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간 때문이야
어젯밤, 최은호는 꿈을 꿨다.
어쩌면 새로운 세상이 열린 그날.
그날 있었던 일의 조각이었다.
권건과의 대화.
전까지는 그런 기분을 느껴볼 수 없었지만, 그를 단둘이서 마주하는 것은 꽤 무서운 일이었다.
새까만 눈동자, 높고 곧은 콧대, 그리고 꽉 다물린 일자 입.
이런 분위기에서는 도망조차 칠 수 없다.
최은호는 숨이 막혔다.
다른 팀 선수들이 느낀다는 압박감이 뭔지 알 것도 같았다.
그를 마주하기 두려웠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를 얼굴.
하지만 권건은 ‘아는 사람’ 이야기를 했다.
남에게 폐를 끼친다거나, 그것이 두려워서 포기를 하니 마니 말하는 것 역시.
그에게 주어진 행복이라는 것을.
누군가에게는 그것조차 기대할 수 없는 사치라는 것을.
최은호보다 어린 이 선수가 겪었을 리 없는 몇 가지 말도 들었다.
그러면서 알았다.
나는.
누군가에게 기대지 않고 일어서기 힘들어하는 성격이다.
스스로를 믿는 힘이 약한 사람, 그게 바로 나.
하지만.
“믿어요.”
권건이 결국 말한 것은.
나를 믿겠다는 이야기.
내년까지만이라도.. 같은 작은 목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내년이라면 어떻게든 재계약을 하라는 뜻 아니야?
그러니까 나랑 프로 생활을 끝까지 같이 하고 싶다는 뜻?
내가 그렇게 대단한가?
어쩌면 내 잠재력, 굉장한 걸지도?
작고 초라해보였던 자신이 달라보이기 시작했다.
서포터를 하면서 혼자 가졌던 피해의식이 녹아내린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높은 곳에 있는 사람, 권건이.
여태껏 자신을 한번도 업신여기지 않았다는 사실을 느낀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하나는 확실하다.
스스로를 믿는 데에 한계가 있는 사람이라도 나를 믿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더 강해질 수 있다.
이게 바로 건강한 기대감이고, 결국 일어서는 데에 큰 힘이 된다는 것.
이제야 나는 권건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
권건이 나가고 난 뒤 빈 의자에는.
그가 보내온 시간이 놓여있었다.
#
정글은 가난한 라인이다.
메타마다 다르긴 하지만 대체로 그렇다.
아예 갱을 포기하고 개인의 성장에 집중한다면 성장이 더 나을 수 있겠으나.
그럴 거면 RPG 하라는 소리가 괜히 나오는 게 아니잖아?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면 라이너들을 봐주는 게 우선이다.
나는 팀의 아버지니까.
“이거, 이거, 이거! 사이언! 시동.. 겁니다..!”
“달려요! 바텀으로! 지금! 어떻게든 꽉 막힌 바텀을 풀어보겠다는 심산! 4인! 이른 타이밍 4인 어셈블!”
그런 면에서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한다.
정글러는 정말 맨손으로 싸우는 파이터와 다를 바가 없다고.
자기 주먹 하나 믿고 우거진 정글 속으로 들어가.
정글 몹과 싸우고.
아군과 씨름하는 상대에게 주먹을 내민다.
“부우우우우우우웅! 거의 도차아아아아악!”
그리고 선뜻 아군을 위해서 대신 맞아주는 역할까지.
“꽈아아아앙!”
“궈어어어언건! 바람처럼 등장해서! 사이언을! 막아섭니다!”
- 운전 대실패 시발
- 아니 고라니가 튀어나왔잖아요
- 차에 치였는데 일어나는 사람이 있다?
이거, 꽤 대단한 파이터 아니야?
“바로 이어서 트런둘까지 등장합니다! 미라쥬가 마음을 단단히 먹었어요!”
사람은 급소를 보호하고자 하는 본능이 있다.
두 번째 세트 미라쥬의 급소는 바텀.
예상을 깬 밴픽에 쭉 밀려나는 바람에, 미라쥬는 힘을 주는 판단을 했다.
탑이 6레벨을 달성하자마자 바텀에 달려오는 것.
이건 모르고 당하면 충격이 컸을 거다.
급소를 내주는 척하면서 오히려 그 상대를 노리는 셈.
하지만 알고 있었다면?
