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게이머, 그만두고 싶습니다-160화 (161/326)

160화. 아 다르고 어 다르다

서머 시즌의 일흔 여덟번 째 경기.

호성적의 대전 FWX와 대구 유니버스.

좀 더 미래를 보는 두 팀의 시즌 말 경기는 탐색전 성향이 강했다.

또, 동시에 서로의 대진에 자신감이 없지 않았기에.

온라인 경기의 편안한 분위기 속 유쾌한 경기력을 보여주려는 두 팀의 마음이 통해 산뜻한 경기를 시작했다.

“여기 권건 있냐?”

해설진에게는 늙은 호랑이, 팀원들에게는 미친개라고 불리는 최정인은 의자에 편하게 기대앉았다.

역시 의자는 유니버스 에디션.

비록 마스킹 테이프로 브랜드를 가렸지만 이런 콜라보레이션 상품은 팀의 품격을 말해주는 척도다.

FWX에는 이런 거 없을걸.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맵핵 써줘? 블랙 쉽 월?”

“진도율 미쳤냐? 왜 갑자기 욕을 하고 그래?”

“아니 치트키인데..”

“구라치지 마라, 쉽월아.”

“...”

유니버스의 탑 최정인은 요즘 부쩍 대답이 없는 권건에게 섭섭하다.

사실 원래도 대답을 거의 안 하긴 했지만 최근에 누구랑 친추를 했다더라 하는 소식이 들려온다.

최정인의 팬들이 알려줬다.

물론, 팬들이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

그는 권건 소식을 궁금해하긴 하지만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스토커까지는 아니다.

종종 권건에게 관심을 보이는 댓글에 귀신같이 유니버스 써머가 아니냐는 댓글이 달리곤 하는데.

그건 터무니없는 오해다.

절반 정도는.

“여기서 차니인가 걔 대기하고 있겠네. 뻔하지.”

최정인은 랭겜을 돌릴 때, 몰래몰래 권건의 접속 시간에 맞춰 같이 돌린다.

권건은 아주 규칙적인 사람이었기에 크게 어렵지는 않았다.

그런데 기껏 그렇게 노력해도.

희한하게 적으로만 만난다.

MMR이 권건과 자신을 같은 등급으로 평가하나?

너무 강한 사람 둘이 같은 팀이 되면 상대에게 미안하니까?

하긴.. 이해한다.

그런 거라면 어쩔 수 없지.

“그럼 마음의 메시지를.. 탑대탑으로. 전달해주겠지.”

근데 적으로 걸리면 자꾸만 탑갱을 와서 최정인을 죽인다.

이건 틀림없이 권건도 나름대로 아는 척하려는 뜻?

같은 팀이 되지 못해서 아쉽다는, 뭐 그런.

무뚝뚝하긴.

오히려 좋아.

나에게 어울리는 정글.

지금 있는 진도율은 어디보자.. 그래, 서포터 보내면 되겠다.

아니면 미드?

AP 정글을 좀 하니까.

미드도 하겠지 뭐.

어차피 캐리는 탑이 하는 거니까.

물론 '탑'이 '탑'하는 생각일 뿐이다.

“FWX.. 에게.. ”

최정인은 감정표현을 띄운다.

테크 체크가 특별히 많지 않아 시간적 여유가 충분했던 오늘.

한 땀 한 땀 성의껏 감정표현 아이콘을 준비했다.

“권건..”

맨 처음에는 FWX 아이콘 감정표현.

“왜 연락이.. 안돼..”

슬퍼하는 꿀벌 감정표현.

“하지만 이해한다..”

도도하게 오케이를 하는 피요라 감정표현.

“우리 팀에.”

유니버스 아이콘 감정표현.

“언제든지 연락.. 해라..”

야쓰오가 멋지게 손짓하는 감정표현.

“이만하면 전달이 됐겠지?”

만족해하는 탑 최정인에게.

“되겠냐? 피요라랑 야쓰오가 언제부터 그렇게 애틋한 캐릭터였냐? 다 수학 과학이잖아. 손짓이 아니라 야쓰오 얼굴에 어그로가 털리는데.”

