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너의 자리는
단장이 뿌리고 간 선물은 신형 스마트폰과 스마트 워치 세트였다.
꽤 유명한 명품 콜라보 에디션의 고가 물품.
세심하게 각 선수가 기존에 사용하던 브랜드에 맞춰 준비했으며.
더 나아가 각 기기에 팀명과 선수명을 각인했다.
“존나 쩐다.”
“니 되팔렘 방지용임.”
“바로 바꿀 건데. 쓰던 거 우리 엄마 줘야지.”
“불효자냐? 새거 사드려.”
“지난주에 새 폰 샀는데? 그럼 이거 어떡함.”
“야.. 그거.. 애매하다..”
“무조건 형 잘못.”
“이유찬 이거 아주 거머리 새끼 아니야? 나 중학생 때 플레 길막한 새끼가 너지?”
“플레에서.. 길막..? 형.. 수준..?”
“으아앙. 도와줘요, 건이맨.”
“그만해.”
윤도형은 큰 덩치를 내 뒤로 숨겼다.
어느새 팀에서 가장 호, 아니 샌드백이 된 윤도형이 좀 불쌍해 보이기도 한다.
운동을 좀 더 하면 낫지 않을까?
피지컬도 좋은데.
“폰 좋네.”
웃음이 나온다.
스마트폰을 바꾸는 주기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1년 이상은 사용하기 마련.
항상 몸에 차고 다니는 스마트 워치 역시 마찬가지다.
여기에 팀명까지 각인했다는 건..
“마음에 쏙 들어.”
김예성이 내 폰을 바라보며 다 안다는 눈빛으로 씩 웃었다.
“그럼 됐어.”
나도 웃어 보였다.
순박한 팀, 착한 구단에도 계략은 필요한 법이지.
그게 나와 같은 길이라면, 상관없다.
“도형이 너 건이 밴시 끝났냐? 이리 와서 니 폰에 대한 토론 좀 해보자.”
“진짜가 나타났군.. 내 두번째 엄마..”
“그런 이상한 호칭 붙이지 마라.”
근데 월챔이라도 진출하면 도대체 어떤 파티를 해주려고 벌써 설레발이야?
기대해보도록 하자.
#
“이거! 전문 용어로 싫어싫어저리가 궁이라고 하는데요!”
“네, 다가오지 말라는 뜻입니다! 두 팀 상당한 거리를 두고 위협적인 포격을 하고 있어요!”
- 아ㅋㅋㅋ 위협 사격만 하고ㅋㅋ 타격은 언제하냐고
- 어디 북쪽 나라세요?
- 오늘 경기 수준 떨어지네 진짜..
- 주 시작부터 이게 뭐야..
- 니네 협캉스 왔니?
“싫어! 저리 가! 우리 힘을 제대로 봤겠지? 아앙?! 이런 일일수록 명확하게 거부 의사를 표현하는 게 중요하거든요? 궁극기가 저어어어언혀 아깝지 않습니다!”
- 아까운데요
- ㅈㄴ 아까운데요
“바론의 소유자는.. 아직도 결정되지 않았습니다!”
“오늘 경기는 역대급이에요. 역! 대! 급! 지금 여러분 눈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겠지만, 이게 진정한 고수들의 싸움이 그런 거거든요? 진짜 진검을 들게 되면 누군가 죽기 전에는 끝나지 않는.. 결국에는 피밖에 남지 않는 전투입니다. 누군가 희생될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생명을 소중히 하겠다, 뭐 그런 얘기죠!”
- 뭐라는 거야ㅋㅋㅋㅋㅋ 갖다 붙이기 하지 말라고ㅋㅋㅋ
- FWX 경기 마렵다 얼른 목요일이 왔으면..
- 걔네도 경기력 떨어지는 거 아니냐 걱정이네
- 오히려 온라인 경기에서 힘이 나는 애들도 있음
- 그냥 빨리 경기장에서 했으면..
- 벌써 그립다 그 현장감..
“어, 어! 말씀드리는 그 순간!”
“퍼즈네요.”
“지금 문제점이 들어온.. 잠시만요..”
- 소통도 존나 느려ㅠㅜㅠㅜㅠㅜㅜㅠ
- 진짜 또 퍼즈 아ㅋㅋㅋㅋㅋ 치킨 다 식는다고!!!!!
- 뭐하냐고 ㅋㅋㅋ 온라인 경기 하기로 했으면 제대로 준비를 해
- 아니 게임으로 먹고사는 애들이 뭔 겜하다가 문제가 이렇게 자주 나
“온라인 진행이 갑작스러운 일인 만큼 시간이 조금 걸립니다, 여러분의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이게 각 팀에서도 연습실 환경과 경기장 환경이 제법 다르거든요. 어느 한 팀에게 유리한 환경에서 진행할 수 없다 보니 상당한 조율이 필요하고.. 그리고 평소에 실행하지 않던 추가적인 프로그램이라던가, 예,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문제가 발생할 수 있고..”
