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은유
병원에 다녀온 최은호는 집에 있었다.
깔끔한 아파트다.
예전에 살던 반지하에서 벗어나.
이제 찢어지지도, 지저분하지도 않은 벽지가 햇빛을 머금고 있다.
부모님과 할머니.
그리고 집에 자주 들어오지 않는 형을 위한 방과 내 방이 따로 있다.
물론 여기에 오기까지 친형의 역할이 더 컸다.
최은호는 여전히 슈퍼스타가 아니었고, 데뷔까지 들어간 돈도 제법 있었으며.
가족을 위한 아파트라는 게 현금 박치기로 살만큼 만만한 게 아니었기 때문에.
하지만 최은호도 손을 보탠 건 확실하다.
최은호는 PC 대신 거실에 있는 TV를 선택했다.
휴대폰도 방에 놓고 나왔다.
스마트 TV이기에 사실 PC와 큰 차이는 없지만.
각종 브라우저나 사이트의 댓글 창에 접근하기에는 더 어려운 면이 있다.
“로그아웃..”
동영상 플랫폼의 계정에서 로그아웃한다.
자신의 영상 알고리즘에서 조금이나마 멀어진다.
부쩍 달라진 사회상에서 선수들의 멘탈 관리를 위해 붙은 상담 심리사의 추천이다.
휴대폰을 스마트 TV로 대체하는 물리적 분리.
그리고 계정 로그아웃을 통한 간접적 분리 처방.
전자기기 금지나 인터넷 선을 자르는 것처럼 무리하게 모든 것을 금지하지는 않는다.
어차피 세계 분리는 이미 성인인 이 선수의 의지에 달린 일이니까.
이전보다 훨씬 정보에서 멀어지기 어려운 환경.
어렸을 적부터 익숙했던 체계들.
상담사가 뭐라고 말하건 휴대폰을 손에서 떼기조차 어려웠던 SNS 중독 최은호지만.
권건과의 대화에서 실마리를 찾았다.
TV 채널을 돌린다.
세계 각지에서 일어난 일, 경제, 정치, 그리고 드라마.
그 어디에도 자신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세상은 생각보다 나에게 관심이 없다.
그리고 멈춘 채널은.
“당신의 생각이 파도처럼 밀려옵니다.. 그리고 다시 멀어집니다..”
명상 채널이다.
최은호는 소파에 앉아 팔을 편히 두고 스르르 눈을 감았다.
여전히 끊임없이 마음이 불안하지만.
크게 숨을 들이쉬고 내쉰다.
“자신을 스스로 믿는 힘으로 고난을..”
싱잉볼 소리와 함께 강사의 고요한 말이 울려 퍼진다.
스스로 믿는 힘?
글쎄.
믿음이 인간의 육체와 같다면, 최은호에게는 아직 근육이 없다.
나를 믿어서 어떻게 될지 확신도 없다.
아직은 그렇다.
“강사님.. 사람마다 다른 거니까요.”
하지만.
믿어주는 사람들은 있다.
그렇다면 틀림없이 달라질 수 있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기다릴 사람들을 위해서.
#
- STM Glory (TOP) : 요즘 뭐. 차니 선수가 뜨는 별이다 뭐다, 하던데. 탑에서 일대일로 한번 제대로 붙어보고 싶네요.
- FWX Chani (TOP) : 아, 스톰 전이요? 봉구 형님이 많이 알려줬어요.
- STM Glory (TOP) : ?
- FWX Chani (TOP) : 봉구 형님한테 탑 차이?로 지셨잖아요. 팬시라고 혹시 기억 안 나시는?
- STM Glory (TOP) : ..!
트래쉬 토크 촬영에서.
우리 청정수 탑은 LKL에서 공격성 하나로는 최고 수준이라고 불리는 최영광을 긁었다.
최영광은 자신의 무력을 뽐내고자 하는 성향이 강한 선수.
지난 시즌에는 문봉구를 상대로는 뛰어난 모습을 보여줬지만, 결국 한타에서 대패하면서 몰락했었다.
“탑, 그렇게 해도 되는 거야? 너무 심한 거 아니야?”
“트래쉬 토크의 트래쉬가 쓰레기 아니야?”
“어..”
“나 되게 신사적으로 말했는데?”
“그렇게 따지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근데 냄새나지 않냐?”
“쓰레기 냄새?”
“내 감각이 말하고 있어. 저쪽은 우리처럼 친밀한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이유찬이 나에게 다가오며 어깨동무하려고 한다.
나는 슬쩍 어깨를 틀어 이유찬을 피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방 녹턴이 어딜 감히 어깨동무?
스톰은 필사적으로 숨기려고 하지만 이미 팀의 분위기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없다.
나는 정글이 팀에 균열을 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스톰이 이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일 따위는 있을 수 없으니.