정글러 진도율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태클을 건다.

“닥쳐라, 정글. 원래 탑은 수학 과학으로 이야기하는 거다.”

“니나 아닥. 너 보니까 왜 탑이 수학 과학인 줄 알겠다."

“수학과 과학은 존나 위대한 학문이니까?”

“아니.”

“그럼 뭐.”

“둘 다 답이 없으니까.”

“쉽월.”

감정표현은 채팅을 대신하는 광범위한 전달 방식이다.

시즌 말이 될수록, 탈락이 확정되거나 진출이 확정될수록 점점 자주 보이는 형태의 교류 형태.

선수들은 때론 움직임으로.

때론 대사, 도발 모션으로.

그리고 감정 표현으로 자신을 표현한다.

하지만 단점이 있다면.

“내 말을 이해해줄 거라고 믿는다. 처니.”

“상대 탑 처니 아니고 차니라고. 이제 좀 외워라.”

“어쨌든.”

오해가 생길 여지가 충분하다는 것.

“형들.”

“어?”

“윤도형. 너는 한눈팔지 말고 빨리 장신구 바꿔 끼고 와.”

“오케이. 오케이.”

“지금 쑤머가..”

상대 탑의 감정표현을 주시하던 이유찬이 날카로운 눈빛을 빛냈다.

“써머야. 여름. 여름 몰라?”

“어쨌든 탑이 도발을 하는 것 같은데..”

“도발?”

“나도 볼게.”

김예성이 함께 이유찬의 시야를 주시한다.

하지만 최정인이 여러 번에 걸쳐 내용을 돌렸기에 김예성은 마지막 감정 표현부터 해석했다.

“들어와 들어와 - FWX - 슬펐꿀벌 - 깔끔하군 - 유니버스.”

“감정표현 이름을 외워? 너 설마 요른 업글템까지 외우냐?”

“이거.”

질린 얼굴의 이유찬을 김예성은 깔끔하게 무시했다.

상대는 권건을 빼가려는 것처럼 예의 없이 구는 탑.

FWX에 대한 감정이 좋을 리 없다.

그러니까 이 말은.

“도발이네.”

“뭐?”

“들어와라, FWX. 울게 해줄게. 오케이? 유니버스로부터.”

“와. 너 고고학자 같다.”

“이건 상형문자나 다를 바 없지. 근데 탑, 니가 만만한가 본데.”

“쉣. 나한테 보내는 메시지였어?”

“어. 니가 봤잖아.”

“김미드. 나 이거 못 참아.”

“나도.”

“힘을 합치자. 건아. 봤지?”

“그래.”

뜻밖에 걸려든 것은 다른 사람들이었다.

갑자기 불타오르는 상체에.

“그래.. 위에서 힘 내주면 좋지.”

“야. 근데 상형 문자가 뭐야? 넌 아냐? 하여간 예성이 쟤는 똑똑한데 이상해.”

“윤도형 너만 하겠냐?”

“나 뭐? 똑똑하다고?”

“할많하않.”

주장은 어깨를 으쓱였다.

#

- (UNV) 우리 써머형 왜 자꾸 감정표현 하냐?

ㄴ 몰라 존나 수다쟁이네

ㄴㄴ 형! 우리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말로 하라고!

ㄴㄴ 하고 싶은 말이 많은가 본데?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ㄴㄴ 근데 너무 불쌍하잖아ㅋㅋㅋㅋㅋㅋㅋ

ㄴ 죽을 때마다 피요라 야쓰오 이모티콘 왜 쓰는거ㅋㅋ

ㄴㄴ 몰라ㅋㅋㅋㅋㅋㅋ 괜찮아 드루와 드루와 하는 거여?

ㄴㄴ 계속 죽여보라고??? 도발???

ㄴㄴ 존나 알쏭달쏭한 표정하고 있는데?

ㄴㄴ 난 쟤가 제일 이상해 진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ㄴㄴ “서머”에는 미쳐있는 남자 미쳤써머

ㄴ 써머랑 차니 탑 둘이서 뭐해ㅋㅋㅋㅋ 또 협곡 데이트?

ㄴㄴ 서로 감정표현 이해하는 거 맞아?

