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게이머, 그만두고 싶습니다-125화 (126/326)

125화. 빈집

“와아아아아아악! 이게 무슨 일인가요?”

“흥미로운데요? 오늘은 서포터 자리에 폴리 선수가 대신 들어옵니다!”

- 이게 무슨 일이야? 얘 누구임??

- 원래 정글임

- 클래스 잘렸어?

- 폼 ㅈ되더니 결국 잘림?

- 뭔 일이 있는 것 같은데?

- 어떻게 하면 정글이 서폿으로 감?

- 그런 적이 있긴 함

- 몇 년 몇 월 며칠 몇시 몇분?

- 니가 찾아봐 좀

LKL 서머 1라운드가 끝을 향해 달려가는 시점.

“흠, 서포터라는 포지션이 어떤 분들은 쉽게 생각하시는 부분이 있는데요. 절대 쉽지 않습니다. 사실 어느 포지션보다도 뇌지컬이 중요한 포지션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러고 보니 문시환 해설께서 서포터 출신이셨죠.”

“그렇습니다. 그러다 보니 조금 편파적으로 말씀드릴 수도 있다는 점, 양해해주시길 바랍니다.”

“암요. 사실 중요하지 않은 라인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서포터가 어려운 건, 희생 때문만이 아닙니다. 사실 원딜의 마음을 읽는 게 중요한 거거든요. 지금 세자 선수는 짝을 잃은 거예요. 지금 FWX 바텀에 대해 소문이 무성한데요. 글쎄요, 저희가 뭐라고 말씀드리긴 어렵지만. 일단 다른 포지션의 선수가 서포터 자리에 적응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인 건 확실합니다. 여긴 세계관이 다르거든요.”

문시환 해설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이유는 있겠죠. 그러니까, 그 답을 오늘 FWX가 보여줘야 할 겁니다.”

쿵, 쿵, 쿵.

어디선가 킥 드럼이 울리는 것처럼 정확한 박자.

“FWX입니다!”

FWX의 선수들이 줄을 맞춰 선다.

날렵한 체형의 최은호 대신.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은 탄탄한 어깨의 윤도형.

선수들의 날카로운 눈빛은 남다른 각오를 띄고 있다.

“오늘의 상대는 최근 들어 기세를 올리고 있는 팀, 부산 호넷입니다!”

“호넷이야말로 FWX를 좇는 팀이라는 평가가 자자하죠! 지난 스프링에는 최종 6위였지만! 시즌 후반 기세가 심상치 않았습니다! FWX와 함께 동부 서부의 경계를 허무는 팀! 그리고! 이번 시즌에는 빅스를 꺾어내면서! 훨씬 더 높은 곳을 바라보고 있는 호넷입니다!”

눈을 찌르며 번쩍이는 불빛.

유난히 잘생긴 선수진과 활발한 SNS 활동으로 유명한 호넷.

그들 역시 단단히 각오한 듯한 얼굴로 경기장에 들어선다.

막이 오른다.

#

윤도형은 어느 정도는 준비가 되어 있었다.

좀 놀라운 일이다.

글쎄, 어쩌면 좀 웃긴 이야긴데.

최은호가 윤도형에게 ‘니가 서폿을 하면 성을 간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고 한다.

이름을 죄은호로 바꿔버리기 위해서 서포터를 연습했다나.

물론 서포터로 포변을 할 생각은 아예 없다.

완벽한 맨땅은 아니라는 정도다.

그래도 라인전 이후 서포터의 플레이와 정글러의 플레이는 어느 정도 맞닿아 있는 면이 있다.

픽 또한 서포터 챔피언과 정글 챔피언의 풀이 겹치는 경우는 왕왕 있다.

다행인 점이라면 지금 버전의 메타가 완벽한 오리지널 서포터 메타는 아니라는 점이다.

특히 다양한 서포터를 기용할 수 있는 원딜 칼리가 밴이 될 정도로 기세가 괜찮은 편이기에.

