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망나니
“지금? 지금 가면 되나?”
“어.”
“오케이.”
“탑. 제발 머리 좀 다듬어..”
김예성은 안타까운 얼굴로 이유찬의 머리를 바라봤다.
경기장이 아닌 만큼 더 자연스러운 꼴이다.
경기장에서는 가벼운 메이크업을 해주거든.
그렇다고 연예인처럼 받는 건 아니다.
말 그대로 가볍게.
그래도 카메라 앞에 서는 거니까.
“귀찮은데.”
이유찬은 오늘도 더벅머리다.
분명히 얼마 전에 깎은 것 같은데 사람이 머리가 저렇게 빨리 자랄 수가 있나?
쟤 무슨 모발 빔이라도 맞은 거야?
“어떻게 하면 머리 자를래?”
“머리를 어떻게 자름. 나 그거 되나? 머리 없는 기사.”
“듀라한.”
연장자 라인이 대화에 끼어든다.
“개 간지나겠다. 우리 탑이 듀라한?”
“우탑듀.”
“나 그 팀 갈래!”
“그래요? 현대 과학 기술로 가능한가? 그럼 나 자를 용의 있어! 헤드 캇!”
“그게 됐으면 흑마법이 나왔겠지..”
“미친놈 아니야, 이거? 얘들아. 제발 그런 말 하지 말자. 얘 순수또라이니까.”
쓸데없는 말이 오가면서 김예성의 안타까움은 멀리 잊혔다.
오늘은 수원 해머스와의 경기.
우리는 자력으로 플레이오프를 거머쥐었고, 해머스는 예전에 탈락했다.
FWX가 뛰어오름과 동시에.
우리의 플레이 스타일을 표방하는 호넷, 그리고 하위권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웠던 F.L.E까지 힘을 내면서.
한때 통곡의 벽이라고 불렸던 해머스는 동네북이 됐다.
해머스의 전략이 널리 알려진 탓이기도 하다.
A코스, B코스 둘 중 하나만 때려 맞춰도 한 세트를 잡고 가는 게 어려운 건 아니니까.
“준비해주세요.”
“네.”
진행 자체는 특별히 다르지는 않았다.
이렇게 갑작스럽게는 아니지만 나도 온라인 경기를 해봤던 터라.
송출되지는 않지만 혹시 모를 부정행위를 방지하기 위한 후방 카메라 설치가 완료되고.
심판진의 입장을 마지막으로 모든 준비는 끝났다.
“경기장과 똑같다는 생각으로 임해라.”
“스크림 아니야. 카메라에 너희 모습이 나가고 있다는 사실도 잊지 말고..”
온라인 경기 진행 시.
종종 지나치게 편한 자세나 단정하지 못한 의복으로 쓸데없이 이슈가 되는 경우도 있는 만큼 팀에서는 ‘예의’를 잊지 않을 것을 당부했다.
항상 개인적인 공간이었던 연습실이라는 장소 탓에 해이해질 수 있는 법이거든.
하지만 선수들은 제법 의젓한 자세로 앉아있었다.
이것이 리그 경기라는 걸 인지한 모양이다.
어느새 엉망이던 이유찬의 머리도 스탭들에 의해 어느 정도 정리되어있었다.
저걸 어떻게 빗어 넘겼지?
우리 팀 일 잘하네.
“가자, FWX!”
“화이팅!”
어쨌든 이유찬과 김예성은 처음 해보는 온라인 경기.
그런데 마침 상대가 ‘묘수풀이 승부’의 해머스?
이건 좋은 제물이지.
#
“탑 포지션을 플레이하시는 유저분들께는 진짜 미안한 얘기지만, 정글러 입장에서 탑 2렙 갱은 가지 않는 게 좋습니다.”
“왜죠?”
“일단 죽여도 바로 올 수 있다는 점이 있구요.”
“네에.”
“무엇보다도 실패하면.”
“실패하면요!”
“이렇게에에에에에엑! 쪼오오오오올딱 망해버리는 수가 있어요!”