“하지만 지금 이대로라면 3대4로 불리합니다!”
오히려 급소가 활짝 열리게 된다.
“트런둘과 사이언이 막아서면서 앞으로 돌격!”
나는 앞으로 나아간다.
“천천히. 그리고 빨리.”
퉤, 입 안에 고이는 피를 재빨리 뱉어낸다.
한 방.
급소라는 게 가린다고 해서 아프지 않은 건 아니다.
뚫리는 순간.
사람은 쓰러지게 되어있다.
“이거, 이거, FWX, 대량 학살 강타와 주요 스킬 자연스럽게 흘리고! 난전!”
최전방에 서서 잔비를 피해내며 펀치를 날린다.
이유찬이 오기 전까지, 아주 약간의 시간을 벌면서.
완전한 찬스를 노린다.
“지금 서로 딜이 많이 나오지 않는 상황! 바텀은 아직 모두 6레벨이 안 돼요! 이거 FWX가 빼는 쪽이.. 어어어어!”
보인다.
과한 독소로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상대 바텀.
그들은 ‘간’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트런둘? 트런둘에게? 어어어어! 권건! 권건! 살짝 돌아 바로 붙..!”
왜냐고?
피로는 간 때문이라는 말, 못 들어봤어?
시답지 않은 말속에.
정확하게 내가 노린 순간이 찾아온다.
내가 왔다는 걸 보자마자 뺐으면 좋았을 텐데.
자신들의 전략과 경험을 맹신하는 데에서 나오는 플레이다.
꼰대들아.
요즘 애들도 제법 똑똑하단다.
우측 스텝을 밟으며 위빙.
“..는 척하면서 바로 도망치려는 원딜에게 일자로 꽂힙니다!”
“궁-극-기! 언제! 언제 6레벨이!”
그러면서 상대 품속으로 깊이 파고든다.
“아까! 아까 전 타이밍에! 질리얀에게! 패시브를! 이번에도 미래를 내다봤나요, 클래스!”
“그러면서 방금 라인 인원수 차이로 진짜 따끈따끈하게 궁극기 얻었어요!!”
“이거 디테일이! 도대체 언제부터 설계한 거예요!”
LOS에서 바텀이 차지하는 비율만큼이나 큰 장기다.
우측 흉곽 아래의 갈비뼈.
나는 공학 기술의 결정체인 강철 주먹을 꽂아 넣는다.
이 급소로 건틀릿을 낀 주먹이 틀어박히게 되는 것이.
리버 블로우.
“아아아아아아아아! 이거, 이거!”
상대는 인간.
그래서 외부 충격에 취약한 주제에, 거대하기 짝이 없는 간이라는 장기를 때리면.
“이거 반대로 들어올 줄 예상 못했거든요! 앞으로 쏠렸던 졔리가!”
즉시 불수 운동을 관장하는 신경계가 자극되면서.
혈관은 넓어지고, 혈압은 떨어진다.
“어어어어어어? 차니? 차니? 차니는 어떻게 여기에! 어떻게 알고! 여기까지 쫓아왔어요?”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달려왔습니다!”
“진짜 몸에 불 붙이고 오긴 했어요! 시바나라서!”
“처절하게 맞붙습니다, 두 팀! 지금 느닷없이 싸움이 커지거든요!”
“이거, 이거, 이제 못 빠져요! 미라쥬! 사이언 앞으로 세우면서 두 탱커가 달려듭니다!”
혈압을 다시 올리기 위해 심장은 더 빨리 뛰고 싶겠지만.
“나를 때려! 나를 때려라! 이거 시바나가 비비면 굉장히 거슬리거든요!”
이미 자율 신경계가 자극된 이상 박동은 느려질 수밖에.
“졔리, 졔리 이거 끝까지 항전하나요? 너무 아파요! 뱌이 주먹에 찌그러지기 일보 직전! 지금 유마 데리고 도망칠 수는 있지만, 지금 이대로 도망쳐버리면! 상체 완전히 망해버려요! 완전히!”
“근데 그러다가 더 망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뇌는 혈액 순환이 필요하다.
그럼, 어떻게 될까?
“지원 필요해요! 이거, 탑 정글이 도망이라도 치게 도와야 합니다! 졔리는 뒤로.. 뒤로!”
의지와 상관없이.