“아! 지금 퍼즈 사유가 들어왔는데..”
“뭔가요?”
“하드웨어.. 이슈라고 하는데요?”
“아..”
“아..”
탄식이 터져 나온다.
“조금만 더 기다려주시기 바랍니다. 지금 현장의 심판진이 문제 사항을 확인하고 있으니까..”
- ㅈ됐네
- 헤드셋, 키보드, 마우스 문제 재끼고 “하드웨어 이슈”
- 사실상 뭐가 문제인지 잘 모르겠다는 뜻
- 알트탭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뜻ㅋㅋㅋ
- 프로그램에는 문제가 없는 것 같은데 다른 게 쎄하긴 하다는 뜻ㅋㅋㅋㅋㅋㅋ
- 우리도 이제 눈치 백단이다 이거야ㅋㅋㅋ
- 경기장 열어줘! 열어줘! 플옵! 예매! 시작해! 시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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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준비할 건 따로 없어.”
박 감독님은 정신없이 바빠 보였다.
선수 입장에서 출퇴근이 없다는 것 자체로만 보면.
대기 시간이 길어져도 좀 더 편하게 있을 수 있고, 대기실에서 배달 음식을 시켜 먹지 않아도 된다는 것 정도가 차이겠지만 팀 전체는 다르다.
사유가 있는 만큼 온라인 경기 결정에 반발하는 팀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죽어나는 건 결정자들보다는 스탭과 심판진이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것은 우리 팀 경기 직후 일시 시설 점검에 들어간 덕에 조금 더 준비 기간이 넉넉했다는 점?
“경기가 진행될 장소는 이쪽입니다.”
“해당 영역에서 경기용 외의 통신 장비나 전자 기기 일체는 금지되고. 기본적인 룰은 경기장과 같습니다.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으니 가능하면 공간을 비우는 쪽으로 요청드립니다.”
많은 팀을 돌아다닌 직원들은 무척 지쳐 보였다.
각 팀의 사옥은 절대 가깝지 않다.
그나마 다행인 건 팀들이 연고지에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일까.
F.L.E의 제주도는 좀 많이 멀잖아.
그러고 보니 제주도에서 결승을 치르는 것을 본 적이 없는데.
재밌겠다.
F.L.E에 갈 걸 그랬나?
2군에 투자도 많이 하는 편이고 감독도 재밌는 스타일인 것 같았는데.
어쨌든.
서울 안에 사옥을 세운 팀들은 서로 가까운 경우가 있지만 서울은 서울대로 붐비고.
경기도권에 연고지를 둔 팀은 당연히 그곳에.
그 외의 몇몇 팀들의 사옥은 동서남북으로 퍼져 있다.
FWX도 마찬가지로 경기도.
대신 외부 공간에 풀코트 농구장이 있을 정도로 사이즈가 넉넉한 편이다.
사실 이 사옥에 머무는 모든 이들은 손끝이 예민한 스포츠맨이라 이용하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차라리 족구장을 만들었으면 어땠을까?
그럼 윤도형과 김예성은 매일 가지 않았을까.
“마실 거라도 좀 드릴까요?”
“감사합니다.”
현장 감사를 빼놓을 수는 없다.
“경기장 상황은 어떻습니까?”
미리 준비한 음료를 직원에게 건넨 박 감독님이 낮은 목소리로 묻는다.
“지금 신원 확인 절차를 개선하고 있고 엘리베이터 및 주 출입문, 부출입문에 이중 인증 시스템을 도입하고 있습니다.”
“물리적 개선도 있나요?”
“네, 시즌 중이라 대규모 시공까지는 무리입니다만.. 임시로 보안 게이트를 세웠습니다. 공항 검색대 같은 거 아시죠? 아예 스태프에게까지 범위를 확대해서 흉기 등의 소지를 원천적으로 막을 예정입니다.”
LKL 직원인지, 보안 업체 직원인지 정확히 모를 사람이 십년은 늙은 표정으로 음료를 들이킨다.
“스탭까지.. 확실히 그렇겠네요. 아예 내부에서 사건이 발생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건 정말 끔찍하겠습니다.”
박 감독님도 고개를 끄덕인다.
확실히 그런 부분은 생각해본 적도 없는데.
이번 사건으로 범죄가 일어나는 것을 정상인의 사고방식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은 무리라는 게 뚜렷해졌다.
프로게이머가 신체적으로 뛰어난 편도 아니고, 설혹 우리가 이종격투기 선수라고 하더라도 그런 위협 속에서는 안전할 수 없다.
뭐, 좋은 게 좋은 거지.
“완전히 시즌이 끝나면 연말에는 대규모로 착공에 들어갈 예정이에요. 이듬해의 핵심 성과 지표는 안전. 절대 안전. 어떠한 천재지변 속에서도 안전.”
무슨 벙커라도 만들려는 건가.