“차아아아아아아니이이이이이이!”
FWX의 탑이 시작하자마자 거대한 선취점을 터뜨렸다.
“리모 선수와 아자부 선수가 무리하는 것을 놓치지 않고 바로 낚아챕니다! 이거, 리모 선수 그대로 죽었어요! 아자부 선수가 갱승사자 됐습니다! 괜히 왔죠.”
“이럴 거면 갱을 왜 왔어! 너 때문에 내가 죽었잖아아악! 니가 죽였어!”
“아, 물론 그렇게까지 말하지는 않죠?”
- 해설 급 손절ㅋㅋㅋ
- 너무 탑 중심 사고방식ㅋㅋㅋㅋ 아니냐고ㅋㅋㅋ
- 갱은 정글 혼자 결정하는 게 아니니깐^^ 다 협의가 끝난 거지 탑 탓임
- 아니지 무조건 갱 온 정글이 잘못한 거지 ㅅㅂ
- 너 탑이니?
- 너는 정글이니?
“예. 그렇습니다. 그렇게까지는 말하지 않고 마음속에 그냥 작은 응어리가 생기죠. 그리고 솔직히, 이런 말은 합니다. 그냥.. 정글 열심히 돌아줘. 탑은 내가 알아서 할게. 진짜 진짜 안 와도, 괜찮아.”
“그 정도는 합니다. 확실히. 이제 서로 좀 불편해졌거든요.”
- 극적 타결
“어쨌든 이거! 시작하자마자 큰일 났어요! FWX가 절대 만만한 팀이 아니거든요? 이거 최근에 탑이 약간 휘청거리는 느낌이었는데, 공격적인 픽을 잡은 차니 선수는 완전히 다른 사람입니다!”
“2라운드 들어서 폼이 급격하게 올라갔죠!”
“하하하하하하하하핫!”
“잘했어.”
“으아하하하하하하하하핫!”
“잘했다고.”
“정교함이 없다면! 망나니일 뿐! 나는! 차니! 차니는! 영어로! 아임 차아아아니!”
“시끄러워!”
최근 경기에서 다소 수비적인 역할을 맡았던 이유찬은 이번에 극도로 공격적인 역할을 부여받았다.
이유찬이 가장 행복해하는 순간.
- 누가 우리 차니한테 시끄럽다고 말했어? 매우 동의
- 라온 아님?ㅋㅋㅋㅋㅋㅋㅋㅋ
- 소리 좀 지르지 마라 차니야ㅋㅋㅋㅋ
- 쟤 게임 원래 저렇게 하냐고ㅋㅋㅋㅋ
- 자기 집?이라고 기가 살았네
- 이런 거 많이 틀어줘요 옵저버님ㅋㅋㅋㅋㅋㅋ
- 시작하자마자 킬 터뜨리는 거 너무 행복하고~
살아있는 여포 그 자체.
“탑, 6레벨 이후에 올라갈게.”
“안 와도 돼!”
“그래?”
“아니? 와 줘!”
“그래.”
“내가 탑! 라인! 혼자! 볼 테니까! 너도! 잘해라! 김미드!”
“그게 원래 니 일이야..”
어떤 의미에서 진정한 방구석 여포인 이유찬의 텐션은 찌를 듯이 올라갔다.
“라온, 라온, 라아아아아아아온! 오랜만에 들고나온 갈레오! 떨어집니다아아아악!”
그리고 중간에 일어난 교전.
“지금 도발 예술이에요! 차징 시간이 길지는 않았지만 완벽하게 3인 도발 들어가면서! 깔끔하게 발을 묶습니다!”
오늘의 FWX 컨셉은.
‘강자’.
“세자, 세자, 세자의 완벽한! 라인전! 오늘 진짜 손 싸움이거든요!”
“칼리로 이즈를 압도합니다! 이거, 바텀에서도! 허니 선수, 오늘 마음이 왜 이렇게 급하죠!”
