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갈림길
식사 시간.
“일도 네가 왜?”
퓨처스 리그, 그러니까 2군 원딜이자 주장인 정일도의 은퇴 소식.
정일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저는 이번 시즌까지만 할 것 같아요’라고 말했지만.
그와 2년이라는 시간을 함께 보냈던 이유찬은 그 소식에 눈에 띄게 반응했다.
“무슨 일 있어? 아님 1군 못 와서?”
1군 원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곽지운은 어색하게 머리를 긁었다.
“야, 유찬아. 눈치 챙겨라잉..”
“절대 그런 거 아니야.”
정일도는 침착하게 말했다.
LKL와 경기 방식이 다른 퓨처스 리그는 종결도 좀 더 빠르다.
결승까지 마친 퓨처스 리그 FWX의 성적은 3위.
신인 정글과 미드, 문봉구와의 협업을 통해 뽑은 탑이 중간에 주전으로 합류한 것을 생각하면 꽤 좋은 성과다.
대진표를 잘 탔다면 충분히 우승도 노려볼 만했다고 하니까.
“지금 멘탈을 흔들려는 건 아니었고.. 형들이랑 가까우니까 이야기한 건데. 내가 타이밍이 너무 안 좋았나?”
그 사이에도 키가 큰 것 같은 진짜 ‘피지컬’이 뛰어난 우리 원딜.
묵묵하고 점잖으며, 팀원들을 챙기는 2군의 주장.
정일도는 이제 190을 훌쩍 넘긴 것 같은 키를 정중하게 숙여 가장 키가 작은 곽지운에게 인사했다.
“형, 정말 감사해요. 많이 도와주셨는데 다른 결정을 해서 죄송합니다.”
“아니야. 내가 뭘..”
곽지운은 손사래를 치며 애써 정일도의 어깨를 두드렸다.
지난 번 방송 때 일정을 빼고 뭘 했나 했더니.
발이 넓은 이 원딜은 2군의 멘탈 관리에까지 동참했던 모양이다.
곽지운은 심판진에게까지 스스럼없이 말을 거는 타입이니까, 뭐.
“근데 지운이 형님은 우찌 자꾸 작아져. 지금 한 30미터 밖에서 보는 것 같어잉.”
“문봉구, 병가 내고 안과 가봐라.”
2군과 1군이 이렇게 가까운 팀은 그리 많지 않다.
사실 좀 어색하거든.
단체 스포츠치고는 5명이라는 적은 인원.
그만큼 적은 자리, 짧은 수명.
어떻게 보면 서로의 자리를 뺏기 위해 싸우는 관계.
그래서 곽지운이 이 자리에 있는 게 의외다.
뭐, 이유찬과 문봉구도 비슷하긴 하지만.
우리는 공용 휴게실에 모여있었다.
모인 사람은 나, 이유찬, 곽지운, 문봉구, 정일도, 그리고 이지호.
평소에 서포터로서 원딜을 정신없이 괴롭히던 이지호는 오늘따라 얌전하게 앉아 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다.
이 묘한 조합에 흘긋흘긋 다른 팀들이 관심을 보이는 게 느껴진다.
“쟤네 결승 갔대.”
“와우.. 결승 좆되네. 매드무비 봤어? 개지리던데..”
“한번 물어볼까? 존나 혹시 시공의 폭풍 팀에 와주실 생각은 없으신지..”
“너같으면 퐁퐁 팀에 오겠냐?”
“힝. 말넘심.”
다른 스포츠와 비교하면 몰라도.
게임 팀 내에서 LOS의 위상은 높은 편이다.
그래, 그만큼 이 자리를 탐내는 사람도 많을 테고.
이제 막 비상하고 있는 FWX의 예비 원딜 자리.
물론 2군에 있었다고 무조건 1군으로 갈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왜?”
나도 궁금증을 참을 수 없었다.
“조금 더 해보지.”
주장을 맡겼다는 건.
실력을 대변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정일도의 워크 에씩에 대해 FWX도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냉정하게 말해서 곽지운은 나이가 많은 편이기도 하고.
“플레이에도 문제가 좀 있었어요.”
“아, 진짜. 고거 아이라고. 진짜. 왜 말 자꾸 그렇게 하는데. 니 진짜 존나게 짜증나.”