칼리가 풀린다면 넓은 스펙트럼의 픽을, 그렇지 않다면 다른 부분에서 밴 카드 우위를 점할 수 있다.

팀에서도 이러한 점들을 고려했다.

스마트하다기보다는 투박한 플레이를 선호하는 이 선수의 첫 번째 계획은 판테언.

사실 윤도형의 모스트 서폿은 따로 있지만 계획은 항상 숨겨야 하는 법이다.

판테언은 최근 메타에서 성능 자체가 뛰어난 편은 아니지만 남자의 로망을 자극하는 부분이 많아 항상 인기가 좋은 멀티 유즈 픽이다.

리그에서 정글로 사용하는 것은, 그래, 어쩌면 쉔보다는 조금 나을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대세 정글에서는 벗어나 있는 상태.

하지만 상대가 팔이 짧은 경우, 서포터로 충분히 기용할만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정 안되면 내가 써버릴 수도 있으니까 이중 함정이다.

“후, 나는 캐리가 아니다. 나는 캐리가 아니다. 나는 아름다운.. 아름다운 한 떨기 꽃.”

“뭔 개소리야, 윤도형. 니가 언제 캐리를 했어. 꽃 같은 소리 하네.”

“닥쳐. 내가 CS 빨아버리기 전에.”

“어후, 너무 너무 두렵다. 라인에 손 대기만 해봐. 바로..”

“바로 뭐.”

“컷!”

“나는 방패로 호로로로로로록! 티티티티티티팅!”

“그럼 뚫고! 바로 미간 적중!”

“꺼져 진짜.”

“너도.”

곽지운과 윤도형, 두 사람의 조합은 또 다른 느낌이었다.

윤도형은 다른 선수들에 비해 좀 더 거칠다.

입도 다소 험한 면이 있고, 우락부락한 인상에 체격도 운동하던 사람처럼 큰 편이다.

오해 사기 좋은 타입.

“오늘 꼭 잘해보자.”

“어. 내가 최은호 자리 존나 뺏어버릴 거임.”

윤도형이 얼마나 이를 크게 가는지 마이크에서도 전해진다.

오늘, 최은호는 경기장에 오지 않았다.

아예 완벽한 휴식을 선택하기로 한 것이다.

어쩌면 나와의 대화가 도움이 됐을지도 모르겠다.

코치 박스에 들어갈 수 있는 인원은 정해져 있지만.

모든 인원이 반드시 출석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아예 오지 않았다는 것은 다른 팀들에게도 교체하지 않고 오늘 내내 윤도형이 서포터로 출전할 것임을 알리는 결과가 된다.

그래서 어지간하면 얼굴을 비치기는 하지만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니까.

“야. 애들 오해한다.”

곽지운이 황당하다는 듯 웃었다.

나도 어쩌면 윤도형의 자리를 뺏은 뒤 ‘대화의 시간’을 가지지 않았더라면.

윤도형의 저런 말들이 좀 별로라고 생각했을지도.

뭐, 지금은 저 선수 나름의 각오라고 생각하고 있다.

두 사람은 공통점이 있거든.

‘퍼즈 이슈’로 고통받았던 윤도형.

‘패배의 원인’으로 집중포화 받은 최은호.

팬에게 받은 상처는 팬으로만 치유가 가능하다.

응원해주는 팬들이 더 많다는 사실은 선수들이 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악성 댓글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무리 팀에서 노력해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응원해주는 팬을 위해, 일단 선수단이 팀을 더 높은 곳에 올려놓고.

섭섭했다고, 이런 이유가 있었다고 말하는 거다.

그럼 그게 정답이 된다.

윤도형은 그렇게 회복하고 있다.

“진짜다. 얘들아. 봐라. 특히 유찬이, 이 형님 실력 본 적 없지?”

“솔랭에서 봤는데요.”

“그건 가짜야. 정글이 힘을 숨김.”

“아! 어쩐지 점수에 비해 못하시는 것 같더라니. 역시? 그랬군요? 바보? 연기? 지렸다? 역시 도형이 형님!”