ㄴㄴ ㄹㅇ 누렁이 듀오ㅋㅋㅋㅋㅋ

ㄴㄴ 둘 다 개인데 말 안 통함

ㄴㄴ 아 근데 오늘 권건 존나 탑 파네ㅋㅋㅋㅋ

ㄴㄴ 권건이 많이 올수록 강한 탑이라는 말이 있다

ㄴㄴ 이야 써머형 축하해 인정받았네 시발?

- (FWX) 바텀 암호문 해석되시는 분?

ㄴ 오늘 뭐 있냐고ㅋㅋㅋ 감정표현 배틀임?

ㄴㄴ ㄹㅇㅋㅋㅋ 뭐라는 거냐 쟨 또?

ㄴㄴ ㅋㅋㅋㅋㅋㅋㅋ몰라 킬샷 저 새기 우리 세자한테 왜 친한척이야ㅋㅋㅋ

ㄴㄴ 전에도 트래쉬 토크 하고 나서 졌잖아ㅋㅋㅋ

ㄴㄴ 그러고 엉엉 울었다는 소문이 있음

ㄴㄴ 누가 그럼?

ㄴㄴ 써머 형이

ㄴㄴ 써머 그 새낀 진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첩잔가ㅋㅋㅋㅋㅋ

ㄴㄴ 미라쥬 출신 특) 할 말 못할 말 구분 못함ㅋㅋㅋ

#

“뭐해? 톡? 누구?”

경기는 무탈하게 끝났다.

“어. 강은찬한테 오늘 감정 표현 무슨 뜻이었는지.”

우리는 아슬아슬하게 매치 승을 차지했다.

마지막 세트에 최은호를 투입하면서 갑자기 달라진 구도가 유효했다.

“유니 원딜 킬샷 말하는 거야? 걔가 전에 트래쉬 토크 지리긴 했어도.. 오늘은 그냥 안부 묻는 것 같던데?”

최은호가 자기 의견을 말했지만.

“그럴 리가 없어, 형.”

“그래. 걔를 더 팼어야 하는 건데.”

여전히 상체는 불타고 있었다.

“감정 표현하는 거 봤지.”

“그래. 내가 뜻 해석해보니까 너를 만나면 찢어버리겠다, 니 지금 뭐해 허접아.. 이런 거였어. 진짜 틀림없다.”

“내 해석도 너랑 비슷해. 탑, 너 좀 아네?”

“화냈더니 배고프다.”

“좋아. 그럼 내가 뭘 좀 줄게.. 좋은 제품이 들어왔는데..”

두 사람이 사라지고 나서.

“뭐래?”

최은호의 물음에.

“팀의 평화와 사기 증진을 위해서 아무 말도 안 하는 게 나을 것 같아.”

곽지운이 대답했다.

“하여간. 쟤들 언어팩 업뎃 좀 해야 해. 진짜 말이 안 된다니까.”

최은호가 가만가만 팔 스트레칭 동작을 취하며 말했다.

그래.

말이 안 된다.

나는 잠깐 잊고 있었던 중요한 기억을 되짚고 있다.

‘릴리.’

지난 미라쥬 경기 직후.

그리고 왕지우가 위기에 처하기 직전.

분명히 이유찬이 그랬다.

하얀 원피스를 입은 여자를 봤다고.

아무리 이유찬이 동물에 미쳤기로서니.

여자와 소녀를 구분하지 못할 정도는 아닐 거다.

성별을 말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어린아이가 경기장 내를 돌아다닌다면.

그게 더 이상하게 느껴지는 게 맞지 않을까?

‘김릴리.’

그 후 이 작은 악마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다.

나는 이 상황은 세 가지로 가정했다.

첫 번째, 이유찬이 소복 입은 처녀 귀신을 봤다.

사실 나는 귀신의 존재를 믿지 않지만.

악마가 있다는 것도, 신적인 힘이 있다는 것도 알았는 데 없을 건 또 뭔가.

물론 경기장 내에 귀신이 있다는 건 좀.. 뭐랄까, 이렇게 안 어울리는 조합이 또 있을까 싶긴 하지만.