“어쨌든 금주 내로 새로운 가이드라인을 다시 한번 정리해서 공유해 드리겠습니다. 너무 노여워 마시고, 항상 저희가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점을 알아주세요. 그리고 단장님과 미팅을 잡고 왔는데..”
언변이 뛰어나다 했더니.
아무래도 경기 점검을 핑계로 ‘달래기’를 하러 온 사람이었던 것 같다.
“알겠습니다. 알려드리겠습니다. 수고가 많으십니다. 감사합니다.”
아직 달아오른 이슈는 쉽게 식지 않고 있다.
“선수님께도 감사합니다.”
직원은 다른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나에게도 눈인사를 건넸다.
항의도 하고, 고성도 높이며 다양한 반응이 오가고 있지만.
사실 이 건이 커지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모두 마찬가지다.
게임사, 협회, 운영측, 이스포츠 구단, 투자자.
심지어 이 산업에 발을 들여놓은 지자체들까지.
리그가 중단되어버리면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다행히 나로 인해 ‘실제 사건’이 벌어진 것은 아니었고.
보이지 않는 노력 덕분에 모두가 우려했던 문체부 선까지 올라가지는 않았다.
정치인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하면 그건 정말 머리 아픈 일이 되거든.
비교적 최근에야 미운털 박힌 신세를 벗어났는데, 다시 게임 문화 산업의 이미지를 퇴화시키고 싶지는 않을 거다.
1면 헤드라인이 상상되지 않아?
[ 게임으로 폭력적으로 변한 가해자.. ]
[ 범죄 전날에도 ‘간편식’으로 끼니를 때우며 3시간 이상 ‘LOS’를.. ]
[ ‘열등감’ 조장하는 경쟁 시스템, 옳은가.. ]
이래서 투자를 통해 최대한 많은 아군을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하는 거다.
투자는 자본을 끌어오는 수단이기도 하지만 같은 배를 타게 하는 마법이니까.
어쨌든.
무난하게 경기장으로 복귀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시기는 잘 모르겠지만, 플레이오프까지 넘어가는 일은 없겠지.
“실례합니다. 이 좌석 주인 분?”
경기가 진행될 자리를 확인하던 다른 직원이 우리를 호출했다.
“아. 전데요.”
최은호가 앞으로 걸어 나간다.
“이건 뭐죠?”
책상 안쪽에 놓인 작은 케이스.
“아, 그건 제.. 뭐더라.. 게르마늄 팔찌..?”
“금속인가요?”
“금속인지.. 잘 모르겠어요.”
“필요하시다면 별도의 검사를..”
“아, 괜찮아요. 치워둘게요. 감사합니다.”
최은호가 공손히 인사하자 곽지운이 재빨리 케이스를 받아서 들었다.
아주 가벼워 보였지만 원딜은 우리 서포터가 팔을 조금이라도 아낄 수 있게 열심이다.
“나는 당연히 윤도형 피규어가 나올 줄 알았는데. 자기만 오타쿠 취급 받을까 봐 최은호 자리에 몰래 숨겨둔 거임.”
곽지운이 케이스를 빤히 들여다본다.
“왜 또 나를 끌어들여? 나는 정말 책상에 있는 루라퐁이 끝이야.”
“라라퐁 아니냐?”
“아, 시벌. 너네 때문에 나도 헷갈려.”
“니 덕력은 한참 멀었다.”
“뭐지? 나 진짜 오타쿠 아닌데 왜 삔또가 상하지?”
윤도형이 고릴라 같은 얼굴로 인중을 벅벅 긁는다.
그리고 곽지운이 들고 있는 박스를 받아 들어 뒤적이다가 갑자기 눈을 빛냈다.
“근데 넌 또 왜 게르마늄 팔찌를 가지고 있어? 문봉구만 유사 과학 신봉자인 줄 알았더니, 그딴 걸 믿냐?”
실실 웃는 얼굴이 드디어 한 건 했다는 표정.
“형, 그만..”
건강단 멤버 김예성이 말려보지만.
최근에 당하기만 했던 윤도형은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설마 너 폰에 금박 뭐 그런 거 붙이고 다녀?”
“어.”
“와우. 최은호 존나 개멍청..”
“할머니께서 나 걱정해서 주시더라. 해줄 수 있는 건 없지만 우리 손주 전자파라도 막아주고 싶다고..”
하지만 최은호의 말이 떨어지자.
“와. 정말 고우시다. 건강 팔찌 부러워.”
“세상에 너무 감사하네. 형은 전자파 레지 생겨서 좋겠다.”
따뜻한 분위기가 됐다.
“어?”
윤도형만 빼고.
“아씨.. 아.. 아이씨..”
말문이 막힌 윤도형은 간절한 눈빛으로 나를 봤지만.
“곤란.”
미안하지만 이건 나도 못 도와준다.
가족, 심지어 할머니 치트키는 가불기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