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너 왜 그래
“오늘 유찬이 조금 불안한데.”
“충분히 커버는 가능한 정도이긴 한데, 이거 처음에 킬 안 가져갔으면 상당히 불편했겠어요.”
“왜 유찬이가 불안해하지? 쟤가 저런 적이 있었나?”
“지금 온라인 오프라인으로 바로 전환되면서.. 그런 것 같은데.”
김한빛 코치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개인 면담에서는 별일 없었는데. 너무 빠른 적응이 문제인 것 같아요. 복합적일 수도 있구요.”
“온라인 경기가 호재라고 생각했는데 또 호재만은 아니군. 그럼 적응하자마자 경기장이 변하는 거잖아. 경기장, 사옥, 경기장, 결승가면 결승 무대, 다시 경기장..”
제아무리 정신력이 뛰어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가혹한 환경이다.
신인에게는 더욱 그렇다.
침착하게 경기력을 유지하고 있는 권건이 있지만.
저 미스테리한 선수는 그렇다 쳐도 모두가 그럴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음.. 그리고 중압감..”
감코진은 잠시 생각에 잠긴다.
뭘 놓쳤지?
저 무던한 선수가 왜?
또 다른 이유가 뭐가 있을까?
“그래도 우리 세자가 자세가 됐네.”
“형님, 진짜 죄송하지만 이런 드립은 받아들일 수가 없어요.”
“간다. 가요. 감독님, 얘네 지금 바론 가요.”
경기에 몰입한 윤도형이 입을 연다.
“일단 이번 경기는 거의 다 가져왔으니까. 마저 집중하고 해결하자.”
“좋습니다. 이따가 제가 붙을게요.”
박 감독과 김 코치는 말을 마무리했다.
“얘들아.. 잘해라.”
윤도형이 서포터로 출전한 건 최은호에게 회복 시간을 벌어주기 위함이다.
그리고 이제 남은 건 정말 중요한 몇 경기뿐.
아마 앞으로는 기회가 없을 것이다.
아쉬웠지만 감사한 일.
이런 기회가 아니었다면 아예 출전도 못했을 것이고.
자신에 대한 여론을 바꾸지도 못했을 테니까.
“FWX, 잘 큰 칼리기 때문에 일단 오브젝트 치면서 생각합니다!”
“결전을 앞두고 있어요! 바도 궁 아슬아슬하게 쿨! 조금만 더! 지금 9시! 스펠 완충!”
“빅스 역시 양보할 생각 없습니다! 시간 조금만 더 끌면! 전황이 완전히 바뀔지도 모릅니다!”
뜨거운 환호.
저 안에 있던 나.
“그윈이 차니의 카뮐 방향으로 드리블 시도!”
최은호의 자리를 잠시 빌려서 들어갔던 저곳.
“클래스가 빠르게 반응합니다!”
비슷한 나이의 선수들 앞에서 차마 말은 하지 못했지만 사실 고맙다.
“차니, 차니, 차니, 차니! 이번에는! 이번에는!”
그리고 제일 많이 대들고 까불어대던 이유찬도.
자신을 위해서 얼마나 많이 집중해줬는지도 알고 있다.
“이거 지금..!”
“FWX가 고개를..!”
주저 없이 앞으로 훅 들어간 노틸이 하늘 높이 적을 띄워 올리고.
“권건이..!”
리싱의 날렵한 발차기.
“한 호흡에..!”
갈레오가 떨어진다.
빠르다.
정말 빠르다.
관전을 하는 자신에게도 이렇게 빠르게 느껴지는데, 선수들에게는 오죽할까.
“이거! 그윈이! 몇 번 가위질만 했어도! 가위질만 했으면 됐는데!”
“공중에서 점프점프 하다가 딜을 아예 못했어요! 왜 오늘도 공중에 뜸? 무한으로 즐기는 트램폴린? 세 선수의 기가 막힌 궁 연계! 차아아아아니를! 도움닫기 삼아! 멋지게 해냅니다!”
그러니까 믿는다.
“이겨라. 우리 팀.”
윤도형은 곧 다가올 FWX와의 종결이 아쉽다.
“더 하고 싶다. L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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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도형이 경기를 바라보던 것보다 조금 앞선 시점.
느껴진다.
불안감.
