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전장으로
“도형, 여기 와드라고.”
“오우.”
“아니, 박으라는 게 아니라 적 와드가 있다고.”
“오와우.”
“미친 윤도형. 너는 해고야. 와드 횡령죄가 수십억 규모야.”
“사장뉨.. 도비는 갈 데가 없오요우.. 불상한 저에게 너무 모라고 하지 마세요우..”
“진짜 개 어이없어. 나 나쁜 사람 만들지 마..”
“그냥 쥐금부터 제가 원뒬 할게요우.. 핑와 좀 사다주세요우!”
“나 그냥 나쁜 사람 한다.”
오랜만에 출전한 윤도형은 다소 긴장한 듯한 기색을 보였다.
하지만 내가 오기 전 FWX의 분위기가 어땠는지를 조금은 엿볼 수 있기도 하다.
이퀄라이저 미사일을 맞은 전적 속.
우울하고 패배감이 가득했을지언정 서로에 대해 기본적인 신뢰 훈련은 잘 되어있는 팀.
곽지운은 윤도형이 이 포지션에 익숙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윤도형은 자신이 잘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적극적으로 곽지운에게 피드백을 요구한다.
이론적으로는 주입이 됐을지 몰라도 리그는 각 분야 전문가들의 싸움이다.
실전 디테일이 조금 부족할 수밖에 없다.
“싸장님, 여기! 도비가 와드를 찾았어요.”
“와드 막타를 나한테 달라고!”
“오우. 내 공속이 너무 빨랐어요우. 미안해요우.”
끊임없는 입담이 이 상황이 마치 솔랭인것처럼 느끼게 한다.
이것이 비교적 오랜 시간을 함께한 정글러의 요령이건 아니건간에, 곽지운은 이 분위기에 감쪽같이 속아준다.
오더에는 큰 재능이 없었던 곽지운이 좀 더 디테일하게 말을 하기 시작했다.
“이 미니언 죽는 순간 바로 얘 찔러봐.”
“실패. 도비는 쓸모가 없어요.”
“다음 기회 노리자. 내가 다시 알려줄게.”
역시 사람은 극한의 상황에 처하면 새로운 재능을 개화하는 것인가?
“이쪽. 와드 없으니까 올라 올 거예요.”
나는 바텀의 좌충우돌 노력에 조금 힘을 보태주기로 했다.
“이거, 허밍 선수가 와드하러 가다가 딱 마주쳤어요! 삼각 구도!”
“바텀 주도권 싸움이 굉장히 치열한 상태거든요! 살짝 밀리고 있던 FWX가 아슬아슬하게 권건의 지원으로 균형을 유지합니다!”
“좋은 움직임! 폴리 선수가, 예! 이 선수가 원래 서포터 출신은 아니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앞뒤 안 가리는 면이 좀 있어도 때릴 때 확실하게 때립니다!”
“간신히 살아가는 허밍의 퍄이크! 까딱하면 정말 큰일 날 뻔했어요!”
“굿.”
“상대 정글도 이쪽에 있어요. 빠지는 척했다가 다시 올 수 있으니까 주의.”
“오케이.”
호넷은 말벌이다.
동시에 전투기나 자동차, 잘 빠진 바이크의 이름으로 많이 사용된다.
벌처럼 날아서 나비처럼 쏜다는 이미지가 있다고 해야 할까.
그래서 호넷은 이런 브랜딩을 표방하면서 깔끔한 이미지를 연출한다.
하지만 나에게 호넷은 결국 말벌이다.
비행을 통한 빠른 기동성, 그리고 여러 번 쏠 수 있는 침을 가지고 있는.
‘곤충계’의 포식자.
그리고 나는 ‘인간’.
말벌의 가장 큰 천적이다.
“예성, 지금 그대로.”
“왔다. 요공 흘렸어.”
“나이스.”
성장한 상체.
미드는 상대의 턴을 빼고.
“바위게 있다.”