두 번째, 이유찬이 정말로 릴리를 봤지만 내 시선과는 다른 모습으로 봤다.

나도 경기에 집중하느라 바빴고 이유찬과 동시에 본 적은 없지만.

어쨌든 우리가 본 존재가 모두 릴리라고 가정한다면.

이건 무슨 뜻일지 나도 잘 모르겠다.

세 번째, 내 눈에는 보이지 않는 다른 악마가 있다.

이건 좀 흥미로운 이야기다.

하지만 이유찬에게 악마가 붙는다든가 할 가능성은 작다.

릴리는 예전부터 ‘다른 스포츠에는 자리가 없다’라는 표현을 썼으니까.

‘김릴리? 어딨니?’

평소에는 오지 말라고 할 때도 나와서 괴롭히더니.

“건아.”

오히려 응답한 건 최은호다.

“오늘은 운동 안 가? 아이고, 아야.”

그러다 조금 팔을 가파른 각도로 세웠는지 앓는 소리를 낸다.

“야! 뭐야! 최은호! 당장 메디컬 체크 들어가?!”

“아니, 그냥 살짝..”

“바로 119 불러?!”

“미친놈아.. 그 정도 아닌 거 알잖아..”

곽지운이 반은 걱정, 반은 놀리는 식으로 하는 말에 최은호가 눈썹을 벅벅 긁는다.

“이제 진짜 많이 괜찮다니까.”

그래. 저것도 있었지.

‘최릴리?’

사실 손목 부상은 사람마다 편차가 매우 크다.

회복이 매우 느린 경우도 있고 놀랄 만큼 빠른 케이스도 있다.

그럼 최은호는?

철저하게 관리했고, 휴식 기간과 주기를 잘 두고 있다곤 하지만..

하나가 미심쩍으니 이것저것 의심이 생긴다.

릴리가 최은호의 회복도 도운 거 아니야?

“얘는 오늘 눈빛이 왜 이래?”

“몰라. 운동 안 가서 그런가 봐. 일단 건드리지 마.”

“그래. 아킬레우스에게도 약점은 있는 법이지.”

사실 릴리가 전지전능인 거 아니야?

알고 보면 나 그냥 우승도 시켜줄 수 있고.

상대 픽도 막 조작할 수 있고.

그럴 수 있는 거 아닐까?

악마라고 했는데 사실은 내 수호천사였던거임.

‘야. 휠릴리.’

이래도 안 나와?

‘탈리아. 이렐리야. 릴리야.’

[ 그만 좀 해! ]

오.

[ 너 진짜 무슨 생각 하고 사니? ]

‘말이 너무 심하네.’

[ 니가 더 심해. 나도 바쁜 악마야! 그렇게 수다 떨겠다고 찾고 그러면 내가 바로바로 나올 수 있고 그런 줄 알아? 지금 내가 랭.. ]

‘랭크전? 승급전?’

릴리는 어딘가 뜨끔한 표정이다.

랭크 승급전을 하고 있을 때 사람을 불러보겠습니다.

무척 폭력적이로군요.

[ 랭.. 랭가슴을 앓고 있었다우. ]

무슨 랭가슴이야.

‘이봐 에미나이, 언제 북쪽 사람이 되었소?’

[ 야, 니 내 말이 그리도 야시꼽니? 이 간나야, 에미나이는 욕설이지. 그래 쓰는 게 아니라우. 어디 뚝감자 같은 게 천지를 너덜거리니? ]

잘하네.

뭐지.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정신이 아득해진다.

이거 현실인가.

‘아니, 무슨 말을 이렇게 잘..’

[ 코리아 랭귀지라고 해서 배웠는데 잘못 짚었다. 어쩔래? ]

댁에도 영어 기반의 검색 엔진이 있나요?

자동 언어 번역이 아니라 언어팩 패치식이었나요?

일단 전지전능은 절대 아니고.

[ 꼽냐? ]

화가 많은걸로 보아 나만을 위한 수호천사 역시 아닌 것 같다.

[ 사과는? ]

‘미안합니다. 욕인 줄 몰랐습니다.’

준비해놨던 젤리가 어디 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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