사람들은 다양하게 나뉘어 스톰의 문제에 대해서 논하고 있다.
연애를 하는 사람이 문제다, 선수도 사람인데 이해해줘야 한다.
협조가 안되는 팀원들이 문제다, 정글 플레이가 이상하지 않냐.
무능한 감독이 문제다, 감독은 죄가 없다.
게다가 스톰의 콘텐츠에서.
벽에 이전까지는 없었던 협동 표어가 걸려있는 것이 노출되면서 이런 게 걸려있다는 것 자체가 유머라는 평가를 듣고 있다.
“그리고 상대가 스톰이잖아. 김미드. 정신 안 차려?”
“아! ..스톰. 그래. 스톰이구나.”
잠시 생각에 잠겼던 김예성이 번쩍 고개를 든다.
“고마워. 나 갔다 올게.”
- STM King (MID) : 라온 선수가.. 실력이 많이 늘었더라고요. 좋은 경기 합시다..
강준윤은 스톰을 떠나지 못하는 망령이다.
꽤 좋은 선수인데 항상 고통받는다.
곽지운의 스톰 버전이라고 볼 수 있겠다.
다른 삶과 달리 하석준 전 2군 감독이 더 큰 일을 벌여서일까, 부쩍 지쳐 보이는 얼굴이었다.
- FWX RAON (MID) : 감사합니다, 킹 선수!
이유찬의 말을 듣고 나간 김예성은.
- FWX RAON (MID) : 하지만 제가 봤을 때는 킹 선수가 더 많이 느신 것 같은데요?
- FWX RAON (MID) : 지난번보다는 더 좋은 경기가 되면 좋겠어요. 스톰, 화이팅!
평소 진중한 분위기와 달리 훨씬 활기차고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촬영을 마쳤다.
“야, 김미드. 칭찬하면 어떡해?”
이유찬은 답답하다는 듯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고.
“어휴. 우리 예성이는 트래쉬 토크도 잘 못 하고. 이런 코너 폐지했으면 좋겠다.”
정말로 트래쉬 토크를 못 하는 곽지운이 자기보다 키가 큰 김예성을 토닥인다.
“임시 서폿은 기회 안 주냐? 나 잘할 자신 있는데.”
윤도형은 별로 관심이 없는 기색.
“예성아..”
다만 그 모습을 보던 멘탈 전문가 김한빛 코치님은 무언가 눈치챈 모양이다.
“너.. 일부러 그랬어?”
“무슨 말씀이세요?”
김예성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맑은 눈빛으로 고개를 슬쩍 까딱인다.
“아니..”
김한빛 코치님은 나와 눈을 마주쳤다.
나도 작게 끄덕였다.
강준윤은 김예성보다 선배다.
그러니까 ‘킹 선수 실력이 많이 늘었다’는 말은 ‘지금은 내가 너보다 더 우위에 있다’는 말이고.
‘지난번보다는 더 좋은 경기가 되면 좋겠다’는 말은 ‘지난번에 너네 개 처 발렸잖아, 날 좀 더 즐겁게 해봐’ 정도가 되겠다.
요즘 부쩍 처져있는 상대에게 ‘스톰, 화이팅!’은 기만이고.
결국, 우리의 승리를 전제로 두고 있는 입장인 김예성의 말은.
깝치지 말라는 뜻이다.
“그래.. 그렇지. 우리 예성이가.. 그런.. 그런 거.. 잘하네.. 정말..”
그것도 환하게 웃는 낯으로.
김예성.
무서운 아이.
누가 이 수줍은 선수를 저렇게 만들었는가.
“김미드. 다음에는 좀 더 쓰레기같이 말해라.”
“연구해볼게.”
김예성이 어깨를 으쓱하며 나에게 칭찬해달라는 것 같은 눈빛을 보낸다.
어딘가에서 옮은 것 같은 맑은 광기가 엿보인다.
안 해줘.
돌아가.
#
2025 LKL 서머 시즌, 43번째 매치.
대전 FWX와 성남 스톰의 이번 시즌 첫 경기.
FWX는 서포터가 컨디션 난조를 겪으면서 일시적으로 정글러가 서포터 포지션으로 나왔지만 스톰의 상황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멀쩡하고 네임 밸류가 있는 선수들이 통째로 흙탕물에 구르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과거 FWX처럼 오더가 없거나.
극단적으로 팀 합이 맞지 않는 경우.
“아니 권건, 권건 뭐에요 진짜아아아악!”
“이 선수가 또 스틸했어요! 그냥 냉큼 먹어버렸습니다! 이거, 이러면 스톰 바텀에서 아무리 열심히 해봤자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지는데요!”
“진짜 뭐냐구요!”
“왜 자꾸 물어보시는 거예요! 권건이에요! 이름이 권건! 선수명도 권건!”
“아니이이이이이익!”