정일도의 말에 이지호가 대뜸 짜증을 낸다.
오늘은 사투리 억양을 숨길 생각도 없는 것 같다.
“이 형 진짜 너무 자학한다. 뭐, 반응 속도 좀 빠른 게 어때서? 스펠 멀쩡히 있는데 안 쓰고 뒤지는 것보다는 훨배 낫지.”
“맞아.”
곽지운이 동의하며 희미하게 웃었다.
상대적으로 생존이 중요한 원딜의 고질적인 문제.
플을 쓸 것인가, 아낄 것인가.
내 스펠 하나가 팀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데.
내가 여기서 쓰고 나면 다음 한타나 오브젝트를 완전히 포기해야 하는 건 아닐까.
혹은 아끼다가 죽으면 더 최악일 텐데.
뭐 그런 것들이다.
정일도는 ‘반응 속도’에 관한 부분에서 2군 해설자들에게 많은 칭찬을 받았다.
국내 최고 반응 속도, 챌체반, 찰나 플래시, 찰정.
그게 이 선수에게 독이 된 모양이다.
그 이미지에 먹힌 나머지 때로는 플 심리전에서 지고 들어가는 결과가 됐으니까.
하지만.
“고칠 수 있는 부분인데.”
충분히.
나도 고작 야쓰오로 행복해하던 이 원딜을 꽤 좋게 생각했던 터라.
알 수 없는 기분이 든다.
“그게..”
내 말에 정일도가 이제야 지난 이야기들을 늘어놨다.
사실.
이 선수는 온라인 스토킹에 호되게 당했다고 한다.
물론 이건 모두에게 있다.
선수들의 스크림은 비공개지만, 개인 솔랭 영상은 누구나 볼 수 있으니까.
아주, 아주 디테일하게.
하지만 연습 솔랭 중에 집중력이 떨어졌던 순간.
같은 팀에 트롤이 잡혔을 때 대응.
혹은 팀원과 선택이 달랐을 때 ‘던진 것처럼’ 보이는 장면들.
연습 솔랭의 최종 KDA.
우리 팀의 인기가 올라가면서.
FWX를 깎아내리기 위해 이 모든 장면을 녹화하고 부정적인 논란거리로 삼았던 사람들이 있는 모양이다.
애석하게도 이번 미라쥬 사건 이후 오히려 이런 ‘괴롭힘’들이 더 주목받으면서 2군인 정일도의 건까지 화제가 됐고, 그게 개인에게는 악재가 된 모양.
도움이 필요한 사람도 있지만 그냥 조용히 잊히고 싶은 사람도 있는 법이니까.
“그런 새끼들 존나 많다고!”
이지호는 어린애처럼 떼를 썼다.
“아, 나, 진짜. 가지 말라고! 지금이라도 가서 말해! 다시 한다고!”
“물론 그런 사람들 몇몇 때문에 그런 건 아니고.. 이건 아주 오래된 생각이에요. 사실 합숙도 잘 안 맞는 편이었으니까. 그래서 사실, 눈치챘을지는 모르겠지만.. 건이 형. 형 오기 전부터 그랬어.”
하지만 정일도는 담백한 말투로 말했다.
“게임이 취미가 아니라 직업이 된다는 거. 힘들더라고. 면담도 받고, 상담도 진행했는데. 저는 아무래도. 돌아갈 것 같아요. 일상으로.”
플레이적인 단점이 발견된 데다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것이 자기 적성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한 정일도.
그 적성이 없다면 게임 실력, 지금의 이슈와 상관없이 오랫동안 프로 생활을 하는 것은 무리다.
어쩌면 이렇게 침착한 정일도였기에 자신과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비교적 빨리 깨달은 것일 수도 있다.
마침 계약은 올해까지고.
공교롭게도 지원 신청까지 많이 들어온 상황에서 정일도는 계약 종료 및 완전한 은퇴 의사를 표했다.
문봉구처럼 스트리머로 전향하는 것도 아니다.
“...”
프로게이머를 그만두는 사람은 숱하게 많다.
게임은 접근성이 좋은 만큼, 놀랄 정도로 많은 지망생이 생겨나고.