“시벌? 저 새낀 대체 뭐냐? 존나 일부러 저러는 거냐?”

황당함에 윤도형이 콧구멍을 벌렁거린다.

“우리는 그걸 팩트라고 부르기로 했어요.”

그리고 재빨리 같이 패는 곽지운.

“다 꺼져라. 서폿 혼자 라인 먹을 거니까.”

“얘들아 게임 끝나면 얘 꼭 신고해라. 우리 팀에 트롤 있어. 영구 정지 빔!”

“노오오! 안 그래도 벤치에 앉아있던 시간 존나 길었는데 한 번만 봐줏떼구다사이.”

“하하하, 아하하하.”

내심 윤도형을 무서워했던 김예성마저 터진다.

덕분에 조금 무거웠던 분위기가 풀려나간다.

원래의 포지션의 선수가 그 자리에 없다는 것만으로도 팀원들은 동요를 느끼게 될 수밖에 없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안다고.

“힘내자.”

“보여줘. 최은호 푹 쉬게 해.”

나도 고개를 들어 흘긋, 맞은편의 호넷을 바라본다.

서로 무슨 대화를 나누는 건지 저쪽도 우리를 힐끔거리다가.

나랑 눈이 마주친 원딜 목해인이 반갑게 웃어 보인다.

헤인즈라는 선수명을 사용하는 저 선수는 예전에 나에게 직접 와서 개인 계정의 친구 추가를 부탁한 사람.

특별히 많이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워낙 내 친구창에 있는 사람의 숫자가 적다 보니.

LKL 팬들이 목해인을 ‘권건의 친구’라고 부르며 인정해주는 기색이 있다.

나는 항상 선수들 사이에서도 신성화되는 느낌이 있으니까.

포지션 덕도 있을 거다.

나쁜 정글은 죄인 취급이지만, 좋은 정글은 항상 인기가 많다.

서포터가 바텀을 뿌리로 둔 수호자라면.

정글은 전라인의 파트너니까.

뭐, 어쨌든.

호넷의 목해인이 ‘내 친구’라고 불리고 그걸로 방송에서 어느 정도 낙수효과를 보고 있다는 건 사실.

그러니까.

호넷을 죽도록 패는 걸로 하자.

#

“오늘은 진영 선택권을 가진 FWX가 레드 진영을 선택했는데요.”

“아마 다소 특수한 상황 속에 생각해 온 전략이 있는 것 같죠?”

호넷은 침착했다.

다만 이전과 달리 감히 FWX에게 SNS로 도발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호넷도 그렇고, 최근에는 빅스가 어떤 꼴이 났는지 다 봤으니까.

그러니까 오늘 묵묵하게 잘하면 된다.

이건 정말 좋은 찬스다.

정식으로 포지션 변경을 하지 않은 선수에게 미스가 나오는 일은 흔하다.

그러니까 어쩌면 오늘, 호넷이 뜻밖에 FWX를 잡게 된다면.

이번 시즌이 잘 풀리게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챔피언십 포인트도 얻을 수도 있고.

올해는 정말로 꿈꿔왔던 월챔에 진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리싱이 가장 먼저 밴 되는군요. 사실 권건 선수의 ‘리싱’ 맛을 본 팀은 호넷이 처음이었죠? 지난 시즌에 정말.. 수도 없는 배달을 맛봤습니다.”

“하하, 이 선수가 정말 견제하기 어려워요. 그런데 이제 탑이 미드 챔피언까지 기용하면서 밴픽은 더욱 미궁 속으로..”

상대가 어떤 서포터를 들고나와도 관계없다.

포지션 숙련도에서 질 이유는 없으니까.

“호넷에서 리산 밴 하면서, 이것도 경험이죠? FWX에게 얼음 왕국으로 맞아본 경험이 있거든요. 저는 이런 밴픽 좋습니다. 굳이 맞은 걸 밴을 안 할 필요는 없잖아요?”

