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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게이머, 그만두고 싶습니다-128화 (129/326)

128화. 달콤쌉싸름한 승리

잠시 소강상태.

호넷의 탑.

가우디, 박태인은 지금 상황이 불만스러웠다.

탑에서 자신보다 데뷔가 늦은 이유찬에게 잔뜩 긁혀서 심기가 불편하다.

선수들은 꼭 팀 순위가 아니더라도 각자 자신 있는 분야가 있다.

공격적인 탑으로는 자기가 넘버 원이 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유찬이 그윈의 품 안으로 파고들어 오는 미친 플레이를 해서 잔뜩 뿔이 났다.

“권건 존나 잘한다.”

“내 말이. 야, 민성아. 쟤 실력 흡수 좀 해봐.”

“리플레이 존나 많이 봤는데도 새롭고 또 새롭네.”

“호오우! 유우레카! 내 계산에 따르면 말이죠.. 우리 정글 민성이는 아직 멀었어용!”

상대는 서포터가 없는 상황.

우리가 더 유리한 게 틀림없는데도 경기에서 지고 있는 상황, 쾌활한 팀원들 때문이다.

꼭 기가 죽어야 한다는 건 아니지만.

박태인 생각에는 다 같이 상대 욕이라도 하고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아니. 형들, 적이잖아요. 좀 막 뭐라고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이제 막 스무살.

팀에서 막내인 박태인을 향해 호넷 선수들이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

“태인이 빡쳤어? 미안해.”

“그럴 수 있어. 근데 우리도 화가 안 나서 그러는 건 아니야.”

“FWX 애들이 진짜 엄청 착하거든. 그래서 좀 병신같은 면이 있었는데..”

호넷 정글 장민성은 지난 시즌, 권건의 플레이를 보고 많은 영감을 얻었다.

승리 인터뷰에서도 권건을 거론한 적이 있다.

“지금은 좀 많이 다르지. 우리가 얘네 플레이 스타일 차용하는 거 알지?”

“그래도 그거랑 지는 거랑 무슨 상관.. 차니랑 권건이 존나 빡치게 게임하는데요..”

“우리 태인이가 권건 극찬하는데?”

“아직 리그 물이 덜 들었구나. 지는 게 빡치는 건 빡치는 거고.. 우리도 지금 할 수 있는 거 최대한 짜내서 해보고 있는 중이야. 맞지?”

“네.”

“다음 세트도 있어. 그러니까 지금 화내고 짜증 내봤자 별로 도움 안 돼. 감정이랑 게임 결과는 분리해서 생각하자고.”

“얻을 건 얻어가자. 우리도 상승세잖아.”

“솔직히, FWX랑 싸우는 거 진짜 도움 많이 돼. 얘네랑만 스크림 할 수 있으면 좋겠다. 미라쥬랑 스크림하는 건 하나도 도움 안 되잖아.”

듣고 보니 맞는 말.

실제 수행할 수 있는지와 관계없이 영감을 주는 플레이가 항상 존재한다.

“인기가 너무 많아서 문제지. 쟤네 스크림 존나 오버 부킹이야..”

“좋아, 좋아. 얘들아. 집중하자.”

“근데 폴리 쟤 서폿 플레이는 진짜 노답이네..”

“일단 노려보자. 다음 세트에 더 물고 늘어져. 주포가 아닌 자에게 응징을!”

“응징을!”

#

경기는 제법 유쾌하게 흘러갔다.

“이제 우리 턴이다아아아아아악! 하기에는 간신히 판테언 잡았어요! 뭐 할 수 있는 거 더 없나!”

“없어요!”

“호넷은, 이번 시즌 호넷은 그래도 좀 달라요. 끝까지 덤벼듭니다. 아무리! 아무리 밀려도! 웅크리기만 하는 팀은 아니거든요! 벌떼처럼 달려듭니다! 그게 매력인 호넷! 망할수록 강해지는 팀! 시간? 시간이 왜 필요해! 그런 건 없습니다! 지금 당장! 싸워! 싸워서! 따서 갚아아아아악!”

“그런데.. FWX는.. 그런 걸 봐주는 팀이 아니란 말이에요!”

“터지고! 또 터지고! 또 또 터지고! 완전히 터졌어요!”

- 지능은 높지만 지식은 낮은 케이스.. 우리 팀 호넷..

- 패기는 좋았다..

- 그래도 게임 시원시원하네ㅋㅋ

- 그럼 혹시 응원하쉴?

- FWX 못 잃어

호넷의 특징 때문인데.

팀 전체가 꺾이지 않는 기세를 가지고 있다.

