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언제부터였을까
성남 스톰의 1라운드 마지막 경기는 대전 FWX.
몇 해 전, 월챔에서 우승까지 했던 스톰의 최근 위상은 형편없었다.
그 당시 로열 로더를 달성한 미드 라이너이자 스톰의 간판스타인 강준윤은 지금까지 팀을 믿고 스톰에 있었지만, 이 선수의 인내심도 슬슬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야. 허진수. 네 여친, 아니, 여친들이라고 해야 하나. 비밀 좀 지키라고 해.”
“뭘?”
“연애하는 거. 뭐가 자랑이라고 그렇게 떠들고 다녀! 시즌 중이잖아. 너, 이런 식으로 하면 계속 경고 듣는 거 몰라서 그래?”
강준윤은 팀의 중심을 잡아야 할 주장.
주장의 자리란 게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닐지언정.
이 팀을 끌고 가겠다는 의지가 가장 강한 사람은 강준윤이다.
중국 생활을 마치고 스톰에 온 이 정글러는 개인의 피지컬은 뛰어난 편이지만 시즌 초부터 꾸준히 팀워크를 해치고 있다.
연애는 죄가 아니다.
하지만 팀의 상황, 계속해서 바뀌는 상대는 가뜩이나 안 좋은 팀의 상황을 악화시킨다.
“경고 들으면 뭐 어쩔 건데? 걔네가 인플루언서인 걸 내가 어떻게 하라고?”
정글러 허진수는 팀이 지금 대안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정말 팀에서 허용하는 마지막 선만큼은 넘지 않는 영악한 태도를 취했다.
기존 스톰 정글이던 이태윤은 스톰의 권좌에 손을 보태는 괜찮은 정글이었던 때가 있었지만, 어느 순간 닥쳐온 슬럼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스톰은 이태윤의 감을 보존하기 위해 퓨처스 리그로 내려보냈다.
하지만 결과는 사실상 잠정 은퇴.
개인의 고점에 만족해버린 이태윤은 더 이상 리그에서 뛰고 싶어 하지 않는다.
평소 같았으면 콜업 고려조차 하지 않았을 2군 퓨처스 리그의 정글 역시.
하석준이라는 미친 새끼가 권건을 내보내고 들인 김상우라는 신인 정글러는 나이가 어려 1군 경기에 나오지 못한다.
실력 역시 퓨처스 리그의 평균 수준.
물론 1년 뒤 출전이 가능한 순간이 온다면 그때 어떤 선수가 되어있을지는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걸 기다리기에 강준윤은 마음이 급했다.
대체 이 운명은 어디서부터 갈라지기 시작한 걸까..
“야, 너도 소개해줄까? 얘 어때. 몸매 존나 좋지?”
“더러운 소리 하지 말라고!”
“이게 왜 더러운 이야기지? 너야말로 더러운 생각하는 거 아니냐?”
대쪽 같은 강준윤은 자신과 색이 아예 다른 이 선수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문제는 이것만 있는 게 아니었다.
지금은 경질된 2군 전 감독 하석준이 푼 독.
유독 FWX 박진현 감독에 대해 안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던 하석준.
어떤 것이 기폭제가 되었는지 자극받은 하석준 전 감독은 담당 선수였던 권건에 대한 악성 찌라시, 심지어 징계 후 몰래 진행했던 개인 방송에서의 ‘썰’까지 풀었지만.
그 모든 것이 거짓으로 밝혀지면서 성남 스톰은 최악의 구설에 휘말렸다.
“안 그래도.. 팀이 힘든데.. 너는 사생활 하나 관리 못하고..”
스톰의 프런트는 과거의 영광에 젖어 대응이 느렸다.
실제로 가만히만 앉아있어도 위세를 떨치던 게 불과 몇 년 전.
팀이 점차 태만해지고 있다는 것을 그 누구도 깨닫지 못했다.
맹장 성향을 가진 1군 감독 김지훈도 뚝심과 강직함은 가지고 있을지언정 유연한 사람은 아니어서 이런 상황에서는 손발이 안 맞았고.
프런트 역시 하석준에 대한 소송까지 진행 중.
정신이 없다.
“하..”
선수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음해까지 한데다 선수의 가치를 모른다는 말, 한물갔다는 소문도 퍼져 이번 하반기 아카데미 모집 인원도 목표치에 미달됐다.
명예로운 스톰으로서는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존나 깨끗한 척하시네. 팬 많다 이건가? 아. 나도 한국에 계속 있었으면 지금쯤..”
허진수의 말에 강준윤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경기에 집중해. 시즌 끝나고 만나도 되잖아.”
“사랑은 기다려주는 게 아니에요. 이 답답한 새끼야. 다 연애하고 살아. 우리도 사람이야. 하, 진짜 좆같네. 내가 감독한테도 듣는 소리를 너한테까지 들어야겠냐? 갱 안 받고 싶어?”