“챔피언이 궁금하세요? 짜오네요!”
“진짜아아악!”
“짜오고! 호위무사고! 장군입니다!”
그 외에도 프론트, 멘탈, 부상 등 다양한 케이스들이 있지만.
스톰은 팀 합이 엉망이었다.
지난 시즌 맞지 않았던 부분이 더욱 커져, 지금은 마치 솔랭이라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러면 스톰, 또다시 엉켜요! 스텝! 스텝! 왼발! 왼발! 아니이! 왼발 하기로 했잖아요! 왜! 왜 또 따로 움직이는거냐구요!”
“결국 끊기고 맙니다!”
성남 스톰과의 1세트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결국 FWX가 스톰을 또다시 무너뜨립니다!”
“이번 시즌, 스톰 입장에서는 정말 대단히 침통한 시기입니다! 원래 이런 팀이 아니라구요! 정말, 킹 선수가 지하에서 울고 있습니다! 멱살을 잡으려고 해도! 라온 선수가 미끌미끌하게 빠져나가 버리니까 손에 잡히는 게 없어요!”
“이대로오오오! 경기! 마무리 됩니다아아아악!”
다만.
“와, 이 개 같은 놈. 진짜.”
“흠.”
코칭 박스로 돌아온 바텀의 두 사람은 불편한 기색이 컸다.
“내가 이런 거 잘 못 느끼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윤도형은 크게 숨을 골랐다.
“붐보이 저 새끼 몇 살이냐?”
“도형이 형, 진정해. 나도 몰라.”
“현피 뜨고 싶은 거 존나 오랜만인데. 게임 진짜 병신같이 하네?”
다혈질인 윤도형은 머리끝까지 화가 나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말렸을 곽지운 역시.
“이겼으니까 괜찮긴 한데.”
짧게 코멘트 후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형님들, 왜 그러는데?”
“탑. 너 혹시 F4나 F5가 빠져있니?”
“나 F 숫자는 스킬 찍는 키인데. 팀원 뷰는 다른데 어디 옮겼음. 어디더라?”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다른 플레이어 화면으로 전환을 잘 하지 않는 이유찬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상대 정글의 바텀 봐주기 플레이가 좀 과하더라.”
곁에 있던 최수철 코치가 설명을 보탰다.
좋게 말해 바텀 봐주기지.
사실상 스톰 정글은 바텀 주변만 맴돌았다.
스탬프를 찍어보면 적나라하게 드러날 것이다.
“그러니까. 뭐랄까..”
“꼭 KDA 관리하는 것 같지 않았어요?”
윤도형이 눈을 번들거린다.
“존나 내가 만만한 건지. 경험치 손해 보고, 정글 손해 보고, 탑 미드 다 버리면서.”
“도형아. 그렇게 넘겨짚는 건 좀 무리가 있지만.”
박진현 감독도 선수들을 진정시키며 경기를 위해 준비한 몇 가지 밴픽 포맷을 리스트업했다.
윤도형이 계속해서 픽하고 있는 판테언.
상대가 바텀에서 집요한 플레이를 펼친 것은 판테언을 열고, 포지션에 익숙하지 않은 윤도형을 노리기 위해 일부러 계획한 것일 수도 있지만.
전체적인 느낌이 달랐다.
자신도 모르게 움직인 박 감독의 손이 신경질적으로 책상을 톡톡 두들기며 조용한 분노를 표한다.
경기를 지켜보던 박 감독 역시 빈정 상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가능하다면 해킹이라도 해서 스톰 선수들이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들어보고 싶다.
이겼지만 열받는 경우가 있다.
상대가 열정적으로 플레이하지 않는 경우가 그렇다.
선수들은 제각각이기에.
말 뒤에 숨긴 칼이나 은유는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LOS는 직업이자 그들의 모든 것이다.
상대가 제대로 된 플레이를 하고 있는지, 정상적인 행동을 취하는지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약팀인 제주 F.L.E를 만났을 때도 FWX는 스윕승을 거뒀지만, F.L.E가 실력이 부족할지언정 열정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지는 못했다.
스포츠의 기본인 그것이 없었다.
승리는 따냈지만, 뒷맛이 깔끔하지 않다.
“그럼.”
하지만 감독이 분노를 함부로 표현하는 것은 팀 전체를 휘말리게 할 수 있다.
박 감독은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우리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겠지.”
권건과 박 감독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그걸로 가시죠.”
깔끔한 그의 한 마디에.
“건이가 저런 팀에 있었다고? 하..”
“쟤네 게임 할 생각 없으면 진짜로 개박살내버리자고!”
“윤도형의 비밀 무기, 개봉박두!”
“좋았어! 출격한다! 나의 영혼!”
화가 난 FWX 선수들은 혀를 내밀며 마른 입술을 핥는다.
거대한 지각 변동이 일어나기 직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