“동의합니다. 호넷이 르블란을 선택합니다. 라온 선수의 아라를 억제하겠다는 전략으로 보이는군요. 설마 이 픽까지 차니 선수가 가져가지는 않을 테니까요!”

- 존나 불안해죽겠어ㅋㅋㅋ

- 차니 이 미친놈은 탑 아라할지도 모름ㅋㅋㅋㅋㅋ

- 그저 묵묵히 탑 픽의 금자탑을 쌓으시는 분..

- 탑 아자르 나온 날 인터뷰 봤음?ㅋㅋㅋ 라온이 차니가 POM 못 받아서 다행이라고ㅋㅋㅋ

- 닭 어쩌고 하던데ㅋㅋㅋ

- 그거 다 전략 숨기기지ㅋ 그걸 속냐

- 아니.. 진짜같던데..

“호넷이 퍄이크의 파트너로 진을 보여주는 척했다가.. 이즈로 마무리 짓습니다! 약간 도발이 들어갔죠?”

“이거, 호넷의 느낌 알 것 같아요. 상대의 특수한 상황을 잘 이용하고 있죠. 헤인즈 선수도 동부에서는 좀 친다고 하는 원딜이거든요. 바텀에서 퍄이크를 적극적으로 내보내면서 속도 차이를 벌리겠다는 속셈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FWX는..”

밴픽은 전체적으로 조용하게 굴러갔다.

다만 이제는 FWX의 밴픽은 예측하기 어려웠기에.

호넷에게는 다소 ‘무난한 픽’들이 강요되는 면이 있었다.

FWX가 어떻게 돌릴지 모르니까.

“음.. 판테언 서폿이었구나. 이거 예전 같지 않을 텐데. 뭐, 그래도 뭐.”

“요즘 권건 때문에 너무 헷갈리네. 아쉽다.”

“나는 솔직히 탑 판테언 나올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

“차니? 쟤 진짜 이상한 애잖아. 진짜 0초에 아라랑 갱플이랑 스왑하는 건 아니겠지.”

“그건 너무 갔다.”

결국 호넷은 그윈과 요공, 르블란, 이즈 퍄이크 조합을.

FWX는 갱플과 비예고, 아라, 애시 판테언 조합을 들었다.

“FWX 밴픽은 진짜 피곤하다.”

“야. 상대 바텀 하나 없는 거나 마찬가진데 그걸 못 이기겠냐?”

“나 오늘은 블루 먹을 수 있냐?”

“글쎄.. 전에는 지운이 형이 특별 주문 넣었다던데..”

“미친 깍지.. 내가 요즘 잘해줬으니까 이번엔 아니겠지? 블루 없는 르블란은 그냥 속 빈 강정인데.. 오늘은 제발 레드 노려라.”

“우진이 형, 미쳤어? 저주를 해도 어느 정도지.. 나 아까 권건 선수랑 눈 마주쳤거든? 근데 블루 다 먹을 거라고 했어.”

“거짓말 좀 하지 마. 니 말 안 믿어. 친추만 되어있으면 다야? 푸키먼 박사님 같은 놈.”

사실 호넷 선수들은 권건과 친추한 목해인이 은근히 부러웠다.

경기는 경기고.

솔랭은 솔랭이니까.

“그러면 오늘의 전략은 뭘까~~요?”

“정글러!”

훅 치고 들어오는 만담에 호넷 정글러 장민성이 눈치를 본다.

FWX만 만나면 ‘정글 이길 자신 있냐’, ‘니가 중요하다’, ‘발만 묶어놔라’라는 요청 등이 쏟아진다.

“정글정글! 오케이. 오늘은 권건 메타 갑니다.”

장민성은 로딩 시간 동안 간단하게 기도하는 시늉을 했다.

“권건 메타가 뭔데.”

“이기는 거..!”

“확인.”

호넷은 말벌처럼 붕붕 날개를 흔들어대며 오각형을 이룬다.

오늘, 호넷은 빈집을 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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