물론 당연한 불안감이다.
이런 큰 시험을 앞두고 떨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더 신기한 일이다.
감정이 예민한 김예성은 오늘따라 입을 열기가 어려웠다.
그나마 김예성에게는 1년 전 빅스에서 겪었던 플레이오프다.
그런데 완전히 다르다.
훨씬 더 이기고 싶다.
“보여줘야 해.. 내가, 잘, 할 수 있다는걸..”
탑은 좀 넋이 나간 것 같다.
쟨 이상한 애다.
하지만 이해가 된다.
김예성은 이유찬에 대한 몇 가지 깊은 사실들을 알아버렸다.
남의 사적인 부분을 딱히 알고 싶었던 건 아닌데.
뜻하지 않게 얘랑 어울려 다니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이유찬의 입에서 나온 정보들이 조합되고 말았다.
상대가 먼저 자신의 약점을 숨기지 않으니 나도 약점을 숨기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마음이 놓였다.
“나는 잘 할 수 있을까?”
김예성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응.”
“너 잘해.”
“괜찮아.”
여기저기서 대답이 돌아온다.
“진짜?”
빅스와의 악연은 예전에 벗어던졌다.
이제 거기 있던 시절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오늘 궁금한 게 많네.”
무심하게 툭 들어오는 말.
“모자라면 채워줄게.”
따뜻하지는 않지만 안심되는 목소리.
이쪽은 반대다.
김예성은 권건에 대해 잘 모르지만, 권건은 김예성을 모두 읽고 있다.
“그래.”
희미한 웃음이 나온다.
그렇구나.
나는 이 사람들이랑 친하구나.
오늘은 복습.
여태까지 해왔던 모든 것을 확인하는 시험.
빅스는 과거에 했던 픽으로 현재를 뒤집고 싶어 하지만.
김예성은 양보할 생각이 없다.
“너희 하고 싶은 거 다 해. 바론 친다.”
주장까지 이렇게 말하는데.
“가자.”
그저 존재할 뿐인 미드로 남고 싶지 않다.
#
“아니 무슨 이딴 게임이 다 있어요? 오늘 FWX 완전히 미쳤어요!”
“아까 한타 한 호흡에 쏟아지는 거 보셨어요?”
“저도 같이 봤습니다! 여러분만 보신 게 아니에요!”
“오늘 날이 서있어요! 진짜! 나 아예 보이지가 않았어! 이런 건 인간적으로 슬로우 모션으로 재생해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그건 반말이구요!”
- 에이~ 줫됏내
- 1세트 나가리네
- 아니 대체 왜 밴픽을 저렇게 하는 건데?? 근본 없는 바도 대체 머선일
- 하고 싶었던 건 알겠어 근데 시발 트페가 존나 쓸모가 없잖아
- 불좀꺼줄래 조합 시바 그걸 왜 여기서 하려고 해 FWX 저 새끼들 존나 그거 초고수잖아
- 왜 상대가 잘하는 픽을 굳이 우리가 들고 옴? 뭐 한눈팔았음?? 밴픽 준비 안 해??
- 아아 그것이 [패배감]이라는 것이다 “빅스”야
- 추잡하구나.. 더 이상의 질척임은 “NO”
“이러면 계산서 뽑아 볼 필요도 없죠? 지금 빅스가 아예 못 움직였어요, 아예!”
경기가 빠르게 흘러간다.
“이거, 또 FWX식 게임 됐어요. 이거 승리 공식 완전히 잡혔습니다. 누구 하나가 흔들리더라도 한타로 완벽하게 해결해버리는 FWX식 이기적인 승리 루트. 지금 길이 보였어요. 제 눈에, 이거 똑똑히 스쳤습니다.”
빅스는 어떻게든 승기를 잡아보기 위해 중간중간 흐름을 끊어보려고 했지만.
“지금 엄청 빨라요. 속도 마구 붙습니다. 이거 아예 숨 쉴 틈을 안 줘요.”
“지금 카뮐 밸류가 너무 높아졌어요. 아까의 그 차니가 아닙니다. 이제 R키 하나 정도 빼고 상대해도 어지간하면 못 잡아요!”
팬들이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 픽.
빅스가 FWX에게 증명하려 했던 과거의 픽들은 재가 된다.
다만 빅스에서 할 수 있는 한 가지.