“지금 폴리 선수의 노틸이 팔굽혀펴기를 한다고 거기에 빨려 들어가면 안 됩니다! 이 선수는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함정입니다!”
압도하는 밴픽은 아니었다.
상체에서 깔끔하게 카갈을 가져갔고 권건이 오랜만에 리싱을 잡았지만.
“추격 면에서 해머스가 절대 밀리지 않거든요? 이거, 끊어야 합니다. 끊어야 해요! 어떻게든! 잘라먹기만 제대로 한다면 틀림없이!”
“아, 이거 차니는 안 되겠다. 차라리 칼리를 한번 끊어보자? 근데, 이거. 쉽게 잡기 어려워요.”
해머스 역시 밴픽 면에서는 꽤 뛰어난 팀이었고, FWX를 막기 위해 서로 좋은 수를 뒀다.
트페와 녹턴을 이용한 강력한 끊어먹기 조합.
“전반적으로 해머스는 발이 빠릅니다. 반드시 상대보다 앞서나가야 해요.”
하지만 밴픽에서 맞먹더라도.
“지금, 지금! FWX가 전장을 마구 휩쓸어요! 솔직히 이건 정교하다기보다는 그냥 힘이 너무 강합니다! 말 그대로 망나니일 뿐!”
“이거! 이거! 이거! 해머스 한타 설계 완전히 꼬였어요! 운영 주도권 그대로 넘겨줍니다!”
압도적인 실력차 앞에서 큰 의미가 없다.
“그냥, 차니가! 칼부림을 그냥, 그냥! 으아! 이거! 점멸, 점멸, 점멸이라도! 아니이이이! 뒤에서 자꾸 권건이 돌아다니니까 앞으로 뚫어보려고 할 수밖에 없잖아요!”
“실례지만 뭐 하시는 분이시죠?”
“망나니입니다만? 차아아아아아니! 솔-로-키이이이이일!”
- 사형 집행인 망차니
- 탑에 사는 망아치
- 우리 팀 막내는 망나니..
- 얘도 약강강약이야?
- 약강강강인 것 같은데? 대신 탱커가 하드 카운터임
- 자신과의 싸움
날뛴다.
“캐리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캐리요?”
“저는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온도. 이 습도.. 이게 캐리의 순간!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강적을 만나 스팸 전화 070을 만들어내던 차니가! 해머스의 리모 선수를 완전히! 박! 살! 내고 있습니다!”
“사실 그 정도는 아니고, 그냥 연고지를 응원하는 숫자였죠. 대전 지역 번호 042.”
- 소름 ㄷㄷㄷ
- 맞춘 듯이 042;;
- 차니 그는 대체;;;
- 내 솔랭 미드는 인천 출신이 많은가 보네..
- 어라 나 왜 눈물이
전과는 확실히 달라진 수준.
“지금 해머스, 아주 싸늘해요.”
그리고 많이 달라진 상황.
“가지고 있던 장점마저 흔들리고 있습니다.”
플옵이 결정된 팀과.
“그래도 끝까지 좋은 모습 보여줘야겠죠! 아직 모릅니다. 이거, 끝까지 싸우면! 끝까지 싸우면!”
완전히 탈락한 팀.
“아, 끊겨요, 끊겨요! 좋은 매복! 중요한 앞 라인인 그윈이 잡힙니다!”
시즌 초, 과거의 벽을 부수고 해머스를 넘어갔던 FWX는.
“이거 벽 느껴져요.. 벽 느껴집니다. 너무, 너무 강해요, 너무 강합니다!”
“너희들은 포위됐다! 포위됐다! 항복하라! 오바! 최! 후! 통! 첩!”
출입을 통제한 채.
“일제히 달려.. 듭니다!”
하늘에서.
“라온의 갈레오!”
땅에서.
“칼리와 노틸!”
그리고.
“도망친 곳에는 권건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동서남북 어디에서나 존재하는.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 너무 시원하고;;
- 이 경기.. 오프라인에서 봤다면 어땠을까?
