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만나서 반갑습니다
“초반에는 탑 중심 메이킹.”
내 계획에 팀원들이 와달라거나 오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 것들은 별로 중요한 게 아니다.
“베리 굿.”
전체적인 스케치를 짤 수는 없을지언정, 내가 몇 마디만 던져도 그 근거를 추리하는 능력은 모두에게 있으니까.
팀원들은 추가적인 질문 없이 납득한다.
우리가 가져온 조합은 라인전에서 강하다.
하지만 내가 가져온 판테언은 정글러로서는 굉장히 솔직한 편이다.
“바텀. 잘 부탁해요.”
그래서 내가 반대편의 라인으로 가기 위해서는.
그만큼 아래에서 힘을 내줘야 한다.
1세트에서 바텀 중심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였으니 더욱 그렇다.
상대가 아무리 허수아비라도 마찬가지다.
“그래!”
윤도형은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옆 눈짓으로 바라보는 게 느껴진다.
저 정도면 시신경이 땅길 것 같은데.
“윤도형이 루루는 뭐..”
곽지운은 집중의 세계로 빠져들어 가며 말끝을 흐린다.
“예성?”
“내가 도울게.”
김예성은 이제 상대 미드의 타이밍에 대해서 훤히 꿰고 있었다.
예전에 내가 상대의 습관과 요령을 알려준 뒤.
스스로 공부한 우리 미드는, 이제 강준윤의 카운터라고도 할 수 있다.
“좋아.”
그림, 빅픽처, 청사진, 설계.
경기를 뛰는 것은 다섯명이지만, 또 다른 인원들이 함께한다.
모두 함께 짠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감코진이 물러간 뒤, 스케치를 물려받아 화폭에 그려내는 화가가 필요한 법.
오더가 아닌 라이너들은 갖은 임기응변을 통해 경기를 풀어나가는데.
이게 붓이 스치는 한 획이고.
획을 오른쪽으로 그을지, 왼쪽으로 그을지.
혹은 어떤 색으로 칠할지.
이 선택에 도움을 주는 것이 오더다.
그 그림을 원래 팀이 그리고자 했던 것과 가장 가깝게 그려내면 승리를 얻을 확률은 올라간다.
“이제 보여주자.”
그래.
오늘 내가 그리고 있는 그림은.
“오늘이 종말의 날이라는 것을.”
아마도, 직경 수백 킬로미터짜리 그림일 것이다.
#
“판테언이 자주 나오지 않는 이유는 그런 게 있습니다.”
경기 초반.
두 팀은 서로에게 크게 간섭하지 않았다.
“리그에서 주류라고 불리는 정글 픽들은 주로, 예. 크게 도움을 받지 않더라도 어느 정도는 역할을 할 수 있는 부분이 있거든요.”
“그렇습니다. 어떻게 보면 서포터랑 비슷한 부분이 있어요. 서포터도 자원적 투자를 최소화하면서 그 안에서 제 역할을 해달라고 기대하거든요.”
정글과 서포터의 유사점을 토로하던 해설진은.
“하지만 이게 판테언은 유통기한이 조금 짧은 편이에요. 사실 꽤 잘 커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잘 나오지 않는 겁니다. 기본적으로 메타를 가리지 않고 사랑받는 픽들은 대체로 라이너에게 투자를 많이 해요. 왜냐면.”
“정글러의 위상이 많이 올랐다고는 하지만, 결국 라이너만큼 강해지는 건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권건 선수가 ‘라이너급 성장을 밥 먹듯이 한다’라는 표현이 정말 무서운 거구요.”
“네. 초반을 빼면 블루는 미드가 먹겠다, 레드는 원딜이 먹겠다, 그것도 아니면 탑이 자기 달라고 조르는데. 맨! 날! 먹이 가져다줘야 하는 신세거든요?”
- 왜 이렇게 한이 맺혔어?
- ㅋㅋㅋㅋㅋㅋ그래서 도축해다 바치는 백정ㅋㅋㅋㅋ
- 권건은 자수성가형임ㅋㅋㅋㅋ 스스로 신분 상승
- 권건이라니? 신이라고 불러라
- ‘신’분 상승
“지금 FWX의 전략은 라이너들이 공격적으로 하다가 권건 선수가 잡아낸다, 이런 걸로 보이구요. 특히 탑에서 레넥과 판테언이 확정 CC를 통해 판테언과 득점을 해내야만 이 경기를 정상적으로 굴릴 수 있어요. 이걸 스톰에서도 모르지는 않을 겁니다!”
“그래서 아무래도 정글러의 폭이 좁아지는 부분이 있어요. 판테언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결국 서폿 판테언과 정글 판테언이 차이가 날 수 있을지가..”
“잘못하면 이거 판테언이 붕 뜬 깍두기가 되어 버릴 수 있는 거거든요!”
잠시 정글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가 결국 포인트를 탑과 정글에 맞췄다.
이번 경기에도 결국 주인공은 FWX의 정글이 아닐까 하는 마음이다.
하지만.