충격적이다.
강준윤은 허진수가 얼마나 미친놈인지 알고 있다.
저 협박은 진심이다.
개인의 감정을 경기에까지 끌고 들어온다.
탑 최영광이 허진수에게 한마디 했다가 철저하게 탑을 외면하는 플레이를 당한 적이 있다.
그 이후, 탑과 정글은 완전히 돌아섰다.
“얼굴도 반반한 새끼가 낭비 오지네. 야, 인기 그거 한 철이야. 니 피지컬도 훅 가는 거 순식간이고. 팔꿈치 저리다며? 요새 니 부진한 거 감코진이 모를 줄 아냐? 다 체크 당하고 있어. 그러다가 손절 당하는 거야. 그럼 그때 이딴 성격으로 방송하면 사람들이 볼 줄 아냐? 그냥 바로 혼자 골방에서 게임이나 하는 폐인 신세지.”
빈정거리는 말에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는다.
강준윤은 결코 능력이 없는 선수가 아니었지만, 모든 프로게이머의 걱정을 파고드는 말이 마음을 할퀸다.
“걔 모르냐? FWX 서포터. 클.. 클? 뭐시기. 존나 훅 갔잖아. 걔처럼 쓰레기 되는 거야. FWX도 걔 버릴 텐데. 그거 보고 정신이나 좀 차려. 선수를 기다려주는 팀처럼 꿈같은 얘기는 이 바닥에 없으니까. 우리는 다 계약된 도구야, 순수한 새끼야.”
스톰은 이미 선택을 했고.
이제 다른 대안이 없다.
“또 어디 가는데.”
“귀 버려서 귀 씻으러 간다. 화장실 따라올 변태 새끼 아니면 꺼지세요.”
허진수는 뻔뻔하게 휴대폰을 꺼내 흔들었다.
올드한 스타일의 김지훈 감독이 몇번이고 압수했던 휴대폰이다.
몰래 빼낸 건지, 또다시 개통한 건지 이제 모르겠다.
“...”
왜 트롤 한명에게 팀 전체가 끌려가야 하는가?
그저 이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이기고 싶어 했을 뿐인데.
현실이 게임과 다르지 않다.
#
“합류.”
우리는 유럽팀과 가벼운 분위기의 온라인 스크림을 진행하고 있다.
오늘의 컨셉은 서로 여러 가지 창의적 플레이를 해보는 것.
시차가 조금 나는 터라 우리는 보통 늦은 시간.
유럽 팀은 이른 시간에 하게 된다.
이건 프로게이머의 삶이 일반인과 다른 시간대를 걷는 이유 중 하나기도 하다.
스크림 상대는 국내에 한정되지 않으니까.
그래서 서로 조율이 중요하지만.
“오케이.”
최근의 우리 팀의 입장은 많이 달라졌다.
스크림 시간을 정하는 것에도 항상 갑과 을이 존재한다.
거래처와 같다.
어느 쪽이 더 급한지, 어느 쪽이 더 많이 원하는지.
선수들은 별로 신경 쓰는 부분이 아니지만 감코진은 실제 경기 시간과 동일한 시간대의 연습을 선호한다.
사람은 습관이 있기 마련이라서.
원래 경기 시간이 잠을 자는 시간이라면, 몸이 말을 듣지 않을 테니까.
최대한 디테일하게 집중의 시계를 맞추는 쪽이 도움이 된다.
“야, 김미드. 내가 더 빨리 간다.”
“내가 더 빠를걸?”
우리와 스크림 하는 것이 상당히 많은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가 퍼져있다.
그래서 우리는 상대가 유럽에 있음에도 우리 경기 시간과 크게 떨어지지 않은 시간을 가져올 수 있었다.
국내외에서 모두 좋은 스파링 상대.
“아닌데.”
“맞는데.”
모든 팀의 관계가 좋지는 않다.
예전 빅스와의 내기처럼, 처음에는 가볍게 내기로 시작했다가 서로 의가 상했을 수도 있고.
스크림에 성실하지 않은 태도를 보이거나.
지나치게 자신들의 패는 숨기고 상대의 패는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
심지어 어떤 팀은 상대가 무언가 얻을 것 같다 싶으면 바로 퍼즈를 걸고 리겜을 요청하기도 한다.
“오브젝트 우선 볼 테니까 바로 끊어줘.”
“합류.. 완료!”
“탑? 어떻게..!”
여기에 나라에서 정한 법이 있는 건 아니니까 이건 결국 매너 문제.
팀 간의 사정이니만큼 많이 알려지지는 않는데, 결국 팬들도 어떤 팀은 서로 사이가 좋고 어떤 팀은 사이가 나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팀도 결국 사람이 운영하는 것이다 보니 그렇다.
그 외에도.
