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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게이머, 그만두고 싶습니다-135화 (136/326)

135화. 밀림

트래쉬 토크는 먼저 같은 포지션의 선수.

그리고 그다음으로 서로 인연이 있는 선수들의 이야기를 나눈다.

나는 어떻게 보면 스톰이라는 팀과 묶인 적이 있긴 하지만.

1군 선수들과는 교류가 없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종종 다양한 포지션이 서로 번갈아 가면서 토크를 벌이기도 하지만, 스톰 전의 트래쉬 토크는 그럴 타이밍도 아니었거니와.

내가 말을 아끼자 주최 측에서 알아서 길이를 조절했다.

스타성이 올라갈수록 이런 부분에서 많은 배려를 받는다.

LKL 기준으로 현재 내가 활동한 기간은 한 시즌.

아주 예전에는 날카로운 멘트를 요청하던 수많은 방송 스태프들이.

이제는 내가 뭘 해도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서 1라운드 마지막 경기 직전.

나는 붐보이와 일대일 트래쉬 토크를 나눴는데.

- STM BoomBoi (JUG) : 권건 선수 좋은 선수인 거 잘 알죠! 유명하잖아요.

글쎄, 이걸 트래쉬 토크라고 할 수나 있을까?

이유찬이나 김예성이 한 게 트래쉬 토크답지 않았을까 싶다.

- STM BoomBoi (JUG) : ‘호적수’를 만났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아직까지 제가 적응을 마치지 못했다고 말씀해주시는 팬분들이 많은데, 끝까지 노력할 생각이거든요?

은근슬쩍 나와 자신을 묶어 자신을 올려 치는 허진수.

자기중심적인 토크에 능숙하고, 외부에 비칠 이미지를 잘 관리한다.

- STM BoomBoi (JUG) : 아, FWX에는 정글이 둘이라고요? 폴리 선수에 대해서? 아하하.

그렇게 나를 올린 여파일까, 추가로 윤도형에 대해 나온 질문에는.

- STM BoomBoi (JUG) : 뭐. 서폿이 원래 좀 쉽잖아요. 그냥 땜빵이죠. 정글은 정글에 있을 때 정글이지 다른 데 갔는데 왜 정글이라고 불러요?

- STM BoomBoi (JUG) : 그리고 솔직히 저는 전에 계시던 서포터분이랑도 그렇게 차이 못 느끼겠던데. 하하!

윤도형과 최은호를 함께 묶어 바닥에 내팽개치면서 끝내 우리가 정한 선을 밟아버리고 말았다.

- STM BoomBoi (JUG) : 권건 선수랑은 사적으로도 깊이 친해지고 싶고 그래요.

- FWX GwonGun (JUG) : 글쎄요.

- STM BoomBoi (JUG) : 핸섬 정글 듀오. 어때요?

어쩌면 허진수는.

내가 그의 열애설 관련 이야기를 꺼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쉽게 공격할 수 있는 부분이니까.

하지만 만약 그렇게 했더라면, 글쎄.

편집되면 다행이고.

편집이 되지 않았다면 교묘하게 내 이미지를 더럽혀 같은 위계를 맞출 수 있었을 것이다.

연애는 사생활이니까.

바깥의 시선이 어쨌든 사생활을 건드린다는 건 위험한 일이다.

빡빡한 합숙 생활과 일정 속에서 어떻게 연애를 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생각보다는 많은 선수가 연애를 한다.

그리고 이건 세상의 모든 일이 그렇듯이 긍정적일 때도, 부정적일 때도 있다.

나?

나 역시 수도 없는 좋은 인연이 소매를 스쳤지만.

도대체 어떻게 시작할 수 있단 말인가.

고작해야 아는 사이에서 일어나는 회귀조차 사무치게 씁쓸한데.

사랑을 하고, 그 시간을 없었던 일로 한다면.

과연 버틸 수 있을까?