“지금 FWX는 클럽 가입서 제출했어요.”

“무슨 클럽이요?”

“만골 클럽이라고. 이거, 잘못하면 오늘 경기 완전히 터져요.”

나는 메이킹을 피하지 않는다.

비예고가 선턴 메이킹을 하기에 좋은 챔피언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글쎄, 그건 상황이 대등하거나 밀릴 때의 이야기다.

나는 높은 설산을 오른다.

그리고 산 위에 서서 작은 눈 뭉치를 만든다.

“으아아아아아! 호넷! 이거! 이거! 완전히 망했어요! 권건이 스킬을 그냥 한 바퀴 돌린 것 같은데! 순식간에!”

“호넷은 지금 이런 생각을 할 거예요. 차라리 저보고 죽으라고 하십시오.. 죽으라고..!”

- “죽어”

- 호고고고곡

- 청소기가 따로 있나?

- 존나 시원하네ㅋㅋㅋ 아 오랜만에 편안하다ㅋㅋㅋㅋ

- 무지성 교전 유도.. 대참사

그것을 손으로 툭, 민다.

내가 올라온 산이 높을수록 내려갈 수 있는 길은 길다.

“이거 이제 헤인즈 선수가 해줘야 해요! 보여줘! 이 선수 사실 힘이 장사거든요! 바텀에서 그래도 좀 편하게 크긴..했는데!”

우르르 내려가면서 무섭게 덩치를 불리는 눈 뭉치는.

이제 더 이상 뭉치라고 부를 수 없다.

“안 편했어요! 불편했어요! 판테언이 바보 연기가 심하긴 해도 할 땐 해주고.. 그리고 지금 폴리 선수는 즐기는 자란 말이에요! 이거, 이거어어어! 즐기는 자가 나타나면 노력하는 사람을 이겨버린단 말이에요!”

이것이 스노우볼.

그것을 산기슭에서야 마주한 상대는.

이미 거대해진 눈 뭉치가 마치 벽같이 보일 것이다.

“그리고 그 위에는.. 권건이 있는 것 같습니다. 타고났고, 노력하고, 거기다 즐기기까지 해요! 지금 호넷이 마음이 급해지니까 답이 스틸밖에 없단 말이죠!”

“근데 권건은 이런 거 봐주는 선수가 아니에요! 언제까지 어깨춤을 추게 할거야아악! 탈골 됐잖아아아아악! 스으으으으으틸! 실패!”

“그렇습니다! 터져요! 터져요! 게임이 터지고 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살면서! 이런 걸 본 적이 없어요!”

“지금 봤네요.”

“아! 그렇군요! 여러분들도 보시죠! 헤이! 테이크 어 룩!”

- 뭐래는거냐? 떼껄룩?

- 보라고ㅋㅋㅋㅋㅋ

- 존나 잘 보고 있습니다ㅋㅋㅋㅋㅋㅋ 영업 대성공

- 이거지ㅋㅋㅋㅋㅋ

- 아~ 뭔가 차오른다ㅋㅋㅋㅋㅋㅋ

나는 최은호와 대화하면서 그의 눈 속에 있는 열망을 봤다.

마치 만들어진 것처럼 순하고 착한 선수들만으로 구성된 팀 FWX.

놀랍도록 믿을 수 없는 환상 같은 이 팀의 상황에 습관처럼 의심을 가지고 있던 나다.

“호넷, 호넷! 빅 웨이브! 다 타요! 어어어어어! 이건 천석꾼, 만석꾼이라도 아까운 빅 웨이브인데! 고스란히 버려요! 싸움만 보다가 운영까지 휘둘립니다! 이거, 정말로! 정말로 만골 클럽 갑니다!”

“완전히! 싹! 다! 망했어요!”

하지만 최은호의 눈 속에 있던 감정은.

욕심, 탐욕, 그래.

그런 부정적인 표현과 비슷하지만, 또 다른 것이었다.

“으아! 그냥 박아! 갖다 박아! 당장! 앞으로! 가!”

“요공이 어떻게든 들어와 보지만! 안 돼요, 안 돼요! 바로 터졌어요!”

조금 거칠고 투박하며 다듬어지지 않았지만.

그 감정은 틀림없이 열망이었다.

내가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그 감정.

“이거.. 이러면.. 이러면!”

그걸 본 순간.

조금은 이 팀의 바보처럼 따뜻하지만은 않은 다른 면모를 본 것 같아서, 뭐랄까.

오히려 여기가 인간답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찾아온 FWX의 경기력! 미친 메이킹! 압도적인 플레이!”

“FWX가 팀원의 부재에도! 훌륭한 경기력으로 승리를 거머쥡니다!”

