 따라 입장하자.
천둥 같은 함성 소리가 경기장을 채운다.
“반대편에는. 도저히 믿기 어려운 팀이 있습니다. 그 누구도 이들이 이 높은 산을 기어 올라올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무대 우측으로 바닥 조명이 켜진다.
여섯, 일곱, 여덟, 아홉.
그리고 열.
영광의 무대에 참여하는 사람의 숫자.
“최고의 경치는 가파른 산을 오른 후에나 볼 수 있는 법, 역사상 최초 결승 진출! 그들의 역사는 지금부터 시작입니다! 파아아아이어워어어어억스!”
한차례 리허설을 거쳤지만 결승 무대가 어색한 FWX 선수들이 대열을 갖춘다.
일순간 비틀거린 누군가를 또 누군가가 잡아 자신의 자리로 가게 돕는다.
아까의 침묵을 거세게 밀어낸 환호가 장내에 가득하다.
나부끼는 깃발이.
팀에서 내건 응원 현수막이.
축제라도 되는 듯 코스프레를 한 사람들이.
폭증하는 수요를 감당하지 못해 터져버린 FWX 샵에서 점퍼를 구하지 못하고, 반소매 유니폼만 입고 앉아있는 사람들까지.
관중들이 무대 중앙의 선수들을 ‘스타’로 바라본다면.
선수들에게는 이 관중들이 ‘별’처럼 멀리서 빛나는 것처럼 보인다.
“오늘, 이 영광의 자리에서 어떤 팀이 이기게 될까요. 최고의 자리에 앉을 팀은 누구일까요! 리그 오브 서머너즈 코리아 리그, 최고의 우승컵을 차지할 팀은 어느 쪽이 될지! 렛 더 파이널스 비긴!”
선수들은 이 자리에 섰다는 것만으로도.
“대망의 결승전을, 팬 여러분의 뜨거운 함성과 함께 시자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이 광경을 보았다는 것만으로도 숨이 멎을 듯한 환희와 부담에 짓눌린다.
“하겠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습니다!”
앞과 뒤.
그리고 양옆.
수만 관중의 응원봉이 일제히 빛을 밝히며 존재감을 드러낸다.
셀 수 없는 별빛 파도.
귀가 터질 것 같은 함성.
지세현은 이 광경에 어딘가 뜨거워지는 감정을 느꼈고.
이 자리에 처음 선 선수들은.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빨려 들어갈 듯, 혹은 두려운 듯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