이유찬도 조금씩 입을 연다.
“주도권 잡아.”
“오케이, 원하던 말이었어! 대장!”
“가우디 선수는 저돌적인 타입이니까 주의.”
“저돌적인 게 뭐야?”
“너같이 한다고.”
“내가 더 잘하는데?”
“그래.”
“코칭 박스에서만 듣던 개소리를 여기서 들으니까 귓방맹이 털리는 것 같네.”
윤도형은 감회가 남다른 것 같았다.
“라방 출연 환영해. 우리 차니가 니 강냉이까지 털어버리기 전에 집중해.”
“최.강.방.패.판.테.언.절.대.집.중. 원.딜.지.켜.”
경기는 고요한 분위기.
바텀을 쉴새 없이 압박해줬지만, 틈을 알고 있는 말벌들은 우리의 꿀을 탈취하기 위해 노릴 것이다.
“지금 FWX, 첫 용 노려보고 있습니다!”
“이거 근거 있거든요? 탑 쪽에서 주도권 충분히 가지고 있고, 갱플 궁 지원 가능합니다!”
“호넷도 용 쪽으로 적극적이지는 않습니다. 적당히 거리 유지! 견제만 하다가 언제든지 빠질 수 있는 거리! 때로는 포기하는 게 더 이득일 때도 있거든요!”
그게 바로, 호시탐탐 우리 주변을 서성거리는 상대 미드.
부웅, 붕.
날갯짓 소리가 들린다.
“지금 바젤 선수의 르블란이 FWX에게 살짝 안부 묻고 있어요? 나 여기 보고 있다? 나 여기 있다? 신경쓰이지? 네, 이거 진짜 귀찮거든요!”
우리가 정식 멤버일 때에는 어림 반 푼어치도 없었을 거리감.
이걸 보니 나도 모르게 얕은 코웃음이 나온다.
우리의 위상은 많이 높아졌다.
지난번에 쉔을 했을 때가 대표적이다.
우리가 뭘 하든 상대는 ‘FWX는 강팀이다’라는 생각에 매몰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최근에 우리가 조금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이번 시즌에 좀 더 높은 곳을 바라보고자 하는 호넷의 마음에 불이 붙은 것 같다.
약해진 강적을 잡아먹고 싶은 마음.
혹은 사냥에 지친 야수를 노리려는 하위 포식자.
그럴수록 힘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예성.”
내가 더 말하기 전.
이제는 내 마음을 읽어내기 시작한 김예성이 자연스럽게 반 호흡을 들이킨다.
“감히.. 심기를 거슬러?”
김예성의 이상한 말과 함께.
“이거, 이거! 이거! 아라! 아라! 아라가! 돌아가는 르블란을 향해 귀신같은 플 매혹! 벽 너머가 보였나요! 정말 과감하게 플레이!”
“FWX가 바로 동시에 고개를 돌리면서 순식간에 낚아챕니다아악!”
“깔끔하게 퍼블!”
“권건은 미동도! 안 하고! 용! 챙겼습니다! 이거 너무 위엄있는 사령관인데요!”
- [가서 죽여라, 구미호]
- 라온 불여시같은련.. 플러팅 존나 빨라..
- 아직 궁이 없으면 플을 쓰면 돼^^
- “오소이!”
- 아ㅋㅋ 신인 서폿 데뷔하니까 하체에 힘 실어줌?
- 솔랭 ptsd 오네 판테언 서폿 ㅅㅂ 도사 메타..
- 어딜 간을 보려고 해? 라온은 라인에서도 강하지만 권건이 근처에 있을 때 가장 강하다
- ㅆㅂ ㅇㄱㄹㅇㅋㅋㅋㅋ
우리는 호넷이 잠시 잊었던 소중한 기억을 돌려준다.
요새 동부의 왕이다, 해머스를 넘어섰다 뭐다 이야기를 듣느라고.
잠시 자신들이 상대하는 게 누군지 잊었나 보다.