“GG!”

그러니까.

최은호에게 한 말은.

지켜져야 할 것이다.

#

- (FWX) 얘들아, 형 왔다 윤도“형”

ㄴ 폴리형 ㅠㅠㅠ 돌아왔구나

ㄴㄴ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되다니 너무 반가워

ㄴㄴ 영원히 못 만날 줄 알았음ㅋㅋㅋ

- (FWX) 폴리 거대유성 외치기.gif

이 샛기 예전엔 그냥 똥오줌을 못 가렸을 뿐 진짜 나쁜 놈은 아니라는 게 우리 협회의 평가다

오늘부터 얘도 또라이다

ㄴ 오의 쓸 때 기술명 외치는 새기들은 다 착한거임

ㄴㄴ ㄹㅇ 정의로운 자

ㄴㄴ 얼굴과 달리 말은 존나 귀엽게 함ㅋㅋㅋㅋ 끄어어억 ㅇㅈㄹ

ㄴㄴ 게임 과몰입 갑ㅋㅋㅋ

ㄴㄴ 못났지만 착한 동네 형st

ㄴ 도형이니?ㅋㅋㅋㅋ

ㄴㄴ 얼마나 이미지를 꼬라박았으면 고작 이딴 걸로 본인 인증 요구ㅜㅜㅠ

ㄴ 자숙 너무 길었음 이제 복귀시켜주자

ㄴㄴ 음주운전이라도 함?

ㄴㄴ 아니 그냥 심판한테 강하게 항의함

ㄴㄴ 욕이라도 함?

ㄴㄴ 그냥 표정 논란이었음

ㄴㄴ 쟤 와꾸 너무 살벌해서 그럼? 어차피 실력이 전부인 판인데

ㄴㄴ 근데 정글임

ㄴㄴ 그럼 씨바 안돼

ㄴ권건한테 자리 비켜주려고 일부러 그랬던거임 사실상 열사님

ㄴㄴ 이건 좀ㅋㅋㅋㅋ

ㄴㄴ 그래도 얘 있어서 다행이긴 한데 ㅆㅂ 클래스 얼른 나아라

ㄴㄴ 클래스 선수 복귀 기원해요 어서 나으세요

#

FWX는 서포터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호넷을 상대로 매치 승을 가져왔다.

윤도형은 다른 픽을 할 줄 모른다는 것처럼 판테언만 픽했다.

최근 상승세로, 약점을 잘 파고들며 이색적인 플레이를 즐기는 호넷에게 한 세트를 주기는 했지만 이긴 세트는 모두 매드 무비가 나올만한 압도적인 경기력.

호넷에서 만남을 요청했지만.

FWX는 팀의 재정비를 위해 당분간 활동을 줄이겠다고 선언하며 승리 라이브 역시 아주 짧게 진행했다.

사실 죄책감을 가지고 있던 최은호의 귀에 들리는 것과 달리 상당히 많은 팬이 FWX를 걱정하고 있었기에 잡음은 없었다.

FWX는 퍽퍽했던 성적이 문제였을 뿐, 팀 운영 자체에서는 호평을 얻던 팀이었기에 더 그랬다.

다른 팀들에 비해 스타트가 늦었는데도 이 정도면 괜찮다는 분위기.

승리 라이브에 참여한 열혈 팬들 모두 한 마음으로 최은호의 불참에 대해서 걱정했다.

안 좋은 모습을 보여준 이유가, 구체적이지는 않지만 ‘건강 이슈’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팬들은 사랑을 담아 따뜻한 메시지를 보냈다.

“이거 최은호한테 모아서 보여줄까?”

“아니? 절대 안 돼. 그냥 아예 노터치가 나아. 네버.”

“그래. 너는 전문가니까.”

“존나 싫었다고.. 전문가 되는거..”

윤도형은 한숨을 내쉬었다.

민망하지만 자기가 궁극기를 쓰던 모습이 방송에 나가면서 꽤 화제가 되고, 이미지 전환이 됐다.

급격하게 형성된 또라이 밈.

사실 진짜 또라이는 이유찬인데 왜 나까지..

억울한 일이지만 그래도 둥글둥글한 관심은 나쁘지 않다.

노래를 부르던 것이 잡히지 않아 아쉬워하던 팀에서는 노래 영상을 찍어볼 생각이 있냐고까지 물었지만 윤도형은 거절했다.

자신이 없어서가 아니다.

자기 생각에 스스로가 너무 잘 불러서 그렇다.

그런 영상은 오히려 못 불러야 인기가 많은 법이니까.

“미드. 거니한테 받은 거 뭐야.”