자신들이 우위에 있는 것처럼 스크림을 일방적으로 취소하거나 미루면서 적절하지 못한 스탠스를 취하면서 불편해지는 경우도 있다.
아무리 모두가 평등하다고 해도 실력이 전부인 스포츠.
분명히 우열이 있지만, 그것을 휘두르는 것은 일종의 갑질이다.
사실 이건 우리 모두가 아는 그 국가에서 자주 벌이는 만행이긴 한데.
뭐, 어쨌든.
“뭐야? 탑 방금, 방금 합류 방금 뭐야? 어떻게 나보다 어떻게 빨리 합류?”
“예성이 말 진짜 빠르다.”
“나 김예성 쟤 말 많아진 거 보고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유찬 저 또라이랑 대화하면 자기도 모르게 빡쳐서 말이 빨라지게 되더라.”
“응, 또라이 1번 윤도형.”
“원래 서폿이라는 포지션이 너 같은 원딜 다 받아줘야 하는 거지? 내가 봐준다.”
“아..씨.. 최은호 보고 싶다.”
“바람 핌?”
“니 너무 싫어 진짜. 극혐이야.”
“나돈데. 존나 통해버렸고.”
FWX는 ‘약팀’이었지만 올라온 팀이다.
그래서 적도 없는 편이었고, 누구와 싸운 적도 없다.
다만 철저히 소외되어 자신들만의 세상에 있었을 뿐.
“탑, 너 설마!”
“후후, 그래. 맞다. 김미드..”
“도대체 왜..?”
새롭게 쌓아나간 FWX의 이미지에 크게 부정적인 부분은 없었다.
우리와 비교적 덜 가까운 팀은 미라쥬와 피닉스.
“나는..! 점멸을 써서라도.. 빨리 가고 싶었다! 벽 넘고.. 물 건너! 격겜 왕의 곁으로!”
“이유찬 저 미친 호로관의 새끼 여포 진짜.”
“재치 있는 욕설 인정합니다.”
“김미드.. 너에게는.. 폐하의 명령보다.. 점멸의 보존이 우선인 거냐?”
그리고 지금 가장 교류가 없는 팀은.
성남 스톰이다.
“합류 타이밍을 뒤트는.. 점멸.. 그런.. 명령..”
“그래.. 그렇다.. 미드..”
“과연.. 건이..”
근데 대체 얘네는 무슨 헛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그걸 전략으로 쓰게?
#
“잠깐. 잠깐.”
“왜요?”
“다시. 다시 가보죠. 이번에도 FWX에서 서포터 폴리 나올 거 아니에요.”
“그 선수는 좀 무시해도 되지 않을까요?”
“지금 FWX 측 밴픽을 맡으신 게 이 코치님이니까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 아니에요?”
스톰 소속의 하지광과 이상태 코치는 팀 내에서 모의 밴픽을 진행하고 있었다.
2승 6패의 동부.
득실 차는 최소화했지만, 결과는 이렇다.
스톰의 성적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처참하다.
1라운드 마지막 경기를 반드시 잡아야 한다.
이번 경기에서도 진다면 2라운드에서도 진다는 것과 같다.
그래도 2라운드 첫 경기는 제주 F.L.E니까 조금은 방심해도 괜찮을 거다.
얼마 전에 FWX를 만나고 갑자기 기세가 오른 F.L.E에게 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스톰은 강팀이니까.
“스톱, 스톱, 크로노 브레이크를 요청합니다.”
최근 어수선해진 분위기 속에서도 코치들은 제 할 일을 다했다.
하지광 코치가 성남 스톰.
이상태 코치가 대전 FWX의 밴픽을 맡아 시뮬레이션을 돌린다.
“크로노 브레이크요? 뭔 밴픽에서..”
“아유, 그러지 마시고. 다시 한번만요. 처음부터.”
“오케이.”
왠지 FWX측 밴픽 역할을 맡은 이 코치는 들뜨는 기분이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이거 내 팀 아닌데.
“장군.”
“멍군.”
“아, 씨..”
“하 코치님 또 망했죠?”
“아니! 이 코치님! 왜 당신이 신을 내냐고요! 우리 팀은 스톰인데!”
“아차차.”
“하.. 일단 판테언만큼은.. 음, 아니면 오히려 판테언을 이용하는 방향으로..”
“좋습니다..”
두 사람은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럼.. 크로노 브레이크를..”
“처음부터? 아니면 2번째 페이즈부터..”
“..시간을.. 더 돌려요..”
“언제까지?”
스톰의 카드들을 돌아보던 하 코치는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그때로요..”
정답을 알 것 같다.
“작년.. 하반기..”
“?”
“2군.. 감독을.. 미리.. 자르고.. 권건을.. 1군으로 콜업하겠습니다..”
“오우.. 기권.. 기권이요..”
그래, 모든 문제는 정글러다.
그때부터가 문제의 시작이었다.
스톰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사실을 천천히 깨달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