“이건 정말 실수? 실수라기엔 좀, 그러니까 너무 매정해요! 이건 바젤 선수의 실수라기보다는 라온 선수의 슈퍼 플레이입니다! 이 선수 정말 물이 올랐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바텀을 신경 쓸 게 아니라는 거죠! 서폿 판테언에 잠깐 정신이 팔렸었는데, 이거.. 생각해보니까 서폿이에요. 상체가 문제인 거거든요!”
아, 그리고.
이자도 드려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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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다큐멘터리는 호넷, 말벌의 삶을 살펴보도록 하죠.
말벌 군체 속에도 계급이 있습니다!
다른 벌들과 특별히 다르지 않게 유충, 수벌, 일벌, 여왕벌 등으로 나뉘어있죠.
하지만 LKL의 말벌들은 짧게는 10분대, 길게는 1시간여 동안 일생을 보냅니다.
아주 놀라운 일생이죠!
오늘의 호넷은 탑과 정글, 그리고 미드가 일벌 역할을.
그리고.. 원딜이 아직 유충이로군요?
흥미롭습니다!
서포터는 여왕을 서포트하기 위한 수벌의 역할을 맡았습니다.
하지만 둥지의 핵심인 여왕이 아직 정해진 것은 아닙니다.
같은 둥지에 있는 벌들 사이에서 차세대의 여왕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왕위 찬탈’입니다!
다행히 이곳에 같은 가족끼리 서로를 물어 죽이는 일은 없습니다.
말벌은 꿀벌과 달리 로열젤리도 없죠.
그래서 먹이를 많이 먹은 벌이 여왕이 됩니다.
누가 먹건, 가능하면 빨리 여왕이 탄생해주는 쪽이 군체의 생존에 유리합니다.
“상대 신인 서폿인데 CS가 왜 그 모양임.”
“야.. 권건이 바텀 압박 너무 심하게 했잖아..”
대개는 원딜이 우화하면서 가장 큰 힘을 가진 여왕이 되곤 하지만..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어떻게 해! 빨리 결정해. 갈지 말지! 라인도 다 탄다!”
오, 저런!
먹이가 없어서 여왕벌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형들..”
여기에는 일벌이 있습니다.
이 정글러는 먹이를 구하지 못했습니다!
“레드.. 레드가 없다.”
“털렸다. 무서운 인간. 다 털렸다. 어떻게?”
저런.
지독한 인간을 만난 모양이로군요.
“진짜 권건이 레드 먹는다고 예고했던거냐?”
“그거 구라였어.. 눈빛만 보고 어떻게 알아..”
“그러니까 아까 용 쪽 가지 말라고 했지. 왜 영역을 침범해.”
먹이가 부족하면 군체는 충분히 성장하지 못합니다.
오소리나 곰이 없는 오늘, 이 야생에서 가장 큰 적은 인간입니다.
아무래도 이번에도 굶주리게 될 모양입니다.
이렇게 되면 말벌의 둥지에는 큰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이제 곧 겨울이 다가오는데.
꼼짝없이 굶어 죽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거, 이거. 3용까지 주면 진짜 완전 망하겠다.”
“스틸 한번 보자. 무조건 뺏어.”
그러다 보면 좀 더 큰 먹이를 노려볼 수밖에 없죠.
집단 사냥을 통한 일확천금입니다.
“스..틸..”
과연 말벌들은.
이 위기를 탈출하고 군체에 강력한 여왕을 탄생시킬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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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나 풀템이다.”
“오우야.”
“서포터 특. 풀템 빨리 완성.”
윤도형은 자기가 말해놓고도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그냥 자질구레한 것들로 아이템 칸이 가득 찼을 뿐이다.
“어후. 나 지금 어디 가줘?”
윤도형은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곽지운이 입이 트인 것은 얼마 전의 일이다.
뭔가 짓누르고 있던 부분이라도 있었는지.
그전까지는 왠지 경기 중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원딜이었다.