어쨌든 나는 대화의 주도권을 허진수에게 넘길 생각이 없었기에.

내가 하고 싶은 말과 하고 있는 생각을 말했을 뿐이다.

- FWX GwonGun (JUG) : 정글이란 뭘까요.

- STM BoomBoi (JUG) : 챔피언? 강타 스펠? 아니, 계약서겠죠.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나는 몇 번의 기회 동안은.

스톰이 붐보이를 영입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모종의 유착 관계라도 있는 것인지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 FWX GwonGun (JUG) : 정글은 경작되지 않은 땅(jangala) 이라는 말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 STM BoomBoi (JUG) : 아, 저도 그 말 알아요! 하하핫! 스톰 출신은 스마트한 정글러?

나와 묶이려는 저 선수는, 내가 자신의 자리를 위협할 때는 그 칼날을 나에게 겨눴고.

호랑이 새끼를 절벽에 밀어 키워내는 스톰은 그것을 방치했다.

아직도 이 선수는 이간계라는 녹슨 마체테를 휘두르고 있다.

나는 그 우스운 꼴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이제 스톰에는.

- FWX GwonGun (JUG) : 그만큼 정글에서 살아남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정글이라 명명된 곳에서는 수많은 생명체가 훨씬 빠르고, 강하게 자라나죠.

정글이라는 무서운 장소에서 가장 앞설 정글러가 없다.

그리고 그걸 지난 게임에서 스톰도 깨달았을 것이다.

- FWX GwonGun (JUG) : 그리고 때로는 독을 품고 자라나겠죠. 살아남기 위해.

나도 깨달았다.

거대한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찬 깊은 열대의 밀림.

지구에서 생태 밀도가 가장 높은 곳.

부평초 같던 내가 결국 뿌리 내린 곳이 여기이고.

FWX라는 것을.

- FWX GwonGun (JUG) : 여기는 원시의 땅.

- FWX GwonGun (JUG) : 클래스 선수, 기다리겠습니다.

앞장서서 당신의 성장을 만들어줄.

FWX의 정글이 여기에 있으니.

#

- (STM) 붐보이 동선 실화냐? 이 씨바 이건 너무 의도가 뻔하잖아 방출각

ㄴ 내가 말했지? 붐보이 그 새끼가 트롤치고 있다니까

ㄴㄴ 니가 언제?

ㄴ 붐보이 편들던 새끼들 다 어디 감?

ㄴㄴ 그런 병신이 있었다고??

ㄴㄴ 팩트*

ㄴㄴ 꺼져 시팔 선 함부로 넘지 마라 도로교통부에 고발하기 전에 내가 먼저 찾아가서 붐보이 조져버릴라니까

ㄴㄴ 나 아무 말도 안 했는데?

ㄴㄴ 딜교 ㄱㅇㄷ

ㄴ 스톰은 붐보이를 방출해라

ㄴㄴ 권건 동선 듀얼 싸이클링 뭔데 존나 낭비 최소화 버릴 게 없네

ㄴㄴ 최소 탈수기

ㄴㄴ 동결 건조 처리기

ㄴㄴ 크립 식기 세척기

ㄴㄴ 정글 로봇 청소기

ㄴㄴ 존나 집안일 최강자네

ㄴㄴ 우리 집안 콩가루도 좀 치워주지 않을래? 내가 스톰 복귀라는 감동의 스토리를 한번 써봤는데.. 건이 니가 라스트 원피스야..

ㄴㄴ 너 같으면 가겠냐?

- (FWX) 클래스? 넌 우리 서폿으로 확정이다

ㄴ ㅆㅂ 영상 봤지? 건신님이 기다린다고 했다

ㄴㄴ 의리 ㅈ되고

ㄴㄴ 내가 이런 사람이 아닌데 배가 아프네? 저 새끼 전생에 뭐 구했냐?