저질 아카데미나 개인의 욕심에 휘둘려 시간만 보내다 프로가 되는 꿈을 접기도 한다.
1군에 데뷔를 했다고 해도 별 성적 없이 사라지는 사람도.
어떻게든 해외로 넘어가서 출전 기회 없이 시간만 보내다 은퇴하는 사람도.
혹은, 만년 후보로 아예 노출조차 되지 않는 사람도 많다.
그래서 팀은 고등학교 자퇴를 권하지 않는다.
돌아갈 곳이 필요하니까.
그걸 여기 있는 사람 모두가 알고 있다.
“선택은 존중해야지. 마, 괜찮다. 야는 진짜 잘한다. 뭘 해도 잘할 거다.”
문봉구가 정일도의 등을 토닥토닥 두들겼다.
이제 갓 스무살이 된 청년은 후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네. 저에 대해서 많이 알게 된 시간이었고. 아, 진짜. 이런 말 하려고 모인 거 아닌데. 결승 간 거 축하한다고 말하려고 그런 건데.”
“그러니까는. 어이구.”
“아무튼 제가 하고 싶은 말은요.”
키가 큰 정일도가 허리를 곧게 펴자 태산같이 느껴진다.
“제가 여기서 떠난다고, 실패자가 된다는 이야기는 아니에요. 어딘가에서 서로 응원하고 살았으면 좋겠어요. 이제 곧 방도 빼니까.. 내 방은 지호가 쓸래? 거기만 1인실이다.”
“졸라 짜증나.. 저딴 말 하는 거.. 개 역겨워.. 다른 원딜 싫어.. 존나 토나와.. 숟가락 새끼들..”
말을 험하게 하는 것과 달리 이지호는 오기 전부터 눈가가 퉁퉁 부어있었다.
볼이 빵빵하고 낯가림이 심하던 최연소 서포터는 처음으로 겪는 이별에 적응하지 못한 것 같다.
예전 미드 라이너였던 김창민 같은 놈과는 이별했다고 생각하지 않을 테니까.
“전에 제가 말했었죠. 야쓰오의 꿈을 이뤘을 때.”
이건 수명이 짧은 프로게이머 사이에서 자주 일어나는 일이자.
어쩌면 몇 달 뒤의 우리에게도 닥쳐올 수 있는 일이다.
“은퇴하고 나서라도. 이렇게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고.”
그 경기가 끝나갈 때 그렇게 말했던 게 너였구나.
“저는 제가 있을 곳을 찾아가는 거고.”
그래도 네가 제일 먼저 은퇴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지호, 그리고 형들은 계속 앞으로 나가면 되는 거예요.”
정일도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준비했던 간식을 줄줄이 내놓는다.
“이거 뭔데.”
“축하 선물인데. 분위기가 좀 무거웠죠?”
정일도는 활짝 웃었다.
“저, 집이 잘살거든요.”
“와. 우리 일도 진짜 재수 없네? 그런 거였어? 금수저 갓수의 취미생활이었던 거냐고!”
“하하, 그 정도는 절대 아니에요. 피자 안 드실 거예요?”
“묵어야지. 아암. 감사합니다. 성공하세요. 아이고, 근데 우리 차니. 왜 넋이 나갔지? 이런 아가 아닌데. 형님이랑 이야기 좀 하고 가자. 알았제잉?”
“탑 아재, 사투리 그거 아이라고..”
농담까지 하며 모인 사람들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려고 노력하는 세심한 정일도는.
끝내 우리에게 ‘우승하라’거나 ‘월챔에 가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우리가 어떤 성과를 내지 않고 그냥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자신과 친구라는 듯이.
사연이 어쨌건, 어떤 선택을 하건.
자신이 원하는 길을 스스로 고른다는 것은 멋진 일이다.
그리고.
어쩌면 리그 내 꼴찌에 가까웠던 FWX조차.
수많은 사람, 그리고 자기 자신과 싸워 비로소 도착한 장소라는 것을 느낀 우리는 묵묵히 이 자리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우리들은 또 이렇게 한 걸음씩 다른 삶으로 갈라진다.