하지만 곽지운이 말을 하건 못하건, 윤도형이 느낀 점이 있었다.
이 포지션은 정말 어렵다.
“시야 잡아줘. 용 쪽.”
그리고 너무 약하다.
“시야 잡다가 죽으면 안 돼. 너 약해. 절대 죽으면 안 돼. 알았지? 너 약해.”
“알았어, 알았어. 그만 좀 말해. 도비 야캐요.”
정글러도 라이너를 위해 희생하는 경향이 있지만 아예 차원이 다르다.
서포터는 로밍을 가야 한다고들 하지만, 정말 로밍 타이밍을 잘못 잡아버리면.
와드를 박으러 갔다가 적을 만나 멀리 돌아서 와야 한다면.
지금도 시간 대비 낮은 레벨에서 얼마나 많은 경험치 손해를 볼까?
그럼 그게 챔피언이라고 할 수나 있을까?
대체 서포터들은 어떻게 칼날 위에서 춤을 추고 있는 걸까?
“여기. 여기 체크. 그리고 그 부쉬 밖으로는 나가지 마세요.”
“바로 마르세유 턴?”
“맞아요.”
중간중간 그 고민을 읽기라도 한 것 같은 권건의 말이 없었더라면 리그 출전 자체가 불가능했던 게 아닐까.
사실 이건 윤도형에게는 정말 어려운 일이다.
권건을 만나면서 꾸준히 훈련하고 있지만.
그의 근본은 감각파 정글이다.
이 정도 아이템, 이 정도 시간, 이 정도의 추이에서는 내가 n 정도의 데미지가 나올 것이다.
이 시간대의 레벨이 이 정도라면 내가 흥했는지 망했는지 체크할 수 있다, 같은 식이다.
완전히 다른 서포터의 아이템과 시간에 따른 레벨 감각에 정신이 조금 혼미하지만.
이건 기술적 어려움일 뿐이다.
피지컬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당장은 내가 꼬라박지만 않으면 된다.
바텀 중심 게임으로 플레이 자체는 어렵지 않다.
그래도 정글 속 야수의 습관이 남아 내가 목덜미를 물어뜯을 수 있는 상대를 찾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호넷.. 서폿 아이디가 허밍이야?”
“어. 몰랐냐.”
“아, 맞네. 본명 허민기라서 그렇구나.”
“오, 그건 나도 처음 알았다.”
“노래 좀 하나 보네?”
“그런가 보다?”
용 싸움이 코앞.
시야를 잡고 귀환했던 윤도형은 허밍이라는 선수명에서 눈을 뗐다.
긴장감, 그리고 동시에 편안함.
꿈에 그리던 권건과의 플레이.
원했던 포지션은 아니지만 그래도 황금 같은 기회다.
정글이라는 포지션으로는 전설이 될 것 같은 이 사람과 같이 플레이를 할 수 없으니까.
이번 시즌이 끝나면 자신이 FWX를 떠나게 될 것은 알고 있다.
아마 그럴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흥이 난다.
“난. 몇 달째 코칭 박스에~ 있었어.”
“뭐래?”
“근데 난 출전을 하고 싶다고 말했지.”
낮은 흥얼거림.
정확히 들리지는 않는다.
“노래?”
일촉즉발.
이번 용마저 양보할 수 없는 호넷이 모여든다.
하지만 FWX는 여유롭다.
“박스를 넘어~ 서폿을 지나 판테언으로 정글을 갈 거야. 판테언으로 운영을 잘해서 언젠가 주전을 갈 거야.”
“우리 신입 서포터 정신 나갔는데?”
“그 와중에 도형이 형님 노래 개 잘함.”
“쟤의 유일한 매력이지. 쎈 인상과 그렇지 못한 목청.”
“문어 마녀라는 소문이 있어.”
“판~ 테어어어언~”
점점 또렷해지는 가사.
무시무시한 굉음과 함께 판테언의 두 다리에 붉은 빛무리가 모여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