ㄴㄴ 권건 프리미티브 마인드 씨발 저게 진짜 생태계 보호지 존나 그린피스네

ㄴㄴ 아‘마존’ 권건 지구의 허파 같은 남자

ㄴ 자를 놈은 자르라고 말해야 하는데 입이 안 떨어지네

ㄴㄴ 어이어이 [신]께서 허가하셨다

ㄴㄴ 하잇 와까리마싯다

#

1라운드와 2라운드 사이의 휴식기는 없다.

그 주에 바로 진행된 피닉스와의 경기에서 우리는 가볍게 승리를 가져왔다.

이번에는 꽤 해당 포지션에 익숙해진 윤도형이 좀 더 큰 활약을 했다.

여전히 서포터로서의 역할 수행에는 서툴렀지만 자기 나름대로 흉내는 내게 됐다는 뜻이다.

상대가 피닉스였기도 했고.

“오늘 은호 오냐?”

“어.”

“빨리 오면 좋겠다. 진짜 제발.”

“이상하네. 왜 깍지 저 새끼 말 하나하나가 기분이 나쁘지.”

“삐빅. 정상입니다.”

주말.

최은호는 짧은 귀가를 마치고 다시 복귀하기로 했다.

고작 일주일에 불과했지만 사실 상당히 긴 기간이다.

경기가 이루어지는 정규 시즌이 세 달 정도니까.

“은호 형 돌아오면 같이 사진도 찍어줄 거야.”

“나는 SNS에 글 올려줄래. 맨날 해달라고 했는데 싫다고 했거든.”

“나는 운세 셔틀 해줘야지.”

“나는..”

“...”

나는 팀원들의 말이 꼭 영화에서 그리운 가족의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마지막 말을 하는 클리셰 같아서 소름이 돋았지만.

“왔다!”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환영 인파 뭐야, 너네들.”

차에서 내린 최은호는 전보다 훨씬 밝은 모습이었다.

“내가 그렇게 반갑냐?”

“어. 존나. 눈물 나게. 개 반가워. 잘 왔어.”

“나도. 야. 최은호. 진짜. 너 LOS 잘해. 진짜로.”

다시 완성된 바텀 듀오와 가짜 서포터는 서로 깨달은 점을 호소하기 바빴다.

“은호 형, 잘 왔어.”

김예성도.

“은호 형님.. 와.. 진짜.. 도형이 형님은 진짜 못 쓰겠어.”

“너무 잘 들려, 미친놈아.”

“유감.”

이유찬도 최은호를 반긴다.

아무렇지도 않게 인사하자고 말을 나누던 놈들이다.

가만히 서 있던 나도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주먹 인사를 나눈다.

“어서 와요.”

“그래.”

잠시 시선이 교차하고 최은호는 웃어 보였다.

근데.

반가운 건 반가운 거고.

“근데 형님. 이마에 그거 뭐예요.”

이유찬이 나 대신 최은호에게 질문을 던진다.

“어?”

“왜 점을 찍고 왔어요?”

“엥? 점? 아!”

옆에서는 최은호를 픽업하러 갔던 김한빛 코치님이 웃음을 터뜨린다.

“아니! 코치님! 이거 왜 말 안 해줬어요!”

“난 보기 좋은데? 점 찍고 복수하러 돌아온 컨셉. 죽이고 지옥 가겠습니다..”

“그게 뭔데요!”

“너네는 모르는구나.. 그런 게 있어..”

“들어본 것 같기도?”

“우리 되게 어릴 때 드라마일 거야.”

잠시 세대 차이에서 온 웅성거림이 퍼져나가고.

“그래서 전 남편을 유혹해서.. 나, 당신이 죽인 여자야..”

“미친 개막장. 그걸 속네?”

“마지막에 점 찍고 돌아온 사람은 어떻게 됐는데요?!”

“결국 다 죽어.”

“진짜요?”