“어어어어어? 졔리는 벽, 벽 탔는데!”
“아아아아! 고양이! 고양이가..? 고양이! 고양이! 서로 타이밍 안 맞았나요! 주인과 갈라지고!”
“그대로..! 질리얀.. 정확한 시한폭탄.. 광역.. 기절..!”
느려지다 못해 멈춰버린 시간 속에서.
“지금 이대로 가면! 안 돼요! 어떻게든, 누구 하나라도! 하나라도 잡아야 해요! 뺄 수 없습니다!”
머리까지 혈액이 닿게 하기 위해서는 몸을 평행으로 만들어야 하기에.
“이거 광역 주먹 굉장히 아파요! 나중에도 그렇지만 뱌이의 주먹은 탱커를 뿌셔!”
“사이언, 사이언, 시체 유통기한 2초! 1초! 뭐! 미니언이라도! 먹을 거 없나! 없어요! 지금 이거 이대로 탑 돌아가게 되는 거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요!”
“아뇨! 시체가 됐지만! 그대로 부관참시! 무덤까지 파헤쳐서 그냥 다시 죽여버립니다! 진짜 큰일 났습니다. 미라쥬, 지금 진짜 큰일 났어요!”
- 탑 시체 반환 요청합니다.. 돌려줘요..
- ㅈ됐다..
- 이건 특수 상해 아니냐고.. 징역.. 징역이오..
- 가만 안 둔다 미라쥬ㅇㅇ
“다운! 다운!”
“미라쥬, 완전히! 따아아아아운!”
“쿠우우우우우웅! 쓰러지는 소리 여기까지 들려요!”
사람은 천천히.
바닥으로 쓰러지게 된다.
“미라쥬가 먼저 완벽하게 노렸다고 생각했는데! 그걸! 그대로 FWX가 읽고 있었어요!”
완벽하게 계획했다고 생각할 수록 타격은 큰 법.
- 역대급 병신짓 아니냐?
- 바텀까지 와서 그걸 죽어주네? 존나 답답하다
- 브론즈도 저렇게는 안하겠다
- 입 털고 병신짓하고 저렇게 죽어준다고?
- 경기 끝나고 보자.ㅇㅇ
- 님 왤캐 살기가 가득해요; 불안하게;
- ㅋㅋㄹㅇ허언증 어쌔신좌ㅋㅋ
“비상이에요.. 이거 진짜, 비상입니다..”
우리는 급소를 때려 상대보다 우월한 위치에 선다.
“이걸 끝까지 하네퐁. 출장어시 땡큐. 이제 탑을 끝.내.주.지.”
“어떻게.. 안거야? 저런 미친짓을 할 줄이야.. 건이 너는 대체..”
코칭 박스에서, 최 코치님은 우리가 나가기 직전에 나에게 속삭였다.
혹시 서포터를 노릴거냐고.
도대체 내 이미지가 어떻길래?
말 한마디 했다고 그 사람만 팰거라고 생각하는거야?
나는 절대 뒤끝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냥 우리 애들한테 고개를 까딱거리는 미라쥬의 전체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을 뿐이지.
경기 시작할 때 눈 부라리는 거 봤잖아.
“꼰대 처치 완료.”
“응? 뭐라구?”
이미 한 번 넘어지는 충격으로 두개골이 흔들린 상대를 다시 때려눕히는 것?
“허허, 차 맛이 좋구나. 은호야, 이 차의 맛이 무엇이더냐.”
“세자 저하.. 정글 차이옵니다.”
그건 훨씬 쉬운 일이다.
#
게임은 완전히 풀렸다.
물론 이건 FWX 입장이다.
미라쥬 입장에서는 막장도 이런 막장이 따로 없었다.
“기껏 악연을 풀었는데.”
베테랑 김진승의 한 수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탑, 바텀의 주도권을 모두 빼앗겼다.
어떻게 알았는지가 문제가 아니다.
미드도 시간 문제.
분명히 라인전 주도권을 잡으려고 들고 간 픽인데.
상체와 하체가 모두 터지면서 의미는 사라졌다.
“왜 다시 연결된 것 같지?”
정글도 마찬가지다.
주먹왕이 되어버린 상대 정글을 마주친다는 건 그것만으로도 악몽.
“누가 그랬을까?”
이인혁은 이를 갈았다.
부드득 소리가 팀 보이스에도 들린다.