“이거? 초콜렛. 건이가 안 먹는대.”

“나도 줘.”

“그래.”

“왜 쉽게 주지? 의심스러운데? 혹시 몸에 좋은 거 넣었어?”

이유찬은 김예성의 책상 위에 있던 아로니아즙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럼 좋은 거지. 달라고 해도 안 줄 거거든?”

김예성은 어처구니없다는 기색으로 팬들이 보내준 아로니아즙을 가렸다.

“이거 걔가 대기실에 남기고 간 거야.”

“누구?”

“걔.”

두 사람은 잠시 눈싸움했다.

“걔.”

“그래. 걔.”

“까먹었어. 이름.”

김예성은 이유찬의 망각이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대충 트릭스터.”

“맞아.”

“어이없군. 뭘 넣었을 수도 있어. 그러니까 우리가 먹어야겠다.”

“나도 그래서 하루에 하나씩 먹으려고.”

“그냥 내가 다 먹어줄게.”

“좋았어. 빨리 없애버리자.”

“확인.”

“야, 이건 뭐냐? 초콜렛이랑 같이 온 거냐?”

윤도형은 특유의 건들거리는 몸짓으로 다가왔다.

“형, 그거 쪽지야.”

“무슨 쪽지?”

“전 타임에 경기한 트릭스터에서 인사하고 싶다고 맡기고 갔어.”

“팬이 준 게 아니야? 뭔 인사? 같은 선수끼리. 밸도 없나?”

“건이가 msl 리포트 만들어준 거.”

“아. 그건 그럴 만 하지. 뭐야.. ‘복수해드렸습니다, 미라쥬 개박살 완료.. 친추 좀’?트릭스터가 미라쥬 이겼었구나? 고수호 얘 존나 충신이네? 솔랭에서도 맨날 우정권 찾더니.”

윤도형은 트릭스터 원딜 고수호가 선물한 초콜렛을 뒤적였다.

벨기에 브랜드의 시그니처 초콜렛이 낱개로 들어있다.

“오우, 고오급 촤컬릿.”

윤도형은 초콜렛 두 개를 입에 쏙 털어 넣었다.

“근데 이거 예전 같았으면 건이가 존나 부러웠을 것 같은데.. 뭐냐, 이 기분? 뭔가.. 좀.. 고수호가 꼬운데? 왜 껄떡거리지?”

“경기를 해보니 형도 우리 마음을 알겠지?”

“어.. 시바.. 뭐지.. 야, 일단 하나 더 줘 봐라. 먹어야겠네. 아까 아침에 단 거 끊었었는데.”

“예, 형님! 세 개 드려도 되겠슴까?”

“어. 나 한 판 다 가능.”

“역시 우리 형님.”

두 사람은 무서운 속도로 초콜렛을 먹어 치웠다.

어차피 권건이 먹으라고 준 것.

가볍게 먹기에는 높은 가격대였지만 여기 있는 그 누구도 그 사실은 몰랐다.

“마카다미아가 맛있네. 왜 하나씩만 들음?”

“나는 하얀 게 좋다.”

“무슨 맛이야?”

“달아.”

“야, 이거 두 개 섞어 먹으니까 맛 이상하다.”

“오.”

그리고 초콜렛을 즐긴다는 개념이 없는 두 사람과, 단 것과는 인연이 없는 김예성까지 합심해서 한 박스를 다 비운 직후.

“너넨.. 진짜 친구도 아니다.”

“야, 깍지..”

“말 걸지 마. 그거 시즌 한정판 골드 컬렉션인 거 모르고 다 처먹었죠? 버릴 거면 나한테 버리지.”

잠시 권건과 이야기를 나누고 온 곽지운의 서러움을 맞이해야 했다.

“저는 안 먹었는데요?”

“입가에 묻은 가나슈나 닦고 말해. 72% 다크초콜렛이었겠지?”

“소름.”

“내 나이 스물 세 살. 인생을 헛산 것 같다..”

“아니 뭘 그렇게까지? 내가 편의점에서 새거 하나 사다 줄게, 초콜렛.”

“내 아르티쟝 캐러멜.. 투르비용 프랄리네.. 수호가 나도 먹으라고 했는데..”

“야, 우리 뭔가 실수한 것 같다. 쟤 초콜렛에 이름도 붙였나 봐.”

“지운 형님이 원래 저렇게 똑똑해요?”

“모르겠어..”

“나가!”

“얘 이렇게 화난 거 본 적 있냐?”

“몰라요. 당 떨어졌나 본데.”

“지운이 형, 저 홍삼 캔디 있는데 이거라도..”

“김예성 너도 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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