“사실 결말은 기억 안 나. 근데 원래 옛날 드라마에서 사람이 많이 죽었어.”

김 코치님이 옛 드라마를 설명해주는 시간을 가지며 우리는 자리를 옮겼다.

모두 카페테리아에서 식사하기로 했다.

“얘들아. 수고 많았다. 은호도.”

이른 시간의 작은 파티.

나오지 않아도 되지만 FWX는 감코진부터 선수들까지 모두 모였다.

“형님. 여기.”

이유찬이 포크를 건네고.

“어, 고마워.”

이마에 찍힌 점을 없애기 위해 세수하고 돌아온 최은호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그래서 그 점은 뭐였는데?”

곽지운이 어이가 없다는 것처럼 웃는다.

“아. 이거? 나 오늘 명상 수련 클래스 다녀왔어. 이거 찍는 게 무슨 차크라를 모으는 거라나?”

“명상 클래스? 너 존..”

말을 멈춘 윤도형의 코 평수가 조용히 넓어진다.

평소 같았으면 더 놀렸겠지만.

아직 브레이크가 남아있는 모양이다.

“빈디. 제 3의 눈이래.”

“쒯. 그건 좀 까리한데? 버프 뭐 붙음?”

“INT.”

“옵션 괜찮네?”

“약간 네임드 느낌 나지 않아? 구매 불가 템.”

“어어. 추옵 개꿀.”

“똑바로 대답해라, 후배.”

“저 서포터 아닌데요. 죄은호씨.”

“죄은호?”

“내가 서포터 하면 성을 간다며?”

잠시 투닥거린 FWX 서포터 2인을 바라보던 팀원들의 분위기가 부드러워진다.

사실 윤도형과 최은호는 친하지만 친하지 않았던 사이다.

내가 없었던 FWX에서 주 오더는 윤도형, 부 오더는 최은호였다.

물론 사실 주와 부를 나누는 것이 의미가 없을 정도로 별로이긴 했지만.

아무튼 두 사람은 서로 약간의 자존심 싸움을 했다.

팀웍이 나빴다기보다는.

자신의 정보나 판단이 정확하다는 오더 주도권 싸움이다.

정글러 윤도형은 팀원들의 호응이 부족하거나 정보 수집에 적극적이지 않다고 생각했었고.

서포터 최은호는 자신의 희생을 남들이 알아주지 않으니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크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팀은 계속해서 패배했고, 둘 중 뭐가 옳았었는지도 영원히 알 수 없게 됐다.

“그래서 어땠냐?”

최은호는 피식 웃었다.

“뭐가?”

윤도형은 약간 머쓱하게 대답했다.

“서포터.”

“그냥. 뭐. 그냥. 뭐. 좀. 생각보다 만만치 않더라.”

“그래. 그럼 됐다.”

“수고했다. 밥 먹자.”

“어.”

다만 윤도형은 진정한 역지사지를 거쳤고.

최은호는 온라인에서 윤도형과 비슷한 어려움을 겪으면서.

둘 사이에 서로에 대한 이해도가 생긴 건 확실해 보인다.

“얘들아. 근데 나 명상 가서 재밌는 사람 만났다.”

“누구?”

“제주 F.L.E 감독님.”

“엥?”

“나도 우연히 당첨돼서 갔는데. 2회짜리 오전 강의였거든? 근데 첫날 옆에 앉았던 분이 안면이 있는 거야.”

“그걸 어떻게 알아봄.”

“전에 왜. 오셨었잖아. 경기도 쭉 했고.”

“기억력 존나 사기네.”

“그래서 뭐 이야기 이것저것 많이 했어. 요가랑 명상 되게 좋아하신대.”

“와우.”

식사 자리에서 아무도 언제부터 출전이 가능하냐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다만 신기한 것은.

어떻게 보면 가장 멘탈이 잘 흔들리고 외부 자극에 취약한 우리 서포터가 전보다 훨씬 단단한 모습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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