김진승에게 사과를 권한 것은 이인혁이다.
문봉구와의 이슈에서 김진승 역시 느낀 바가 없지는 않았기에 받아들였다.
팀에서 가장 다혈질이었던 김진승도, 나이를 먹어갈수록 사람의 다른 면을 볼 수 있게 됐으니까.
그래서 경기가 시작할 때도 미안하다는 눈빛을 열심히 보냈는데.
“하..”
방송하던 왕지우가 이상한 말을 했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그래, 평소 같으면 아무렇지도 않을 말이다.
그게 뭐?
근데.
FWX는 건드려서는 안 되는 팀이다.
정확히는 굳이 도발해서는 안된다.
미신이라고들 하지만 오늘은 분명히 차이가 느껴진다.
트릭스터는 패스하고 우리 경기 빡세게 준비해왔잖아?
사실 FWX 입장에서는 순위권 싸움을 할 때 트릭스터보다 미라쥬 쪽을 잡는 편이 더 유리하지만, 일단 맞고 있는 입장에서는 이걸 들여다볼 여유는 없다.
“나는 진짜 모르겠어. 근데 내 옆에 앉은 사람이 그런 것 같아.”
어처구니가 없다.
긁을 거면 같은 서폿이나 원딜을 긁지.
친분도 없는 권건을 대체 왜?
자기들은 같은 라인에서 안 만난다고?
정글은 또 텅 비어있다.
사채업자 새끼.. 전 세트에 못 가져갔던 걸 이번 세트에 다 가져가는 모양이다.
“일단 나는 아니고.”
미드 안희종이 조심스럽게 말하며 빠져나간다.
적이 용을 가져갔다는 알림이 뜬다.
밖으로 나가지도 못했다.
“지우 형.”
왕지우가 눈에 뜨일 정도로 몸을 떨었다.
귀환해도 뭐 하나 살 게 없는 정글러의 가난에 오히려 웃음이 나온다.
“내가 형 방송할 때 너무 신 내지 말라고 했냐 안 했냐?”
“지, 지금 너, 그 태도가 형한테, 어?”
이인혁은 눈이 돌아갔다.
“우리 기강 한 번 잡을까? 순위 다시 매겨? 지금 티어 누가 제일 높아?”
"다시 매겨도 돼? 혹시 지금은 나이순으로 바꾸면..”
미라쥬는 정글의 솔랭 티어가 가장 높다.
"되겠냐?"
“...”
“그래 인마, 도구가 말이야, 어!”
짐짓 원딜이 같이 꾸중을 해보지만.
“바텀이 뭐 분리되어있는 줄 알아? 그때 원딜은 뭐했어? 같이 노력을 했어야지!”
정글러의 분노는 멈출 줄 모른다.
1세트에 대한 피드백 판결은 이미 내려졌다.
자기가 내뱉은 말에 잡아먹혀 전 세트부터 이번 세트까지 팀의 패배에 일조한 서포터는 입도 벙긋할 수가 없다.
“인혁아.. 추석 미리보기 서비스 중이냐?”
“테러 쟤 터졌다.”
“...”
그리고 정글들은 왜 다 그렇게 체격이 좋은지.
전통이라도 있나.
왕지우는 간신히 대꾸했지만 자기도 모르게 존댓말이 나오고 만다.
“테러쟝.. 왜 게임 밖에서는 그렇게 빠따 들고 사람 때릴 것처럼 말을 해요?”
하지만 어림도 없다.
“존댓말은 왜 쓰는 거지, 쥐젖같은 우리 형?”
“쥐젖이라니..”
“우리 형이 존나게 양성 종양 같아서 그래. 내가 레이저로 지져줄까?”
“와그거진짜너무무서운말이다. 나 신고할뻔했잖아.”
“농담이 나오냐, 형들아?”
꼰대 사이에서의 서열은 무섭다.
권건이 염두에 두지 않은 서포터에 대한 징벌은 팀 내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야, 야. 게임하자.. 침착하고..”
평소에 가장 공격적인 분위기를 이끌던 탑 김진승이 당황한 말투로 팀원들을 달래보지만.
“...”
“빡겜해. 일단. 빡겜해.”
“돌아가서 보자, 쥐젖.”
“...”
얻어맞은 충격 탓인지.
미라쥬는 아직도 머리가 어지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