- 스쁘라이트~ 샤워~
“이게 FWX! 자력 플레이오프 진출 팀의 빠워! FWX 마크 투! 새로운 여정! 선수들이 힘을 숨김! 이번에 진행되는 현장 공사가! FWX 포토월이 하도 닳아서! 그걸 다시 달기 위해 진행되고 있다는 소문이 있어요!”
“오버 좀 하지 마세요.”
해머스 눈앞의 거대한 벽이 됐다.
#
“오늘 유찬이 컨디션 굉장하던데요.”
“이례적이었지?”
경기는 큰 어려움 없이 끝났다.
경기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절차가 복잡했지만, 경기 종료 후는 오히려 빨랐다.
이르게 퇴근한 느낌.
선수들은 내, 외부의 인터뷰를 진행하는 사이.
감코진은 정보가 휘발되기 전에 정리했다.
“네. 평소보다 텐션이 높았어요.”
김한빛 코치가 대답하고.
“인게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최수철 코치 역시 대답했다.
여태까지 있었던 모든 경기에서.
권건은 숨 쉬듯 한 세트 이상 플레이어 오브 더 매치를 챙겨가곤 했지만, 오늘은 처음으로 권건이 POM을 받지 못한 경기.
“이거 정말 희소식인데요.”
팀은 오히려 이 소식을 반가워했다.
“유찬이가 한 번, 지운이가 한 번. 좋습니다.”
권건이 쌓은 점수는 서머에만 벌써 1300점.
이른 시기에 플레이어 오브 더 스플릿이 확실시되고 있었다.
이건 개인에게는 명예로운 일.
하지만 팀 전체로 봐서는 한명에게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지는 것이었기에, 권건이 빠지게 된다면 팀이 휘청거리는 불안정한 상태라는 것 역시 인정할 수밖에 없다.
“당연히 건이가 있으면 좋지만, 나머지 선수들이 좀 더 활약할 필요가 있겠죠.”
“그래. 무기는 다양할수록 좋은 거니까. 정글 중심의 게임이 항상 옳은 건 아니지.”
긍정적인 영향력이 퍼져나가고 있다는 것을 느낀 감코진의 얼굴에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환경은 바뀌었지만 오늘의 경기를 완벽하게 승리로 이끌어 좀 더 확실히 자리를 굳혔다.
FWX는 오히려 득실 차로는 1위 트릭스터를 근소하게 앞서고 있었고.
남은 경기를 모두 내주는 한이 있더라도 유리한 위치에 설 수 있다.
“그런데 유찬이는 역시 고저가 있네요. 진짜 어떨 때 보면 망나니가 맞아요.”
“당장은 온라인 경기가 호재가 된 건가?”
“정말 혹시라도 반대로 적응을 못 할까 걱정했는데, 그럴 일은 없겠어요. 일단..”
이런저런 소식들을 들어보니 일단 오프라인 재개장까지 잡혀있는 일정은 2주.
어떻게든 플레이오프만큼은 경기장에서 진행하고자 하는 강력한 의지가 느껴진다.
“일단 온라인 경기에서 선수 컨디션에는 문제가 없음을 확인했고.”
“이거.. 될 것 같지?”
“될 것.. 같은데요?”
FWX의 당면한 목표는 정규시즌 2위 이상으로 PO 2라운드 직행.
당연히 목표는 우승이지만, 혹 결승에서 이기지 못하더라도 2위로 월챔 선발전을 나간 뒤.
어떻게든 월즈를 밟아보는 것.
“이게 되네?”
“남은 경기.. 확실한 타겟 하나만 정하고, 밀어버리죠.”
“좋아. 아낄 카드는 아끼고..”
“그 카드는 꼭 숨겨..”
“당연하죠..”
박진현 감독과 두 코치는 선수들만큼이나 설레는 마음으로 철저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인생 최고의 찬스이자, 다음 단계로 갈 수 있는 계단이.
눈앞에 있다.
성큼 다가온 기회에 가슴이 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