“어어, 바텀, 바텀, 바텀!”
꽤 호흡이 괜찮은 편인 스톰의 바텀 듀오는 픽을 마쳤을 때 조금 황당한 기분을 느꼈다.
상대 정글러가 오리지널 서포터인 루루를 가져갔기 때문이다.
“아, 수달이 형. 이건 좀 혼내줘야 하는 거 아닌가?”
“그래? 우리 지인이 원하는 대로 하자.”
순한 원딜러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포터 김지인도 붙임성 있는 유들유들한 타입이었지만.
다른 포지션에서 온 선수가 순수 서포터 챔피언을 고른 부분이 묘하게 불편했다.
복수 전공을 듣는 친구가 전공 학생들도 떨어져 나가는 악명높은 강의를 신청한 느낌?
뭔가 내 자존심을 건드리는 느낌?
판테언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어머니’ 계열까지 손을 대는 건 좀 그렇다.
기본적으로 정글러같은 사람들이 상상도 못 할 정도로 체력이 낮은 챔피언.
설마 뒤에서 실드와 버프나 주면 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건 서포터를 너무 띄엄띄엄 보는 거 아닌가.
그래서 스톰의 바텀에서 FWX에게 승부수를 던진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준윤이 형, 권건 칼부 쪽이지?”
원딜은 순간 미드에 묻기보다는 정글에게 묻는 게 정상이라는 생각이 스쳤지만.
“응.”
어쨌든 미드에게서 답은 떨어졌고, 김지인은 상대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주기로 했다.
“이거, 에단 선수가! 에단 선수가 먼저 겁니다?!”
“이거 굉장히 과감한데요! 아직 양측 정글러는 합류할 수 없는 상황!”
스톰에서 누군가 미리 그림을 완벽하게 그렸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었다.
과감한 투자는 리스크도 크니까.
“레나타의 앞점멸 악수! 바로 폴리 선수의 루루에게 스킬 적중..하는데!”
팀 게임을 할 생각이었다면, 스톰의 바텀은 스펠을 아끼며 좀 더 기다렸을 것이다.
“근데 이거, 이거, 좀 쎄해요! 쎄한데요!”
그리고.
윤도형의 루루가 상대 서폿에게 낚아채이는 그 순간.
“이거.”
윤도형은 뺨이 저릿저릿한 느낌을 받았다.
정확하게 권건이 말해준 그림.
밴픽에 이어 플레이까지 맞아떨어진다.
“바텀.”
말은 길지 않았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전투 상황이니까.
솔랭에서 라이너를 해보던 때나 코칭 박스에서 들여다보던 것과는 다르다.
역지사지.
정글러나 서포터가 오더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이유는.
라인전을 하면서 말을 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을 최근에 깨달았다.
“상대 정글 못갑니다.”
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권건이 시의적절한 콜을 내린다.
정보를 따로 요청한 것도 아닌데 어떻게 알았을까.
대신 판단을 해주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알았다.
그리고 그만큼, 내가 여태까지 얼마나 부족한 정글이었는지도.
이것이야말로 자신이 원래 포지션으로 돌아가면 해야 할 일이라는 걸 확실히 알겠다.
어쨌든, 이건 전투의 허가를 뜻한다.
“...”
곽지운은 아무 말이 없지만 함께 움직인다.
경기장에서 자리가 탑, 정글, 미드, 원딜, 서포터 순으로 자리가 배치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옆에서 호흡이 느껴진다.
마이크까지 전해지지는 않지만 미묘하게 옆에서 느껴지는 아우라 같은 것.
탑과 미드 사이에 앉아있던 정글과 다르게, 서포터의 옆에는 온전하게 원딜 하나만을 배치한 이유.
LOS 신께서는 다 뜻이 있으셨구나?
윤도형은, 이 느낌을 믿고 뛰어든다.
“지금, 지금 이거! 에단 선수가 좀.. 얕봤어요?! 루루가 초반에 진짜 세거든요!”
“졔리가 도와줄 만한 충분한 딜이 안 나옵니다! 이거, 이거, 루루가, 지금! 세계관 최강자!”
“사실 판단하기가 좀 어려운.. 그런.. 부분이 있긴 한데, 만약 다른 선수가 루루를 했다면.. 에단 선수가 먼저 싸움 안 걸었을 것 같거든요!”
윤도형은 두꺼운 손가락을 움직인다.
투박하게 바짝 깎은 손톱이 키보드 위를 누빈다.
“웃긴 새끼.”
오른손에 쥐인 마우스를 부드럽게 움직이며 앞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눈이 닿는 곳에는 자신의 루루가 있다.
“폴리 선수가 서폿 경력이 없는 건 아니거든요!”
“몇 경기정도 뛰긴 했습니다! 예! 판테언이지만, 아니, 그런데! 지금! 끝까지! 무슨! 정글 루루처럼 따라가서 때리잖아요!”
“전혀 쫄지 않습니다, FWX! 그대로 앞으로 밀고 들어갑니다!”