#
[ (LKL) 결승전, 인천 시립 유니버시아드 체육관 ]
[ 1분 만에 전석 매진! 몇 해만의 ‘다른’ 결승 ]
[ 결승에 몰리는 기대감. 인천 트릭스터 대 대구 FWX의 승자는? ]
[ “일찌감치 가능성을 알아봤죠”, 쏘닉스는 웃고 있다. 스포츠 스폰서쉽, 옳게 된 투자의 비법. ]
[ 오랜 시간 왕좌를 두고 다퉜던 팀들 “비켜!”, ‘고인물’에 던져진 작은 돌멩이, FWX ]
[ FWX, 구단 창립 최초 LKL 결승 진출 쾌거! ]
[ 역대 최단기간/최대 격차 순위 상승, 작년 스프링 9위 언더독의 ‘탑독 학살’! ]
[ 결승 대진 인천 트릭스터는 여전히 강팀.. “서머 시즌의 FWX를 모두 이긴 유일한 팀”, 전략은? ]
[ 위업을 세운 박진현(PerBe) 감독, “이 모든 기적이 한 선수로부터 시작됐다는 것을 감히 부정할 수 없다” ]
[ FWX에 남은 마지막 한 걸음 ]
[ 권건, 사실상 ‘올해의 루키’ 확정? ]
[ 메이킹, 공격성, 서포팅.. “도대체 못하는 게 뭐니?” ]
[ 조심스러운 스토브 리그 예측.. 벌써 뜨거운 시장 ]
[ FWX 김수연 단장, “선수층 보강? 스토브 리그? 걱정하지 말아달라, FWX는 운이 없었을 뿐 결코 가난한 팀이 아니다” ]
[ 유니버스 탑 최정인(Summer), “권건과 가장 친한 선수는 바로 나.. 호형호제한다” ]
[ 스톰 미드 강준윤(King), “권건은 스톰의 후예.. 함께 뛰었다면 좋았을 것”. 알고 지내던 사이냐는 질문에는 “알고 지냈던 것 같은 기분은 드는데..” ]
#
결승전은 불과 일주일 후.
선수들은 긴장감 속에 결승을 준비했다.
[ 어때. ]
“괜찮아.”
[ 괜찮아? 육성 계획 달성률 몇 퍼? ]
최근 릴리의 최애는 수박이다.
지금은 내 방 캐비닛 위에 앉아 수박을 오물오물 먹고 있다.
팩으로 포장된 사각 커팅 수박이다.
성적이 잘 나오기 시작하자 팀에는 복지가 넘쳐난다.
아주 예전부터 카페테리아 벽에 원하는 건의 사항을 적는 판이 있었는데.
대체로 식단이나 음료 종류 정도에 불과하던 그 판에 과일을 적었더니 이제 매일 아침 계절 과일이 배송된다.
곽지운은 거기에 초콜릿을 적었지만 건강단 단장 최은호가 지워버렸다.
이 사실을 알지 못하는 곽지운은 꽤 섭섭한 눈치로 과일을 맛있게 먹곤 한다.
이게 우리 팀에만 배송되는 건 아니라서.
덕분에 다른 게임 팀들까지 행복해진 것 같은데, 뭐.
FWX가 통이 크다는 건 알겠다.
“...”
[ 응답 없음? ]
“66.8%.”
[ 응, 답 없음. ]
쪼끄만 게 어디서 이렇게 깝죽거리는 것만 배워왔어.
LOS가 이렇게 무섭다.
[ 근데. ]
릴리가 수박씨를 허공으로 툭 뱉자 스르륵 사라진다.
와!
씨 발라먹을 줄 아시는구나!
[ 희망찬 걔. ]
“희망찬?”
[ 탑. ]
거 너무 시청자 입장 아니요?
[ 걔 말인데.. ]
“어.”
오늘 피드백을 오랫동안 해서일까.
피로가 몰려온다.
[ 아니다. ]
“뭐가 아닌데.”
[ 아니야. 그냥, 잘 키워보라고. ]
“그래.”
[ 포기하지 말고. ]
“포기 안 해.”
그래.
쓸만한 선수니까.
[ 너를 ..로 생각하면서 열.. 하고 있으니까.. ]
그러니까 어쩌면.
내년 이맘때에는.
[ 잘 자. ]
오랜만에 수마가 나를 덮친다.
곧, 결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