“이거! 오늘 두 팀 집중력 만만치 않아요. 빅스가 어떻게든 수성하면서 경기 길어지고 있습니다.”
“1분 1초라도 더 버티려고 노력하고 있거든요?”
시간 끌기.
이건 분명히 하나의 작전이다.
이번 세트는 이미 물 건너갔지만 다음 세트, 그리고 또 그다음 세트, 혹은 그 뒤를 더 유리하게 이끌어 가고자 하는 빅스의 노련한 전략.
“하지만 결국 영혼까지 넘어갑니다, 벌써 두 번째 바론! 압박은 계속됩니다! 너네 뭐 돼? 왜 거기 틀어박혀 있어! 후반 밸류 뭐, 셰나라도 있어? 앙?”
“나오라는 말이죠! 이제 정말 안 나갈 수가 없어요!”
“마지막 희망! 아까 철저하게 게릴라 작전으로 확보했던 바위게! 이거 시야 꺼지면 이제! 아무것도 안 보여요! 너무 부담스러운데요!”
하지만 그마저도.
“이거? 이거? 권건이 또.. 권건이 또오오오오! 바위게 시야 피해서 침투!”
“지금 그윈 앞세워서 살짝 나가보는데, 이거! 이거! 순진하게! 저기 호랑이가 기다리고 있어요!”
“끼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그윈! 그윈! 그윈! 바로! 끊깁니다!”
“이거, 이거 빅스 다운! 다운! 못 일어납니다! 이거! 그냥 다 죽어요! 더 버틸 수가 없습니다! 이제는 시간 끌기 안 돼요!”
경기 시간을 더 이상 지속시킬 수 없다는 듯.
“네명! 네명 죽었습니다! 이거 이제..!”
“이제 끝납니다! 이대로 밀고 들어가면, 시간이 꽤 끌린 이 경기가! 드디어! 첫번째 세트가!”
“드디어어어어어어억!”
끝이 난다.
“이제 이거 여태까지 망설였던 표현 쓸 수 있을 것 같죠? 빅 클럽 매치! 이제 명실상부한 빅 클럽이 된 FWX가! 빅스를 상대로! 새로운 동화를 써 내려갑니다! 플레이오프 2라운드, 첫 번째 세트에서 승리를 차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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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KL) 해외 해설 Jack “Oh! Look at the Fireworks!” ]
[ FWXvs빅스 2세트, FWX가 힘들게 가져간 승리 ]
[ 1세트의 패인은 픽밴. 2세트의 패인은 “정글”? ]
[ “모레 있을 수학 시험 준비를 했는데.. 의외로 체육 시험이 너무 어려워요”, 결승에 집중했나? 무너져버린 빅스 ]
[ 승리의 키는 그에게 달렸다.. FWX의 유일한 희망 ]
[ 권건을 틀어막기 위한 다음 전략 ]
[ 빅스의 패패승승승? FWX의 월챔 진출? 진짜 드라마의 주인공은 누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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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제목을 아래로 훑으며 리뷰 업로드 준비를 하던 FWX 스트리머 강동흔.
그는 프로로 오랫동안 활동했던 만큼 고전 스타일의 LKL을 잘 아는 사람이다.
“음..”
1세트에 이어 2세트가 끝났다.
FWX의 승리.
보통이라면 이대로 기세를 몰아 3세트까지 이기는 게 자연스러울 것이다.
제법 차이가 났으니까.
강동흔 역시 3세트까지 FWX가 가져가리라는 데에 이견은 없었다.
물론 우리 팀이라서 그렇다.
“빅스가 선배답긴 하네.”
강동흔은 메모를 적어 내려갔다.
“지고 있는 중에도 어떻게든 경기를 지연시켜서.. 변수를 늘리려고 하고 있어.”
권건은 다시 봐도 놀랍다.
날렵한 피지컬을 중심으로 동선, 메커니즘 이해, 그리고 챔피언 풀.
없다시피 한 스트리머를 키우기 위해 FWX에서 받은 지원 중 한가지는 선수 오더 관련된 자료.
그 모든 내용을 종합해볼 때.
그야말로 세계 최고의 정글러면서 동시에 뛰어난 뇌지컬을 가졌다.
“하지만..”
한 명의 힘으로 승리하는 건 무리다.