“미친 평타 챔피언! 도와줘! 피이이이익스! 반짝반짝! 마구 때려요! 시비루, 루루, 픽이익스! FWX 바텀은 세명이야! 이게, 이게에에에! 고사리손으로 때리는 건데! 지금 이렇게 저레벨 단계에서는 고사리손이 고사리가 아닙니다! 채찍이에요! 채찍!”
“아니, 아니, 아니? 아니? 평타를 너무 많이 때렸어요!”
“거의 정글러급 딜링!”
- ㅋㅋㅋㅋ시발ㅋㅋㅋㅋㅋ 버프 자기한테 걸고 때려ㅋㅋㅋㅋㅋ
- 상대 견제는 익저면 충분하다ㅋㅋㅋㅋ
- 폴리랑 루루 공통점 찾았다; 둘 다 미쳤음
- “예상 밖”
- 뉴타입 서폿;; 아니 이거 서폿 아니잖아 시발 원딜 시비루루네
- 에단 색안경 플레이 지렸다ㅋㅋㅋㅋ
- 파일럿을 보고 때려야 하는가 챔피언을 보고 때려야 하는가 그것이 문제로다
- 루루 지독한 것.. 뺨이 얼얼하네..
윤도형은 평소에 입을 양옆으로 올려 이를 드러내고 웃곤 했지만.
지금은 누구처럼 왼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고 웃었다.
아직 잊지 않았다.
내 원래 정체성은 먹잇감을 놓치지 않는 정글.
상대가 나를 잡아먹으려고 든다면, 나도 잡아먹으면 그만이다.
“내 이름은 루루. 정글이죠.”
장난기가 넘치는 이 작은 챔피언은.
모두에게는 비밀이지만 귀여운 것을 좋아하는 윤도형이 LOS에 입문하게 된 계기이자 첫 챔이며.
칼바람 전용 계정과 비공개 계정에서 가장 많은 플레이를 한 귀염둥이.
그리고 최애 탑이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이 십새야.”
윤도형의 눈에 최종 병기 루루의 광기가 물든다.
#
우리는 바텀에서 득점을 올리며 출발했고.
관성에 따라 바텀을 바라봤던 상대 정글은 붕 떴다.
“무지개색 총공격이다!”
윤도형은 뭔가 혀짧은 소리를 내기 시작했지만, 그만큼 강해졌다.
서포터에게 강해졌다는 표현이 옳을지는 모르겠지만.
기세가 그렇다.
“얘가 정글인 이유는 한곳에 오래 머물면 사람을 미치게 해서 그런 것 같다.”
곽지운은 짧은 평가를 남기고.
“하, 쉽다. 쉬워. 이게 LKL 최강의 탑?”
내 도움을 받은 이유찬 역시 득점을 올렸다.
상대 탑인 글로리가 화가 난 것이 여실히 느껴지지만, 정글의 지원은 오지 않는다.
내가 주변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이상, 상대 탑은 평소의 절반의 힘조차 내기 어렵다.
“그건 아니지. 건이가 도와준 거잖아.”
“음. 감축드리옵니다, 폐하.”
“아니지.. 그것도.. 틀렸잖아.. 내가 탑한테 너무 많은 걸 바랬나?”
글쎄, 그럼 상대 정글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불현듯.
지난번 경기에서 그를 만났던 생각이 났다.
그때의 나는 울라프.
별을 하나 세고, 도끼를 줍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별을 하나 세고, 도끼를 주웠더랬다.
“미드.”
“오케이.”
자연스럽게 차이를 벌린 나는 또 한 번 스톰 미드 강준윤의 습관을 이용해 득점을 올린다.
김예성은 슬쩍 나에게 킬을 양보한다.
“이럴 필요 없는데.”
“유통 기한이 길면 갱에도 좋지. 아, 물론 건이 너에겐 유통 기한이 없지만.. 미드는 할 만해서.”
“그래.”
복잡한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어차피 서로 아니까.
상대 미드의 플레이가 흐트러진다.
김예성의 플레이와 강준윤의 플레이는 닮은 구석이 있다.
완벽주의자, 로머, 그리고 올곧음.
사실 탑도, 바텀도 그런 면이 있다.
FWX의 선수들은 스톰과 묘하게 닮아있다.
심지어 한 명에게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까지도.
하지만 이 별들을 품고 있는 장소가 다르다.
여기서 발견한 새로운 세계.
김예성에게 말한 것처럼.. 어쩌면 나 역시도 나에게 꽤 잘 맞는 옷을 찾았을지도 모른다.
“그럼 이제.”
어떻게든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짓하는 이곳.
나는 그것들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싶다.
그래서 나는.
탑도, 미드도 될 수 있으며.
바텀으로도 갈 수 있는 판테언을 들었다.
그리고 어쩌면 이것은 내 이전 정글이었던 윤도형에게서 받아온 일종의 계승일지도 모른다.
뭐, 정글 판테언은 아니었지만.
“서머의 1라운드를 끝내보자.”
내 정신은 우주처럼 넓어진다.
하나의 거대 유성이 되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