인게임 수행은 다 같이 하는 거니까.
이런 빅 매치에서는 더욱 그렇다.
다음 세트를 이겨버리면 끝이지만, 혹시라도 시간이 많이 지연된 상태에서 네 번째까지 넘어가면 기존에 잘 따라오던 선수들까지 흔들리는 수가 있다.
그리고.
이 선수들은 플레이오프에 익숙하지 않다.
월챔 역시 꿈도 꿔보지 않은 선수들이다.
원래라면 귀가해서 부모님이나 친구와 시간을 보낼 시기.
시즌을 길게 달리는 ‘습관’이 없다.
정말 혹시라도.
패패승승승을 당하게 되면, FWX는 결승에도 월챔에도 가지 못한다.
월챔을 밟아보지도 못하면.
이듬해 월챔 준비도 힘들어질 수밖에 없다.
강동흔이 불안감을 털어내며 머리를 흔들었다.
“근데 탑은 왜 저래?”
빅스는 큰 누수부터 막자는 판단을 했는지 2세트부터 권건을 견제하기 시작했고.
반대로 탑을 파기 시작했다.
이건 3세트도 마찬가지일 거다.
탑이 신인인 FWX는, 경력이 긴 바텀 듀오보다 탑 방향을 봐주는 경향이 있다.
“뭐. 탑들이 다 그렇지 뭐. 봐주면 봐준다고 지랄, 안 봐주면 안 봐준다고 지랄. 하여간 지지리도 말 안 듣고 널뛰기하는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 에이. 지운이가 얼마나 힘들까.”
원딜 출신 강동흔은 습관적 탑 혐오를 하며 폰을 집어 들었다.
프로 시절에는 그렇게 지겨웠던 일들인데.
한 발 떨어져서 보니까 꽤 재밌긴 하다.
FWX가 잘나가서 그런 걸 수도 있지만.
“어차피 편집까지 생각하면 경기가 다 끝난 다음에나 업로드가 가능할 테니까..”
좀 아쉽다.
다음 시즌에는 반드시 동시 중계 신청해야지.
“찌세야.. 경기.. 보고 있어?”
툭툭 문자를 보낸다.
강동흔은 처음에는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것도, 방송도 어떻게 해야 할지도 잘 몰랐지만.
지세현의 도움을 받아 꽤 성장했다.
평범한 대학생이라던데 요즘 이십대는 감각이 참 대단하다.
거기다 얼핏 듣기로는 무슨 코인도 해서 꽤 이득을 봤다고..
처음엔 빅스 친구에게 소액으로 출발했다나?
예전에 벌었던 돈을 코인으로 날린 강동흔이 듣기에는 터무니없이 부러운 말이어서 그냥 웃어넘겼다.
그냥 일이나 열심히 해야지.
“어쨌든 이겨라. FW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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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러는데.”
이제 이유찬은 나조차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초조해 보였다.
도대체 뭐가 문제야?
다 말해주는데.
“잘! 하고 싶어서.”
“잘하고 싶으면 그렇게 하면 안 되지.”
“...”
오늘 이유찬은 내 말을 들으면서도 미세하게 앞서나가는 경향이 있었다.
꽤 잘 훈련해왔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와서 왜?
바텀이야 듀오의 판단이 더 중요할 때가 많으니 주로 상황 브리핑을 제공하고.
미드는 이제 어느 정도 조율을 마쳐 내 손과 발이 되어준다.
그리고 탑은, 아직 내가 구체적으로 행동 지시를 내리고 있다.
“여태까지 잘 해왔잖아.”
살짝 달래본다.
탑이 흔들리면 곤란하다.
“...”
이유찬은 절대 말을 안 들을 것 같은 입 모양을 하고 있다.
와, 이게 미운 일곱살?
누구누구가 생각나는 얼굴이다.
“혹시 근육 경련 같은 게 있는 거라면 주먹을 꽉 쥔 다음..”
“건아.”
김예성이 드물게 내 말을 끊었다.
“일단 이번 세트 한 번 더 해보자. 그리고..”
“그리고?”
“아니야. 일단. 다음 경기. 내가 끝낼게.”
김예성이 깊은 눈으로 말했다.
“갚아줘야 할 것도 있거든. 아주 건방진 사람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